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너를 마음에 담았다 (172/323)


172화: 너를 마음에 담았다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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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비밀기지.

가져온 간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던 이벨리아는 오두막에 패인 커다란 흠집에 문득 시선을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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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전에 식량 도둑이 검 휘두르다가 팍 찍어버린 건데.”

안 고치고 그대로 놔뒀구나. 이 기물 파손범!

천천히 시선을 돌려보니 벽난로 안에는 남은 재들이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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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켜둬서 이렇게 지저분해졌네.”

한번 흠이 눈에 보이자 괜히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게 된다.

뒤편을 바라보니 푹 꺼진 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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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번 몸을 던져서 이렇게 됐나 보다.”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귀퉁이가 터진 쿠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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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엔리르가 물어뜯어서야.”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오두막을 둘러보던 이벨리아는 이내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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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는 나보다 작았었는데. 엄청 커다래졌네.”

엔리르가 이 나무에다가 쉬야를 엄청 했는데. 그래서 이렇게 잘 자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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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다 이렇게.”

새삼 느꼈다. 참 많은 흔적이 소르르 쌓였다고.

어디 하나 손길 안 닿은 곳이 없었고, 또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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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벌써 9년인데.”

처음 만들었을 때보다 많이 지저분해지고 낡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달가웠다.

식량 도둑과 티격태격하고. 악마가 찾아오고. 용을 줍고.

같이 간식을 먹고, 낮잠을 자고, 고민을 털어놓고, 울고, 웃고.

아무래도 우리가 함께 만든 시간이 이곳의 낡음이 되었나 보다.

그 어느 날 아가레스가 부숴버린 창틀 모서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이벨리아가 옅게 웃었다.

***

밤새 처리해도 끝을 모르고 쌓이는 상소문. 그리고 각종 보고서.

보통 각 서류들이 이 제국 온갖 현안을 담고 있었으나, 오늘 새벽만큼은 달랐다.

상소문은 단 하나의 내용으로 통일되어 있었고.

보고서 역시 상소문과는 다르나 단일한 내용으로 통일.

귀족들의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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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는 무슨.’

루드비히는 하루빨리 비를 맞이하라는 상소문 더미를 대충 밀어두었다.

상소문의 개소리보다 보고서의 내용이 훨씬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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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 없는 균열에서 마족들이 쏟아져 나온다라…….’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통상 마족들은 매개가 소환하거나, 그들을 지휘하는 악마의 부름이 있어야 인계로 올라올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 보고서에 따르면 마족들에게 그런 제약은 더 이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제국 전역, 특히 변방을 위주로 발현되고 있는 균열은 인마전쟁의 새로운 국면으로 작용할 것이다.

루드비히는 보고서에 몰두하며 밤을 지새웠다.

***

그리고 다음 날.

6월 4일. 정기 귀족 회의.

루드비히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앉아 속으로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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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기지로 튀는 건데.’

땅 도둑에게 줄 마들렌을 바구니에 담느라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 천추의 한이다.

지금쯤이면 비밀기지에서 빈둥대고 있어야 하는데…… 망할 에르트 백작. 귀신같이 눈치채고 들어와선.

우리 땅 도둑 심심해하면 어떡하나. 배고파하면 어떡하나.

이벨리아에 대한 생각으로 정신이 회의장을 떠나버린 루드비히의 귀에, 어지럽게 왕왕대는 귀족들의 청이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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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께서도 비를 맞이하시어 후사를 탄탄히 하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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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두신 영애가 없으시다면 간택 절차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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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성년식을 치르실 테니 그에 맞추어 성혼을 진행하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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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황태자 전하의 국혼은 서둘러 마땅한 대업입니다-!”

남의 인생 모든 걸음을 업보 혹은 업적으로 양단하여 취급하는 저들을 어쩌면 좋나.

루드비히가 불쾌하다는 듯 오른쪽 눈을 찌푸렸다.

눈치 좀 있다는 귀족들은 황가의 축복인 홍안이 섬뜩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알아서 몸을 사렸으나.

