177화: 아가레스의 귀환
(177/323)
177화: 아가레스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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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아가레스의 귀환
2022.06.09.
제국 서부, 병사들은 숨죽인 채 마지막 남은 균열을 바라봤다.
토벌 시작일로부터 햇수로는 3년이 지났다.
적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기실 출정 전에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였다.
균열은 마지막 반항이라도 하듯, 크게 일렁이며 울컥 마족을 뱉어냈다.
그리고 그 앞에 물러섬 없이 서서 검을 휘두르는 이는.
“전하! 조금 뒤로 빠지시지요!”
“됐다. 좌익(左翼)이나 물러나라고 해. 폐쇄 시 충격이 작지 않을 테니.”
이젠 어엿한 군주가 된 황태자 루드비히.
시리게 푸른 검기가 청년왕(靑年王)의 검 끝에서 일렁이자 후방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경탄했다.
“저리 선명한 검기라니…… 전하께서 검의 끝을 보셨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나 보군.”
“괜히 나셨을 때부터 황가의 축복이라 불리셨던 게 아니라니까!”
“나는 사실 이번 출정 때부터 이리 될 줄 알기는 했네. 아니, 세상 어느 황태자께서 무려 3년이나 천한 병사들과 함께 구르신다던가?”
실로 그랬다. 특권 없이 병사들과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곳에서 자고, 그렇게 전투한 세월이 벌써 자그마치 3년이다.
함께 출정한 병사들에게 루드비히는 다시 없을 성군이었다.
루드비히가 땅을 박차고 균열 지척으로 달려가 검을 휘두르자, 푸른 검기가 검붉은 실금을 틈 없이 둘러싸고 천천히 축소하며 공간을 좁혔다.
- 쿠구구구궁.
더는 팽창하지 못한 균열이 일그러지며 선으로, 이내 점으로 변하더니- 큰 폭발음을 내며 터지고.
그렇게 서부 마지막 균열의 폐쇄.
“……끝났군.”
길었다. 참으로.
읊조린 루드비히가 검을 휙 털며 뒤로 돌아서자.
- 와아아아아아!
드넓은 평원을 가득 메운 대군이 일제히 창과 검을 맞부딪치며 환호했다.
그들이 충심을 바친 이 제국의 후계자를 향해.
***
깊은 밤, 루드비히의 막사.
“이만 복귀하시지요, 전하.”
들어온 이크리안이 수도 여러 소식지를 투박한 책상 위에 내려두며 권했다.
“황자 전하가 겁도 없이 전하의 자리를 노리는 것을, 수도에 남은 세드릭이 겨우 막고 있는 중이랍니다.”
“흐음. 공자가 고생이 많군.”
제법 심각한 사안임에도, 전쟁터를 구르며 간땡이만 부어버리신 주군께서는 공녀님의 편지만 쏠랑 집어 자리에 앉으신다.
“전하.”
“…….”
불러도 답 없이 공녀님의 편지만 읽고 또 읽고. 이크리안이 이를 악물었다.
“전하! 수도! 수도 안 돌아가시냐고요!”
“아직.”
“균열도 다 없어졌는데 아직은 왜 아직입니까?”
“…….”
“공녀님 편지를 그리 꿀 발라둔 것처럼 아끼실 것이 아니라, 그냥 가서 뵈면 되지 않습니까. 예?”
“아직 안 돼. 혹시 주변에 남은 균열 더 없나?”
“오늘 마지막 균열을 깔끔하게 치워버리셨잖습니까.”
“……다른 지역에는 지원 갈 필요 없다던가?”
“동부는 저희 아버지가, 남부는 소공작이, 북부는 공작 각하께서 모두 흔적도 없이 처리하셨다고 분명 어제 보고 올려드렸습니다만.”
“그 재수 없는 악마는 뭘 하고.”
