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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민폐 하객 이브 (170/323)


170화: 민폐 하객 이브
202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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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티나 가문에 이어 황제와 황태자도 착석하자 연회장을 환히 비출 정도로 밝았던 조명이 일순간에 모두 꺼졌다.

이내 어둡고 은은한 조명 하나만이 남아 다른 입구에서부터 단상까지 길게 깔아둔 카펫을 비추고.

오케스트라가 웅장한 선율의 행진곡을 연주하자 귀족들이 일제히 크게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단상 뒤, 오로지 연회의 주인공을 위해 마련된 별도의 문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세레스와 에드윈.

둘은 마치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연모하는 것처럼 따뜻하게 눈을 맞추며 팔짱을 끼고 단상 위에 섰다. 세레스는 전율에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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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거야. 여기가 내가 있을 자리야.’

고작 살롱의 단상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공녀를 비롯한 이 제국 모든 귀족들이 자신의 아래에 서서 이 약혼을 축복하고 있지 않은가.

시험 삼아 어린 영애 하나를 빤히 바라보니, 달달 떨며 고개를 푹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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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한 게 없음에도 내 시선 하나에 죄인이 되어버리지.’

달콤하다. 이런 권력을 원했다.

양대 후작가의 영애로서도 가지지 못했던 영예. 황가의 일원이라는 드높은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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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어둠 속에서 환히 웃은 세레스는 황실 파티시에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웨딩케이크 위에 불꽃처럼 핀 초를 훅 불어서 껐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다시 조명이 켜지자.

함성이 삽시간에 잦아들었다. 짙은 정적이 연회장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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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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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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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가……?”

세레스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천천히 이벨리아 쪽으로 쏠렸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따라 했다고 밖에 볼 수 없이, 색부터 장식까지 거의 흡사한 드레스.

심지어 당사자가 공녀와 예비 황자비라니.

그 누구도 쉽사리 입 열지 못하는 고요 속, 짐짓 놀란 듯 우아하게 입을 틀어막은 세레스가 이벨리아에게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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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이쪽으로 좀 와보시겠어요, 공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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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내게 오라 가라 할 수 있었던가?”

작위 없는 귀족 자제들은 보통 상호 경어를 쓰지만, 작위 차이가 현격하거나 서로 비틀린 관계라면 외려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기에, 이벨리아는 냅다 말을 놓았다.

세레스는 살짝 입술을 물었다. 정식으로 황자비에 오르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여전히 공녀가 위에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단상에서 사뿐하게 내려온 세레스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긴장이 아닌 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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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리 태연한 척해도 속으로는 얼마나 창피해하고 있을까.’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다.

연회의 주최자와 같은 드레스를 입지 않는 것은 사교계에선 마땅하고도 기본적인 예의.

심지어 황실의 약혼식임에야, 더 말할 것도 없이 지탄받을 행위임은 자명하다.

그렇기에 세레스가 택한 전략은 동정심 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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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제가 밉다고 한들, 약혼식까지 이리 망치고 싶으셨습니까.”

이벨리아가 눈썹을 슬쩍 올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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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욱하여 지었던 죄가 있으니 사죄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공녀님께서 내모셨던 전쟁터에서 매일 밤을 지새우며 반성하고, 또 반성하였지요. 아버지를 잃으면서도 원망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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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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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단 하루, 가장 빛나고 싶었던 날에 저를 이리 짓밟아 버리시다니…….”

여러모로 고생을 겪으며 더욱 가냘파진 세레스가 떨리는 손짓으로 드레스를 꽉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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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자비 없으십니다, 공녀님.”

이벨리아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세레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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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자기의 드레스가 먼저라고 우겨주면 최상인데.’

이벨리아가 세레스의 드레스를 따라 만들었다고 증언할 가짜 증인들 몇을 심어두었으니, 아주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만들어질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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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서. 무슨 말이든 해봐.’

연회 참석자들 모두가 수군대고 있는 것을 만족스럽게 곁눈질하며, 세레스는 여전히 핍박받는 피해자를 연기했다.

이벨리아는 작은 손으로 세레스의 드레스를 살짝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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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로 맞췄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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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단 하루뿐인 약혼식 아니겠습니까. 부끄럽지만, 가장 빛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번에 맞췄답니다. 공녀님께서 이러실 줄 알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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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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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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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맞췄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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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이었어요. 그렇게 캐물으신다 하여 공녀님의 만행이 가려지는 건 아닐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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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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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클레르 의상실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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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 클레르 의상실이라…….”

