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당근을 흔들어! (176/323)


176화: 당근을 흔들어!
2022.06.06.


16600758805546.jpg

 
무려 용으로부터 예비 대마법사 판정을 땅땅 받은 렐리안은 그날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마치 마법이 자신의 의미기라도 한 듯 뻔질나게 엔리르를 찾아와 둘이 틀어박히는가 하면, 이벨리아에게 엔리르를 며칠만 좀 빌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6600758805554.jpg

“내 친구와 내 애착 인형이 둘이서만 그렇게 놀러 다니면 나는 어떡해……?”

마법 못 하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1660075880556.jpg

“이브. 이것 좀 보세요! 정말 신기하지 않나요? 이 술식을 이렇게 이어붙이면……!”

16600758805564.jpg

“엣헴. 어떠냐, 내 술식이.”

1660075880556.jpg

“정말 대단하세요! 역시 스승님!”

16600758805554.jpg

“……빌어먹을 천재들.”

저것이 꼬부랑글씨인지 의미를 가진 기호인지 식별조차 가지 않는 술식을 그려대는 둘을 보며, 눈이 핑핑 돌아버린 이벨리아는 책상 앞에 주저앉았다.

16600758805554.jpg

“그래애-! 재밌게 놀아-! 나는 편지나 쓰지 뭐-!”

관심 좀 가져달라 크게 외쳐보았으나, 친구와 애착 인형은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대답도 없다.

16600758805554.jpg

“내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이라도 걸었니, 혹쉬-?”

이래서 애들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더니. 아이고. 아이고.

입을 삐죽인 이벨리아는 서랍에 가득 쟁여둔 편지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수신인이 아닌 다른 이가 열고자 하면 화르르 타버리는 값비싼 편지지.

전쟁이 있을 때는 안보를 위해 꽤 애용되곤 하는 것이었다.

워낙 혼란한 상황이라 제대로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 안전히 잘 있다, 안전히 돌아와라, 정도의 마음을 담아 날리고 싶었다.

혼란한 마법 이야기를 배경음 삼아 적어 내려간 편지에, 친애하는 이들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그득 담겼다.

***

「지금 엔리르와 렐리안이 내 뒤에서 마법 이야기 중이야. 꼭 어디 가지도 않고 내 방에서 저래. 마법충들로부터 이브를 구제해줄 용사 어디 없나. - 괴로운 이브가」

「카시스 영애에게 내 마법사가 될 생각 없는지 물어봐 줘. 탐나는 인재로군. 영애의 기쁜 소식을 전하니 네 동화책 공장장은 엉엉 울었다. – 루이」

***

「우리 토끼 잘 지내지? 다른 사람들이 어디쯤 머무는지는 매일 신문에 나오는데, 네 얘기는 찾을 수가 없어. 아무도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나 봐. 날이 꽤 추워졌으니까 옷 따뜻하게 입어야 해. - 궁금한 이브가」

「제국신문 속보 - 루페르트 백작, 북부 에비스 지역 균열 폐쇄」

***

「올봄은 유난히 꽃가루가 심해. 재채기를 서른 번은 한 것 같아. 그리고 나 키가 자랐어! 엔리르랑 눈을 맞춰보니 예전보단 목이 덜 아픈 거 있지! 아. 마지막으로, 렐리안은 이미 섬기는 주인이 있어서 네 밑으로는 들어갈 마음이 없대. - 커다래진 이브가」

「내가 어제 꽃밭에서 국지전을 벌여서 그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네게까지 닿았나 보다. 앞으로 유의하지. 그리고 네 키가 자란 게 아니라 그 멍청한 용이 작아진 걸 수도. 카시스 영애의 대답은 참으로 유감이군. 섬기는 주인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고 있으니 빼앗아 올 수도 없고. - 루이」

***

「날씨가 엄청 더워졌어. 엘라임이 비밀기지에 커다란 얼음 침대를 만들어 줬어! 토끼가 돌아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토끼도 여기 누울 수 있도록 허락할게! - 수박 먹는 중 이브가」

