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대마력의 소유자
(175/323)
175화: 대마력의 소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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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대마력의 소유자
2022.06.02.
“누나 머리처럼 동그란 초콜릿.”
엔리르는 동글동글한 초콜릿이 잔뜩 든 유리병을 들고 폴폴 날아 이벨리아의 방문을 열었다가.
“히익-! 누나!”
너른 방 천장에서 난데없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보곤 기겁하여 유리병을 떨어뜨렸다.
폭포 아래, 그 물벼락을 고스란히 맞으며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는 이벨리아.
호다닥 날아간 엔리르가 쏟아지는 폭포를 향해 냅다 불을 뿜자, 불과 물이 만나 생성된 수증기가 방을 가득 채웠다.
“누나! 누나! 괜찮아? 응?”
“콜록! 너어, 없애버리면 어떡해!”
“누나가 익사하기 직전이었어!”
“익사는 무슨! 내가 불러낸 폭포인데!”
젖은 머리칼을 손짓 한 번으로 말려버린 이벨리아가 툴툴댔다.
“모처럼 정령술 연습 중이었단 말이야.”
“정령술 연습을 왜 해? 그 물 덩어리 정령왕 부르면 다 해결되는 거 아니야?”
“엘라임은 일회용이야.”
정령계에서 듣던 엘라임 억장 무너질 소리를 하며, 이벨리아는 바닥에 떨어진 초콜릿 몇 알을 주워 입에 털어 넣었다.
“한번 불러서 힘을 쓰면 온몸이 아프다구.”
“저번 축복제 때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는데?”
“그때 멋있는 척하려고 다리 후들거리는 걸 얼마나 참았는데!”
“참은 거였어? 왜?”
“폼생폼사 몰라? 기껏 악마 때려잡아 놓고 아이고 삭신이야 주저앉을 순 없잖아!”
실프를 불러 자욱한 수증기를 날린 이벨리아가 턱을 괴고 정령서를 뒤적거렸다.
“운디네가 말해줬어. 예를 들어 엘라임이 항아리라고 치면 내 자연력을 항아리에 졸졸 담아줘야 하는데, 내가 항아리 따위 개나 주라는 식으로 온 사방에 자연력을 흩뿌려서 그렇대.”
말 그대로 컨트롤도 기교도 없이 무식하게 힘으로 때려 박는 수준.
“어쩐지 내가 정령술을 쓰면 사방에 꽃이 핀다 했어.”
여하간 문제를 알게 된 이벨리아는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스튜 받침으로나 쓰던 기초 정령서, ‘갈드라보크 카발라’를 정독하면서.
효율적인 자연력 배분법, 제1장.
온종일 균일하게 흐르는 폭포를 아무 데나 냅다 만들어라.
“좋아. 이건 통과. 사실 아빠랑 엄마 방에도 폭포를 만들어두고 왔지!”
“집주인 방에……?”
분명 집주인의 방에는 여러 가지 서류가 있었는데. 아연해진 엔리르가 말랑한 앞발로 이마를 짚었다.
“제2장. 온종일 같은 온도로 타오르는 불의 고리를 냅다 만들어라. 이것도 통과. 이건 연무장에 만들어두고 왔지!”
“연무장에……?”
어쩐지. 그래서 아르티나 기사단이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련 중인가 보다.
정령술 훈련을 빙자한 폭군의 행패에 엔리르가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제3장.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라?”
뜬금없는 수련법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넘겨보니 대략 한 끗 차이인 마나와 자연력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필요한 자연력만 쏙쏙 빼서 몸에 저장할 수 있다는 취지인 것으로 보였다.
세계에 도는 자연력을 끌어당기다 보니, 그 힘으로 여러 잡다한 것들도 불러들이게 마련.
정령사에게는 필요 없는 마나가 끌려오면 그만큼 자연력이 끌려올 자리가 사라지게 된다.
일견 타당한 이야기에, 이벨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마법사라면 내가 아주 잘 알지!”
