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남의 약혼식에서 깽판을 쳐보자 2022.05.09.
“방금 누가 염병 소리를 내었니?”
“……엉덩이 살려!”
흠칫 놀란 이벨리아가 소파 뒤로 호다닥 숨어들었으나, 어림도 없었다. 무려 정령을 불러내 이벨리아의 뒷덜미를 들어 올린 엘리시아가 엄하게 물었다.
“이브. 누구한테 배웠어, 그런 말. 응?”
아니, 이벨리아는 진짜로 억울했다.
“어느 기사야. 누가 감히 우리 아가 앞에서 조동아리 함부로 놀렸어.”
때린 사람은 기억 못 해도 맞은 사람은 기억한다는 말을 여기에 쓰는 걸까.
“엄마.”
“그래. 말해보렴. 그자도 족쳐야 할 것 같으니.”
“엄만데…….”
“그래. 우리 아가는 내 딸이지. 그래서, 누구니?”
“엄마라구. 엄마. 엄마한테 배웠다구.”
잠시 침묵하던 엘리시아가 뻣뻣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나?”
“엄마가 전에 ‘황족은 무슨. 염병하네.’라고 했잖아요…….”
“……!”
우리 아가의 곱지 않은 입과 사라져버린 충성심은 모두 나로부터 비롯된 거였나. 충격받은 표정으로 엘리시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 아르티나 공작저의 만찬장. 광활한 대리석 테이블 주위에는 가족들과 엔리르가 둘러앉아 있었다. 매해 반복되어 온 새해맞이 풍경이었다. 달리 연회를 개최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이들끼리 모여 만찬을 즐기는 것. 사용인들에게도 아낌없는 포상이 내려졌기에, 주변에 시립해 있는 하인들과 하녀들의 표정에는 충성심이 가득했다. 이벨리아의 입 주변에 묻은 빵가루를 부드럽게 털어주며, 휴고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집사 하델에게 명했다.
“하델. 선물들은 모두 돌려보내도록.”
“예. 주인님.”
그러자 테이블 위를 뽈뽈뽈 돌아다니며 모든 이들의 음식을 탐내던 엔리르가 슬그머니 앞발을 들었다.
“집주인…… 나 보석 하나만 가지고서 돌려보내면 안 돼?”
“안 돼. 저건 다 뇌물이다.”
“난 뇌물 좋아하는데.”
“네가 악룡이 되어 직접 뇌물을 받던가.”
“흥!”
냉정하긴! 아마 고드름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다! 서러워진 엔리르는 파다닥 만찬장 한구석으로 날아간 다음, 몸을 둥글게 말고 고개를 날개 속에 파묻었다. 흘끗 일별한 휴고가 크라바트에 달려 있던 질 좋은 사파이어 하나를 떼어 무심하게 엔리르 앞으로 굴리듯 떨어뜨렸다. 난데없이 날아온 보석에 번쩍 고개 들고 좌우를 살피던 엔리르는 뒷발을 슬슬 보석 쪽으로 뻗어 끌고 온 다음 날개로 쏙 덮었다.
“에헤-.”
아무도 못 본 줄 알고 꼬리를 살랑이는 어린 용. 시선 돌려 모른 척한 휴고가 픽 웃었다. 한편 모두가 먹지 않는다고 하여 기쁜 마음으로 칠면조 다리 두 개 모두를 손에 쥔 이벨리아는 들썩들썩 신난 기분을 표현했다.
“왜 칠면조는 네 발로 걷지 않아? 네 발이면 다리가 네 갠데!”
그 엉뚱한 말에 아르칸이 날개 두 개도 뜯어 이벨리아의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대신 두 날개가 있지. 자. 아가. 날개도 다 먹어.”
“오라버니는 날개 안 먹어?”
“난 퍽퍽한 살이 좋아.”
어떻게 퍽퍽한 살이 좋을 수가 있어? 자신과 정반대인 그 괴상한 취향에 이벨리아가 입을 떡 벌렸다.
“나는 오라버니 같은 사람이랑 혼인할래. 그럼 평생 내가 다리랑 날개 다 먹겠지!”
“혼인……?”
새해 아침부터 난데없는 혼인 이야기에 세 부자와 한 용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인간형으로 변해 이벨리아의 옆자리에 앉은 엔리르가 나이프로 스테이크 덩어리를 콱 내리찍으며 손에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였다.
“누나. 갑자기 혼인 이야기가 왜 나와?”
“응? 아니 그냥…….”
