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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세계에 갇힌 죄수 (161/323)


161화: 세계에 갇힌 죄수
202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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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지하 수로.

숨을 들이쉴 때마다 습한 공기가 폐를 불쾌하게 채웠다.

넓은 공동 주위로 흐르는 물은 폐수나 다름없이 악취가 났다.

타다닥-.

찍!

알 수 없는 찌꺼기를 입에 물고 뛰던 생쥐 한 마리가 무언가를 밟고 그대로 절명했다.

그 공동 한 가운데. 깊게 후드를 눌러쓴 사내는 흔적 없이 사라진 생명을 무감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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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조심하지 그랬느냐.”

그르렁 낮게 웃은 사내가 손에 쥐고 있던 플라스크 병을 흔들었다. 오색의 무언가를 넣자 희뿌옇게 새어 나오는 연기.

그 이후로도 한참 달그락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실험도구들 사이로, 돌연 세로로 검은 줄이 그어진 눈 하나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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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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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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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안 놀라네. 큰 사고 한 번 겪더니 아주 용감해졌어?”

이명, 예언의 귀공자.

3위 악마 밧사고(Vassago).

어린 소년의 얼굴을 하고 광대를 표방하듯 세로줄 그려진 눈을 휘어 접으며 악마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타닥, 타닥, 춤을 추듯 가벼운 걸음이 산더미처럼 쌓인 연구자료를 이리저리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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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앉지 그러십니까. 제 연구실이 어지럽혀지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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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그제야 발밑을 내려다본 밧사고가 마치 공을 차듯 서류 더미를 퍽 차버렸다.

손에 집히는 플라스크도 단숨에 터뜨리고는 해사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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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패악 부리고 싶은 날이라. 네가 이해해.”

또다시 흥얼흥얼 들려오는 콧소리.

심사를 뒤틀리게 해서 저 콧노래가 멈추는 순간 자신의 심장도 멈출 것을 알았기에, 사내는 그저 조촐한 나무 의자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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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로 무거운 걸음을 다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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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서를 아주 열심히 모으고 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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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쥘 수 있는 것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쥐어야 할 처지라.”

통통 뛰어 사내가 앉은 의자 뒤로 다가간 악마가 고개 숙여 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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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내 부하. 능력 없는 인간 때문에 정령왕에게 맞아 순살이 되어버렸네.”

안타깝다는 취지의 문맥과는 달리 키득키득 들려오는 웃음소리.

성정 잔혹한 이 대악마에겐 휘하 악마가 죽은 것조차 그저 유흥거리에 불과했다.

고서(古書)에서 평하길, 인간이 상상하는 악마에 가장 가까운 존재.

과연 옛 현인들의 말씀 틀린 것 하나 없다고 생각하며, 사내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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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어도 어려웠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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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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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을 알려주시고 나와 계약을 맺을 생각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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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엥. 싫어. 난 못생긴 인간하고는 계약 안 해.”

키득, 웃으며 손가락을 탁 튕기자, 꺼질 듯 흐리게 흔들리던 호롱불이 일시에 부피를 키웠다.

- 화르륵.

타오르는 불빛 사이로 보이는 사내의 모습은 처참했다.

왼팔에는 은으로 만든 의수. 오른쪽 눈에는 두꺼운 안대. 또 얼굴 반쪽에는 짙은 화상.

한때 에르카디아 제국의 후작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자이나- 작금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동정을 느끼지 못하는 악마는 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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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 불쌍해라. 아르티나한테 뼈를 세게 맞아 순살이 되어버렸네.”

당최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알 수 없는 농담을 뱉으며, 밧사고가 전(前) 데퐁트 후작의 연구자료를 뒤적였다.

불구가 된 이후 사망을 가장하여 이 지하 수로에 틀어박힌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 시간 내내 온갖 연구에 매진한 덕인지 사방이 두꺼운 노트로 가득했다.

밧사고는 그중 가장 손때가 많이 묻은 노트를 검지 하나로 펼쳤다. 훅 끼쳐오는 먼지에 과장되게 코를 틀어막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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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야?”

그려진 것은 커다란 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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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을 만드는 물레는 아닌 것 같은데.”

데퐁트의 전(前) 가주, 루시우스 데퐁트가 후드 아래로 목을 울리며 웃었다.

저것은 자신의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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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보셨습니다. 보통의 물레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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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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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물(神物)입니다. 이 세계의 시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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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내내 가벼운 태도를 견지하던 밧사고가 콧노래를 멈췄다.

전(前) 데퐁트 후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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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지 않을 리가 없지.’

연금술사들의 지식이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그 어떤 존재의 것보다 방대하다는 것은 저쪽도 알고 있을 터.