그러자 곁에 있던 엔리르가 뿌듯하게 가슴 털을 부풀렸다.
“도와달라고 해야겠다!”
“엣헴.”
“가자, 엔리르.”
“어디 가서 연습하려고?”
“카시스 후작가.”
“응? 어디?”
“렐리안. 마법사잖아.”
“……나는?”
“너 마나가 어떻게 끌려오는지 알아?”
“그건 그냥 숨 쉬면 따라오는 거야.”
“마나가 달라붙으면 어떤 느낌인지는 알아?”
“동글동글 착해.”
“마나가 어떻게 마력으로 변해서 몸에 저장되는지는 알아?”
“스읍- 후우- 스읍- 후우- 짠!”
거봐. 답이 없다. 원래 천재는 범인(凡人)을 가르치지 못하는 법이다.
하물며 탄생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마나를 읽는 용인데 오죽할까.
이벨리아의 표정이 떨떠름하자 황급히 날아오른 엔리르가 날갯짓을 동원하여 설명했다.
“자, 누나. 숨을 크게 들이쉬어 봐. 그러면 자잘한 동그라미가 몸에 달라붙는다? 그게 마나야! 그걸 푸르르 털어낸 다음에 자연력만 골라서 쓰면 되는 거야. 쉽지?”
“자, 엔리르. 연필을 쥐어봐. 그러면 손이 저절로 슥슥 움직인다? 그렇게만 하면 이 제국 수석 먹을 수 있어. 쉽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방금 네가 한 말이 이거랑 뭐가 달라! 에잉, 쉽지 같은 소리 하네.”
이게 자기는 용으로 태어났다고 가련한 인간을 농락하고 있어.
***
이벨리아가 온다는 연락을 받자, 렐리안은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고 연신 발코니 밖을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이미 십수 번은 읽은 쪽지가 들려 있었다.
「마법사로서의 네 도움이 필요해.」
쪽지를 품에 꼭 안으며 렐리안이 헤헤 웃었다.
‘마법을 익히길 정말 잘했어. 공녀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시니까 마치 인정받는 것 같아.’
언제 오시려나. 바로 오시겠다고 했는데.
까치발을 들고 한참을 기다리던 렐리안은 저 밖에서 아르티나 가문의 마차가 달려오는 것이 보이자 곧바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이고, 아가씨. 뛰시면 큰일 납니다!”
“걷기만 하셔도 쓰러지시는 분께서!”
“이제 이 정도는 괜찮아!”
공녀님과 어울리면서 눈에 띄게 좋아진 건강 상태.
달리는 건 꿈도 못 꾸던 렐리안은 전에 없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다리를 만끽하며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이브!”
마치 몸통 박치기를 하듯 달려드는 렐리안을 이벨리아가 환히 웃으며 꼭 안았다.
“렐리안! 언제 이렇게 잘 뛰게 됐어?”
“조금 됐어요. 다 이브 덕이에요.”
이벨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렐리안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러고 보니 렐리안…….”
엄청 자주 봐서 미처 몰랐었는데.
“키도 크고, 볼도 복숭아 같고, 생기가 넘치는 것이…….”
렐리안이 살짝 볼을 붉혔다. 아르칸 오라버니에게 잘 보이고자 여러모로 관리한 것이 티가 나나.
“아무래도 내 자연력이 렐리안에게도 영향을 미쳤나 보다!”
아. 우리 공녀님. 아직 이런 방면으론 눈치가 없으셔서 참 다행이다.
조금 더 발그레해진 얼굴로 렐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제집처럼 후작저를 걸으며 이벨리아가 렐리안의 여린 어깨를 두드렸다.
“후작님이랑 공장장이 모두 떠나버려서 외롭지?”
“조금요. 걱정도 되고요.”
“둘 다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니까. 괜찮을 거야.”
“네, 그러리라 믿어요. 이브는 괜찮아요? 전하와 루페르트 백작님이 돌아오시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들었는데요.”
“하나는 내가 부르면 언제든 돌아올 거라서 괜찮아.”
