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네가 자는 동안 곁에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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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네가 자는 동안 곁에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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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네가 자는 동안 곁에 있을게
2022.05.02.
최근 루드비히가 비밀기지에 상주하는 시간이 제법 길어졌다.
이 제국의 작은 지존, 동시에 이 제국에서 가장 커다란 짐을 홀로 지고 있는 소년. 루드비히는 엎드려 오렌지를 굴리고 있는 작은 친구를 응시했다.
‘이게 남들이 말하는 힐링 뭐 그런 건가.’
빤히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이벨리아가 오렌지를 내려두고 휙 고개를 돌렸다.
‘깜짝이야.’
괜히 멋쩍어 루드비히 역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딴청을 피웠다.
작은 친구가 타박타박 걸어와 옆에 털썩 앉자 루드비히의 어깨가 빳빳하게 굳었다.
이벨리아는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모아 끌어안은 다음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식량 도둑아.”
“나 너 안 쳐다봤는데.”
“도둑질하지 말고 착하게 살지 그랬어.”
“……이렇게 갑자기 내 인성을 나락으로 떨어뜨려?”
“세간에 도는 네 인성은 나락이던데.”
“조그만 게 사정없이 뼈를 때리네.”
루드비히가 낮게 한숨 쉬며 이벨리아의 머리 위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주었다.
맞는 말이다. 루드비히 역시 며칠 전에 소식을 접했다. 심복인 에르트 백작으로부터.
‘전하. 제국민들 사이에 신탁 하나가 돌고 있는데…….’
‘무슨 신탁.’
‘그, 외람되오나…….’
‘말해. 일감을 더 얹어주진 않을 테니까.’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시면 이 제국이 무덤이 되고, 황자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셔야 영광될 것이라는 신의 말씀인지 개의 말씀인지 모를 신탁이라고 합니다.’
‘……출처와 시발 지역을 알아 와.’
‘역시 일감이 더 생겼군요. 아주 기쁩니다. 전하. 하하하.’
알아본 결과 제법 광범위하게 퍼져버린 신탁. 신탁만 퍼져나갔으면 해석이라도 분분했겠으나, 대대적인 선동도 함께 이뤄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것이 한가득인데 별 같잖은 헛소문까지.
여론을 잠재우려면 선동과 선전으로 맞불을 놓는 것이 정도(正道)이나, 루드비히는 이에 가장 약했다.
기본적으로 선동이라 함은 말을 퍼트릴 이들이 많아야 하고, 특히 이 경우에는 제국민들에게 이질감 없이 녹아들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하니까.
루드비히는 울창한 가지의 나무 아래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지금은 이 세상 자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점점 더 힘들어지는군.’
그러자 이벨리아가 바짝 다가와 감은 눈앞에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내 친구가 이 제국을 무덤에 파묻을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러게 말이다. 나도 꿈에도 몰랐네.”
“그 꼴뚜기가 황제가 되면 요람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널 텐데.”
“혹은 요강이 될 수도 있지.”
키득키득 웃던 이벨리아가 루드비히의 어깨를 톡톡 치며 일어나라 졸랐다.
“왜. 세상이 환멸 나서 눈을 감고 있고 싶어.”
“나는 식량 도둑이랑 놀고 싶어. 나랑 풀 빻고 놀자.”
“후…….”
놀자면 별수 있나. 이 한 몸 바쳐 즐겁게 놀아드려야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벨리아가 루드비히의 어깨를 살짝 누르고서는 몸을 기울여 위에서 시선을 맞췄다.
“너 잠 못 잤어?”
“응.”
“며칠?”
“하루.”
“…….”
“……귀신같긴. 사흘.”
이벨리아는 힘을 주어 루드비히를 밀쳐 눕힌 다음, 작은 손으로 냅다 루드비히의 눈을 가려버렸다. 한 손으로 가리려니까 영 부족하여 두 손을 모두 사용하여 눈 하나씩.
“뭐 해.”
“조금 자.”
픽. 손 아래로 드러난 루드비히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눈에 와닿는 따뜻한 온기가 기분 좋았다.
