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토끼가 해, 내 에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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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토끼가 해, 내 에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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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토끼가 해, 내 에스코트
2022.05.12.
세레스와 에드윈의 약혼식이 사흘 앞으로 다가온 시점.
응접실에서 엔리르와 뛰어놀다 지친 이벨리아가 하품하며 자신의 방으로 향하자, 아르칸과 세드릭, 엔리르, 그리고 놀러와 있던 아가레스가 어김없이 뒤따랐다.
모두가 자연스레 방으로 들어오는 것과 달리, 아가레스는 방 문턱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마치 허락을 구하듯.
“들어와, 토끼도!”
아르칸은 승낙을 받고서야 안으로 들어서는 악마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 공작저에서 가장 예의 바른 존재가 이 악마라니…….
여동생이 만들어낸 대단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침대에 앉아 그새 졸던 이벨리아는 퍼뜩 드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걸 아직 못 정했어.”
“가장 중요한 거?”
“내 에스코트.”
쿵. 가슴 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기분.
황망한 듯 입을 벌린 아르칸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다, 당연히 오라버니들이랑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이벨리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아르칸이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기회다, 작게 중얼거린 엔리르가 인간으로 변하더니 성큼 다가왔다.
“또 커졌어, 이 자식!”
또 며칠 새 훌쩍 커진 키에 이벨리아가 인상을 찌푸리자.
“난 항상 누나 밑이야.”
곧바로 허리를 낮추고 이벨리아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올린다. 마치 귀족 영식들이 에스코트를 청할 때 하듯.
“내가 할래. 허락해줘.”
그러나 이벨리아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 어린 용의 신형이 데굴 옆으로 굴렀다.
“저리 꺼져. 건방진 파충류.”
엔리르를 발로 차 치워버린 아가레스가 이벨리아를 향해서는 순한 양과도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브, 내가 할래. 제발.”
그 요망한 간극을 아르칸이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제법 단단해진 손이 아가레스의 어깨를 휙 밀쳤다.
“너야말로 꺼져, 시커먼 악마. 이브의 에스코트는 유구하게 내가 해왔다.”
“형님은 이제 아리따운 영애를 에스코트할 때도 되지 않았어? 언제까지 우리 아가 옆에 구질구질하게 붙어 있을 거야?”
“아군이라고 믿었는데, 세드릭.”
“아가의 에스코트 앞에서라면 나는 한 마리 외로운 늑대야.”
우애 따위 개나 줘라. 아가 에스코트는 내 것이다.
잔머리라면 아르티나 삼 남매 중 최고를 달리는 세드릭은 나동그라져 있는 엔리르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아 눈을 맞췄다.
“야. 용. 인간들은 누구를 대동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격을 평가하거든.”
“그런 면에서 용을 대동하면 다들 우리 누나 대단하다 하겠지!”
“넌 그냥 용이잖아.”
“……용은 대단한데. 그냥 용이면 안 돼?”
“가서 내가 용입니다, 하려고?”
“……난 우리 누나의 마지막 숨겨진 패인데.”
“숨겨진 패야, 에스코트야?”
“……숨겨진 패.”
“그렇지? 그럼 넌 탈락.”
다음으로 세드릭은 아가레스의 앞에 서서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러자 아가레스가 빠르게 선수 쳤다.
“난 대악마다. 게다가 모든 이들이 알고 있지.”
어떠냐. 이 정도면 우리 꼬맹이 에스코트에는 부족함 없을 텐데.
당당한 표정으로 이벨리아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려는 대악마에게, 세드릭이 팩트를 내리꽂았다.
“작위가 구려.”
“……뭐?”
“백작이잖아. 루페르트 백작.”
“그래서.”
“이 제국 하나뿐인 공녀가 소공작도 아니고, 공자도 아니고, 고작 백작에게 에스코트를 받는다고?”
“난 대악마인데.”
“그래서 뭐. 백작이잖아.”
“아니…….”
“무슨 말 하려고. 어쨌든 백작이잖아.”