둘 모두 무사할 것을 의심치 않는다. 다만, 부르면 언제든 달려올 수 있다는 것은 불러도 닿기가 요원한 것과는 결을 완전히 달리했다.
‘토끼의 진명을 알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야.’
루드비히가 떠날 때는 울었으면서 아가레스가 떠날 때는 외려 등 떠밀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토끼. 내 악마. 내게 종속된-.
넌 내가 작게 읊조리기만 해도 평소처럼 나와 눈을 맞출 테니까.
‘이런 게 단단한 관계가 주는 안정감인가 봐.’
새삼 너와 나의 관계를 되새기자 자연히 입가에 떠오르는 웃음.
의아하다는 듯한 렐리안의 시선을 흘려넘기며, 이벨리아가 준비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브.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고요.”
운을 떼며 렐리안이 각종 다과를 권했다. 사양 없이 받아들인 이벨리아가 초코 코팅이 묻은 견과류를 오독오독 씹으며 본론을 꺼냈다.
“응. 렐리안 몸도 좋지 않은데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해. 요즘 정령술 공부를 좀 하고 있는데, 마법사의 도움이 있으면 좋다고 해서 찾아왔어.”
“세상에!”
기쁨으로 인해 렐리안의 손이 세게 쥐어졌다 펴졌다.
마법사로서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해주신 것도 기쁜데. 그게 심지어 공녀님의 성장을 돕기 위해서라니!
“살아 있길 잘했어!”
“응?”
“혼잣말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수련실? 연무장? 정원? 어디가 편하실까요?”
잔뜩 흥분한 렐리안이 얌전하고 잔잔한 호들갑을 떠는 와중.
테이블 위에 웅크리고 바나나를 입에 물던 엔리르가 갸웃하며 물었다.
“보라 인간. 아파?”
“네?”
“몸이 안 좋다며. 어디가 아파?”
“아. 스승님께선 아직 모르셨구나. 저는 원래 몸이 안 좋았어요. 태어날 때부터.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왜 아픈지는 어떤 의원도 밝혀내지 못했고요.”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클 때까지 아팠어……?”
“네.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에요. 원래는 바람만 쐬어도 쓰러지기 일쑤였는데.”
자신에게는 일상과 다름없는 일이다. 새삼 이제 와서 슬프지도 않은 일.
그럼에도 공녀님과 용님의 눈매가 동시에 축 내려가는 것이- 누가 표면상 남매 아니랄까 봐 참으로 닮았다.
삽시간에 시한부 환자의 병실처럼 분위기가 가라앉자, 렐리안이 애써 밝은 척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을 거라고 했는데. 지금 이 상태면 넘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태어남과 동시에 늘 렐리안의 곁에 머물던 죽음.
이해할 수 없었다가, 체념했다가, 끝내 받아들인 지금.
“그래도 명이 길진 않을 테니까,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려고요!”
창문 밖으로 살랑 들어오는 바람에 보랏빛 머리칼이 흔들리자, 렐리안이 귀 뒤로 넘기며 흐리게 웃었다.
“사랑도 하고, 마법도 배우고, 이렇게 공녀님과 이야기도 하고. 소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죽는 날까지 매일 열심히 해볼까 해요.”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내 흔적이 여기저기 남을 수 있도록.
수줍으면서도 당차게 선언하고 천천히 고개를 든 렐리안은 당황했다.
“이, 이브? 스승님?”
두 남매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뚝!”
“흐어엉- 죽긴 누가 죽어어- 그런 말 하지마아-.”
“히끅, 보라 인간, 히끅, 난 용이야아-.”
“그래애- 얘는 용이야아- 흐어엉- 너 어떻게 좀 해 봐아-.”
순식간에 울음바다. 졸지에 지금이라도 숨넘어갈 환자가 되어버린 렐리안이 멋쩍게 웃었다.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테이블 위를 가로지른 엔리르는 냅다 렐리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히끅. 내가 고쳐줄 거야-.”
