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너희 잘 하고 있는 거 맞지? (174/323)


174화: 너희 잘 하고 있는 거 맞지?
2022.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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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르트 백작의 참전 소식은 제국 전역을 술렁이게 했다.

아무리 잘난 사령관들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군(軍)의 모습을 갖춰 출정하는 것과는 달리, 혈혈단신 전쟁터에 뛰어드는 이.

악마 또는 마족을 상대함에 군세 따위 필요 없다는 그 오만함은, 아이러니하게도 제국민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안정을 주었다.

수도 사방위, 그중 남문(南門).

전례 없는 대악마의 출정식을 보고자 모인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뒤에 딸린 대군은 없다. 높게 매달린 깃발 역시 없다.

달랑 말 한 필과 검 한 자루.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초라하다 생각지 않았다. 외려 경외심에 우러를 뿐.

그 단출한 모습이 말하는 바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이 이상은 무용(無用)하다’.

성벽을 둘러싼 제국민들이 술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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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악마가 무슨 바람이 불어 제국을 위해 참전한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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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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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끼, 이 사람아. 우리는 그저 감사하다 절하며 받아먹으면 그만일세. 지금 저 바깥에 균열인지 뭔지 하는 것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질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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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무리 그래도 악마가 악마를 때려잡는 게 말이나 되는가? 물론 고맙긴 하다만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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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면 자네가 직접 출정하지 그러나? 꼭 검을 들 용기도 없는 것들이 말만 많아서는, 에잉, 쯧쯧.”

대다수가 감탄하는 와중, 의심 많은 이들이 한 마디씩 얹고 있던 그때.

단신으로 성문 밖을 나서던 아가레스는 잠시 고삐를 당겨 멈춰 섰다.

이내 느리게 좌중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시선 닿은 곳은 저 멀리 성벽 위.

그 많은 인파 속에서도 마치 좌표가 찍히듯 단번에 찾아낼 수 있는 그의 주인.

가만히 바라보던 아가레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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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께서 내게 출진을 명하셨다.”

부탁이 아니라 명.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잠깐의 침묵이 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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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쓸고 오지.”

이내 터지는 함성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렇게 악마는 이후 자신이 세울 전공(戰功)을 모조리 이벨리아의 발치에 바치고 홀로 나아갔다. 그에겐 더없이 익숙한 수라장 속으로.

***

습성이 코알라, 나무늘보, 고양이와 별반 다를 것 없이 게으른 이벨리아는 아주 가끔 남들이 놀랄 정도로 부지런해지곤 했다.

대부분 자신의 이익을 셈할 때가 아니라, 친애하는 이들을 위해 움직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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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수염만 보여도 도망치기 바쁘셨던 공녀님께서 웬일로 먼저 수업을 다 청하셨습니까?”

분명 오늘의 집중력도 이 종잇장보다 얇으리라. 그리 여기며 제자를 바라본 현자는 풍성한 눈썹을 슬쩍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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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에 변화가 있으셨군.’

현 황제와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했던 현자는 이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은 어떠한 사유로 심성이 만개할 때 이런 눈빛을 하곤 했다.

예를 들면, 허울뿐인 황좌의 주인이 아니라 진정한 군주가 되어야겠다 결심했을 때.

혹은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지켜야겠다 결심했을 때.

이벨리아는 고개 들어 스승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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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저는 백수가 꿈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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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따갑게 하신 말씀이니 잘 알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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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가지고 태어났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더 누리겠다고 공부를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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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굼벵이 같은 심성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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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놀고먹다 죽으려 했는데. 내가 죽기 전에 제국이 먼저 망해버리면 곤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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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놀고먹다 죽겠다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수업을 청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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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왕 배우는 김에 친애하는 내 사람들……과 악마들도 돕고요.”

마치 놀고먹는 것이 주된 목적이고, 돕는 것이 부수적인 것처럼 퉁명하니 말하고 있지만, 귓가가 발간 것을 보아하니 본심은 후자인 모양이다.

