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생태계 교란종 이브 (165/323)


165화: 생태계 교란종 이브
2022.04.28.


방 안에서 반성문 한 줄 쓰고, 한 번 뒹굴고, 한 줄 쓰고, 한 번 뒹굴고를 반복하던 이벨리아는 창문을 똑또도독 두드리는 소리에 흠칫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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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렇게 채신없이 창문을 두드려?”

발코니를 애용하는 우리 토끼는 저렇게 방정맞지 않은데.

눈부신 햇살 때문에 반쯤 가려둔 커튼을 열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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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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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우!”

난데없는 비둘기다. 일반 비둘기보다 몸집이 작은 것이 제법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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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야, 이리 온! 구구구! 구구구!”

다리를 번쩍 드는 비둘기에게 구구구 소리를 내자, 동글동글 귀엽던 비둘기의 눈이 삽시간에 짜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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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대가리 너 왜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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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 구구!”

창문을 콕콕 쪼는 힘이 아까보다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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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구구 욕이라도 한 걸까.”

이벨리아가 창문을 활짝 열자 휘익 날아 들어오는 비둘기의 몸통을.

- 타악.

잽싸게 튀어 오른 말랑한 솜방망이가 꾸욱 눌러 잡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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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간식거리인가. 군침이 싹 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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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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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엔리르! 걔 발에 뭐가 묶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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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표인가? 이것만 떼고 먹으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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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구! 구구구!”

앞발에 눌린 비둘기가 이벨리아를 보며 애처롭게 날개를 파닥였다.

살려주세요, 인간. 아까 비웃어서 죄송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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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르. 쪽지를 열어보고 친구한테서 온 거면 살려주고, 적이 보낸 거면 너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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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뭐.”

앞발에 살짝 힘이 빠지자 때를 놓치지 않은 비둘기가 푸드덕 날아올라 이벨리아의 뒤로 쏙 숨어들었다.

기분 탓인가. 이벨리아는 창밖에 있을 때보다 반쯤은 쪼그라들어버린 비둘기의 발에서 쪽지를 풀어냈다.

잘 훈련된 비둘기를 이용한 연락법은 은밀히 정보 수집을 하는 이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

이벨리아에게 이런 식으로 연락을 취할 이는 단 한 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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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카밀라네.”

정령왕을 소환한 뒤 열렸던 축하연에서 이벨리아의 험담을 하는 이들의 명단을 적어 넘겨주었던, 델포이 자작가의 영애. 제법 오랜만의 연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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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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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만나자는데. 우리 아가 용 이 비둘기 못 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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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아까 닭장에 들어가서 닭 잡아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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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출귀몰한 들짐승이 닭을 죄다 잡아먹는다고 세토가 불평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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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한창 성장기라 잘 먹어야 하거든. 다 먹어치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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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키 크는 계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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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누나 키 크는 계란은 안 먹고 남겨뒀어.”

잠시 인간으로 변한 엔리르가 이벨리아의 앞으로 성큼 다가와 손으로 키를 가늠하더니 다시용의 모습으로 돌아가 거만하게 털을 부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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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안 먹고 남겨둬야겠다. 아직 한참 멀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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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방금 굉장히 농락당한 기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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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탓이야. 누나.”

이 자식. 저렇게 닥치는 대로 닭이고 비둘기고 잡아먹고 나보다 커졌던 거야.

이벨리아는 옆에 놓인 간식을 와르르 입에 털어 넣었다.

픽 웃으며, 엔리르가 앞발에 턱을 괴었다.

간결한 답장을 휘갈겨 쓰는 은인을 바라보면서.

***

공녀님. 지방 제국민들 사이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신탁이 돌고 있습니다.

「그림자 없는 태양이 관을 쓰거든 무덤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때 홀로 남아 처량한 빛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비로소 움트는 요람이라.」

자세한 건 뵙고 이야기 나눔이 좋을 듯합니다.

***

감히 내게 오라는 말은 아니겠지?

찾아와.

***

- 푸드덕.