“물론 그렇긴 하나…….”
“그렇지? 그럼 너도 탈락!”
기실 말도 안 되는 이유였으나, 아주 당당하고 상큼해서 타당한 것처럼 믿게 된다. 세드릭의 여우 짓을 처음 겪는 아가레스가 눈을 깜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가…….”
“양심 없는 어부지리, 멈춰!”
틈새를 노려 성큼 나서는 아르칸을 향해, 세드릭이 편지지 하나를 척 들이밀었다.
옅은 보랏빛. 은은한 라일락 향기가 올라오는 편지지.
“뭐야, 이게.”
“렐리안이 보냈어. 열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에스코트를 부탁하는 내용이겠지?”
“나는 렐리안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
“알아. 알아. 아는데, 어릴 적부터 봐오던 동생이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용기 있게 에스코트 신청을 했는데 매몰차게 거절할 셈이야?”
“…….”
“형님이 정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본디 에스코트란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없더라도 친밀한 유대관계가 있는 귀족들 사이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것으로…….”
“…….”
“거절한다면 마음 약한 렐리안은 아마 사흘 밤낮을 눈물 흘릴지도 모르고…….”
“알았으니까 그 입 다물어. 이 촉새 같은 자식.”
“그렇지? 그럼 형님도 탈락!”
아버지께선 어머니를 에스코트하실 테니, 이제 경쟁자는 없다!
여우처럼 눈을 반달로 휘며 웃은 세드릭이 당당하게 이벨리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자- 우리 공주님. 이번 연회에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엥. 싫어.”
“왜, 왜, 왜……?”
***
믿을 수 없는 단호한 거절.
한동안 뻣뻣하게 굳어 있던 세드릭이 고장 난 인형처럼 달그락 말을 더듬었다.
“아, 아가. 이제 오라버니 싫어?”
“나도 이제 열두 살이란 말이야.”
“아직 아가아가 말랑말랑 이브인데?”
“아니지. 어른어른 단단단단 이브지.”
“……그런 거로 치고. 어른어른 이브면 왜 내가 에스코트하면 안 돼?”
“어른 영애는 가족한테 에스코트 받는 거 아니야.”
게다가 그 밉살스러운 세레스가 무려 약혼을 한다는데! 자신은 또 가족들에게 에스코트를 받아서야 면이 서질 않는다.
잡힌 손을 휙 잡아빼는 손길이 참으로 매몰차다. 세드릭이 황망하게 허공을 더듬거렸다.
“그, 그럼 누구한테 받게?”
이벨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아가레스를 향해 돌아갔다.
“안 돼…… 아가야 안 돼…….”
“여기 있네. 왕자같이 생긴 악마가!”
불안한 낌새를 느낀 세드릭의 애원은 효과가 없었다.
아가레스는 마치 간택된 후궁처럼 무릎 꿇고 이벨리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고, 이벨리아는 왕처럼 오만하게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르티나의 세 형제들은 바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난 악룡이 될 거야. 악룡이.”
“오늘부터 난 마계를 정복하는 용사가 꿈이다.”
“어흐흐흑. 우리 아가를 저 시커먼 것에게 빼앗기다니……!”
***
약혼식 당일. 온 수도가 들썩이는 건 당연했다.
제법 오랜만에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 게다가 이 제국 후사와 직결되는 경사.
연이은 호외가 길거리에 흩뿌려지자 제국민들은 이야기꽃을 피웠고, 귀족들은 지닌 드레스 중 가장 좋은 것을 차려입고 황궁으로 향했다.
무려 황실의 약혼이니만큼 지방 귀족들에게도 차별 없이 초대장이 돌아갔기에, 황궁 앞에는 제각기 화려한 마차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별세계 중에서도 가장 드높은 곳. 황궁 안쪽.
“저는 딱 한 분만을 생각하고 올라왔답니다.”
“저도요. 한데 아직 오지 않으셨나 봐요.”
“아마 수도의 대귀족들께선 조금 늦게 당도하시겠지요.”