드디어 마음을 잡은 제자를 향해 이 제국 유일한 현자가 인자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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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학문은 누가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익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때가 되면 이리 스스로 문을 열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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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스승님께서 말씀하실 건 아닌데요.”

누구보다도 졸졸 따라다니며 귀에 강제로 메다꽂으신 분께서 말이야.

끌끌 웃은 현자가 이벨리아의 맞은편에 앉으며 보따리를 풀었다. 쌓여 있던 각종 고서가 즐비하게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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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무엇을 가르쳐 드려야 우리 공녀님의 안락한 노후에 보탬이 되려나.”

순식간에 키만큼 쌓인 방대한 자료를 흘끗 바라보며 이벨리아가 고민 없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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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전부요.”

 

***

홀로 남하(南下)하던 아가레스는 저 멀리 보이는 검붉은 선에 시선을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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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그 균열인가.”

가까이 다가가 살피니 확실히 이질적이기는 하다.

마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혼탁한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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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섞였는데.’

익숙하지 않은 기운이다. 집중하여 탐색하는 아가레스의 눈 깊은 곳에서 회로가 빛을 발했다.

자연력도, 존재력도, 지배력도 아니다.

본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근원이 아니라 억지로 뜯고 이어붙인 인위적인 힘.

웬만한 것은 포용하고 아우르는 이 세계에 흠집을 내고 균열을 일으키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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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

아가레스는 균열이 어떤 식으로 기능하는지를 알아내고자, 즉각 폐쇄하지 않고 가만히 응시했다.

그렇게 약 한 시간 뒤.

허공에 실금처럼 그어져 있던 균열이 일렁이며 점점 두께를 키웠다. 마치 균열 자체가 무언가를 배불리 먹으며 자라고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 틈이 생기자, 날카로운 손톱이 비집고 불쑥 튀어나오더니 억지로 잡아 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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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 시스템인가. 없어 보이게.”

대악마는 그저 여유롭게 팔짱 끼고 관전했다. 안에서 뭐가 튀어나오든 상관없다. 난데없이 신이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그를 곤란하게 할 것은 없으니까.

몇 분 후. 중형 마족 하나는 족히 튀어나올 만큼 균열이 벌어지자.

- 크아아아아!

손톱의 주인이 크게 포효하며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4급 언데드종, 듀라한.

자기 머리를 손에 들고 말 위에 올라탄 목 없는 기사.

72 악마 급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마족 중에서는 제법 고위에 속한다.

듣기 싫게 끓는 목소리로, 듀라한이 뒤를 따르는 하위 마족들에게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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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쓸어버려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이 증오스러운 땅에 생명은 남겨둘 필요가 없다!”

공포에 질린 인간들의 얼굴. 찢어지게 지르는 비명. 살려달라는 애원. 그것들은 듀라한에게는 그 무엇보다 맛있는 산해진미였다.

펼쳐질 만찬을 기대하며 앞을 바라본 듀라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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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인간이 하나밖에 없군.”

격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라 아가레스의 정체를 어림잡지조차 못하는 우매한 눈.

듀라한이 낄낄 웃으며 아가레스에게로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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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인간. 내 마음에 쏙 들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면 내 종으로 부려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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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애원할 존재는 이 세계 단 한 명뿐이라.”

같잖다는 듯 말을 맺음과 정확히 동시.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은 채, 딛고 선 세계를 그의 지배 영역 아래 둔 아가레스가 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렸다.

균열을 찢고 나온 마족들뿐만 아니라 균열 그 자체까지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압도적인 힘에 짓눌린다.

그렇게 마족의 중대(中隊) 하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단 30초.

대악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남하를 시작했다.

***

아가레스는 창공을 덮는 익숙한 황금빛 깃발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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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저게 출정한 방향이었나.”

똥 밟았네. 4분의 1 확률이었는데 하필 여기일 건 뭐야.

마찬가지로 반대편에서 아가레스를 확인한 아르칸 역시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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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여긴 왜 왔지.”