“모든 지역을 돌며 균열을 폐쇄……라기보단 그냥 녹여버렸답니다. 덕분에 토벌 기간이 반쯤은 단축되었다는 평이 있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루드비히가 슬그머니 고개 돌리며 말했다.
“그럼 주변 시찰이라도 돌고 갈까?”
“아뇨.”
“어쩌면 산속에 숨은 마족 군대가 남았을지도 모르는데.”
“없습니다. 다 확인했습니다.”
이크리안이 한숨 쉬며 루드비히의 책상을 탕 짚었다. 나무로 대충 깎아 만든 책상이 삐걱 소리 내며 앞뒤로 흔들렸다.
“대체 수도에 돌아가는 걸 왜 이렇게 두려워하십니까, 무려 전하께서?”
“두려워하긴, 무슨.”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성년식까지 건너뛰실 이유가 있습니까? 폐하의 칙서가 이리 수두룩하게 날아왔는데도, 굳이 굳이 못 본 척, 못 들은 척 전쟁터에만 박혀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거 벌써 2년 전 일이다. 그대 2년 전에도 똑같은 잔소리를 했었어.”
불현듯 머리를 치는 합당한 의심에 이크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공녀님 때문에 그러십니까.”
“무슨 갑자기 이브가 거기서 왜 나와.”
“그렇지 않아도 짝사랑을 피해 출정하셨는데, 막상 돌아가서 장성하신 공녀님을 뵈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을까 우려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다.”
“맞는데요, 뭘. 공녀님께서도 벌써 열다섯이 되셨으니 얼마나 고고하고 고아하게 자라셨겠습니까.”
“고고하다, 고아하다, 그런 단어는 이브와는 연관이 없다.”
“여하간 공녀님이 아니라면 전하께서 수도 귀환을 굳이 피하시는 이유가 달리 있을 리가요.”
사정없이 내리꽂히는 팩트에 영 민망해진 루드비히는 막사 천막을 냅다 걷고 밖으로 휙 나와버렸다.
“후우…….”
어둠 속에 진심을 감춰두니, 흐리게 비추는 달빛마저 부끄럽기 그지없다.
루드비히는 울창한 숲속, 인적 없는 호숫가로 다가가 검을 들었다.
기운을 팔로, 손끝으로, 검날로 흘려보내니 이내 어둠을 환히 밝히는 검기(劍氣).
‘여전히 푸르다.’
검기는 검사의 심상을 반영한다. 고로 의도하지 않더라도 무의식 가장 깊은 곳에 박힌 색이 발현되게 마련.
부정할 수 없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다정한 푸른색.
검을 내린 루드비히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직도 나는…….’
***
홀로 산천을 돌며 닥치는 대로 균열을 폐쇄하던 대악마는 며칠 전부터 실로 가공할 속도를 냈다.
정확히는 보고 싶다는 이벨리아의 편지를 받은 이후부터.
균열뿐만 아니라 마족들의 거점까지 모두 파괴한 아가레스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걸터앉아 머리를 쓸어올렸다.
‘다 끝났나.’
한참 내려다봐도 더 보이는 것은 없다.
‘돌아가도 되겠군.’
그의 주인께서 다 쓸어버렸으면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라 하였으니, 충실히 따를 생각이었다.
하여 출정일로부터 햇수로 무려 3년만.
대악마는 왠지 모르게 울렁이는 마음으로 귀로에 올랐다.
***
집사 하델이 방으로 넣어준 신문을 보던 이벨리아는 1면을 차지한 소식을 가위로 정성스럽게 오려 노트에 끼워 넣었다.
「균열 토벌 종료 임박. 모든 사령관 귀로에 올라.」
헤드라인을 바라보니 가슴 속이 간질간질하다.
발코니를 확 열자 허리께까지 닿는 황금빛 머리칼이 바람에 살랑 흔들렸다.
“엔리르!”
부르자 화단에서 꽃을 따먹던 어린 용이 파닥파닥 날아올라 은인에게 폭 안겼다.
