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땅콩이 마계를 점령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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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땅콩이 마계를 점령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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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땅콩이 마계를 점령하진 않겠지
2022.04.18.
“까도 까도 끝이 없네. 양파인가?”
아르티나 공작저, 방 안.
산처럼 쌓인 선물 상자를 쭉쭉 뜯어내던 이벨리아가 손에 들린 포장지를 휙 내팽개치고 벌렁 드러누웠다.
“누나. 누나. 이것 좀 봐. 보석이야. 나 이거 주라.”
방금 연 선물 상자에서 나온 것은 또 보석.
그동안 훔쳤던 보석들을 모두 집주인에게 반납하느라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 용이 눈을 번뜩 빛냈다.
“그래. 너 가져……가 아니라! 내놔! 나만 빼고 자라버린 배신 용에게 줄 보석 따위 없다!”
“누나가 너무 느리게 자라는 건데. 한 입에 삼켜버릴 병아리처럼.”
“너 어떻게 그런 못된 말을!”
우리 아가 용 인성…… 아니 용성 무슨 일이야?
이벨리아가 입을 틀어막고는 엔리르의 앞발에 잡힌 보석을 휙 빼버렸다.
한편에 가득히 쌓인 선물더미 어딘가로 휙 던지고 나니 다시금 한숨이 흐른다.
“다음 해부터는 이브 생일선물 적당령을 내려야겠어.”
이틀 전, 날씨도 화창한 5월 5일에 있었던 열한 번째 생일파티.
올해도 다름없이 가족들과 친구들만 모여 평화로운 생일을 보내던 중이었다.
요리장 세토가 만들어준 커다란 오렌지 무스 생일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려던 순간.
“저기, 아기씨. 잠시 나와 보셔야…….”
“아기씨. 얼른요!”
재촉하는 하녀들의 말에 발코니로 나갔다가 목격한 것은…… 공작저 앞에 구름떼같이 몰려든 제국민들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폭동인가!”
“공녀님! 탄신을 축하드리는 마음에 소를 좀 잡아보았습니다!”
“아니! 소를?”
“여기 오리도 있습니다, 공녀님!”
“맙소사! 오리도?”
“혹시 돼지고기를 좋아하실까, 돼지고기도 가지고 왔지요!”
“세상에! 돼지까지? 혹시 다들 천사야?”
공작저 밖에 진을 친 제국민들은 환호하며 이벨리아의 탄신 축하를 외쳤다. 소며 닭이며 돼지며 온갖 동물을 잡아다 바치면서.
“이 천한 것들이 공녀님께 드릴 것이 이것 외엔 없어서……!”
“귀하신 분께 고작 이것 따위가 입에 맞으실지 그저 송구할 따름이지만…….”
“정말 고마워! 최고의 선물이야!”
고개를 조아리는 제국민들을 향해, 이벨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어떻게 내 기호를 딱 파악했냐며 폴짝폴짝 뛰어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기 최고!”
“아기씨. 진정하시지요. 고기들 어디 안 도망갑니다.”
혹시 난간 밖으로 떨어질까 곁에 시립한 카론이 팔로 난간 앞을 막았지만, 그 팔조차 잡아 치우고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에 발코니 아래 선 제국민들의 함성이 더욱 짙어진 것은 당연지사.
내려다보던 이벨리아는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숨겼더랬다. 기쁘게 건넨 선물을 받고 엉엉 우는 것만큼이나 꼴불견인 건 없으니까.
여하간. 그렇게 제국민들이 고기를 잡아 올 때까지만 해도 그저 고마웠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귀족들이 이딴 괴상한 그림을 보내질 않나. 이깟 아가들이나 읽는 책을 보내질 않나!”
“그 그림 비싼 거래. 엄청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는데.”
“내 미적 감각을 의심해? 이런 물감 튀기기는 나도 하겠어.”
“그리고 그 책은 요즘 어린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교양서라고 집주인이 그랬어.”
“내 학문적 성취를 의심해? 이런 병아리들 보는 책은 옛날에 이미 다 뗐다고!”
“그래도 다 누나한테 바치는 선물인데…….”
“선물을 가장한 뇌물이지.”
고기지상주의인 이벨리아에게 고기만도 못한 선물은 쓰레기 투기나 다름없다.