그러니 저 신물이 그저 허구가 아니라는 것도 짐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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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를 잘 물었군.’

노련한 수완가인 루시우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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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 돕는다던 저와의 계약을 파기하고자 오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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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넌 이제 쓸모가 없는 쓰레기니까.”

그런데 이걸 보니 조금 고민이 되긴 하네? 밧사고가 턱을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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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왕을 뵙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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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데려가면 내 목이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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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제게는 아직.”

후작이 은으로 만든 의수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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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식이 있으니까요.”

 

***

심드렁한 표정의 붉은 머리 사내 뒤.

송곳니 드러낸 석상이 양옆을 지키는 거대한 돌문이 자리하고 있다.

문에 세로로 깊게 음각된 글자는 경고. 또는 위협.

「너머엔 오로지 무궁(無窮). 무극(無極)의 가책을 맞이하라.」

오로지 마계의 지배자만 개폐할 수 있는 곳.

아홉 지옥의 입구.

인간의 몸으로 아득한 너머를 마주한 데퐁트의 전(前) 가주, 루시우스 데퐁트가 바닥에 꿇어앉아 이마를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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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옥(九獄)의 주인, 게티아(goetia)의 기둥을 뵙습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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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눈길 닿는 것만으로도 혼이 눌리듯 위압적인 기운이 쏟아졌다.

말 그대로 ‘격’이 다른 존재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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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거래를 하자 했다고?”

꿀꺽. 긴장으로 인해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약을 팔듯 거래를 제안해서는 저 지옥문 너머로 내던져질 터.

루시우스 데퐁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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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감히 계약을 청할 주제가 되진 못하니, 거래를 구하고자 합니다.”

마왕, 바알이 픽 웃었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주제도 분수도 모르는 것은 한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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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과거 나의 충복과 했던 거래를 저버렸다.”

데퐁트는 인간계의 기밀을 마계에 제공하여 아르티나의 멸문을 돕는다.

상응하는 대가로, 마계가 인간계를 집어삼킨다 하더라도 데퐁트 가문의 지위와 안위는 보장한다.

나름 수지맞았던 그 거래가 어그러진 것은 모두 이 모자란 인간이 헛발질하다가 자멸해버렸기 때문이다.

경멸하는 듯한 시선이 눈앞의 인간을 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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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패라서 죄송합니다- 울며 빌진 못할망정 건방지게 거래를 제안해?”

그 말에 루시우스 데퐁트가 고개를 들려 하자, 자비 없는 기운이 단번에 머리를 찍어눌렀다. 쿵. 이마가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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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쓰레기와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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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겐 아직 금제탑의 지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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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탑은 1차 인마전쟁 당시 사라졌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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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한 이가 바로 접니다. 그리고 저 역시 금제탑의 일원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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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이 눈속임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바닥에 닿은 머리가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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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 간 계승된 금제탑의 지식은 땅을 아우르고 하늘을 열지요. 그런 지식을, 또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연금술사들을 어떻게 제 손으로 모두 태워 없애겠습니까. 그건 이 세계를 위해서라도 절대 대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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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돌렸다는 말을 장황하게도 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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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금제탑이 불타고 적지 않은 연금술사들이 죽기는 했습니다만…… 대의란 것은 늘 소수의 희생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금제탑의 지식과 이를 운용할 수 있는 연금술사들이라…….

바알이 천천히 턱을 쓸었다.

폐기할 쓰레기인 줄 알았더니. 재활용 정도는 가능할 수준으로 보인다.

얼마 전 협곡 근처를 배회하는 근본 없는 연금술사 몇을 데려오기는 하였으나, 확실히 금제탑 출신들이 아니어서 그런지 그다지 성에 차지 못했다.

기껏해야 하는 일이라곤 마물들의 베인 상처가 다시 보글보글 아물게 하는 정도이니.

지배자 특유의 태도로 여유롭게 주판을 튕기던 바알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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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승낙과 동시. 루시우스 데퐁트의 앞으로 계약서 하나가 두둥실 날아왔다.

계약 내용이 붉은색으로 빛났다.

1. 루시우스 데퐁트(이하 ‘을’)는 현 구옥(九獄)의 주인(이하 ‘갑’)에게 연금술에 대한 일체의 정보 및 능력을 아낌없이 제공한다.

2. ‘갑’은 ‘을’이 속한 가문의 부흥을 돕고 안위를 보전한다.

3. 계약 파기의 귀책 사유를 지닌 자는 혼으로 그 대가를 치른다.

가장 아래에는 큼지막한 인장이 찍혀 있었다.

둥그런 두 개의 원, 교차하여 이를 가로지르는 선. 그 가운데에는 잔뜩 가시가 박힌 역십자가. 마왕 바알의 상징이다.

바알이 까닥 고갯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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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어. 피로.”