「제국신문 속보 - 루페르트 백작, 동부 비체네 지역 1급 균열 폐쇄」

***

「오랜만에 파라반트 길드에 다녀왔어. 균열에 대한 심화 정보를 요청했더니 무려 50만 리브르를 요구하지 뭐야. 그때 내가 구해줬던 거지 소년이 얼른 길드를 장악해야 할 텐데. 어쨌든 정보 길드에서 얻은 자료를 추신으로 보낼 테니 참고해! - 저금통 배를 가른 이브가」

「제법 도움이 되는 자료군. 우리 측에서도 조사한 내용을 추신으로 보낼 테니 참고해. - 루이」

***

「내가 편지를 보내면 다음 날 신문 1면에 토끼의 승전보가 걸리는 건 내 착각일까? - 영문을 모르겠는 이브가」

「제국신문 속보 - 루페르트 백작, 서부 델타 지역 국지전 승리.」

***

「꼴뚜기가 카밀라한테 집적댄대. 카밀라는 귤 같고 참 예쁜데. 주제도 모르는 해산물 같으니라고. 네 약혼녀나 잘 챙기라고 가서 머리를 쥐어뜯으려는 걸 카밀라가 말렸어. - 저녁으로 나온 꼴뚜기를 퉤 뱉어버린 이브가」

「그거 정신 못 차리고 아직도 그러고 있나. 안쓰럽군. - 루이」

***

「토끼야. 벌써 연말이야.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 걱정되는 이브가」

「제국신문 속보 - 루페르트 백작, 남부 델라스 지역 해방.」

***

「이번 생일엔 구혼장을 무더기로 받았어. 죄다 쓰레기지 뭐. 하나같이 열네 살이면 약혼자를 정해야 할 나이라는데. 영 터무니없는 말이야. - 쓰레기 더미 위의 이브가」

「용 두고 뭐 해. 전부 태워버려. - 분노한 루이」

***

「토끼야. 수도에 돌발 균열이 발생했어. 내가 나서서 처리하려고 했는데, 잔디 악마가 검은 쫄쫄이 옷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다음 순식간에 처리해버렸어. 지금 수도 사람들은 쫄쫄이 히어로가 누구인지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중이야. - 황당한 이브가」

「제국신문 속보 – 루페르트 백작, 포위된 소공작의 군대를 구출하고 남부 아카이아 지역 국지전 승리.」

***

「이세르나 백작과 꼴뚜기가 귀족들을 포섭하고 있어. 에르트 백작이 사방팔방 뛰고 있기는 한데 나날이 창백해지는 것이 이래서 사람이 주군을 잘 만나야 하는구나 싶고. 이번 귀족 회의에서는 꼴뚜기를 황태자로 올리자는 이야기가 나온 듯한데, 가주 대리로 참석한 작은 오라버니가 깽판을 치고 왔어.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 - 그리운 이브가.」

「내가 얼마나 자랐는지 보면 깜짝 놀랄걸. - 뿌듯한 루이.」

***

「토끼야. 네 말이 맞았어. 정령왕들은 죄다 어딘가 미쳤어. 페르세스가 쓴 소설은 눈 뜨고는 못 봐줄 지경이야. 이프리트가 유희 시절에 쓰던 별명들은 하나같이 처참해. 허리케인 흑염룡, 심연의 다크솔저…… 비웃던 엔리르과 결국 한 판 했어. - 경악한 이브가.」

「제국신문 속보 – 루페르트 백작, 특별 전공(戰功)을 인정받아 후작으로 승격.」

***

「그저께 카시스 후작가에서 신년 연회를 해서 다녀왔어. 거기서 가면을 쓴 어떤 영식과 부딪혔는데, 순간 심장이 쿵 하지 뭐야. 이게 사랑인 걸까? - 두근두근하는 이브가」

「심부전증이다. 의원 불러. 당장 달려가기 전에. - 너의 루이」

***

「그저께 카시스 후작가에서 신년 연회를 해서 다녀왔어. 거기서 가면을 쓴 어떤 영식과 부딪혔는데, 순간 심장이 쿵 하지 뭐야. 이게 사랑인 걸까? - 두근두근하는 이브가」

「제국신문 속보 – 루페르트 후작, 동부 트리아 지역 2급 균열 폐쇄.」

「제국신문 속보 – 루페르트 후작, 동부 가로쉬 지역 1급 균열 폐쇄. 압도적인 무위」

「제국신문 속보 – 루페르트 후작, 서부 제아논 영지 점령 마족 대학살.」

***


16600758805583.jpg

“이놈의 토끼를 그냥.”

