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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화: 때로는 싸우면서 친구가 된다 (171/323)


171화: 때로는 싸우면서 친구가 된다
202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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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스 저택. 수많은 방 중 하나의 화려한 침대 위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뒹굴던 이벨리아가 퍼뜩 고개 들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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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야. 토끼야.”

침대 바로 옆에서 우유를 따뜻하게 데우던 아가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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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내일 앙제스 의상실에 갈 건데. 토끼도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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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가잖아. 그럼 물을 필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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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뜻이야,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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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따르겠다는 뜻.”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가 담긴 컵이 손에 내려앉았다. 감싸니 온몸에 훈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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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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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말씀을.”

후- 후- 우유를 불어 호로록 마시며 이벨리아가 한숨처럼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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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요즘 불면증인가 봐. 고민 걱정이 많은 어른이 되어서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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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잘 못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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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맨날 뒤척이기 일쑤야.”

그러자 아가레스는 이벨리아의 이마를 짚어보고, 맥을 짚어보고, 심지어 마기를 운용하여 어딘가 좋지 않은 곳이 있는지 세심하게 살폈다.

어린 인간 친구를 돌보고자 익힌 의학 지식에 따르면, 평소와 같이 멀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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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트라우마가 생긴 건가.’

황비의 일인가, 어류들의 약혼식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과거 악마에게 당했던 기억 때문인가. 하긴, 어린 나이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많이도 겪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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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우유 마시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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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응.”

아가레스는 곧바로 옆방으로 건너가 서재를 뒤적였다. 심신의 안정과 트라우마의 완화, 그리고 불면증에 좋다는 세상 모든 것을 구해서 가져다 바칠 생각이었다.

어린 친구를 위하여 의학 서적을 한가득 쌓아둔 데다가, 대부분의 책을 한 번씩은 탐독하였기에 속도는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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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지금은 라프라스 꿀을 탄 물을 먹인 다음, 향초를 켜두고, 잔잔한 노래를 틀…… 수가 없으니 직접 불러주면 되겠군. 내가 아는 자장가를 어린 인간에게 불러줘도 문제없는 건가.’

악마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자장가 가사를 자체 검열한 아가레스는 다시 이벨리아의 방으로 돌아가 살짝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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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자장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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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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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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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울…….”

새근새근- 편안하게 들려오는 숨소리에 가까이 다가가니, 어느새 다 마신 우유 컵을 옆에 두고 대자로 뻗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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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유에 수면제를 탔나.”

너 불면증이라며. 세상 어느 불면증이 우유 마시고 혼절해서 잠들어.

그동안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것은 단지 과한 낮잠으로 인한 것이 분명했다.

아가레스는 허탈하게 웃으며 침대맡에 앉았다. 코를 톡 건드리자 손가락을 답삭 물어 오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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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암…….”

아마 넌 모를 거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듯, 네 사소한 불편이 내겐 얼마나 큰 걱정으로 다가오는지.

어린 친구가 깨지 않게 한쪽 팔로 보듬어 들고, 아래 깔린 이불을 빼 제대로 덮어준 아가레스가 속삭이며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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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꿈 꿔, 이브.”

높게 하현달이 뜬 밤.

악마는 지독히도 제 것 같은 어둠을 배경 삼아 발코니 밖으로 뛰어내렸다.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인간 세상이나, 어느 책에서 배운 바 있다.

어린 인간이 보호자의 허락 없이 외박하는 것은 곧 양아치로 전락하는 첫걸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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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꼬맹이가 양아치로 전직하게 둘 순 없지.’

아르티나 공작저로 가서 이벨리아가 손쓸 틈도 없이 깊이 잠들어버렸다는 사실을 알리고, 대신 외박 허락을 받을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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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에겐 뭐라고 말하나.’

불면증이 있다던 이브가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혼절하듯 잠들어버렸다고 말하면 대략 알아들으려나…….

세상을 발아래 두고 살아온 대악마는 그렇게 터덜터덜 아르티나 공작저로 향했다.

***

다음날. 짹짹 시끄럽게 새가 우는 소리에 반짝 눈을 뜬 이벨리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랜 시간 푹 잔 덕분에 피부는 깐 달걀처럼 반질반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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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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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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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언제 잠들었지! 혹시 불면증 때문에 잠을 못 자서 환각이 보이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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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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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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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그거 아니야, 너.”

토끼가 자신에게 저리 단호하게 말하는 일은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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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한 능력으로 내 몸에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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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한 능력…… 뭐 그런 거로 치자.”

잠깐의 간극에 고개를 갸웃한 이벨리아는 이내 뭔가 깨달은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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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머리 아파? 나 좀 봐,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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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밖 세상은 너무 쓴맛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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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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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내 엉덩이를 마구 두드릴 거야. 토끼랑 밥만 먹고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홀랑 외박을 해버렸네?