“루이. 신탁은 걱정 마.”
“……차라리 수도를 중심으로 퍼졌으면 잡기도 쉬웠을 텐데.”
“하필이면 가장 먼 지방에서부터 타고 올라와서 루이가 알게 되고는 너무 늦어버렸겠지.”
“……응.”
“사실 있잖아. 그동안 네가 너무 바빠서 말할 틈이 없었는데.”
“……?”
“내가 미리 손을 써뒀어.”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는 듯, 이벨리아의 손 아래에서 루드비히의 눈 깜박임이 느껴졌다. 여러 번. 빠르게.
“마음 아프더라도 며칠만 기다려. 그 신탁의 해석은 완전히 달라질 테니까.”
의미를 알아챈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의 손목을 잡아 손을 떼어내고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무슨 뜻이야? 이미 손을 써놨다니?”
“그으…… 화내면 안 된다? 사실은 며칠 전에 카밀라가 찾아왔었거든.”
이벨리아는 변방에 머무는 카밀라가 떠도는 신탁 내용을 초기에 듣고 쪽지를 보낸 일부터, 이벨리아와 카밀라가 만난 것, 하여 신탁 내용을 어떻게 바꾸라고 알려줬는지까지 모두 차근히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루이를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잡초 같고 쓸쓸한 황태자로 만들었어. 혹시 기분 상했어?”
루드비히의 입매에 실소가 매달렸다. 이 땅 도둑은 참으로 기묘하다.
마냥 가벼운 태도로 안락한 인생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여도, 돌아보면 항상 제 사람들을 위해 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가장 원했으나 감히 청하지 못한 은총을 턱 내어주는 신 같기도. 혹은 기갈 속 한 방울의 물 같기도.
그 기적 같은 배려가 외롭고 고독한 태양의 마음속에 묵직하게 들어찼다.
아마 목 어딘가가 꾹 눌린 것처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루드비히는 마른 침을 몇 번 삼킨 뒤 애써 평소와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오히려 고맙지. 제왕이 될 이는 마땅히 그런 눈물 어린 스토리 하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선의로 한 일이나 만에 하나라도 불쾌함을 느꼈을까 봐 슬쩍 눈치를 보던 이벨리아는 루드비히가 시원하게 웃고 있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야 가슴을 펴고 떵떵거렸다.
“그치! 맞지! 우리 식량 도둑은 이미지를 만들어 줄 충복이 없으니까 내가 했어!”
“아주 잘했네.”
“엣헴. 동화책 공장 공장장 오라버니도 별거 없어! 이런 일은 내가 훨씬 잘한다니까!”
“차기 마탑주와 병아리는 비교가 안 되지.”
“내가 압승!”
“그럼. 그럼.”
어깨와 콧대가 한껏 올라간 이벨리아가 오렌지 주스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캬아 소리를 냈다.
“카밀라는 일을 잘하고 있으려나.”
혹시 임무 수행 과정에서 위험에 처할까 봐 정령 하나를 붙여놓긴 했는데. 물론 배신하는 경우 응징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고.
카밀라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려던 이벨리아는 조금 전과 미묘하게 달라진 루드비히의 상태를 눈치챘다.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 힘이 빠진 눈가. 차분해진 숨소리. 가볍게 내려간 어깨.
이벨리아는 대화 주제를 바꿨다.
“오늘 날씨 좋다. 그치.”
“응.”
“저 구름은 우리 엔리르를 닮았다.”
“못생겼네. 울퉁불퉁.”
“그리고 왠지 식량 도둑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방금 한 말 취소.”
생긋 웃으며, 이벨리아가 루드비히의 어깨를 뒤로 밀었다.
무예를 게을리하지 않아 어느덧 소년답게 단단해진 팔은, 오로지 작은 친우의 앞에서만 전혀 맥을 못 췄다.
저항 없이 뒤로 누운 루드비히가 의아한 듯 눈을 깜박였다. 이벨리아는 조금 전처럼 작은 손을 루드비히의 눈 위에 얹었다.
“코 자자.”
“……내가 애야?”