아르칸이 손을 꺾어 뚜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설마 마음에 드는 영식이 생겼어?”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세드릭이 경련이 이는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그럼 혹시 누가 우리 아가한테 혼인 이야기를 꺼냈어?”
“그것도 아닌데, 근데 작은 오라버니 왜 그런 표정으로 웃어? 눈하고 입이 따로 놀고 있는데…….”
흰 천으로 입가를 닦은 휴고가 몸을 뒤로 쭉 뺀 이벨리아를 번쩍 들어 무릎 위에 앉혔다.
“아가.”
“앙.”
“나중에. 아주 먼 훗날에. 혹시라도 아가 마음에 차는 영식이 생기거든 아빠한테 꼭 미리 말해줘야 한다.”
“응! 나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하기 위해서죠?”
이벨리아의 등을 규칙적으로 토닥이던 휴고의 손길이 뚝 멈췄다. 이어 스산한 어조로 묻는다.
“어딜 떠나보내.”
“나는 지금 엄마랑 아빠랑 오라버니들의 이브지만, 연인이 생기면 연인의 이브가 되기도 하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말갛게 올려다보는 딸의 표정에 휴고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개자식이 감히 우리 딸을……!’
휴고는 아직 존재조차 하지 않는 어린 딸의 연인을 향해 가열한 분노를 퍼부었다. 어떤 놈팡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 모가지가 멀쩡하진 못할 터다. 휴고의 머릿속에 온갖 암살 방법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이벨리아가 손에 쥔 칠면조 날개를 물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이브는 멀리 안 가!”
“아마 그놈이 멀리 가게 될…… 아니다. 우리 딸. 자. 날개 먹거라.”
휴고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한 암살 예고를 가까스로 삼켰다.
*** 만족스럽게 새해맞이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 그릇을 소중히 안은 채 응접실로 나온 이벨리아는 아까 밟고 차버린 신문이 다시 정갈하게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에엥. 아까도 왔던 신문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부지런한 사용인들의 솜씨였다. 심지어 보기 싫은 얼굴 두 덩어리가 가장 앞면에 놓인 채였다. 이벨리아가 벽난로 앞 소파 가운데에 몸을 말고 앉으면서 신문들을 손으로 밀어 바닥에 죄다 떨어뜨렸다.
“너희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까 책임져!”
뒤에서 봐도 빵빵하게 부풀어 볼록 튀어나온 볼에, 아르칸과 세드릭이 이벨리아의 양옆을 차지하고 앉아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매만졌다.
“뭐가 우리 아가 흥을 깨버렸어? 아, 황자와 데퐁트 영애의 약혼?”
“응. 새해 첫날부터 저것들의 얼굴을 신문에서 보다니. 이브 눈 살려!”
“그런데 아주 잘 어울리지 않아?”
“그래. 원래 끼리끼리라잖아.”
“그건 그래. 꼴뚜기와 해삼 같아.”
“그렇다면 주례는 용왕님이 서셔야겠군.”
“무슨. 그냥 어류 시장에 불과하지.”
이벨리아는 오라버니들의 장난에 키득키득 웃으며 카사를 불러 신문을 태워버렸다.
“생각해보니까 쓰레기와 쓰레기의 약혼은 아주 환영할 일이야.”
끼리끼리 어울려줘야 애먼 사람들이 피해를 안 보지. ***
“……쓰레기와 쓰레기가 약혼해도 애먼 사람이 피해를 볼 수 있구나.”
불과 이틀 뒤. 렐리안과 티타임을 가지던 이벨리아는 의견을 정정했다. 금을 녹여 만든 화려하기 그지없는 초대장을 망연자실하게 든 채로.
“약혼식이라니. 내가 물고기들 열정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둘 다 사치하는 것이라면 환장하는 이들인데. 화려한 약혼식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강건하고 행복한지, 또 호화로운지 보여주려 함이 당연했다. 열다섯. 어느새 훌쩍 자라 제법 숙녀티가 나는 렐리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이벨리아의 손등을 토닥였다.
“황실의 약혼이라면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말이야.”
“이왕 가시는 김에 편히 즐기다 오셔요, 이브.”
“주인공이 에드윈과 세레스인 마당에?”
“그럴 리가요. 그들은 그냥 애피타이저에 불과하죠.”
황비의 몰락과 이번 신탁 이후로 위치가 더욱 불안정해진 황자. 가세가 크게 기운 데퐁트 영애.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들과 연을 맺는 것엔 별 관심도 없을 터.
