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모두 이브의 손바닥 위 (167/323)


167화: 모두 이브의 손바닥 위
2022.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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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의 아버지, 곧 에드윈의 외할아버지인 이세르나 백작은 이 제국에 머무는 날을 꼽기가 힘들었다.

이세르나 백작가는 과거 이끌던 상단이 몇 가지 교역으로 소위 대박을 치면서 귀족 작위를 매수한, 말 그대로 졸부 가문.

기반이 그렇다 보니 제국 내 내로라하는 부를 가진 이후에도 이세르나 백작 본인부터가 타 제국과 오지를 두루 돌며 교역을 성사시키는 데 혈안이었다.

그런 이유로 근 4년간 에르카디아 제국을 비웠던 이세르나 백작은 딸의 비보를 듣자마자 다급히 복귀하였고.

비록 그리 정은 없었더라도 어찌 되었든 핏줄, 또 가문의 출세를 위한 끈이었던 딸이 냉궁에 유폐되어 반쯤 미쳐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그렇게 몇 달의 와병 끝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백작은 설렁줄을 흔들어 집사를 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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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은.”

아르티나에 대한 분노가 속을 모두 집어삼켜 갈라진 목소리로 백작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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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 놓으시지요. 이 제국의 명운에 관한 것이니, 낮이고 밤이고 거리에선 황자 전하야말로 이 제국 황위에 걸맞다는 칭송이 흐른다 합니다.”

타고난 감각으로 손대는 것마다 성공하는 교역. 덕분에 부라면 어느 가문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쌓았다.

최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던 신생 상단 하나가 꿈틀거린다는 정보를 전해 들었지만, 감히 그의 위치를 위협할 수준으로 자라진 못할 터다.

따라서 이세르나 백작이 유일하게 바라는 것은 중앙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

자신의 손자를 차기 황제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 참에 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이세르나 백작은 거금을 들여 걸인들을 사들이고, 동시에 작은 신전 하나를 매수하여 거짓 신탁을 퍼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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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 하니 내 딸은 이미 손 쓸 방도 없이 미쳐버렸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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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하오나 그러합니다,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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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궁에서 죽은 자는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하지. 못 본 지 오래되기는 했다만, 부녀지간의 정으로 최소한 무덤은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겠나.”

백작이 집사의 도움을 받아 신발을 신고 탁자를 짚으며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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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의 시신이라도 보전할 방법은 단 하나다.”

늙었지만 여전히 형형한 눈이 각오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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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자가 황제가 되는 것.”

딸의 시신. 가문의 영광. 마르지 않는 부. 그 모든 것을 가져다줄 유일한 구원.

일평생 거상으로 살아온 이세르나 백작이 이런 패를 놓칠 리 없었다.

***

황비를 잃고 나서 한동안 궁 안에 틀어박혀 있던 에드윈은 최근 다시 활기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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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님께선 언제 오신다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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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이세르나 백작은 엄밀히 전하의 아랫사람입니다. 전하께선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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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다, 알았어! 이세르나 백작은 언제 온다더냐! 됐느냐? 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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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와 함께 오찬을 든다 하였으니, 곧 당도할 것입니다.”

에드윈이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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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할아버님, 아니, 이세르나 백작이 말하던 그 신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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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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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찌 되었느냐? 형님을 엿 먹일 수 있게 잘 퍼져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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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국민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로 날 새는 줄 모른다 합니다.”

에드윈이 거울을 쾅쾅 치며 큰 소리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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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봐라! 이세르나 백작이 제국으로 복귀하고 나서는 늘 좋은 일들뿐이다! 형님이 나보다 더 빛났던 이유는 단 하나야! 내게 뛰어난 참모가 없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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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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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형님과 공녀가 잘났다 한들 신묘한 책략으로 상단을 이토록 키운 백작에 당할 수 있겠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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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그러합니다.”

이제나 오시려나, 저제나 오시려나. 마치 전쟁 떠난 임 기다리듯 서성이며 기다리길 몇 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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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이세르나 백작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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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어서! 어서 들라 하라! 아니지, 내가 나가보겠다!”