“애든 아니든. 넌 힘들었고. 잠을 잘 못 잤고. 나는 네 친구고. 오늘 날씨는 참 좋고.”
“…….”
“편하게 자. 모처럼 내가 안 자고 옆에 있을 테니까. 누가 꿈에서 괴롭히면 달려가서 다 무찔러줄게.”
잠이 든다는 것은 곧 방비가 불가능하다는 것.
하여 수면은 루드비히에겐 늘 고통이었다.
밀려드는 수마가 이토록 달았던 적은 맹세코 없었는데…….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더없이 소중한 친우의 잔잔한 콧노래 소리가 더해졌다.
루드비히는 속절없이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이벨리아는 새근새근 잠든 루드비히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이렇게 잘 자면서.”
불규칙적인 토닥임. 서툰 자장가를 담은 콧노래는 루드비히가 눈을 뜰 때까지 계속됐다.
넘어가는 해가 노을을 만들어내는 시간까지.
***
그 시각.
카밀라, 아니, 카멘은 투전판에서 카드를 뒤집으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에잉, 쯧쯧. 말도 안 되는 신탁이 판을 치더니 내 카드마저 농락당했는가.”
그러자 순서에 맞춰 카드를 턱턱 내려두고 있던 노름꾼들이 혀를 차며 물었다.
“무엇이 말이 안 돼? 아주 선명하게 딱 떨어지는 신탁이더구먼!”
“그려! 이 제국 역사상 이렇게 뻔한 신탁이 내려온 건 처음이라던데!”
“황태자 전하가 황제가 되시면 우리 제국 쫄딱 망한다지 않는가!”
역시 최근 가장 회자되는 주제답다. 후줄근한 옷을 입고 때가 낀 손톱으로 동전을 던지던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가 들은 소문을 한마디씩 얹었다.
검은 더벅머리 가발을 눌러쓴 카밀라가 도박판에 깔린 카드와 딱 맞는 카드를 내려놓자, 사내들 사이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동전을 쓸어 담으며, 카밀라가 씩 웃었다.
“거 보게. 신의 말씀을 완전히 잘못 해석하고 있으니 형씨들 운세가 잘 풀릴 턱이 있나.”
“거리에 짜하게 도는 해석이 바로 이것이네! 신관복을 입은 이들이 얘기하는 것을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
“나도 같이 들었지! 황비 전하께서 아주 큰 잘못을 하긴 하셨지만, 하루아침에 어머니를 잃은 황자 전하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처량하기 그지없지.”
사내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간에 도는 에드윈의 평은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 형에게 가려 빛을 보지 못한 비운의 황자, 황제마저 외면하고 버려둔 황실의 골칫거리 정도였으니, 처량하다는 신언에 딱 맞는 이였다.
카밀라는 새로 카드를 섞으며 눈앞의 이들을 마치 무지렁이 바라보듯 응시했다.
“황태자 전하는 고작 세 살이실 적 황후 폐하를 잃으셨지.”
노름꾼들이 카밀라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높으신 분들의 비사는 다 아는 이야기라도 재밌게 마련이다.
“황후 폐하를 황비 전하께서 시해하셨다는 소문도 공연히 돌았었고.”
“뭐. 오래전에 그런 소문을 들었던 것도 같긴 한데…….”
카밀라는 도박판 위로 몸을 숙이고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소리 낮춰 속삭였다.
“그게 참이다 거짓이다 말이 참 많았지 않은가. 그런데 미쳐버린 황비 전하가 온종일 서거하신 황후 폐하께 사죄를 드리고 있다지. 미안해, 미안해, 로아나 미안해, 하면서.”
사내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오소소 돋는 소름에 팔뚝을 문지르면서 카밀라에게 바짝 몰려들어 묻는다.
“그렇다던가?”
“그게 참이야?”
“세상에.”
“어디 그뿐인가. 나는 그저 이 마음이 찌르르 아파 죽겠네.”
“또 무엇이?”
“어릴 적 황후 폐하를 잃은 황태자 전하께서, 황위를 탐하는 황비 전하와 황자 전하 사이에서 얼마나 핍박받았을지를 생각하면…….”