“초대받은 이들은 외부 활동이 드물어 눈도장을 찍기 어려운 공녀님께 집중할 거예요.”
“내게?”
“이브와 친분만 쌓으면 황태자 전하, 아르티나, 루페르트 백작님, 카시스 후작가까지 줄줄이 따라오는걸요.”
“앞은 다 그렇다 치고. 카시스 후작가는 왜?”
“제가 곧 카시스니까요.”
당연한 사실이라는 듯 말한 렐리안이 친우이자, 동경이자, 주군인 이벨리아를 따뜻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저는 언제나 공녀님을 주인공으로 만들 거니까요.”
*** 이벨리아와 렐리안은 그 길로 공작저를 나와 앙제스(Anges) 의상실로 향했다. 대부분 그렇듯 기별 없이 들이닥친 아가레스도 함께 데리고. 의상 고르기는 쉽지 않은 작업이니, 함께 보고 의견을 말해줄 이가 늘어나면 오히려 좋았다. 엘리시아에게 가문과 목숨을 빚지고, 오로지 엘리시아를 위해 문을 연 의상실. 마담 앙제스는 폭주한 마차처럼 뛰어나와 이벨리아를 맞이했다.
“공녀님! 찾아주셨군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그……그래? 아, 이쪽은 루페르트 백작과 카시스 영애.”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공작부인께서는 함께 안 오셨나요?”
과하게 반짝이는 눈을 좀 돌리고자 요즘 수도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인 토끼를 소개해 줬건만. 공작부인 광신도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요즘 도통 저를 불러주지 않으시던데. 혹시 그 고귀한 마음을 빼앗은 다른 마담이 있는 건……!”
“이번 겨울이 시작될 때 그대를 불렀었잖아.”
“하지만 예전에는 더 자주 불러주셨었는데…….”
시무룩한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리던 앙제스가 이벨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자주 좀 찾아달란 압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신다.
‘역시 성정도 공작부인을 꼭 빼다 박으셨구나. 공작부인과 미니 공작부인이라니. 행복해서 죽어버리겠네.’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단속하며, 앙제스가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마주 앉아 따뜻한 코코아를 호로록 마시며, 이벨리아가 용건을 말했다.
“황가와 데퐁트의 약혼식은 알고 있겠지.”
“그럼요. 온 수도가 그 이야기로 떠들썩한걸요.”
“그때 입을 드레스를 맞추고 싶은데. 조금 빠듯하게 찾아온 감이 있어서 가능할지…….”
“가능해요! 가능합니다!”
“그대의 의상실엔 늘 예약이 아주 많이 밀려 있다고 들었는데.”
“줄로 세워두자면 수도 한 바퀴를 돌 만큼은 되지요.”
“그런데 가능하다고? 나는 지위를 앞세워 갑질을 하고 싶진 않아.”
“어머, 이게 갑질인가요? 달콤해라.”
앙제스는 자신의 책상 안쪽, 유리로 만든 상자 안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노트 하나를 꺼내 이벨리아에게 건넸다.
“영애들을 위한 드레스북인가? 아주 두꺼운데.”
“어머. 무슨 말씀을요. 오로지 공녀님만을 위한 드레스북이죠.”
“……이, 이게 다 내가 입을 드레스라고?”
“세상에, 그 앙제스가 공녀님을 위해 드레스북을 따로 제작했다니……!”
서로 조금 다른 포인트로 경악하는 이벨리아와 렐리안을 보며 앙제스가 뿌듯한 듯 소리 높여 웃었다.
“옷에 관한 한, 제 눈과 손은 항상 옳습니다. 편히 골라보시지요.”
이벨리아는 도움을 요청하는 표정으로 친구들을 바라봤다.
“……누가 나한테 미적 감각이 심히 없다고 했거든. 고르는 것 좀 도와줘. 이 드레스는 어때?”
“아름답군.”
“어머, 정말 예뻐요!”
“흐음. 그럼 이걸 후보로 해두고. 이건 어때?”
“아름답군.”
“세상에, 아주 예뻐요!”
“……이거는?”
“아름답군.”
“맙소사, 굉장히 예뻐요!”
“……너희가 다 예쁘다고 하면 어떡해. 고를 수가 없잖아.”
“네가 입는다는데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을 리가.”
“그럼요. 루페르트 백작님 뭘 좀 아시네요.”
“너희 사실 뭐가 뭔지 잘 구분 안 되지.”
“…….”
“…….”
“마담. 도와줘. 우린 가망이 없어.”