“균열이 거의 다 폐쇄됐대! 이제 다들 돌아오려나 봐!”
“흥. 늦기도 엄청나게 늦었네. 내가 갔으면 한 주먹 감인데.”
빈말로라도 사이가 좋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주 얼굴 맞대던 둘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니 엔리르 역시 무료했던 게 사실이었다.
막상 돌아온다고 하니 내심 반갑긴 하면서도 또 그동안 독점하던 누나의 관심이 분산될 것 같아 심술도 나고…….
착잡한 감정에 앞발 사이로 얼굴을 폭 묻었으나, 마냥 신난 이벨리아는 엔리르의 앞발 두 개를 번쩍 들어 올리고 해사하게 웃었다.
“다들 돌아오면 엄청 놀라겠지! 내가 이렇게 많이 자랐으니까.”
“……똑같은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게 무슨 망언이야? 똑같긴 뭐가 똑같아! 너 잠깐 인간으로 변해봐.”
엔리르는 냉큼 몸을 일으켜 폴짝 뛰어내리려다가 멈칫하고는 다시 식빵 굽는 자세로 눈을 감았다.
“아냐. 안 변할래. 나.”
“왜? 네가 변해야 내가 얼마나 자랐는지 알 수 있는데.”
“……아니야. 나 안 변할래. 누나 자랐어. 동의해.”
뭐야. 이 옜다 먹어라 같은 말투는.
“그러고 보니까 너 굉장히 오래 인간형으로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까먹었어.”
“변하는 방법을?”
“응. 까먹었어. 몰라. 나 졸려. 잘래.”
자신이 훌쩍 커버린 것을 알면 누나가 더욱 상심할지도 모른다.
누나가 자란 건 맞는데…… 자신이 자라는 속도와는 제법 차이가 있다 보니, 지금 인간형으로 변해봤자 시야 차이가 예전보다 더욱 심할 따름이다.
한편 이벨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려 용씩이나 되어서 인간형으로 변하는 법을 잊었을 리가 없는데.
‘변하기 싫은가 보지, 뭐.’
싫다는 걸 강요할 생각은 없다. 키야 이따가 지나가는 기사 아무나 붙잡고 재보면 되니까.
“조금이라도 더 커지게 낮잠이라도 자야…… 엥?”
발코니 문을 닫으려던 이벨리아는 멍하니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광활한 하늘 위에 길게 그어진 검붉은 실선 하나.
이벨리아가 눈을 비볐다.
“엔리르. 혹시 저게 지금 내 눈에만 보여……?”
그 말에 한쪽 눈을 슬그머니 뜬 어린 용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눈에도 보여.”
“……여기 수도 한복판인데.”
수도 내에서 발발한 균열은 3급 균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얼마 전 잔디 악마가 쫄쫄이를 입고 매우 신속하게 닫아버린 그것.
그때 눈대중으로 보았던 것보다 지금 뜬 균열이 훨씬 거대한 것을 보아하니, 어림짐작하기로 1급 균열은 되어 보였다.
‘하늘을 쭉 가로지르고 있는데 1급이 아닌 게 이상하지.’
넘실거리는 기운도 심상치 않다.
‘내가 닫아도 힘을 꽤 써야 하겠어.’
그나저나 하필 이럴 때 발생할 건 뭐람. 이벨리아가 혀를 찼다.
대귀족가문의 후계자들은 가급적 한날한시에 토벌 또는 전쟁에 나가지 않는다.
모두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가문의 대가 끊길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마침 이틀 전, 세드릭이 수도 인근의 균열 폐쇄를 위해 출정한 상태.
따라서 이벨리아마저 자리를 비우면 아르티나 공작가 후계 셋이 모두 같은 시기에 전투를 치르게 된다.
‘오라버니가 수도에 기사들도 많이 남았으니 절대 자리 비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지.’
저 멀리 담장 너머.
제국민들을 대피시키려는 수도 경비대의 고함이 들려온다.