수석 시종이 말릴 새도 없이, 에드윈은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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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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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전하. 말씀을 낮추셔야지요.”

잘 보여야 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귀여운 척을 하는 에드윈이 자신의 머리를 쿵야 상큼하게 때리는 시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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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아차. 제가 할아버님을 뵈니 너무 기뻐서 그만……!”

마찬가지로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척을 하는 이세르나 백작이 껄껄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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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 그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이 살얼음 같은 황궁에서 얼마나 힘드셨을지를 생각하면 이 늙은이 억장이 무너지는 것을요.”

두 조손은 화기애애 웃으며 시종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황자궁의 만찬장으로 향했다.

대기하던 시종이 화려한 문을 열자 펼쳐진 건 황제의 상이 부럽지 않은 만찬상.

황자가 자신에게 얼마나 의지하는지가 느껴져 내심 만족스러우면서도, 이세르나 백작은 짐짓 난색을 표하는 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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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전하. 뭘 이렇게까지 준비하셨습니까. 그저 손자와 밥 한 끼 하고 싶은 할아비 마음으로 달려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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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이십니까! 좋은 소식을 함께 즐겨야 하는 자리가 아닙니까!”

오늘은 마땅히 축배를 들어야 하는 날이었다.

항상 가식적인 모습으로 성군을 연기하던 형님의 추악한 면을 온 제국민들이 알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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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이 황위에 오르면 제국이 망한다는데! 신탁이 그렇다는데! 대체 어느 제국민이 형님을 지지하겠습니까! 무지할수록 신탁에 크게 의존하는 법이지요!”

에드윈이 호들갑을 떨며 이세르나 백작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특별히 공수한 귀한 와인을 가득 따르고, 자신의 잔에는 포도 주스를 가득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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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황위로 가는 첫걸음을 위하여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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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전하. 이리 포부가 넘치시니 제가 걱정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렇게 두 조손이 금빛 미래를 그리며 챙, 잔을 부딪치던 찰나.

에드윈의 수석 시종이 만찬장으로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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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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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냐! 감히 내가 이세르나 백작과 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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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나 꼭 아셔야 할 듯한 일이라…….”

일갈하려는 황자를 눈짓으로 막은 이세르나 백작이 시종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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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흠. 감히 주인의 식사를 방해할 만큼 큰일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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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탁의 해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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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퍼지고 퍼져 드디어 폐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더냐?”

낄낄. 만면에 미소를 담고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묻는 에드윈을 향해 시종이 어렵게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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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반대로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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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어떻게 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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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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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반대로냐고 묻지 않느냐!”

불길한 예감에 에드윈이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냅다 집어던졌다. 이세르나 백작이 천천히 잔을 내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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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신탁 속 황태자와 황자 전하의 위치가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겠지?”

시종은 그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에드윈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세르나 백작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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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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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전하. 잠시 진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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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었는데!”

마치 누가 밟아버린 꼴뚜기처럼 바락바락 날뛰는 꼴을 보며 이세르나 백작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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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자는 지나가는 개와 황위 다툼을 해도 승산이 없겠군.’

황자궁의 만찬장에는 한동안 유리 깨지는 소리와 고함이 울려 퍼졌다.

***

황비가 냉궁에 유폐된 뒤.

아무리 그래도 황자의 생모이니 곧 사면될 것으로 믿고 자리를 지켰던 시녀들과 시종들은, 황비가 완전히 미쳐버렸다는 소식이 돌자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갈 곳 없는 세레스는 쥐 죽은 듯 황비궁 한구석에 처박혀 지내고 있었다. 물 데우기도 여의치 않아 얼음장 같은 물로 목욕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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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오라버니와 함께 전쟁터에 남아 있는 건데! 앗, 차거!”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처럼 스산한 황비궁 욕실. 몸 위로 조르르 떨어져 내리는 차가운 물에 소름이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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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따위로 대접을 해?”

