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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다 쓸어버려, 나의 악마 (173/323)


173화: 다 쓸어버려, 나의 악마
2022.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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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일. 정기 귀족 회의 의사록]

마족 침공 확산세.

연관을 찾기 어려운 여러 지역에서 크고 작은 균열 발생.

아르티나 공작, 수도 인근 약 10M에 달하는 최대 균열 조사를 위해 출정.

***

[7월 2일. 정기 귀족 회의 의사록]

균열은 전조 없이 발생.

안에서 각종 등급의 마족 출현.

통상 균열의 폭이 클수록 고등급으로 분류.

발생원인 불명(不明).

악마 출현 여부 불명(不明).

폐쇄 조건 불명(不明).

***

[7월 16일. 정기 귀족 회의 의사록]

아르티나 공작이 균열 전체를 검기로 감싸 우그러뜨리니 비로소 폐쇄.

***

[7월 30일. 정기 귀족 회의 의사록]

아르티나 공작, 수도 인근 게이트 전부 폐쇄. 북상(北上) 중.

황태자 전하, 서부 하론 지역에서 첫 승전보. 카시스 소후작 합류.

카시스 후작, 동부 데르트 영지로 출정.

아르티나 소공작, 남부 로렌느 지방으로 출정.

이세르나 백작, 수도 전역 방위 자원.

***

[8월 13일. 정기 귀족 회의 의사록]

다발적인 균열로 우려하던 인력 부족 현상 현실화.

아르티나 공녀를 참전시키자는 안건이 제기되었으나, 황제 폐하의 노호에 무산.

***

[8월 27일. 정기 귀족 회의 의사록]

남부 지역 위고, 균열로 인하여 괴멸(壞滅).

하르벤타 제국으로 통하는 게이트 훼손.

귀족 대다수, 아르티나 공녀의 참전을 재요청.

***

[9월 10일. 정기 귀족 회의 의사록]

걷잡을 수 없는 균열 확산.

귀족 대다수, 아르티나 공녀의 참전을 강하게 요청.

***

9월 24일. 정기 귀족 회의.

귀족들은 이를 갈며 회의장에 발을 디뎠다.

오늘에야말로, 반드시, 공녀의 출정을 승인받아야 한다.

상황이 이에 이르니 친(親)아르티나인지, 반(反)아르티나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전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공녀가 필요했다.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돌발 균열.

걷잡을 수 없이 피해를 보고 있는 그들의 영지.

유수의 귀족들이 발에 땀이 나게 제국 전역을 뛰고 있지만, 그들의 수보다 균열의 수가 월등히 많았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면 사병을 가진 귀족 모두 출정하면 되지 않겠느냐 할 텐데, 기실 어중간한 귀족들론 어림도 없었다.

아르티나 공작이 밝힌 바에 따르면, 균열이란 결국 그 자체를 일그러뜨려 힘으로 닫아야 하는 것.

속속 들어오는 소식들에 의하면, 검사로서는 소드마스터를 넘보고 있는 소공작 또는 아르티나 기사단의 중간급 기사 정도는 되어야 했고.

마법사로서는 마탑의 고위 마법사 또는 카시스 소후작 정도는 되어야 했으며.

정령사로서는 최소 중급은 되어야 작은 균열을 폐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도 일명 1급으로 명명한 거대한 균열이 발생하면 아르티나 공작이 직접 달려가 폐쇄하여야 할 정도였으니…….

대정령사의 참전이 급하긴 급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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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가 아직 어려 안타깝긴 하다만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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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대의 앞에서 작은 희생은 불가피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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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티나 공작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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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승인을 받아내야 한다.’

공녀가 자원하지 않는 이상, 억지로 등 떠밀 방법은 황제 폐하의 명이 담긴 칙서뿐이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의지를 다지던 귀족들은.

- 콰앙.

교양 없이 열린 회의장 문에 불쾌한 듯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사색이 되어 더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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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루, 루페르트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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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르트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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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지위를 두 번씩이나 말하는 저의가 뭐지. 네놈들도 내 작위를 무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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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웬일로 회의를 다 참석하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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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이 귀족 회의에 참석하는 게 뭐. 내가 백작이라 나가길 바라는 건가.”

난데없는 피해망상에 걸린 대악마. 귀족들이 아연하게 입을 벌렸다.

작위 자격지심이 아주 대단한 것을 보아하니, 혹시 공녀님께서 백작 작위를 마뜩지 않아 하신 건가.