자신의 딸, 혹은 방계 친족이라도 황태자비로 밀어 넣고자 하는 일부 귀족들은 탐욕스러운 청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아들의 혼인만큼은 본인의 의지에 맡겨두고 싶었던 황제가 과열된 귀족들을 진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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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들 하도록. 황태자의 국혼이 제국 중대사임은 본인 역시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이니.”

황제의 개입으로 잠시 소강된 분위기. 루드비히가 슬쩍 눈짓하자 에르트 백작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다른 안건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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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최근 실종 신고가 급증세에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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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국혼보단 이쪽이 훨씬 시급한 안건이겠군. 원인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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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들이 어느 성별이나 연령에 치우쳐진 것이 아닌 것으로 보아, 특정 목적을 가진 단체의 소행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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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가 아니라면…… 마족들의 소행이라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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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이 보고된 이후 실종 신고가 급증한 것에 비추어, 관련이 없진 않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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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병력이 열악한 변방에선 제국의 안보에 의심을 품는 불순분자들도 적지 않다는 소식도 접하였습니다.”

그러자 혼사 이야기가 오갈 때와는 달리 진지한 낯을 한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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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에 이르렀다면 불안은 당연한 것. 불순분자라는 말은 불쾌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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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송구합니다, 전하. 저는 그런 뜻이 아니오라…….”

그러자 에드윈의 외할아버지, 이세르나 백작이 발발 떠는 귀족을 일별하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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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변방은 수도와 달리 항시 위협에 노출되어 있지요. 저 역시 교역을 위해 지방에 거점을 두고 있어 잘 알고 있습니다.”

저 늙은 너구리가 순순히 내 편을 들 리가 없을 텐데. 꿍꿍이를 짐작하려던 루드비히가 백작을 빤히 바라보자, 이세르나 백작이 운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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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서부 변방에서는 일개 사단이라고 칭해도 부족함 없을 마물들이 번갈아 침공을 가하고 있다지요.”

루드비히가 픽 웃었다. 뭘 저리 공들여 판을 짜시나.

이세르나 백작이 이런 말을 하는 스스로가 참으로 송구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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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해하는 제국민들을 달래고 실종과 균열을 조사하실 겸, 제국 내 가장 선망받는 분께서 제국 변방을 크게 한 바퀴 도시는 것은 어떨지.”

제국을 위한 충심에서 비롯된 간언으로 포장하고 있으나, 실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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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같아서야 이 노구를 이끌고 몸소 뛰고 싶으나, 제국민들이 신뢰하는 분이 아니면 큰 의미 없지 않을까 우려되어…….”

그저 루드비히를 보내려는 얕은 수다.

얼마 전 신탁 건으로 황태자의 입지가 더욱 단단해졌으니, 이세르나 백작으로서는 똥줄이 탈 수밖에 없긴 했다.

현재 에드윈과 이세르나 백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귀족들을 포섭하는 것.

그러려면 황태자가 궁을 비워야 했다.

기실 변방을 돌고 돌아온다면 제국민들 사이에서 황태자의 명망은 더욱 높아질 것은 자명하지만,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궁 내부의 판을 흔들어 놓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 의도를 모를 리 없는 루드비히의 심복, 에르트 백작이 선수 쳐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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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 전하께서 적임자시군요. 마침 불순한 신탁이 돈다고 하니, 전하께서 몸소 출정하심으로써 불필요한 의심을 잠재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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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 전하께서는 이제 막 약혼식을 올리셨습니다. 황가의 후사는 그 어떤 것보다 최우선. 데퐁트 영애와 우애를 다지시는 것이 급선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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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안보보다 까짓 우애가 중하다는 말씀입니까,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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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 우애라니요. 부부의 연은 하늘이 내려준다 이르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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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놓고 말해봅시다. 황자 전하께서 출진하신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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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안 되는 걸 어찌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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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께선 매번 상황이 녹록하여 출진하셨답니까? 그대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황태자비도 전하의 심신이 평안해야 만드실 것 아닙니까!”