이번 균열 토벌전. 가장 촉망받는 두 사령관이 마주했다. 정이라곤 없는 서늘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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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내 구역이다.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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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에 침이라도 발라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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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퉤. 발랐다.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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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새끼같이 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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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는 어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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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시는 바에 따랐을 뿐.”

아르칸이 불쾌하다는 듯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가 거점으로 삼은 지역에 생성된 것은 무려 1급 균열.

몇 없는 1급 균열의 폐쇄는 마땅히 혁혁한 전공(戰功)으로 인정될 법하다.

하여 제법 오랜 시간에 걸쳐 부족함 없는 진을 다 쳐놓은 상황.

이제 곧 균열을 찢고 나올 것들을 사냥만 하면 되는데, 버릇없는 악마가 은근슬쩍 숟가락 얹기를 시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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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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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답게 행동해, 황금 머리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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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공(戰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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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많이 죽이면 네 공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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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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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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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제대로 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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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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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많이 죽이냐다. 등급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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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불합리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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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리면 뒈지시던지.”

 
- 크르륵.

고등급의 균열답게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들은 2급 인외종(人外種) 사이클롭스.

외눈박이 거인들이 발 한 번 디딜 때마다 지축이 울리고 병사들이 휘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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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준비 태세! 준비 태세!”

도열한 기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창과 칼을 들고. 궁사들이 활시위를 당겨 눈을 조준하던 찰나.

아가레스가 병사들을 헤치고 전열에 서서 묵빛 검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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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하는 말 못 들었나.”

그러자 아르칸 역시 병사들을 흘끗 돌아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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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 네놈들이 끼면 숫자 계산이 복잡해진다.”

아연해진 병사들을 뒤로하고, 아르칸과 아가레스는 동시에 땅을 박차고 사이클롭스 무리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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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아르칸이 검 한 번 휘두름과 동시에 절명한 거인의 수를 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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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소롭다는 듯 아가레스가 곧바로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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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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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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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숫자 제대로 세고 있는 거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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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아니지. 봐주고 있는 건데.”

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두 청년이 경쟁적으로 거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1급 균열이라는 명성 아래 잔뜩 긴장하고 있던 병사들의 손이 하얗게 질리자, 알렉이 짝짝 손뼉 쳐 주의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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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자. 다들 검 내려두고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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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하지만 1급 균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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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1급 균열 지금 엉엉 울고 있는 거 안 보여?”

저 두 존재가 아주 박살을 내고 있잖아.

마치 휴양지라도 온 듯 바닥에 누워 주스를 쪼록 빨며, 알렉이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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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꿀이 아니에요. 있을 때 실컷 빨아둬.”

 

***

제국 서부. 황태자 루드비히의 진영.

참모이자 무시 못 할 전투 인원인 이크리안은 심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군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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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하루하루 생사의 경계선을 걷는 전쟁터.

바짝 긴장하고 컨디션을 조절해도 모자랄 판국에, 이 제국의 황태자이자 대군의 사령관께서 왜 밤이면 밤마다 쪼그려 앉아 달빛을 보며 청승을 떨고 계시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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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들어가서 주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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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달이 참 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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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밝다는 건 밤이 깊었다는 뜻이고, 밤이 깊었다는 건 자야 한다는 뜻이고, 주무시지 않으면 내일 전쟁은 또 어떻게 치르려고 진짜 날이면 날마다 이 난리십니까.”

전하께서 안 주무시니까 전하를 지키는 기사 여럿에 저까지 꼴딱 날밤 새우고 있는 거 안 보이시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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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들어가서 자거라. 나는 생각할 게 조금 더 있어서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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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뭡니까. 그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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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주군 고민 상담해드려서 재워버려야겠다는 심산으로 물었으나, 질문 들은 이는 그저 아련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낮에는 악귀처럼 검을 휘두르고, 밤에는 감성에 젖어 별을 헤는 주군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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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혼종이다.’