내려앉는 비둘기의 다리에서 쪽지를 풀어 읽은 이가 옅게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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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그럴 리가요.”

그 고귀한 손에 들린 패가 되어드리겠다 약조하였으니, 마땅히 가 드려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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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신 분께서 손을 더럽히시면 쓰나.”

깊게 후드를 눌러쓴 이는 손에 쥐고 있던 다양한 문양의 카드를 내려두고 주머니를 챙겨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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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카멘! 벌써 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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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있어서. 재밌는 얘기 잘 들었어,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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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잉. 아직 턱수염도 덜 난 보송이가 뭐 그리 바쁜 일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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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좀 만나고 그래! 그 좋은 나이에 매번 노름이나 하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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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씨나 잘해.”

호기로운 대답에 투전판에 둘러앉은 사내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짤랑. 돈주머니를 던졌다 받으며 허름한 건물 밖으로 나온 카멘은 좌우를 살펴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후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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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이 짓도 오래는 못 하겠네.”

한숨과 함께 검은 더벅머리 가발을 벗자 쏟아지는 귤색 단발머리.

그렇게 조금 뒤.

투전판에서 노름하던 소년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몸에 딱 달라붙는 간편한 드레스를 입은 영애가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온갖 잡소문의 생성지요, 더러운 스캔들의 온상지인 투전판.

카밀라가 성별과 지위, 나이와 생김새까지 모든 것을 위장하고 소문을 수집하는 제법 좋은 일터다.

마계전(馬契廛)에서 말 한 필을 빌려 올라타면서, 카밀라가 귤색 머리를 낮게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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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판의 터줏대감들도 출처를 모르는 신탁이라…….”

뻔하지 뭐. 그 신탁을 퍼트린 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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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 한번 거하게 치네.”

 

***

선명한 주황색 단발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대강 쓸어넘기며, 카밀라는 위압적으로 솟은 공작저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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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봐도 참……. 우리 집 열 채도 들어가겠다.’

아르티나 공작가. 기가 안 눌리려야 안 눌릴 수 없는 지위와 명성. 하지만 그래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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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굳이 이곳에 온 목적을 잊어선 안 되지.’

신탁에 대해 알려드림과 동시에, 공녀님께서 여전히 나의 줄이 되어주실 만큼 잘 성장하고 계시는지 확인해야 했다.

정령왕 소환 축하연으로부터 어언 2년이 지났다. 2년이면 정세가 바뀌어도 몇 번은 바뀌기 충분한 시간.

하루하루가 간당간당한 델포이 자작가는 그들의 명맥을 길게 유지시켜 줄 조력자가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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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이 2년 새 썩은 동아줄이 되어버렸다면 빨리 다른 줄을 찾아야 해.’

가문과 가족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온갖 험하고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배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여러 경우의 수를 상정하며, 카밀라는 집사가 안내하는 집무실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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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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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아직 어린 게 아주 어른 귀족처럼 말한다.”

상석에 앉은 이벨리아가 픽 웃으며 고개를 까닥하자, 카밀라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카밀라는 천천히 집무실을 둘러봤다.

사방을 점령한 서류 더미에 난해한 책까지.

뭐야. 뛰어난 전략가라는 소문을 듣긴 했다만, 벌써 이런 업무까지 보시는 건가.

카밀라가 숨기지 않고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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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실이 참으로 멋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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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 나도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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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가 많아 보이시는데. 용건만 간단히 보고드리고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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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우리 오라버니는 수련하러 갔거든. 돌아오려면 한참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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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공녀님 집무실이 아니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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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어? 딱 봐도 연약하고 작은 나는 저 서류에 파묻혀 죽을 거 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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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여기 떡하니 앉아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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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오랜만에 카밀라를 보는 거니까 멋진 척 좀 하고 싶어서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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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잡은 동아줄 이미 썩어버린 건가.

혹시 2년 사이에 바보 천치로 자라신 거라면 빠른 손절이 답이다.