마땅히 시녀 두엇은 남아 내 시중을 들어야 할 것 아니냐고!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며 목욕물을 엎어버린 세레스가 방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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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방 한가운데 서 있던 인영이 검지를 입술 위에 가져다 대고서는 로브를 내려 얼굴을 드러냈다.

세레스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설마.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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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버지?”

비록 눈과 팔을 잃고 얼굴 반쪽도 화상으로 일그러졌으나, 몰라볼 리 없다. 자신에게 반드시 황후 자리에 앉아야만 한다고 독촉하던 아버지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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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떻게, 아버지, 아버지!”

기댈 곳 하나 없던 세레스에게, 돌아온 아버지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명줄이나 다름없게 비쳤다.

와락 달려드는 세레스의 등을 대강 토닥이며 루시우스가 핀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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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조용히 하라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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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떻게……! 살아계셨으면서 왜 저를 찾지 않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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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야 황태자나 아르티나의 눈이 우리 가문에서 잠시라도 떠나 있을 테니,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루시우스는 오랜만에 만난 딸을 무릎 위에 앉혀두고 빠르게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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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있던 동안, 나는 마계와 금제탑을 등에 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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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계요? 금제탑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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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 가문은 다시 부흥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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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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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 아르티나가 대단하다고 한들. 공녀가 쥔 힘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른다 한들. 마계와 금제탑을 모두 합한 것에 이르겠느냐.”

확신 어린 장담에 세레스의 표정이 환희로 물들었다. 언젠가 복수할 날이 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드디어, 이렇게 빨리!

장밋빛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발그레해진 딸을 어르며 루시우스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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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스. 황자 전하와 약혼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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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엑. 싫습니다, 아버지. 그놈의 면상만 봐도 토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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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아직도 황태자를 연모하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세레스가 비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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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의 축하연에서 황태자 전하가 보이셨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무얼 그리 잘못했다고, 마치 원수를 보는 차가운 시선이셨지요.”

잠시 침묵하던 세레스가 주먹을 쥐고 제 아비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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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연모하는 건, 또 연모했던 건, 황태자가 아니라 황후의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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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하구나. 이래야 내 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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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가 되어 저를 비웃었던 것들을 모두 발아래 두고 부릴 것입니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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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원한다면 황자 전하와 혼인하거라. 이 제국의 황제가 될 이는 루드비히가 아니라 에드윈이다. 이 아비가 반드시 그리 만들 테니까.”

후작은 자신을 꼭 닮은 딸을 부둥켜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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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저 황자 전하의 비가 되어, 황후의 관을 쓸 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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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그런데 황자 전하의 의사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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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걱정 말거라. 이 아비가 이미 이야기를 마쳐두었으니.”

기실 황비궁에 오기 직전, 황자를 비롯해 이세르나 백작과도 모두 이야기를 끝내둔 참이었다.

망했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확연히 기울어진 데퐁트 후작가와 연을 맺는다는 것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던 그들은, 루시우스의 뒷배 이야기를 듣고서는 반색하며 함께 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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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황자 전하께서 널 부르실 테니, 몸가짐 단정하게 하고 기다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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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버지. 오신 김에 저와 이야기라도 조금 더…….”

붙잡으려 했건만 눈 깜빡하자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진 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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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무래도 아버지가 애용하셨던 호문쿨루스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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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람이 이대로 죽으란 법은 없지.”

깔깔 소리 높여 웃던 세레스는 홀로 궁에 남은 이후 가장 단잠을 잤다.

꿈에서는 자신의 발아래 엎드린 공녀가 살려달라 울부짖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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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라. 너 일을 꽤 잘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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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공녀님의 자금 덕분이지요. 제가 도박판을 돌아다니며 소문을 낼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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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정령을 붙여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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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 목적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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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 편에 섰다면 호위였겠고, 네가 날 배신했다면 감시였겠지.”

태연한 말투와 달리 일순 온기 없이 가라앉은 눈. 카밀라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팔을 슬쩍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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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먹지 마. 지금은 내 편이잖아? 개인적으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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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유도 참 무시무시하게 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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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네가 내 편이라면 회유겠고, 배신할 마음을 먹고 있다면 협박이겠지.”