*** 이벨리아가 드레스를 선택한 지 약 나흘 후. 얼추 가봉이 끝난 드레스를 베일 안에 가려두고, 앙제스가 드레스에 맞는 장갑과 신발을 제작하고자 2층 작업실에서 콧노래를 부르던 무렵. 의상실 1층에서는 두꺼운 천막 뒤 반투명한 베일로 싸인 드레스를 누군가 척 가리켰다.
“저거. 보여봐.”
“송구하오나 저 옷은 이미 주인이 정해졌습니다.”
“내가 두 배로 산다고 해. 얼마든 간에.”
“그것이…….”
예비 황자비의 사정없는 갑질에 의상실 종업원들이 쩔쩔매며 몸을 조아렸다.
“내가 누군지 몰라서 이래? 명하는 거 안 들려?”
“소, 송구합니다.”
“하지만 이 옷은 귀인께서 구매하신 것이라서…….”
“귀인? 황자비가 될 나보다 더 지위가 높다더냐?”
다른 종업원들의 비상사태 알림으로 2층에서 내려온 앙제스가 허리를 숙였다.
“이 가게의 마담, 앙제스라 합니다. 귀하신 분께서 무슨 일로 언성을 높이시는지요.”
“내가 누군진 알고 있겠지?”
“예, 영애.”
세레스가 짐짓 인자하게 웃으며 흘러 내려온 앙제스의 머리칼을 귀 뒤에 꽂아주었다.
“무려 황가의 일원이 되는 영예로운 약혼식이다. 내가 네 옷을 선보일 기회를 주고자 함이니, 감사히 여기도록.”
“…….”
“저 옷. 주인이 있다 들었는데.”
“예. 그렇습니다.”
“누구지?”
오로지 의상실을 위해 귀족 작위를 내던지고 평민이 된 앙제스. 그녀는 세레스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쳤다. 옷은 그녀의 자부심이다.
“아르티나의 공녀님이십니다.”
세레스의 눈이 불을 뿜었다.
“내게 팔아. 두 배, 세 배, 아니 열 배로 지불할 테니.”
“이미 주인이 정해진 옷을 어떻게 팔 수 있겠습니까.”
“그럼 비슷한 거로 만들어. 물론 내 쪽을 더욱 화려하게.”
“제게 의상 제작을 의뢰하시려면 대기열에 이름을 올리셔야 합니다.”
“황자비가 될 내 약혼식이야!”
“서거하신 황후 폐하께서 혼례복을 의뢰하셨을 때에도 대기열에 이름을 올리셨었습니다.”
“하. 실력이 좋다 하여 오냐오냐 봐줬더니, 그 오만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겠구나.”
그래 봤자 평민 주제에. 중얼거린 세레스는 옷을 덮고 있는 반투명 베일을 휙 잡아당겼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며 드러난 드레스에 세레스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
실로 아름다웠다. 홀린 듯 드레스를 눈에 담던 세레스는 앙제스가 베일을 다시 덮어씌우고 나서야 화들짝 시선을 뗐다.
“돌아가 주십시오, 영애. 저희 의상실의 예약 상황을 고려하면, 영애의 약혼식 날까지 새로운 드레스 제작은 어려울 듯합니다.”
세레스는 차가운 눈으로 앙제스를 노려보다가 의상실 문을 발로 차고는 휙 나가버렸다.
“후우.”
뒤에 남은 앙제스와 종업원들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거칠게 뛰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
“너.”
세레스는 따라온 하녀 중 하나를 검지로 까닥 불렀다. 옷을 보는 눈이 밝아 함께 드레스를 고르고자 데려온 아이였다.
“방금 저 드레스 잘 봐두었느냐.”
“예, 황자비 전하.”
세레스가 황자비가 되려면 약혼식, 성년식, 결혼식까지 치러야 하므로 멀고도 멀었지만, 하녀는 세레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아가씨’ 대신 ‘전하’라는 호칭을 택했다. 아니나 다를까. 흥, 콧방귀와 함께 입꼬리를 씰룩인 세레스가 가볍게 걸어가며 명했다.
“다른 의상실로 가서 저 드레스와 비슷하게, 더 화려하게 만들어 와.”
내 약혼식이다. 내가 주인공인. 심지어 이번 세대 처음으로 황가에서 치르는 약혼. 당장 사방을 둘러보더라도 온 신문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자신의 드레스에, 또 일거수일투족에 모든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오면 창피를 당하는 쪽은 공녀일 터다.
“최대한 비슷하게 제작해. 공녀가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