잘 구워진 빵과 따뜻한 수프를 건네던 아가레스가 한쪽 눈을 미세하게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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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고 이것부터 먹어. 공작저엔 내가 알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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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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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잠들었으니 오늘 돌려보내겠다는 말을 하러 갔다가…….”

이벨리아가 빵을 앙 베어 물며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아가레스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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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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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 중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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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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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봐. 말을 하다 마니까 토끼도 궁금하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데? 혹시 우리 엄마가 토끼 엉덩이를 때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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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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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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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조금 일이 있었다고 알면 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웬만한 일엔 눈 하나 깜짝 않는 우리 토끼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가.

이벨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가레스 몫의 빵 한 덩이를 빼앗아 베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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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집에 가보면 알겠지.”

 

***

근데 이렇게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건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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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응접실인데 바람이 아주 솔솔 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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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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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은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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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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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우리 집 부순 게 두 번째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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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가 먼저 그랬다.”

민망한 듯 슬쩍 가리키는 손가락은 아르칸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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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먼저 오해하게 말했잖아.”

반박하듯 곧장 돌아오는 아르칸의 손가락은 아가레스를 향해 있었고.

결국, 둘이서 무슨 사고를 쳤다는 말인데.

눈을 가늘게 뜬 이벨리아가 응접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저 멀리 천장 쪽에 산뜻하게 뚫려 있는 구멍. 벽 쪽에 깔끔하게 베인 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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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어지는 침묵에 아르칸이 삐질 식은땀 흘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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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친환경적이고 좋지?”

말 없는 어린 친구 때문에 역시나 눈치를 보던 아가레스가 덥석 물어 긍정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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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자연과 늘 접해 있어야 하는 정령사에겐 최상의 저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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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개소리…… 아, 그렇지. 맞아. 악마 너 뭘 좀 아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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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야말로.”

그야말로 바보와 멍청이의 행진. 이벨리아가 한숨처럼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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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보들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물었으나 바보와 멍청이 모두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볼 뿐,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러자 몸무게만큼이나 입도 가벼운 엔리르가 이벨리아의 등 뒤에 딱 붙어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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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알지!”

 

***

유난히 어두웠던 어젯밤이었다.

아직은 시린 바깥 공기를 몰고 대뜸 공작저에 들이닥친 아가레스 덕분에 공작저는 전시와도 다름없는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주인 격인 이벨리아가 부재중일 때 공작저에 방문한 대악마는, 아무리 우호적이라 한들 그 자체로 재앙이나 다름없었으니.

공교롭게도 휴고와 엘리시아 모두 출타 중이었기에 사용인들은 곧바로 아르칸을 호출했고.

아가레스는 검을 차고 내려온 아르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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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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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귀가 전이시다. 이브는 어디 두고 그대 혼자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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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는 내가 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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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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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 저택에서 함께 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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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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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고 혼절해서 잠들었거든. 내일 돌려보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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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고…… 혼절해……?”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제 할 말만 하고 휙 돌아서는 아가레스의 뒤.

여동생에 관한 한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는 아르칸이 검집에 손을 올렸다.

마신 다음 혼절할 것이 이 세상에 술밖에 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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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자식…….”

인간 세상 법도 따위 준수할 마음이라곤 단 한 톨도 없는 이 뭣 같은 악마가 우리 아가한테 술을 먹여서 잠을 재웠다고?

잘 벼린 칼날이 악마의 목 뒤에 겨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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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벼라,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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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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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싸우지 않으면 오늘 죽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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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날?”

상황을 파악할 마음이 없는 아르칸.

상황 파악 못 한 채 거기다 대고 비웃는 아가레스.

독불장군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 둘이 화목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리 없었다.

- 쾅.

경지에 다다른 자들의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공작저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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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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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엑!”

뛰쳐 내려온 세드릭과 파다닥 날아온 엔리르가 경악한 표정으로 사용인들을 대피시키고.

날아오는 테이블 파편을 검으로 막아낸 세드릭이 빽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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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는데! 왜 난리야, 이 밤에!”

콰앙. 아가레스의 검을 가까스로 받아치며 아르칸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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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이 이브를 기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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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구멍에 이상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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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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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틀려서 정정하기도 난감하군.”

챙, 맞부딪혔다 떨어진 아르칸의 검이 짙푸른 검기를 담아냈다. 세드릭이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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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그 검기 넣어두고 우리 평화로운 대화로 좀 풀어볼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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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식이 자백했다. 이브에게 술을 먹여 기절시켰다고.”

검기가 서린 아르칸의 검을, 아가레스는 큰 어려움 없이 손쉽게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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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먹여, 이브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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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먹였다면서, 이 개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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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쳤나? 성인이 될 때까진 절대 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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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아까…….”