여전히 아르칸의 집무실을 강탈한 채, 이벨리아가 두 다리를 모아 의자 위에 올려두고 팔로 끌어안아 고양이처럼 웅크렸다.

고위 귀족의 예법에는 상당히 어긋난 태도였으나, 전혀 가벼워 보이지도, 방종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같잖은 예법 위에 내가 있다는 식의 거칠 것 없는 자신감으로 비쳤다.

카밀라는 꼴깍 침을 삼키며 대화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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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 전하의 세력이 지방 한지까지 세세하게 퍼져 있었을 줄이야. 솔직히 의외였습니다. 꽤 작은 지역 단위까지 소문이 돌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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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거 황자가 한 거 아니야. 능력 없는 꼴뚜기는 그런 일 못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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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 전하가 아니라면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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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르나 백작. 얼마 전 돌아왔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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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을 제법 오래 비우셨던 분이 그런 일까지 가능하셨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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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을 운영하는 이들은 곳곳에 유통망을 가지고 있거든. 아마 지방 거점을 중심으로 해서 뒷골목 부랑배들을 사들여 거짓 신탁을 퍼트렸겠지.”

카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국에 돌아와 보니 멀쩡했던 딸이 미쳐있는데.

원인 제공은 그쪽에서 했더라도 아비 된 입장에서는 눈이 돌아갈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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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이 일이 공녀님께 되레 큰 골칫거리가 되어 돌아오진 않을지 걱정입니다.”

이벨리아가 태연하게 쿠키를 집어 입에 넣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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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데퐁트 후작은 살아 있을 테고, 이세르나 백작은 돌아왔고, 세레스는 끈을 잃었고, 에드윈은 똥줄이 탈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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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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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서 뭘 작당할지야 뻔하지 뭐.”

하나하나 만만치 않은 면면이 모여 뭔가를 꾸민다는데 마치 지나가는 똥개들이 회동하는 것인 양 태연하게 넘기는 반응에 카밀라가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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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불쌍하네요. 그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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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위 다툼과 어른들 싸움에 낀 작은 새우 이브가 가장 불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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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그런데 그 황위를 다투는 이들과 어른들이 모두 공녀님 손바닥 위에서 놀고 계신 느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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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손바닥이 간질간질한 이브가 가장 불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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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그런 거로 하죠.”

 

***

새해 첫날.

아주 드물게 이른 아침부터 반짝 눈을 뜬 이벨리아는 곧바로 발코니 문을 열고 실프를 불러 아르티나 기사단이 있는 연무장으로 동실동실 떠서 날아갔다.

잠옷을 입고 수면 머리띠를 하고 연분홍 토끼 슬리퍼를 신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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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 중지! 우리 아기씨가 하늘에서 내려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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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뭔가의 강림은 강림인데. 천사보단 마왕 쪽인 것 같군. 컥.”

헤롤드는 새해에도 헛소리를 지껄이는 알렉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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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다안-! 새해야!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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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우리 아기씨께 좋은 일만 가득 생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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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 모두가 건강하면 나한텐 가장 좋은 일이지!”

타닥, 이벨리아가 땅에 발을 딛자 아르티나 기사단이 감동한 듯 일제히 눈물을 글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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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기씨께서 어쩜 이렇게 의젓해지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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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른이 다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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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이제 내 나이를 세려면 손가락 열 개를 다 펼치고도 두 개를 더 써야 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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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장하십니다, 우리 아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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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다니. 아주 대단하십니다, 우리 아기씨!”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어화둥둥 하는 기사단을 뒤에 잔뜩 달고 응접실로 들어오며, 이벨리아는 바닥에 곱게 놓인 신문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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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가장 앞면에는 대문짝만 하게 특보가 실려 있었다.

「세기의 약혼! 황자 전하의 피앙세는 누구?」

「데퐁트 영애, 황가와 연을 맺다!」

사진 속. 환히 웃는 에드윈과 세레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벨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콱 지르밟으며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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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잉. 새해 첫날부터 염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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