모두의 평화를 위하여, 귀족 하나가 손을 비비며 아가레스의 비위를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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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백작 작위는 인간 작위 중에서도 아주 높은 작위인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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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아니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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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공녀님이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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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은 아니시고.”

그렇다면 됐다. 공녀님만 아니라면 이렇게 살살 달래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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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귀족 작위에 대해서는 일절 알지 못하는 멍청이가 실언했나 봅니다. 백작 작위는 아주 높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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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그게 좀 멍청하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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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세상 둘도 없는 천치일 겁니다. 자기는 얼마나 대단하다고 감히 백작의 작위를 비웃는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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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공자보다야 백작이 높긴 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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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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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보단 백작이 높은 거 아닌가. 그건 작위가 없고 나는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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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이셨습니까, 그런 말씀을 하신 분이?”

아가레스가 끄덕였다.

순식간에 아르티나 공자를 향해 멍청이 천치 발언을 한 것이 되어버린 귀족은 사색이 되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가레스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귀족들의 자리 중 가장 상석으로 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과연 고고한 대악마가 한낱 인간들의 회의에 참석한 이유가 무엇인가.

회의장 내 귀족들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긴장한 면면들을 느리게 둘러보던 아가레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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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의 때 개소리가 오갔다 하여.”

사정을 봐주지 않는 마기가 회의장에 묵직하게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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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짖었는지 봐두려고.”

귀족의 권리도 의무도 찾지 않던 루페르트 백작의 난동에 귀족들이 하나둘 주저앉았다.

살피는 시선 속. 고요한 분노가 휘몰아친다.

그러자 납작 엎드린 귀족들 중 하나가 더듬더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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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백작께서도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제국 전역이 균열과 마족들로 심상치가 않으니…….”

아가레스가 마치 벌레를 보듯 내려다보자, 귀족은 벌벌 떨며 고개 숙이고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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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이 달린 문제이니만큼, 힘이 있으신 분들은 의무를 다하셔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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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공녀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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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직 어리시나 무려 대정령사 반열에 오르셨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분명 괜찮으실, 케엑!”

아가레스는 지껄이고 있는 귀족의 목을 움켜쥐고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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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인이 나 없는 곳에서 이딴 식으로 입방아에 올랐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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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헥. 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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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부재중이라고 좋을 대로 내뱉나 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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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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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견 하나가 늘 뒤에 있다는 걸 잊지 말았어야지.”

발버둥 치며 아가레스의 단단한 팔을 손톱으로 긁어대던 귀족이, 딱 숨 끊어지기 직전 바닥으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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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공녀님의 출정을 거론한다면, 네놈을 먼저 균열에 처박을 것이다.”

막혔던 숨을 몰아 내쉬며 눈물 콧물을 흘리는 작태를 차갑게 오시하며, 대악마가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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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은 내가 한다.”

 

***

회의장 밖으로 나온 아가레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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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꼬맹이한테 뭐라고 말하지.’

반쯤은 홧김이었다.

감히 그의 친우를 전쟁터로 밀어 넣으려는 저 꼴같잖은 작태에 화가 나서.

그리고 남은 반쯤은 욕심이었다.

얼마 전에 작은 황금 머리통이 자신에게 고작 백작이냐며 비웃지 않았던가.

전공을 세워 보다 높은 작위를 갖고 싶었다.

어차피 고작 악마나 마족들을 상대로 그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을 테니 가벼운 마음으로 참전을 선언하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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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낼 텐데.’

불과 몇 달 전. 말도 없이 휙 떠나버린 루드비히에 대한 분노로 그의 작은 친우가 얼마나 발을 굴렀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다신 안 놀아줄 거라는 둥. 돌아오면 정말 엉덩이를 걷어차 버릴 거라는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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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켜놓고 맛있는 것과 꽃을 주면서 말하면 덜 화내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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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야!”

가족들 모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공작저에서 홀로 놀고 있던 이벨리아가 호다닥 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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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놀아주려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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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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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꽃은 뭐야? 우왕, 마들렌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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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켤까?”

그러자 이벨리아가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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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오라버니는 나한테 미안할 때마다 촛불을 켜곤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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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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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켠다고 내가 덜 화내진 않아. 뭔데. 말해봐.”

어떻게 말을 해야 덜 혼날까. 또 작은 친구가 덜 슬퍼할까.

잠시 고민하던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에게 마들렌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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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지위를 가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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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냅다 갑자기? 이 제국 황제라도 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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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황제는 너 하나로 충분하고. 그냥. 조금 더 높은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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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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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 토벌에 참전한다고 했어.”