이벨리아가 되 읊으며 살짝 입꼬리를 올리자, 저쪽 구석에 공기처럼 서 있던 카밀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혼잣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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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이상하다? 난 공녀님의 드레스를 한 달 전에 앙제스 의상실에서 봤었는데.”

외적으로는 이벨리아와 접점 없는 카밀라가 먼저 나서주었으니, 렐리안 역시 편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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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이에요. 마담 앙제스가 대대적으로 자랑을 하던걸요.”

그러자 어딘지 찜찜한 표정으로 말을 참고 있던 귀부인들과 영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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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그렇네. 마담 앙제스가 광고하던 그 드레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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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께서 이 드레스를 맞추셨다면서 신이 나서 자랑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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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그 유명한 앙제스 의상실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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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께서 자신의 의상실을 애용하시니 품질은 보증된 것 아니겠냐면서, 무려 이 드레스를 맞춰드렸다며 의상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떡하니 걸어놓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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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한 달쯤 전에 갔을 때부터 걸려 있었어.”

이게…… 이게 무슨 일이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세레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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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앙제스가 공녀의 드레스를 대놓고 광고했다고?’

디자이너들에게 디자인은 생명.

영애들이 연회 직전까지 드레스를 극비에 부치는 것은 품위.

그러니 세레스가 의상실에 방문했을 당시 앙제스가 이벨리아의 드레스를 베일로 감싸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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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의상실에서 어떻게 드레스 디자인을 유출할 수가…….’

고객의 드레스 디자인을 사전에 유출했다는 것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제국 최고의 의상실 자리에서 미끄러질 수 있을 정도의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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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제스 의상실이 그걸 감수했을 리가 없는데, 무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두서없이 흐르는 세레스의 의식 속. 작은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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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엿 먹이고 싶었다면 조금 더 철저했어야지.”

 

***

모두 다 꿰뚫고 있던 척 연기하던 이벨리아는, 기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세레스가 정말로 이런 치졸한 수를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사 대비하여 나쁠 것 없다는 마음으로 작은 대비책을 마련해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이벨리아가 앙제스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맞춘 다음 날.

앙제스는 이벨리아에게 서신 하나를 보냈더랬다.

「공녀님. 데퐁트 영애께서 공녀님의 드레스를 보시고는, 같은 것을 만들라 명하셨으나 거절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착용하실 드레스의 보안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군데군데 눈물 자국으로 인해 번져 있는 글씨.

일반인들은 출입할 수 없는 곳. 심지어 베일로 가려둔 드레스. 충분히 주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레스의 막무가내로 인해 노출되었으니 앙제스의 심정은 말이 아니었다.

번진 글씨를 빤히 보던 이벨리아는 동글동글한 글씨로 답장을 남겼다.

「베일을 걷고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해. 그 아름다운 드레스는 그대가 내게 헌정하는 것이라고.」

***

앙제스의 의상실은 약혼식 드레스를 맞춰보려는 수도의 모든 귀족들이 한 번씩은 걸음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미 귀족들의 뇌리에는 마담 앙제스가 유례없이 헌정하였다는 드레스 디자인이 깊게 박혀있는 상황.

심지어 귀족들이 이를 보고 감탄한 시기가 예비 황자비께서 말씀하신 드레스 제작일보다 보름은 더 이전이다.

귀족들의 실망 어린 시선이 이벨리아가 아닌 세레스를 향했다.

차가워진 분위기를 느낀 세레스는 공포에 질려 몸을 굳혔다.

이벨리아는 한 걸음 물러서 느리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동정심을 사려는 연기 따윈 필요 없다.

이 거대한 제국. 하나뿐인 공녀.

바꿔 말하자면 같잖은 판을 만들지 않아도, 가꾼 이미지로 좌중을 설득하지 않아도, 냅다 지위로 내리찍으면 웬만한 일은 해결된다는 뜻.

이 경우엔 부족함 없는 판까지 깔아두었으니 남은 일은 어려울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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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군. 이건 마담 앙제스가 날 위해 만든 드레스인데.”

앙제스의 자랑을 귀 따갑게 들은 부인들과 영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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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루페르트 백작과 내통하였다는 이유로 날 사형에 처하라 하더니.”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던 지방 귀족들이 숨을 들이켰다.

이것이 바로 대귀족들의 알력 다툼 클래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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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네 하루뿐인 약혼식까지 날 망신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싶었나 봐.”