이세르나 백작과 에르트 백작이 각자 모시는 주군을 위해 설전을 벌이던 중.

머릿속에 오직 우리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자는 목표만 가득 찬 귀족들이 눈치도 없이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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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황태자 전하께서도 어서 혼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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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제 조카 아이가 아름답고 현숙하기로 소문이 자자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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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의 조카를 어디 감히 황태자비에 가져다 댄답니까. 에잉. 주제도 모르긴.”

이런. 루드비히가 이마를 짚었다.

왜 주제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온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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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은 무슨.’

그는 누군가와 평생 손잡고 걸어갈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위태한 부표 위.

누가 올라타든 짐 될 것이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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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도둑 정도 되면 또 몰라.’

귀족들의 우리 딸, 우리 조카 자랑을 흘려넘기며 루드비히가 사념에 잠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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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도둑이랑은 황궁에 같이 살아도 재밌긴 하겠지.’

밥을 먹을 때는 연신 웃음이 터질 테고, 함께 산책할 때는 이 세상이 다채로운 빛으로 물들 테다.

지는 노을마저 피는 태양으로, 흐린 여명마저 선명한 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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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함께 있다면 분명 그러겠지.’

늘 피와 쇠로 뒤덮여 있던 미래가. 너와 함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색으로 젖어 든다.

루드비히의 입매에 자신도 모르는 미소가 잔잔히 걸렸다.

그래. 너와는 모든 곳, 모든 길, 모든 일상을 함께 걸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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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브가 황후가 된다면…….’

이어지던 루드비히의 상념이 칼로 자른 듯 멈췄다.

동시에 미소 짓고 있던 입가가 싹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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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혼인이라니. 이브와 혼인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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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일전에 마도구를 사용해 어른으로 변신했던 이브와 손을 잡고, 포옹하고…….

펑. 속에서 뭔가 터지는 느낌과 함께 뜨끈한 열기가 얼굴 쪽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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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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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을 불러라!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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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이 토마토처럼 발가신 것을 보아하니 열이 오르신 듯하다!”

사방에서 떠는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루드비히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소년이 되어 단단해진 손이 입가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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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내가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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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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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를.’

전조 없는 깨달음.

아니, 전조는 차고 넘쳤으나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던 그것들.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그저 한편에 쌓고 단단히 막아둔 감정들이 둑 터진 것처럼 밀어닥쳤다.

외면하던 노도를 정면으로 마주한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루드비히는 깊은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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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히 너를…….’

세상 모두가 이 수라장에 갇힌다 하더라도 너만은 예외여야 했다.

그런 너와 이 지옥도에서 평생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라니.

모순되기 그지없다. 이기적인 욕심이다.

이곳에서 어머니를 잃었다. 황비가 미치는 것도 직접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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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의 여인은 행복할 수 없다.’

경험에 기반한 확신. 루드비히의 지론은 그랬다.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루드비히가 가까이 다가온 어의를 한 손으로 물렸다.

그리고 잠시 뒤. 천천히 고개 들어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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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출진은 내가 한다.”

 

***

루드비히는 길길이 날뛰는 에르트 백작을 뒤로하고 집무실로 돌아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참전을 선언하자마자 역시 성군의 자질이라며 칭송하던 귀족들.

기실 반쯤 충동적으로 참전을 선언한 건 그깟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도피였다. 책무로부터. 또 감정으로부터.

늘 담담히 책무를 지던 루드비히는 난생처음 피하고 싶은 혼인이란 의무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살고자 일생 감정을 닫아왔던 루드비히는 밀어닥치는 발칙한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택한 것이 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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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태론 이브를 볼 수가 없어.’

늘 그렇듯 맑은 표정으로 식량 도둑, 외치며 달려올 친구를 향해 감히 이런 감정을 품었다.

지금으로서는 함께 있고 싶다 바라는 것조차 죄악이다.