시리게 부는 눈보라가 이벨리아의 손짓 한 번에 쩡 얼어붙었다.

약 3년간 부단히 수련한 덕분에 일취월장한 정령술은 대정령사라는 칭호에 제법 걸맞았다.

16600758805583.jpg

“답장도 없이 시위하는 거야, 뭐야?”

실프가 대기의 온도를 확 낮추어 얼려버린 눈보라를 손으로 밀어 치우며, 이벨리아가 이바스 저택의 대문을 발로 뻥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16600758805583.jpg

“얍! 나 왔다!”

16600758823363.jpg

“야. 넌 양심 좀 있어라.”

16600758805583.jpg

“뭐! 왜!”

16600758823363.jpg

“악마의 저택 근처에서 정령술은 예의상 좀 삼가지?”

16600758805583.jpg

“흥!”

16600758823363.jpg

“뭐야. 이 밥풀 왜 이렇게 심통이 났어.”

본래도 더러운 성격이 오늘따라 조금 더 까칠한 듯하다.

찬찬히 살피던 마르바스가 이내 놀리듯 빙글 웃었다.

16600758823363.jpg

“아아. 알겠다. 아직도 주군께서 답장 안 하셔서?”

16600758805583.jpg

“아, 아니이? 내가 애처럼 그런 거로 삐질 것 같아?”

그러자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장미꽃을 매만지던 로노베가 픽 웃으며 거들었다.

16600758823406.jpg

“완전.”

16600758805583.jpg

“아니거든!”

16600758823363.jpg

“애니걔든!”

16600758823406.jpg

“백 프로네.”

인간 놀려먹기에 도가 튼 두 악마의 행패에 이벨리아가 발을 콩 굴렀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루드비히와 아가레스가 출정한 지도 벌써 햇수로는 3년이 되었다.

놀아줄 친구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자 자연히 이바스 저택을 찾는 빈도도 늘어났고, 그 덕에 이 못된 악마들과도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버렸다.

밥풀의 뾰로통한 표정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로노베가 소리 높여 웃었다.

16600758823406.jpg

“이럴 줄 알았어! 우리 주군께선 원체 다른 것들에 관심이 없으시거든!”

16600758805583.jpg

“아냐! 토끼가 얼마나 이것저것 관심이 많은…… 많은…….”

아닌가. 생각해보면 우리 토끼는 주변 사람들에게 늘 무심했던 것 같다.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한 루이나 엔리르에게도 틈 하나 보여주지 않는 철벽.

문득 깨닫는다.

내가 아는 토끼의 모습은, 토끼가 오로지 내게만 보여준 모습이구나.

16600758823406.jpg

“아하하하-! 거봐! 너도 곧 버림받을 줄 알았다니까! 주군께서 인간 꼬마에게 가지신 흥미가 오래 갈 리가 없지!”

16600758823363.jpg

“주군께서 더는 널 총애하지 않으신다면, 잘 됐군. 이 기회에 확 잡아먹어 버려야지.”

늘 그렇듯 땅콩을 놀리며 키득거리던 두 악마는 유난히 조용해진 분위기에 의아하다는 듯 서로 눈을 마주쳤다.

16600758823363.jpg

‘뭐야. 이쯤 되면 강아지처럼 아르르 달려들 때가 되었는데.’

16600758823406.jpg

‘뭐가 이렇게 조용해?’

기이한 침묵에 시선을 돌리고. 헉. 두 악마가 숨을 들이켰다.

16600758823363.jpg

“야, 야, 밥풀아.”

16600758823406.jpg

“우, 우냐?”

16600758805583.jpg

“앙 우러어-.”

푸른 눈에 가득 담긴 눈물, 꾹 참는 듯 먹먹해진 목소리.

톡 치면 주르륵 울겠는데!

무슨 말로 놀려도 항상 당당하게 받아치던 땅콩이 오늘따라 왜 이러지!

두 악마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이벨리아 근처로 다가와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16600758823363.jpg

“아니, 그, 야. 밥풀아. 주군께서 바쁘신가 보지. 전쟁터가 얼마나 바쁘겠냐, 응?”

16600758823406.jpg

“그래! 넌 가본 적 없어서 모르겠지만, 전쟁터란 건 원래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쁜 거거든.”