공개적으로 쏟아지는 망신에 세레스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오늘만큼은 이럴 수 없었다. 오늘만큼은.

화려한 데뷔극에서, 이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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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세요, 황자 전하.’

간절한 눈으로 에드윈을 돌아보았으나, 손익계산에 지극히 이성적인 에드윈은 질 것 뻔한 판에 끼어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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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드레스가 탐났다면 말하지 그랬어. 드문 경사의 주인공이니 양보했을 텐데.”

세레스는 애써 정신을 다잡으며 주먹을 쥐고 이를 앙다물었다.

눈앞에서 공녀가 하는 말보다, 들려오는 수군거림이 더욱 불쾌하게 박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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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자작극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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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퐁트 영애께서 공녀님의 드레스를 보고 탐을 내 같은 걸 만들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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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놓고 오히려 공녀님께 망신을 주려 하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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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비가 되실 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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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티나와 척을 지셨다는 것은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사방에서 찔러오는 날카로운 바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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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는 안 돼.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정말 걷잡을 수 없어.’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세레스는 의상실에 데려갔던 하녀를 손가락으로 불러 앞에 꿇어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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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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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 드레스를 맞춰오지 않았느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벨리아는 감탄했다. 오, 황비랑 하는 짓이 똑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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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네년이 이 사달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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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가족들과 동생들 모두 데퐁트 후작가에서 일하고 있어, 하녀는 선택의 여지 없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귀족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설령 하녀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하더라도, 본인 역시 앙제스 의상실에 다녀온 이상 모방한 드레스라는 걸 눈치챘을 텐데.

이제 와서 독박을 씌우고 빠져나가려는 모습이 썩 좋게 보이진 않았다.

그 작태를 보던 이벨리아는, 그 자리 그 누구도 뱉지 못한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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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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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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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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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런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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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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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자. 부르셨나요.]

이프리트와 달리 제법 차분한 성격의 하급 정령.

작은 불새가 허공을 휘젓자, 세레스가 놀라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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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저를 해하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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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때려. 선물 줄 테니까 조용히 있어 봐.”

이벨리아가 카사를 붙잡아 바라는 바를 작게 명하자, 고개를 끄덕인 작은 불새는 계약자의 몸 주변을 한 바퀴 휘감으며 거대한 불길을 일으켰다.

방대한 자연력을 받아 제약 없이 뻗어 나가는 열기에 참석자들이 얼굴을 가리고 제각기 뒤로 물러서고.

이내 불길이 가라앉자-.

이벨리아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고 있었던 드레스.

대신하여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불꽃이었다.

이벨리아의 의지를 받아 그 어떤 것도 태우지 않으나, 주변에 전해지는 열기는 그대로인 불로 빚은 드레스.

이벨리아가 대충 생각한 투박한 디자인은 삽시간에 정교하게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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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리트구나.’

세심한 배려에 이벨리아가 씩 웃었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드레스에, 귀족들은 홀린 듯 이벨리아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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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정령이 만든 드레스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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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에는 별 신기한 일이 다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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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라고 늘 이렇진 않습니다. 공녀님께서 별 신기한 일을 다 만드시는 거지요.”

이벨리아는 발치에 떨어진 드레스를 대강 발로 차 세레스의 앞에 밀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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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아주 귀한 드레스지만, 너와 같은 걸 입긴 싫으니 네게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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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

세레스가 바득 이를 갈았다. 심히 모욕적이다.

한편 차가운 표정으로 관망하던 루드비히는, 이벨리아가 원하는 판이 모두 끝났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오케스트라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연회를 알리는 부드러운 선율은 세레스에겐 그저 농락처럼 느껴졌다.

이벨리아는 마련된 자신의 자리로 가 오만하게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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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 콱 쥐어박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약혼식에서 황자의 약혼녀를 날려버렸다가는 내 꼴도 우스워지지.’

그래도 평생 이불을 찰 흑역사 하나를 선사해주었으니 속이 시원했다.

나름대로 수위를 조절한 약혼식 깽판러.

세레스의 관점에서는 인생 최악의 민폐 하객이 까닥 턱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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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해. 케이크 안 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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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레스는 기어코 약혼식 케이크 한 조각을 얻어 포크로 파먹고 있는 어린 친구에게 우유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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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잘 참았네, 내 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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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아. 이게 바로 으른의 자비라는 것이에요.”

마침 이벨리아의 테이블 근처를 지나가던 카밀라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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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디에 자비가 있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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