아가레스는 출진의 이유를 오롯이 자신의 욕심인 것처럼 포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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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 토끼 지위가 백작이라고 괴롭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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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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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작은 오라버니가 한 말 때문에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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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인간들에겐 그들의 법칙이 있다.

그들의 문제가 있고, 그들의 해결 방식이 있으며, 그들의 사상이 있는 법.

아가레스는 그 모든 경우의 수에서 예외 없이 이벨리아의 보루가 되어주고 싶었다.

가령, 루드비히가 패해 에드윈이 황제가 되더라도.

에드윈과 세레스가 아르티나를 멸문에 이르게 하더라도.

그 어떤 최악을 가정하더라도 도피처가 되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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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의 영역으로 와준다면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지킬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네 마지막 선택지가 마계가 되길 원치는 않는다.

네게 선택권을 더 안겨주면 안겨주었지, 빼앗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는 이 모든 마음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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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에스코트, 더 멋있게 하고 싶어서. 이젠 네 성년식도 많이 남지 않았으니까.”

오랜 친구를 찬찬히 살피던 이벨리아가 옅게 웃었다.

한결같이 배려 깊은 나의 악마.

작고 부드러운 손길이 아가레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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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이 나를 전쟁터에 내보내자고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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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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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황에 토끼가 자리를 비우겠다고 할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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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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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와 아빠도 부재중이니 귀족들의 요청이 강해졌을 테고.”

아가레스는 고개를 젓고 싶었다.

아니라고. 그런 일 따위 없다고. 내 출정은 그저 작위 욕심에 기인한 것이니, 너는 그저 이곳에서 편히 쉬고 있으면 된다고.

때로 모르는 것이 약이 되기도 한다.

귀족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네가 원치 않는 굴레를 강제로 지우려 한다는 걸. 나는 네가 몰랐으면 했다.

그럼에도…… 주인의 눈을 가리지 않는 악마는 결국 끄덕였다.

강하고 현명한 그의 친우는 마냥 가둬두고 보호할 대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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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대로야.”

하지만 난 그걸 원치 않아. 아가레스는 바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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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다면 나아가. 나는 네 뒤를 따를 테니.”

그저 작은 친우를 닮은 꽃을 쥐여주며 전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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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싫다면 머물러. 나는 널 대신하여 다녀올 테니.”

기실 발치에 엎드려서라도 애원하고 싶었다.

가지 마. 그냥 여기에 있어.

내가 대신 갈게. 내가 대신 싸울게. 내가 대신 보고, 듣고, 견딜게. 그렇게 하게 해줘.

잠시 고개 숙여 침묵하던 이벨리아가 자신의 악마와 천천히 눈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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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기억해.”

제발 하지 말라 애원조차 못해 애타는 눈. 이벨리아는 이 눈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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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독을 먹었을 때. 그때 네 표정이 어땠는지.”

딱 지금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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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보인 엄마랑 아빠, 오라버니들의 표정이 어땠는지.”

너와 다르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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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몰랐었어.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바보 같게.”

나 혼자 달리는 동안, 내 소중한 사람들이 세상 다 무너진 마음으로 울었다는 걸 몰랐어.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눈가를 쓸었다.

오로지 나로 인해서만 슬퍼했던 나의 악마.

결국, 나의 안위가 너의 안위였다.

나의 평온이 너의 평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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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알아. 나를 돌보는 것이 내 소중한 이들을 돌보는 거라는 걸.”

홀로 오만했던 아이는 타인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혼자 달리던 아이는 조금 느리더라도 모두를 챙기는 법도 배웠다.

꼭 모든 것을 다 짊어지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이벨리아는 자신을 간절히 올려다보는 아가레스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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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안 갈래.”

대악마의 금빛 눈이 진정 기쁜 듯 사르르 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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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출정은 꽤 오래 걸린다며. 내가 오랫동안 혼자 전쟁터에 나가 있어 봐. 다들 얼마나 걱정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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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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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아직 어린이야. 놀고먹을 나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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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당해.”

이벨리아가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악마의 턱을 잡아 살짝 위로 올렸다.

마주 닿아 온전히 그를 지배하는 맑은 눈. 대악마가 전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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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아가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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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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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대신해서 다 쓸어버리고 와.”

오만한 주군의 명. 포악한 악마는 달게 웃었다.

***

[10월 8일. 정기 귀족 회의 의사록]

루페르트 백작, 출정.

백작의 요청으로-.

출정 지역, 제한 없음.

출정 인원……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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