유유히 뜬 별을 이 진흙탕으로 끌어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을 테니.

하여 루드비히는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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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고 돌아올게. 이 버릇없는 바람이 제멋대로 커지지 않도록.’

그리고 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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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정리하지 못한다면. 더 높이 뜬 태양이 되어 돌아올게.’

네가 노니는 그 구름 위에서 나도 함께하자, 당당히 말할 수 있도록.

***

이벨리아는 요리사들이 한창 바쁜 아침 시간, 얍, 소리를 내며 주방으로 쳐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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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아기씨! 또 주방을 얼마나 엉망으로 만드시려고 찾아오셨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말해버린 요리장 세토가 자신의 입을 급히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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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 엉망으로 만들었어!”

오시는 모든 날이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유명 동화 속 소년처럼 세토 역시 속으로만 사실을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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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샌드위치를 만들려고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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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 지옥에서 올라온 음식 2편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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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토. 오늘 입이 아주 자유분방해.”

오늘따라 이놈의 입이 그냥 방정이다.

허허 웃은 세토는 신속하게 샌드위치 재료를 준비했다.

이내 아기씨의 손끝에서 차곡차곡 만들어져가는…… 괴상한 물체.

세토는 황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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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씨. 지금 뭘 연성하고 계시는 건가요?”

 

***

이벨리아는 피크닉 바구니를 이리저리 흔들며 폴짝폴짝 비밀기지 오두막으로 향했다.

결국, 이벨리아가 빵을 밑에 깔면 세토가 재료를 풍성하게 올려 꼬치로 꽂아준 샌드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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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 노력이 반영되었으니까 이건 내가 만든 거나 다름없지!”

남의 재능을 홀랑 자기 것으로 만든 무양심 이벨리아는 돌 위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렸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옆으로 살짝 기울 때 즈음.

이벨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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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이 나눠 먹으려고 잔뜩 가져왔는데. 오늘 식량 도둑 안 오나?”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식량 도둑의 매가 날아가는 것을 못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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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바쁜가…….”

더운데.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기다려야겠다.

배가 고파진 이벨리아는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입에 물며 오두막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정면에서 보이는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대자보.

「땅 도둑은 테이블 위를 확인하시오. 그 외 찌꺼기들은 손대지 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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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엥! 뭐야! 깜짝 선물인가?”

포르르 테이블로 달려간 이벨리아가 달랑 놓인 쪽지를 휙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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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지 않은 쪽지였으나, 한참을 바라보던 이벨리아의 입이 삐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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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히끅. 동글게 맺힌 눈물이 흐름과 동시에 작은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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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어딨어.”

같이 먹으려고 이거 가져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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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쁜 놈이…….”

말도 없이 진짜. 내가 만든 샌드위치 먹기 싫어서 튀어버렸어.

먹던 샌드위치를 옆에 두고 한참을 서 있던 이벨리아는 소매로 눈을 벅벅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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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끅. 너 돌아오기만 해봐. 다신 안 놀아줄 거야.”

못된 식량 도둑. 만난 날부터 잠깐 헤어지는 오늘까지 한결같이 못된 식량 도둑.

너 혼자 다 짊어지지 말라고 내가 여기 있는 건데.

넌 또 홀로 꾸역꾸역 참다가 이렇게 떠나버리고.

터덜터덜 소파로 걸어가 주저앉은 이벨리아는 가져온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괜한 서러움과 걱정, 그리고 친우가 곁을 떠났다는 생소함에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빵 위를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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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빵이란 이런 거구나…….”

같이 먹지 않으니까 하나도 맛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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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식량 도둑. 넌 다신 샌드위치도 안 만들어 줄 거야.”

공유자 하나가 잠시 이탈한 비밀기지.

늘 이벨리아의 방문을 알리던 커다란 매, 라르고는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

「잠시 다녀올게. 잘 먹고, 잘 자고, 비 오는 날엔 나뭇잎 잘 쓰고 있어. - 너의 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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