마시고 혼절했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뭘 마시고 혼절했는지는 듣지 않은 것 같고…….

뭔가 이상하다. 속도를 늦추며 아르칸이 미심쩍은 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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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뭘 마시고 이브가 혼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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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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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우유를 마시고 혼절하는 사람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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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동생.”

불면증이라더니 호로록 마시고 대자로 뻗어 잠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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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손을 흔들어도, 들어 올려 이불을 덮어줘도 깨어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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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해도 이런 오해가 따로 없다.

머쓱해진 아르칸이 맞대던 검을 천천히 내리고 투덜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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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애초에 말을 그따위로 해서 헷갈리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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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야말로 다짜고짜 검부터 들이미는 버릇은 아주 좋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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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주제에 감히 버릇을 운운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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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싸잡아 욕하는 그 버릇도 아주 거슬려.”

잠시 바닥을 향하고 있던 두 청년의 칼끝이 다시 슬금슬금 위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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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아르티나의 상징은 용이 아니라 황소로 바꾸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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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말부터 다시 배워오면 그리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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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기저귀 차고 응애 울던 핏덩이가 건방지게 기어오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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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성인이 되었다. 반면 네 시간은 흐르지 않고 멈춰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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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깔짝대는 건 이브를 믿어서인가?”

아가레스의 표정이 드물게 노기를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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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짝대다 네 멱을 따버릴지 누가 아나.”

아르칸의 눈이 흔치 않게 투기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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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던 중 가장 가소로운 말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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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 들어, 악마.”

서로 오해하였음을 깨닫고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던 싸움은 다시 활활 불이 붙었다.

으레 덜 자란 아이들이 그렇듯, 제법 유치한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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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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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말로.”

- 콰앙.

그렇게 2차전 시작.

곁에서 지켜보던 세드릭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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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가 어딨니……? 이 오라버니 명줄은 여기서 끝인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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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누나.”

파다닥 날아 어깨 위에 앉은 엔리르가 전하는 사건의 경위를 들어보니, 결국 둘 다 잘한 것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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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가장 작은 집주인은 어제 죽는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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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겠다. 엄마가 말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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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집주인이 몹시 화가 나서는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어. 저기 테이블이 뽀각 부서진 건 그것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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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엔 진중하기 짝이 없는 오라버니.

항상 모든 일에 무감한 대악마.

타인과의 관계에서 열정을 불사르는 일이 극히 적은 두 인물이…….

지금도 서로 턱짓하며 네 탓이네, 내 탓은 아니네, 잘못을 미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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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이벨리아는 짐짓 한숨 쉬는 척을 하면서도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외형상으론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토끼와 이젠 스무 살이 되어버린 오라버니.

그 둘이서 너, 쟤, 하면서 티격태격하니 제법 친밀한 관계처럼 보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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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둘이 알아서 메꿔놔! 춥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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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해라. 네 잘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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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원인 제공은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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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커다란 구멍에서 토네이도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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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저 금은 어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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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란 저런 것이다. 불필요한 곳엔 힘을 쓰지 않고 필요한 것만 베어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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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벽을 베었나. 참 대단하시네.”

엔리르가 날개로 이벨리아의 팔을 톡톡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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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보. 경보. 3차전 발발 직전. 3차전 발발 직전.”

대악마와 소공작의 유치한 말다툼을 홀린 듯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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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꿔놔! 얼른! 둘이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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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하려고 했어,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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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목재를 집으러 가고 있다.”

한껏 미루다가 결국은 임시 처치를 위해 나란히 목재를 집어오는 그 불퉁한 표정들.

태어나 못질 한번 해본 적 없는 이들이 마치 검 휘두르듯 망치를 휘둘렀다.

- 쾅.

망치질 한 번에 못이 끝까지 내리 박혔다. 아가레스가 뿌듯한 듯 슬쩍 아르칸을 바라봤다.

- 콰앙.

의식이라도 한 듯, 아르칸 역시 가열한 망치질로 못을 끝까지 내리박은 뒤 보란 듯 망치를 돌렸다.

서로를 슬쩍 바라본 악마와 인간.

이내 불붙은 듯, 가열한 망치 소리가 쾅쾅쾅 울려 퍼졌다.

지켜보던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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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저러는 거 처음 봐. 이크리안 형님과도 저렇게 놀진 않았는데.”

이벨리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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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저러는 것도 처음 봐. 애초에 토끼랑 저렇게 놀 사람이 없긴 하지.”

날아다니다가 망치에 맞을 뻔한 엔리르를 잽싸게 구해 품에 안으며, 이벨리아가 둘의 관계를 깔끔하게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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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면서 정든다더니. 진짜 친구가 되어버렸네, 둘이.”

동시에 못을 쾅 내리박은 철부지들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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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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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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