변방에서 올라온 어린 영식들과 영애들은 혹여 중앙 귀족과 불꽃 튀는 로맨스가 펼쳐지진 않을까, 분홍빛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도 뵐 수 있겠죠?”
“전하께선 이미 아르티나의 공녀님과 교제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게 헛소문이라 판명 난 지가 언제인데요!”
“저는 소공작님이 더 뵙고 싶어요. 아직 아끼는 여인이 없으시다 들었는데.”
“카시스 소후작님도 명성이 자자하시던걸요. 아주 다정하시다던데요!”
“공자께선 또 어떻고요! 예전에 우연히 한 번 뵈었는데, 사르르 짓는 눈웃음이…… 하아…….”
고양이 눈매를 가진 영애가 짐짓 이마를 짚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자, 주변에 선 영애들이 일제히 까르르 웃으며 분위기를 맞췄다.
“그런 분들과 혼인이라도 하게 되면 정말 꿈 같겠어요.”
“누가 될진 모르겠지만 정말 복 받은 영애지요.”
모두가 제 일은 아닐 것처럼 말하면서도 눈은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번뜩인다.
시답잖은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고 구석에 서 있던 카밀라가 흥, 코웃음 쳤다.
‘그런 분들은 우리 같은 것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으신단다.’
공녀님을 몇 번 뵈면서, 자신은 이미 다른 세상을 접했다. 말 그대로 천외천(天外天).
그 세계가 얼마나 드높은지. 어찌나 환상 같은지.
바라던 것이 가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그것을 쉽게 탐할 수 없는 법이다.
‘이 세상에 동화는 없어.’
철없는 부모 대신 기우는 가문을 떠받치는 소녀 가장, 카밀라가 보고 자란 세계는 그랬다.
어릴 적부터 키워주던 유모.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주던 요리사. 방을 정리해주던 하녀. 그 모든 이들의 일자리와 안전이 카밀라의 손에 달려 있었다.
‘어차피 나는 혼기가 차면 아무에게나 팔려갈 텐데.’
한미한 가문의 영애로 태어난 이상 그건 숙명이었다. 그걸 뒤엎기를 감히 바라진 않는다.
다만 적어도 가문과 사용인들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거래를 원할 뿐.
그리고 그 거래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뒷배가 필요하다.
잡은 줄이 공녀님이라면 차고 넘친다.
‘오늘도 똑똑히 보여드려야지. 내가 가치 있는 패라는 걸.’
카밀라는 방금 아르칸과 세드릭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영애들을 명단에 적어 넣었다.
고민 끝에 제목은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도둑놈 심보.」
“저는 공녀님이 더 궁금해요.”
“저도요!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선망해왔거든요.”
“황태자 전하와 루페르트 백작께서 공녀님을 아주 아끼신다더라고요.”
“세상에. 그런 건 어떤 기분일까요!”
방금 이야기를 나눈 영애들 역시 목록에 꼼꼼하게 적은 뒤, 고민 없이 제목을 붙였다.
「경쟁자.」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노트 위. 카밀라의 짧은 펜은 연회 내내 바삐 움직였다.
***
입장하던 세드릭은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수치스럽다.’
어쩌다 보니 부모님과 함께 입장하고 있는 형제는 자신밖에 없는 것 아닌가.
‘형님과 렐리안을 등 떠밀 때가 아니었어.’
자신 역시 어느덧 열여덟.
달라붙는 영애들에겐 별 관심이 없어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으나…… 작년에 성년식을 치른 영식이 파트너 없이 홀로 입장하는 것은 제법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도 날 보지 말아줘.’
바라며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왠지 동정하는 듯한 영식들의 눈동자와 과하게 번뜩이는 영애들의 눈망울이 오늘 연회가 결코 평탄치 않을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망할.’
***
연이어 입장한 아르칸 역시 난감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아르칸의 귓가를 날카롭게 찔렀다.
“어머, 세상에. 소공작님과 카시스 영애가……!”