아직은 못 하지만, 곧 용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때가 되면 가장 먼저 보라 인간을 치료해주고자, 대체 어디가 아픈 건지 대강이라도 원인을 알기 위함이었다.
이 세계, 유일한 용. 마력을 아우르는 농도 깊은 존재력이 렐리안의 몸 속을 휘돌았다.
그렇게 잠시. 어린 용의 동그란 머리가 갸웃 기울었다.
“히끅. 으잉?”
작은 앞발이 어깨, 팔, 등을 차례로 짚었다.
이내 상당히 심각해진 표정.
“……이게 뭐야.”
“왜? 렐리안 어디가 굉장히 안 좋아?”
“보라 인간.”
“네, 네에.”
“몸이 안 좋다는 게, 혈관이 막혀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고, 갑자기 정신을 잃고, 속이 뒤집어지고, 그런 거야?”
“네. 혹시 저 지금 죽나요?”
“몸 안에 뾰족한 알갱이가 굴러다니는 것 같지, 가끔은?”
“네, 맞아요. 잠시만요. 이럴 줄 알고 저기 제가 만들어 둔 유언장이 있는데…….”
“보라 인간아.”
“……제가 죽으면 꼭 공녀님께서 읽어주시고…….”
“보라 인간아. 진정해. 너 안 죽어.”
“네?”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유일한 용이 단정했다.
“네 어디가 아픈 건지 의원들이 찾아내지 못할 만도 해. 넌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니까.”
“하지만 저는 평생…….”
“아가 때보다 지금이 덜 아프지?”
“네. 크면서는 아주 약간씩은 차도가 있었어요.”
“마법을 배우면서는 훨씬 덜 아파졌지?”
“……생각해보니까 그때를 기점으로 조금 더 나아진 것도 같고요.”
퐁. 인간으로 변한 엔리르가 렐리안의 등에 손을 짚었다.
“지금은 어때.”
“……!”
훨씬 괜찮아졌다. 혹시 치유 마법이라도 쓰신 걸까. 의문을 담고 올려다보니 엔리르가 고개를 저었다.
“몸의 한계를 넘는 마력을 담고 있어서 그래. 네가 가진 마력이 지나치게 많아서, 몸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사방으로 날뛰고 있거든.”
마법. 마력. 마나에 관한 한, 이 세계 유일하게 남은 용의 말이 틀릴 리가 없다.
렐리안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평생 알고 살았던 것이 송두리째 달라질 것 같다는 예감 앞에.
“네 몸이 조금 커지면서 그릇이 넓어지니 덜 아팠던 거고. 마법을 배우면서 몸속에 잔류하는 마력을 밖으로 배출할 줄 알게 된 것도 꽤 도움이 되었을 거고.”
“그, 그게 무슨…….”
똑똑하니 전부 이해했음에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말을 더듬거리자, 어린 용이 순수하게 경탄하며 일축했다.
“날 제외하면, 너보다 뛰어난 마법사는 없을 거다, 이 말이지.”
***
렐리안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무려 용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일평생 아팠던 건, 대마력을 감당하지 못한 육신의 한계 때문이었다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담담하던 렐리안이 오열했다.
살 수 있다. 내게도 내일이 있다.
강해질 수 있다. 나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마법. 일평생 나를 죽이고 동시에 살린 그것.
‘아아. 그래. 이거였구나. 늘 감싸던 그 무거운 것이 바로 마나였구나.’
친애하는 이가 알아주자 부유하던 세계의 마나가 작은 마법사의 주위에 기쁜 듯 흘러들고, 체내에서 마력으로 굳어졌다.
‘이 고통이 마력이었구나.’
또다시 몸속에서 뾰족한 유리 알갱이가 구르는 느낌.
감당하기 어려운 통증에 심장을 움켜쥐면서, 렐리안은 웃으며 울었다.
***
렐리안을 달래던 이벨리아가 아연하게 입을 벌렸다.
‘반전도 적당해야지……!’
몸이 좋지 않은 줄 알았던 내 친구가 알고 보니 차기 마탑주 씹어먹을 재능을 가졌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