카밀라의 탐색 어린 눈이 조금 더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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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보내드린 신탁에 관해서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벨리아가 다과 그릇을 카밀라 쪽으로 무심히 밀며 의자에 포옥 기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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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할 말이 뭐 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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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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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탁. 가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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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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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모를 것 같았어?”

씨익. 이벨리아의 입꼬리가 오만하게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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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게 가짜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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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치고는 너무 직관적이잖아. 누굴 의미하는지 뻔한걸.”

신전과 신관이 존재하는 만큼, 신탁 또한 없진 않다.

그러나 본디 신탁이란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일반적.

개미가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듯, 인간이 훨씬 격 높은 신의 말을 인간의 언어로 부드럽게 치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카밀라가 쪽지를 통해 알려온 신탁은 지나치게 직관적이고, 또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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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태양이란 뒷배 없는 이 제국의 소지존을 의미할 테고.”

이벨리아가 무릎 위로 올라온 엔리르의 털을 느린 손길로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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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아 처량한 빛이란 최근 황비를 잃고 온갖 지지리 궁상은 다 떨고 있는 황자를 의미하겠지.”

무거운 원목으로 만든 책상 아래로 이벨리아의 까닥이는 발이 카밀라의 다리를 살짝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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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무덤이요, 황자가 황위에 오르면 요람이라니.”

화들짝 놀란 카밀라가 다리를 확 피해버리자 이벨리아가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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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민들의 지지를 황태자 아닌 황자에게로 돌리려는 짓인 게 뻔하잖아.”

뒤로 몸을 물린 카밀라가 더듬더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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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금 공녀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가 드리러 온 건데……. 누군가 허위 신탁을 퍼트려 황위 다툼을 다른 양상으로 끌고 가려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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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엥. 고작 이걸? 이건 그냥 여기 앉아서도 알 수 있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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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모르는 게 정상이라서요.”

이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긴장감 하나 없이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던 카밀라는 홀로 납득했다.

하긴. 공작부인께서 이 제국 제일의 지장으로 이름 날리셨었고. 공녀님께서는 공작부인을 빼닮았다 소문 자자하시니…….

2년 전보다 훨씬 정제된 기운. 날카로운 시선. 아무래도 줄을 헛잡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카밀라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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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일부 제국민들 사이에서는 벌써 황자 전하께서 황위를 이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이 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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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거짓 신탁을 퍼트린 이들이 선동도 하고 있겠지.”

객관적으로 보면 제국을 부흥케 할 황제의 재목은 단연 루드비히다. 그러나 눈으로 볼 일이 있어야 평가도 가능한 법.

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하위 귀족과 제국민들은 누가 더 황위에 어울리는지 판단할 경험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자연히 카더라 또는 날조된 소문에 쉽게 동조하게 마련이다.

이벨리아가 앞에 놓인 코코아 잔을 들어 호로록 마셨다.

검지가 두꺼운 원목으로 만든 아르칸의 책상을 규칙적으로 톡톡 두드렸다.

직관적인 신탁은 양날의 검이다.

일부 무지한 제국민들을 호도하기 쉬우니 역사적으로도 빈번히 사용된 거짓 신탁.

그러나 신탁이 의미하는 이를 뒤바꿔버린다면 그보다 효율적인 건 없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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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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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공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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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잡을 줄이 되어주고, 너는 내 손에 들린 패가 되어준다고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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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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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방금 네가 내게 보여준 패는 실망스러워. 그저 사실 전달이 목적이었던 것 같은데, 그 정도는 굳이 네가 아니라도 알 수 있거든.”

실로 그렇다. 카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벨리아가 아르칸의 집무 의자 팔걸이에 한쪽 팔을 괴고 비뚤게 자세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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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네 능력의 전부는 아니리라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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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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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나도 내 패에게 얼마큼의 총애를 나눠줘야 할지 알아야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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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십니다. 하명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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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전. 그게 필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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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전문이지요. 어떤 여론을 조성하면 되겠습니까.”