16600758823363.jpg

“맞지! 눈앞에 창칼이 막 날아다니는데 언제 답장을 쓰고 앉았겠냐. 그렇지?”

16600758805583.jpg

“하지만 루이는 꼬박꼬박 답장을 쓰는데…….”

16600758823363.jpg

“걔는 군사를 우르르 끌고 갔다며. 우리 주군께선 홀로 가셨으니까 그렇지!”

16600758805583.jpg

“혹시 아스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면 어떡하지…….”

16600758823406.jpg

“이 자비 없는 승전보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16600758805583.jpg

“그럼 진짜로 이젠 나랑 친구 하기 싫어서 그런가……?”

또다시 울먹울먹.

꼬마 인간의 정서에 익숙지 않은 악마들은 그제야 눈치챘다.

어린 인간에게는, ‘네가 소중히 여기는 그 존재가 더는 널 좋아하지 않나 봐’같은 장난은 쳐선 안 된다는 걸.

이 밥풀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또 저렇게 풀 죽어 있는 꼴을 보니 마음이 영 편치는 않다.

펑. 마르바스는 그리도 변신하기 싫어했던 사자로 변해 이벨리아의 앞을 알짱거렸다. 심지어 앞발로 자기 정수리 위를 톡톡 가리키면서.

16600758823363.jpg

“야. 야. 땅콩. 이거 봐라.”

16600758805583.jpg

“……?”

16600758823363.jpg

“어때. 사자 머리 위에 새싹! 푸릇푸릇하지!”

16600758805583.jpg

“…….”

그러나 평소 같으면 배를 잡고 웃었을 이벨리아가 오늘만은 웃질 않는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악마들이 이벨리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달래기 시작했다.

16600758823363.jpg

“야. 땅콩아. 주군께서 널 얼마나 아끼시는데. 네가 무슨 영식 운운하자마자 대학살 승전보가 온 걸 보면 모르겠냐.”

16600758823406.jpg

“그래. 네가 편지를 보낸 다음 날이면 곧바로 승전보가 날아오는 것도 그렇고.”

16600758805583.jpg

“그러니까 대체 왜 그러냐구. 왜 답장은 없고 승전보만 날려대는데!”

16600758823363.jpg

“그럴 수도 있지! 전쟁 중의 인간들은 특이한 방법으로 연락한다며! 악마들은 그 방법을 잘 몰라…… 어……?”

16600758823406.jpg

“……아?”

에이. 설마.

16600758805583.jpg

“그걸 모르게 아스가 바보야?”

16600758823363.jpg

“어허. 당연히 아니지. 근데 악마의 문물은 인간들 것과는 많이 달라서 편지라는 개념 자체가 익숙지 않거든.”

16600758805583.jpg

“……그래?”

시무룩해진 밥풀이 살살 살아나는 것이 보인다. 로노베가 거들었다.

16600758823406.jpg

“그래. 게다가 네가 말해준 불타는 편지지는 우린 상상도 못 하는 거야. 편지가 오가다가 정보를 빼앗길까 봐 그런 편지지를 쓰고, 또 아주 특별한 비둘기한테 그걸 맡긴다니.”

16600758805583.jpg

“그럼 아스도 몰라서 못 하는 건가……?”

그래도 답장을 하긴 해야겠으니 승전보로 대신하는 거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악마들을 보며, 이벨리아가 흐음, 소리 내며 등을 기댔다.

16600758805583.jpg

‘가능성 있어. 우리 토끼는 생각보다 빙구니까.’

 

***

「토끼야. 네가 보고 싶어. 다 쓸어버렸으면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 - 심심한 이브.」

「제국신문 속보 – 루페르트 후작, 하룻밤에 마족 주요 거점 열다섯 파괴.」

「제국신문 속보 – 균열 토벌전 막바지. 속속 귀환하는 사령관들.」

***

「토끼야. 비밀 편지를 보내는 법을 모르면 당근을 흔들어 봐. - 혹시나 한 이브.」

***

「제국신문 속보 – 현장 기자, 납치 및 실종」

「제국신문 속보 – 실종되었던 현장 기자 하루 만에 복귀.」

***

「제국신문 속보 – 당근.」

 

16600758889202.jpg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