혼비백산하여 달려가는 다급한 발소리도 어렴풋이.
또 기사들이 창칼을 들어 올리는 익숙한 소리도.
‘하지만 루이가 1급 균열은 재앙이나 다름없다고 했는데.’
외눈박이 거인이나 와이번 등의 고등급 마족이 튀어나온다고 했다. 평생 가도 한번 보기 어려운 마족들이 마치 인마전쟁을 방불케 하듯 우후죽순 쏟아져 나온다고.
‘수도 한복판에서 거인 같은 게 날뛰면 제국민들 집은 어떡하지.’
이벨리아가 볼을 긁적였다.
‘우리 멍멍이들이랑 황실 기사단까지 있으니까 알아서들 잘 처리하겠지?’
물론 처리야 하겠지만 닫을 때까지 피해가 꽤 클 텐데. 저기 내가 좋아하는 닭꼬치 집도 있는데…….
의자에 주저앉았다가도 괜히 불안해서 고개 들고 균열을 바라보길 몇 분.
“에잇, 진짜!”
기사들에게 맡겨 두려던 이벨리아는 결국 후드를 뒤집어쓰고 일어섰다.
“가게?”
“안 가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아서!”
“그럼 같이 가.”
“몰래 나가야 해. 오라버니들 다 부재중이라 나까지 나간다고 하면 다들 뒤집어져.”
“내가 전에 파 둔 용구멍으로 나가자.”
“그건 또 언제 파뒀어?”
“혹시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대단한 용은 모르는 게 없지.”
“역시 내 용. 가자!”
씩 웃은 이벨리아가 몸집을 키운 엔리르를 타고 창문 밖으로 휙 뛰어내렸다.
***
“엔리르. 용구멍에 보석이 굴러다니는 건 내 착각일까?”
“……기분 탓이야.”
엔리르가 임시로 보석을 저장하기 위해 파 놓은 개구멍…… 아니, 용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아까보다 제법 벌어진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제국민들은 기사들이 펼친 방패 뒤에서 공포에 질려 기도하거나, 아이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뒤.
- 콰드드드득.
균열이 찢어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리자.
황실과 아르티나 기사단을 비롯한 여러 귀족 가문의 사병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창칼을 틀어쥐었다.
이내 균열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은 손이 아닌 날개.
1급 균열에서 날개를 달고 나올 만한 마물은 많지 않다.
도감에서나마 봤던 기억을 되살린 기사들이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날개……?”
“설마……!”
“궁수, 앞으로!”
“어서!”
균열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에 처치하려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창공을 비행하는 것은-.
1급 괴수종. 발록(Balrog).
수도 같은 평화로운 지역에서는 한 세대를 걸러도 볼 일 없는 것이기에, 난생처음 고등 마족을 눈앞에서 마주한 제국민들과 수도 경비병들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후드를 쓰고 군중 한가운데 서 있던 이벨리아가 작게 한숨 쉬었다.
‘느낌이 온다. 느낌이 와.’
그나마 정신 차린 기사들이 창공을 나는 발록을 향해 마법이며 창을 쏘아대고 있으나, 그 사체가 지상으로 추락하며 가하는 충격 역시 제국민들에겐 충분히 위협적이다.
‘또 나서게 될 느낌이 온다…….’
얄궂게도 4년 전 축복제에 나타난 악마를 처리했던 그 자리 그대로다.
“어어! 다들 피해!”
“으아악-! 떨어진다!”
소란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위를 올려다보니, 이벨리아가 있는 바로 위쪽에서 날개를 휘저으며 떨어지고 있는 발록.
실로 집채만 한 크기다.
품 안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엔리르가 귀를 쫑긋하며 물었다.
“내가 할까?”
“아니. 우리 아가 용은 내 비장의 패잖아. 내가 할게.”
천천히 들어 올리는 후드 아래 덮인 손. 그리고 자연력을 담아 부르는 이름.