또 의도도 지나치게 뻔했다.
제국민들이 고기를 가져다 바친 것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의미였다면.
귀족들이 필요하지도 않은 온갖 값나가는 물건을 가져다 바치는 것은 우리 가문을 잘 봐달라는. 중앙 정계로 올려달라는. 우리 아이와 혼사를 치러 달라는. 말 그대로 상응하는 대가를 염원하는 뇌물이었다.
“그래도 저 똥에 쓸래도 쓸데없는 선물들까지는 그러려니 했어. 얼마 전 있었던 축복제 일로 다들 내게 잘 보이고 싶은 모양이니까. 그런데…….”
이벨리아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엔리르가 이번만큼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좀 심했어.”
“아주 심했지.”
공작저 하늘 위. 누가 보더라도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하나는 푸른 물로. 또 하나는 흰 구름으로.
「나의 아가 계약자, 탄신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 말랑이! 언니랑도 계약하자!」
이벨리아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저것들은 땅에 새겨진 것들보다는 나아.”
시선 돌려 아래를 바라보면. 공작저 바깥에 새겨진 타오르는 글씨.
「철이 없었죠. 계약자가 가지고 싶어서 이름까지 허락했다는 자체가.」
그리고 그 옆. 다른 세 필체의 글씨보다는 조금 작고 수줍게 흙으로 새겨진 흔적.
「시켜줘. 너의 명예 정령왕.」
“……끔찍해.”
“정령왕들이 내 존엄성을 박살 내고 있어.”
곁에서 옅게 웃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잔에 따뜻한 코코아를 채워주었다.
“상종하지 마. 하나같이 미친 것들이니까.”
저게 한순간에, 그것도 자연 그 자체에 새겨지는 순간. 누가 남겼는지 눈치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하필 발코니에 서 있을 때 보란 듯이 새겨지는 바람에, 제국민들은 우리 공녀님께서 물의 왕뿐만 아니라 다른 왕들의 사랑까지 받으신다며 더욱 환호했고.
화들짝 놀란 이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솜이불을 꺼내 그 안으로 파고들었더랬다.
쥐구멍 대용으로.
호로록. 코코아를 마시던 이벨리아가 창문을 닫으며 물었다.
“토끼. 저거 어떻게 못 해?”
“할 수 있지. 없애줘?”
“할 수 있어? 그럼 당연히 없애줘야지!”
“잠시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발코니로 나가 난간을 짚고 뛰어내리려던 아가레스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아. 공작저가 조금 무너지고 하늘이 약간 쪼개질 수는 있어.”
“동작 그만.”
“자연을 관장하는 왕이 자연에 새긴 흔적이니. 그와 상반되는 힘을 가진 내가 저걸 없애려면 부숴버리는 수밖에 없거든. 심하게 부서지진 않을 텐데. 안 돼?”
“이리 와서 냉큼 앉아.”
말 잘 듣는 충견처럼 냉큼 곁에 앉은 대악마는 시무룩 입을 삐죽이는 어린 친우를 살살 달랬다.
“조금만 참아. 한 이틀만 있으면 없어질 테니까.”
본디 물은 증발하고, 구름은 흐르고, 불은 꺼지고, 땅은 흩어지기 마련이니.
“……이틀.”
아무래도 이틀은 더 솜이불이 필요할 모양이다.
이벨리아는 저쪽에 던져두었던 솜이불을 다시 주섬주섬 챙겨 동굴처럼 볼록하게 만들었다.
마치 은신처에 숨는 고양이처럼 꼬물꼬물 파고 들어간 이벨리아가 얼굴만 쏙 내밀고 물었다.
“참. 그런데 아스는 생일이 언제야? 매번 물어도 그냥 웃기만 하고.”
봐, 지금도 또 어물쩍 넘어가려고 예쁘게 웃는 거 봐!
“아무리 예쁘게 웃어도 오늘은 그냥 못 넘어가. 꼭 알아내야겠어.”
이벨리아는 단단히 결심했다. 매해 받아만 먹는 얌생이가 될 수는 없다.
“알려줘. 응? 생일이 언제야?”