“두 분 모두 성정 반듯하신 것이 참 잘 어울려요.”
“하긴, 어릴 적부터 친분이 두터우셨으니 이렇게 발전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아르칸이 이를 앙다물었다.
‘발전은 무슨.’
저 흥미 본위의 눈초리들.
익숙한 자신은 그렇다 치고, 불순한 관심을 받게 될 렐리안을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온 제국이 또 입방아를 찧어대겠군.’
몸 약한 렐리안이 여러 사람의 입방아에 올라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을까.
함부로 입 놀리는 귀족들을 사나운 눈으로 훑자, 렐리안이 아르칸을 잡고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아르칸 오라버니.”
“신경 쓰지 말거라. 괜한 소문이 돌지 않게 제대로 단속할 테니.”
그 단호한 말에 서운한 감정을 애써 숨긴 렐리안이 환히 웃었다. 아르칸을 올려다보며.
“신경 안 써요. 시선은 즐기면 그만인 것을요.”
본격적으로 마법을 배우면서 신기하게도 부쩍 나아진 몸 상태.
복숭아꽃처럼 피어난 볼과 산새처럼 가벼운 발걸음.
자신을 이끌고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는- 부드럽고 강한 기백.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르칸은 문득 생각했다.
마냥 지켜줘야 할 아이였는데…….
‘나처럼, 너도 자랐구나. 렐리안.’
***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제국에선, 본디 지위가 가장 높거나 세(勢)가 제일 강한 귀족이 마지막으로 입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이 이벨리아라는 것은 제법 많은 것을 시사했다.
앞서 입장한 아르티나 가문의 모두가, 이벨리아에게 그 자리를 양보했다는 의미이니까.
아가레스가 이벨리아를 에스코트하며 들어오자 홀린 듯한 시선이 달라붙었다.
조금 전처럼 수군대는 목소리는 없었다.
공녀와 백작이라는 지위를 넘어-.
대정령사, 단신으로 악마를 학살할 수 있는 아르티나의 일원과.
대악마, 홀로 제국을 멸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인마전쟁의 종식자.
극도로 상반되나 어느 한쪽의 절대적인 충성 아래 지극히 조화로워진 관계.
감히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도, 입을 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기묘하고도 압도적인 결합.
좌중을 느리게 둘러본 아가레스가 부드럽게 이벨리아를 이끌었다.
“널 쳐다보는 저것들이 마음에 안 드는데.”
“널 보는 거야. 토끼야.”
다시 둘러봐도, 확실히 그의 소중한 친구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물론 그는 영식들을 위주로 경계하긴 했다.
“주제도 모르는 인간들이 분명 널 보고 있어.”
아가레스가 불쾌한 듯 몸을 슬쩍 움직여 이벨리아를 시선으로부터 가렸다.
“좀 보라고 앙제스의 드레스까지 사서 입은 거야.”
“……보라고 입은 거야?”
“원래 비싼 드레스는 보라고 입는 거야. 자랑하려고.”
작은 친구의 말은 절대적이다.
아가레스는 다시 몸을 원위치하여 이벨리아를 시선에 내놓았다.
별을 보듯 반짝이는 저 눈빛들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어린 친구가 이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면, 그의 불쾌함을 이유로 그걸 구속할 수야 없는 일이다.
“영애들은 아주 토끼한테 넋을 놓았네. 내 토끼인데.”
“나는 오로지 너 보라고 입은 거야.”
평소와 다르게 깔끔한 연미복을 갖춰 입은 토끼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날 가려도 좋아.”
“가리긴 왜 가려. 내 토끼가 이런 토끼다 만천하에 자랑해야지.”
자. 우리 멋진 토끼 좌우로 행진!
서로를 바라보며 킥킥 웃은 두 친구는 부드러운 카펫을 편하게 거닐었다.
마치 장난치듯. 또는 산책하듯.
딛고 선 곳이 어딘지는 관계없었다.
함께 있다면 늘 그들의 비밀기지나 다름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