카밀라가 과장된 손동작으로 옷소매를 들어 눈가를 콕콕 찍었다.
“내 사돈의 팔촌의 사돈이 황실 기사단의 견습 기사인데, 밤이면 밤마다 황태자 전하의 침실엔 자객이 들고, 식사엔 독이 섞여 나온다지 뭔가.”
아이고. 아이고. 집채만 한 사내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반면에 황자 전하께서는 여태까지 황비 전하의 비호 아래에 아주 호사를 누리셨다지.”
세상에. 맙소사. 거대한 사내들이 이번에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잠깐. 그렇다면 신탁에서 말하는 ‘처량한 빛’은 황자 전하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 아닌가? 응?”
“그게 맞겠네! 엉? 그게 맞아! 듣고 보니 그렇네!”
퍼지는 수군거림을 잠시 지켜보던 카밀라가 돈주머니를 챙겨 일어서면서 첨언했다.
“아. 그리고 고위 귀족들의 예법에서는, 황비 전하를 태양의 그림자로 지칭한다 하던데.”
선동 끝. 깨끗하게 완료.
맛있는 뼈다귀를 던져줬으니, 저들이 신나게 물고 뜯은 다음 다른 이들에게 던져줄 터다.
“그러면 지금 돌고 있는 신탁의 해석이 완전히 반대가 된 것 아닌가!”
“하긴, 어디 황자 전하가 전쟁터에 나가셨다는 소식 들어본 이 있나? 응?”
“이보게, 카멘! 더 알고 있는 건 없나?”
카밀라는 더 대꾸하지 않고 투전판을 떴다.
쉽게 선동당하는 이들은, 그만큼 역으로 선동하기도 수월하다.
또 남을 선동하는 것도 좋아하지.
뼈다귀는 돌아다니면서 여러 소문을 그러모아 살을 붙일 터.
그 결과로 루드비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소년왕(小年王)으로, 에드윈은 이 제국을 무덤으로 이끌 탕왕(湯王)으로 묘사될 터다.
“자. 다음 투전판이 어디더라…….”
모처럼 딴 돈주머니를 짤랑이며 카밀라가 걸음을 옮겼다.
“이러다 도박 자금으로 집안 기둥 뽑겠네.”
***
너덧 개의 도박판을 돌고 델포이 저택으로 돌아간 카밀라는 눈을 비볐다.
“아니, 이게, 무슨…….”
“왔구나, 카밀라! 얘야, 어서 이리 좀 와보렴!”
“하이고, 우리 복덩이 딸!”
커다란 궤짝. 그 안에 쌓인 번쩍이는 황금.
그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팔짝팔짝 뛰고 계시는 부모님.
마지막 도박판에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잃고 신발과 허리띠까지 잃은 카밀라는 고개를 기울이며 궤짝 앞으로 다가섰다.
“아버지, 이게 뭡니까? 어디서 이런 돈을……!”
“무려 아르티나 공작가에서 보내신 거란다! 우리 딸! 공녀님과 이토록 친분이 있었으면 이야기를 하지 그랬니!”
“아니, 이럴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수도로 올라가서 공녀님께 인사라도……!”
부모님께서는 아무래도 황금 궤짝보단 저 구름 위의 아르티나 가문이 이 한미한 델포이 자작가에 입김 한 번 불어넣어 주었다는 사실이 더욱 감격스러우신가 보다.
카밀라는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 같은 부모님을 진정시키고, 옆에 놓인 편지 봉투를 뜯어 안에 든 쪽지를 펼쳤다.
동글동글한 글씨체. 커다란 편지지를 가득 채운 단 네 글자.
「도박 자금.」
아. 간결하기도 하시지.
허리를 접고 키득이며 웃던 카밀라가 편지를 접자, 델포이 자작 부부가 바짝 달려들었다.
“우리 장한 딸. 어떻게 아르티나 가문과 친분을……!”
“공녀님께서 뭐라시니! 응?”
카밀라가 짧은 편지를 천천히 접어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입에는 여전히 웃음이 진하게 매달린 채였다.
“아주 저를 홀리시네요, 공녀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