“그깟 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말 그대로 의미가 없어 의미가 없다고 했을 뿐이건만. 그 말을 들은 어린 친우의 눈이 세상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축하도 받고 선물도 받고 케이크도 먹는 날인데. 아주 좋은 날인데. 왜 의미가 없어?”
“더 좋은 날이 많으니까.”
“생일보다도?”
“너와 함께 있잖아. 그 모든 날이 내겐 가장 좋은 날이라.”
“앗, 그래……? 아니, 말 돌리지 말고!”
팡. 그의 어린 주인이 이불 더미 속에서 사납게 발을 구른다. 성질 나쁜 오리처럼 입이 톡 튀어나왔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더 화나지 않게 하는 게 상책이다.
여기서 더 토라졌다가는 오늘 저녁을 같이 먹을 기회를 놓칠지도 모르니까.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서운 것 앞에서, 대악마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없어.”
“생일이 언제냐니까 뭐가 없대?”
“생일. 없다고.”
“……그게 왜 없어?”
“그냥 없어.”
원래부터 없었는지. 있었으나 의미가 없어 사라졌는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없었으니까. 아주 오랜 시간.
생일이란 누군가 기억해주고 챙겨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다른 이가 아니라 하다못해 자기 자신이라도.
그러나 세상 그 어느 마족도 고작 생일 따위 행사에 모두 모여 축하를 건넬 정도로 말랑한 삶을 살아가진 않는다.
하여, 그에게 의미 있는 생일이란 사계절 속 오로지 하루.
“네 생일이 있고. 네가 그날 행복하다면 그만이지.”
진정 그러했다. 그런데 그의 작은 꼬맹이는 그 말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브?”
“…….”
또 무슨 생각이 저 작고 예쁜 머릿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
바다 빛 눈동자는 안쓰러움, 슬픔, 동정…… 그가 어디에서도 받아볼 수 없는 감정을 가득 담았다.
‘이것도 꽤 좋군.’
그는 애써 정정하지 않았다.
작은 친구의 관심 한 자락은 그에게 늘 갈구하는 대상이었다.
그것이 친애든, 동정이든.
이벨리아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라면 꼬리 아홉 달린 여우라도 될 준비가 되어 있는 악마는 짐짓 서럽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러자 그의 상냥한 주인은 곧바로 이불 더미를 휙 박차고 나와 톡톡 어깨를 건드렸다.
“새, 생일이 없어서 슬픈 거지?”
“……괜찮아. 평생 없었으니까.”
“펴, 평생? 단 한 번도 없었어?”
“응…….”
“허억!”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어깨에 작은 손을 얹고 짤짤 흔들었다.
“오늘…… 아니, 아니야. 오늘 말고 닷새 뒤로 해! 앞으로 내 생일 일주일 뒤는 아스 생일인 거야!”
“음?”
“자! 토끼 이제 집에 가!”
“응?”
“가! 얼른! 나 바빠!”
“잠깐, 저녁…….”
- 쾅.
얼떨결에 쫓겨난 채 뒤로 쾅 닫힌 문.
아가레스가 중얼거렸다.
“관심 한 자락 달라 아양 좀 떨었더니. 이리 매정하게 쫓아내 버리실 줄이야.”
그 냉정함조차 달콤하다면, 난 진정 미쳐버린 건가.
***
- 콰앙!
“얍! 나 왔다!”
“너, 너, 너 그 버릇 좀 고치랬지!”
“잔디는 잔디 주제에 깜짝깜짝 잘도 놀라네!”
마치 자기 집인 양 성큼성큼 들어와 소파에 방만하게 걸터앉은 이벨리아는 기다란 병을 손에 쥔 채 부르르 떠는 잔디 악마를 보며 키득 웃었다.
“밥풀 주제에 대체 어디서 예절 교육을 받았는지 버릇은 더럽게 없어서!”
“너 지금 우리 가문 무시해? 예절 교육 철저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데!”
마르바스는 몰랐다. 이벨리아가 배운 예절이라는 게 대부분 조아려라, 갈라져라, 꿇어라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 정도라는 걸.
제국 유일 공작가의 예절 교육이란, 떠받드는 방향보다는 군림하는 방향으로 이뤄짐이 당연했다.
소파에서 쭈욱 기지개를 켠 이벨리아가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잔디. 너 그거 들었어?”