“일레스트.”
과거 축복제 날 불렀을 때와는 비교 불가한 청명한 힘이 광장 내에 들어차고. 푸른 늑대가 갈기를 푸르르 털며 이를 드러냈다.
[계약자! 나 오늘도 출세하는 건가!]
“떨어지는 저것부터 막아주면!”
[으아악-! 계약자 바로 머리 위까지 왔잖아! 일찍 안 부르고 뭐 했어!]
- 콰아아앙!
일레스트가 만든 물의 장막과 발록의 사체가 부딪히며 공간이 깨져나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시간이 지나도 충격이 없자,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려 있던 제국민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흘끗 일별한 이벨리아는 발록의 활공 범위에 있는 하늘 전체 아래 넓게 장막을 쳤다.
마치 허공에 얕은 바다가 깔린 것처럼 푸르게 일렁인다. 제국민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장막…….”
“저 늑대는 상급 정령 아닌가? 나 예전 축복제 때도 본 적이 있는데!”
“상급 정령? 이 제국에 상급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이는 단 한 분뿐인데…….”
천천히 시선 돌린 제국민들은 깊이 후드를 눌러쓴 이를 바라봤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다.
소리 죽인 술렁임이 광장 전체로 퍼져나갔다.
“공녀님이에요, 엄마?”
“쉬잇. 조용히 하렴.”
“공녀님이라고?”
이내 광장을 뒤덮는 안도 섞인 울음.
기사들이 진을 칠 때와는 결이 달랐다.
제국민들에게 이벨리아의 의미란 그랬다.
유수의 귀족들이 수도를 비운다는데도 자신들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았던 건, 모두 이벨리아가 이 수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드를 내리고 균열 바로 앞으로 뛰어든 이벨리아를 향해, 기사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공녀님! 위험합니다! 물러서시지요!”
“위험? 나한테?”
세계의 근원되는 물이 넓게 퍼진 균열 전체를 감쌌다.
“허튼소리.”
장막 안에 갇힌 발록들이 사방으로 날뛰었다. 거대한 몸체가 힘껏 부딪힐 때마다 이벨리아가 살포시 눈을 찌푸렸다.
‘이걸 전부 찌그러뜨리려면 힘이 만만치 않게 들겠는걸.’
이게 1급 균열이란 말이지. 과연 모두가 애를 먹을 만도 하다.
‘없어 보이게 쓰러지면 안 되는데.’
그렇게 입술을 깨문 채 장막을 서서히 안쪽으로 밀어 발록과 균열을 누르던 찰나.
- 화르륵.
이벨리아의 자연력보다 농도 짙은 마기가 물의 장막 밖을 단단히 둘러쌌다.
만물을 아래 두는 상위 격의 지배력에 허공을 떠돌던 것들이 일제히 활공을 멈추고.
동시에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안온한 목소리.
“이런.”
“……!”
놀라 고개 돌리자.
“명 받들고 돌아왔는데, 내 주인께서 이리 싸우고 계실 줄이야.”
늘 그렇듯, 앞이 아닌 옆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나의 악마.
“토끼야……?”
“허락한다면, 내가 마무리하고 싶은데.”
균열의 파동으로 인해 검붉게 어두워진 하늘 아래.
재회를 반기는 두 친구의 눈이 깊게 얽히고.
일순 경직된 아가레스와는 달리, 이벨리아는 맑게 웃었다.
아, 3년 만인데. 내 시야가 조금 높아진 것을 제외하곤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나의 오랜 친우. 너와 있으면 뭐든 잘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산더미같이 쌓인 하고 싶은 말들을 잠시 뒷전으로 미뤄두고, 이벨리아가 명했다.
“좋아. 이번에는 진짜 금방 돌아와야 해!”
“10초만 세. 꼬맹이…… 아니, 이벨리아.”
비로소 주인 곁으로 돌아온 대악마가 낮게 속삭이며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