한숨 쉰 이크리안이 루드비히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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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사춘기라도 오셨습니까,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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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는 무슨. 내 나이가 벌써 열여섯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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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별자리에 꿀단지라도 맡겨두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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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도 저 별을 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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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밤마다 비련의 주인공처럼 청승 떨고 계시는 이유가 수도에 두고 온 공녀님 때문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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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긴 뭘 보고 계시겠습니까. 자고 계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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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참 감성이 메말랐어. 마법사들은 원래 다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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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이불킥하는 것보다야 메마른 게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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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킥을 왜 하나. 나는 한 치의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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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뒤에 두고 보시죠.”

첫사랑에 빠진 소년은 바보가 된다더니. 이크리안이 보기에 루드비히는 바보를 넘어서 등신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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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무십시오.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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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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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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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감성도 없고 충심도 없는 마법사 같으니라고.”

주군의 사춘기. 게다가 짝사랑이자 첫사랑의 시작.

신하로서는 악재도 이런 악재가 없다.

훤히 보이는 고생길에, 이크리안은 늘 품고 다니는 사직서를 다시 한번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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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 동부.

남부에서 기어코 아르칸을 이겨 먹은 뒤, 성화에 못 이겨 동부로 내쫓긴 아가레스가 고원을 터덜터덜 걷다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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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뭐야.’

마주친 대군. 드높게 휘날리는 깃발을 보아하니 마족 조무래기들의 군대는 아니다. 전투 시에 기(旗)를 내걸 수 있는 것은 72 악마뿐이었으니까.

칼각을 맞춘 군대가 행진하는 방향을 보아하니 향하는 곳은 수도.

균열의 확산으로 인해 유수의 사령관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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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들이 수도로 쳐들어가면 모처럼 쉬고 있는 우리 꼬맹이가 또 바빠지겠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아가레스는 고원을 까맣게 채워 진격 중인 군대 앞을 홀로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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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냐!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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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우두머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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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을 보아하니 마족인 것 같은데.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건방지게……!”

아가레스는 앞에서 짖는 악마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몇 위인지. 이름이 뭔지. 능력은 어떤지. 알 리 없고 알 이유도 없다.

폐부를 찌르듯 짙은 마기가 평원을 한바탕 쓸고 지나가자, 부지불식간에 증발해버린 악마의 군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악마가 말에서 내려 아가레스의 발치에 납작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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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사, 살려주십시오. 제가 감히 몰라뵙고……!”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빌었으나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한 금안에는 한 치의 변화도 없다.

그러자 최후를 직감한 악마가 추하게 발버둥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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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같은 동족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뻗어오는 손이 멈추지 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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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십니까!”

같잖은 협박에 대악마가 낮게 웃었다.

그리고- 파천(破天).

지상에서 천공으로 날카롭게 솟은 마기가 하늘을 두 쪽으로 갈랐다.

대기와 구름이 양단되고. 동시에 천공에서 지상으로 뇌우가 내리꽂힌다.

어디 감히 신과 하늘을 가져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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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위에 계신 분께서 명하셨거든. 다 쓸어버리라고.”

 

***

아르티나 공작저.

정원 테이블에 앉아 날씨를 만끽하던 이벨리아와 엔리르가 입을 떡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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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동쪽 하늘이 반으로 똑 갈라졌어.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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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반으로 똑 갈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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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종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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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짓인 것 같은데.”

설마. 이벨리아가 이마를 짚었다.

다 쓸어버리라고 했다고 하늘까지 쓸어버리는 우리 토끼를 어쩌면 좋담.

한숨 쉬며 찻잔을 들어 올리던 이벨리아가 문득 드는 합리적인 의심에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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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과연 이 깽판을 우리 토끼만 치고 있는 걸까……?’

비슷한 지역으로 출진한 오라버니와 토끼가 만나서 대판 싸우진 않았을까.

우리 식량 도둑은 동화책 공장 공장장 안 괴롭히고 잘 있는 걸까.

이벨리아가 양단된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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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너희 잘 하고 있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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