사람들 틈에 녹아들어 심리를 조종하는 여론전은 빈말로라도 쉽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시원하게 들려오는 답이 의외다. 이벨리아가 슬쩍 눈썹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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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라. 그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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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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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량함을 가지고 논하자면, 우리 제국에서 가장 쓸쓸한 이는 황태자 전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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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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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더 지난 일인 데다가, 전하께서 워낙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다들 잊은 모양인데.”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 꺼내 미안하지만, 이게 다 네 황위를 지키기 위해서니 용서해주길 바라, 루이.

널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울고 참고 참고 또 참는 청춘 이야기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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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세 살이실 적 황후 폐하께서 서거하셨지. 물증은 없지만 유폐된 황비가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유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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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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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부모 없이, 심지어 외척도 없이, 황태자 전하는 홀로 모든 암투를 견뎌내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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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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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린 나이에 독에 당해, 전쟁터에 떠밀려, 암살자가 들이닥쳐…… 눈물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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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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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황자는? 세력을 굳건히 한 황비 밑에서 전쟁터 한 번 구경 못 하고 곱게 자랐지. 독이나 암살자는 구경도 못 했을걸.”

어때. 신탁에서 말하는 홀로 남아 처량한 빛이 누굴까.

어릴 적부터 생사의 경계를 홀로 걸어온 루드비히?

엄마 치마폭에 싸여 있다가 자신들의 과오로 몰락하여 홀로 남은 에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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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잘 포장하면 오히려 황태자 전하께 유리한 신탁이 되겠군요.”

카밀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자, 이벨리아가 검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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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더. 그림자 없는 태양이라고 했지.”

그림자는 보통 뒷배를 의미하니, 외척 없는 루드비히를 뜻하고자 했던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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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귀족들의 예법에서는 황비를 태양의 그림자라 칭하거든.”

황비가 냉궁에 유폐된 후 미쳐버렸으니, 황자야말로 ‘그림자’ 없는 태양이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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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민들 눈높이에 맞춘 신탁이라서 간과한 모양이야. 어차피 이런 예법을 아는 이가 흔치 않을 테니까.”

카밀라가 제국민들을 선동할 수 있도록 신탁의 해석을 적절히 바꿔준 이벨리아가 살포시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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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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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쉬운 일이 아닌데. 쉬워졌네요.”

해사하게 웃으며 이벨리아가 커다란 빵 하나를 입에 와앙 물었다. 아르칸의 서류에 크림이 뚝뚝 떨어졌다. 기겁하며 바라보는 카밀라에게, 이벨리아가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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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을 바꿀 필요 없어. 저쪽이 정성 들여서 만들어둔 판을 우리 쪽으로 끌어오면 그만이야.”

아무리 직관적이라 하더라도 특성상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신탁. 그건 해석하기 나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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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신탁 속. 루드비히와 에드윈의 위치를 바꿔. 카밀라.”

네가 얼마나 쓸모 있는 패인지 내게 보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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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공녀님.”

황족의 이름을 경어 없이 냅다 부르는데도 한치의 위화감이 없다.

막연하게 짐작하던 이 제국 유일한 공녀의 위치가 온몸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카밀라는 나가면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들어올 때보다 조금 더 정중한 인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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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말에 오르는 카밀라의 짧은 오렌지빛 머리칼은 땀에 젖어 있었다.

긴장감으로 인해, 언제 흘렀는지도 알 수 없는 식은땀.

시험하고자 왔건만. 발 들이는 순간 위치가 뒤바뀌고.

공녀님의 이야기 하나로 세간에 도는 신탁의 해석이 완전히 변해 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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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짠 판인지는 모르겠지만, 죽 쒀서 공녀님 드리게 생겼군. 배 아파서 팔짝 뛰겠어.”

말의 옆구리를 박차기 전, 공작저를 다시 올려다보며 카밀라가 땀을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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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저런 사기 같은 분이 다 있어.”

신은 불공평하다.

저런 밸런스 파괴범. 생태계 교란종을 세상에 내려버리시면 남은 이들 서러워서 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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