“뭐.”
“내가 악마 하나를 아주 묵사발 내버렸다는 소문.”
“들었다. 아주 처참하게 발랐다며.”
“자꾸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 다음 차례는 네가 될 거야.”
마치 폭군이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를 핍박하기라도 하듯, 까닥 턱짓하며 위협한다.
“……너 진짜 인성질 한 번 무시무시하다.”
“헹.”
“그런 야박한 감탄사는 또 어디서 배웠어.”
생긴 건 성화(聖畫)에 나올 아가 천사처럼 생겨서는. 인성은 아주 대악마 뺨친다.
“그래서. 오늘은 왜 쳐들어왔는데.”
“아. 잔디 놀리는 게 재밌어서 깜빡 잊었다!”
이벨리아는 빵빵한 가방 하나를 주섬주섬 뒤적여 종이 뭉치를 꺼냈다.
“네가 도와줄 게 있어.”
“뭐든 안 도와. 돌아가.”
“아스를 위한 건데?”
“주군 팔아먹지 마라. 이 요망한 밥풀. 돌아가.”
“진짜야! 아스 깜짝 파티를 해줄 거거든!”
“주군을 깜짝 놀라게 하자고? 너 죽고 싶어?”
“그냥 놀라게 하는 게 아니라 생일파티로 깜짝 놀라게 하는 거지!”
“혹여 놀라신다면 그 자리에서 죄다 소멸시키실걸. 땅콩 너만 빼고.”
별안간 드는 합리적인 의심에 마르바스가 인상을 팩 구겼다.
“너 혹시 지금 너 안전하다고 우리 안전은 개무시하냐?”
“응?”
“맞네, 맞아. 이 못된 땅콩이 진짜.”
주군께서 자기를 해할 리는 없다고 확신하니까 이런 대범한 일을 꾸미는 거네. 감히 주군을 놀라게 하면 악마 여럿 죽어나갈 줄도 모르고.
마르바스가 시위라도 하듯 주먹을 쥐었다.
“악마의 생명권 존중하라- 존중하라-!”
한편 이벨리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서 안전과 생명권이 왜 나와?
아. 설마…….
이 낭만 없는 악마들…….
“잔디 모지리 너 깜짝 파티가 뭔지 모르지.”
“깜짝 놀라게 한다며.”
“냅다 가서 와아악 놀라게 하는 게 아니야.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주거나 축하를 해줘서 행복하게 해준다는 의미지!”
주군을 행복하게 해드린다고? 축하 같은 말랑한 걸 해서?
마르바스가 듣기에 그보다 더 허황된 이야기는 없었다.
주군께서 어떤 분이신가.
영토를 가져다 바쳐도, 적의 목을 가져다 바쳐도 한결같이 심드렁하시던 분 아니던가.
그런데 저 빵빵한 볼. 빛나는 눈동자는 확신이라도 하는 듯했다.
저 조그만 손으로 뭔가 해드리면 주군이 행복해하실 게 분명하다고.
괜히 씁쓸해진 마르바스가 입맛을 다셨다.
‘뭐냐. 진짜. 나도 못 찾아드린 주군 행복을 네가 뭔데 대뜸 갖다 드리냐고.’
무려 주군께 꽃잎이며 쿠키며 별 해괴한 선물을 맥락 없이 드릴 때부터 알아봤다.
이 인간 꼬맹이가 제대로 또라이라는 것은.
그리고 주군께서 그것들을 제법 기꺼워하신다는 것 역시.
‘잠깐. 혹시 이러다 나중에 내가 이 땅콩을 주군으로 모실 일이 생기는 건…….’
주군께서 이 땅콩한테 마계를 줘버리신다거나……?
아니면 성질 더러운 이 땅콩이 마계에 쳐들어와 자기 손으로 왕관을 날름 써버린다거나……?
‘에이! 웬 재수 없는 생각을!’
그럴 리가 없다.
설마. 설마 대악마인 내가 이깟 땅콩 앞에 무릎 꿇는 날이 오진 않겠지.
왠지 모르게 드는 오한에 부르르 고개를 저은 마르바스가 부정 탄 것을 없애준다는 주문을 힘차게 외쳤다.
“퉤퉤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