루시우스 데퐁트는 망설임 없이 엄지를 깨물어 피를 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문의 부흥.

그 안에는 적대하는 아르티나에 대한 처단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니.

증오스러운 그것들을 없애고 만인지상의 자리에 설 수만 있다면…….

허공에 굳건히 뜬 계약서에 종족과 제국을 배신한 이의 날인이 찍혔다.

동시에 낮게 웃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를 짓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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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도구 정도는 되었으니 고개 들어도 좋다.”

포도 한 알을 입에 머금은 바알이 왕좌에 방탕하게 기대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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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대의 연구 중 신물에 관한 것이 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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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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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관한 것이라고?”

바알이 검지를 까닥하자 루시우스 데퐁트는 무릎걸음으로 걸어 연구 노트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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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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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축을 다루는 신물입니다. 물레에 혼을 바치면, 물레바퀴는 시간을 자아내거나 감아내며 돌아가지요.”

바알의 눈썹이 위로 슬쩍 솟았다.

확실히 금제탑의 지식 범위는 방대하다.

감히 한낱 인간이 신을 자처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신물(神物)의 존재를 알아내고, 또 탐을 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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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자면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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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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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왜 연구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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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눈. 잃은 팔. 잃은 얼굴, 잃은 지위…… 모든 것이 후회되어.”

시시한 이유다. 바알은 금세 흥미를 잃고 혀를 찼다.

높은 격을 가졌기에 인간보다 많은 것을 보는 마왕은, 안쓰러운 버러지를 위해 드문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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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찾는 이 신물(神物)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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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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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유능력은 이동이지. 다른 세계에 가보니 알겠더군.”

이 세계는 여타 세계와는 아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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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여긴 적 없나. 시공간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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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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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면 시간이고 공간이면 공간이지. 왜 우리는 시공간이라는 말을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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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공간의 연속이라 알고 있습니다. 우리 시야에 보이지 않는 공간을 설명하기 위해, 미력한 인간들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가져다 붙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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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의 명성이 완전히 헛것은 아니로군. 그렇다. 시간은 공간의 연속이다. 즉, 과거의 공간. 현재의 공간. 미래의 공간이 있고, 그것을 파노라마처럼 이어붙인 것이 인간들이 정의하는 시간이지.”

끄덕이는 데퐁트 후작을 보며 바알이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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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에는 과거의 공간, 현재의 공간, 미래의 공간이 있었다.”

버러지이지만, 말이 통하는 이를 싫어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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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하는 신에 의해, 혹은 신물에 의해, 또는 어느 초월자의 간절한 염원에 의해. 그 공간은 잘리고, 돌아가고, 편집되기도 했지.”

결과로 누군가는 삶의 끝에서 회귀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미래를 엿보고 돌아오기도 했다.

후작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하나 남은 눈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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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미래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바알이 흐리게 웃었다.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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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연한 게 이 세계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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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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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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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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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시간축 자체가 사라졌어.”

과거는 존재의 기억 속에 있고. 미래는 존재의 환상 속에 있는 것 이외에.

실질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의미하는 그 시공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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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는 오롯이 현재만 안고, 오로지 앞으로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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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시공간이 없는 세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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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연구한 그 신물(神物). 그것을 이미 누군가 부숴버렸다고 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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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누가 신물을 부순단 말입니까? 그건 단순한 물레가 아닙니다. 물레의 형상을 한 시간축 그 자체이지요!”

바알이 등받이에 눕다시피 기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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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들 아나. 다만, 누구인진 몰라도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겠지.”

감히 시간을 붙박고 신물을 파괴한 죄업은 억겁을 걸어도 다 씻지 못할 것이니.

***

깨어질 듯 내리쬐는 햇빛.

아가레스는 비밀기지의 나무 밑에서 입을 아아- 벌리고 있는 이벨리아에게 시선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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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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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열매 곧 떨어질 것 같아. 내 입으로 드루와, 드루와!”

하여간 엉뚱하다.

위태롭게 달랑이던 열매 하나가 쏜살같이 입속으로 추락했다.

오물오물 물어 금방 삼켜버린 이벨리아가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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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이 나무 열매 아주 최고야.”

또 다른 곳으로 위치를 바꿔 아아- 입을 벌린다.

옆에 놓인 돌에 걸터앉으며, 대악마는 듣고 싶은 이름이 있어 친우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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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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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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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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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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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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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가레스.”

부르는 언어에 그에 맞는 답이 들려온다는 것은 제법 기꺼운 일이다.

그만큼 많은 것을 나누었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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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빗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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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떨어지는 열매를 잡아 건네주며, 이 세계의 가장 오래된 죄수는 아양 떨듯 요요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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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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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말로. 이브.”

신이 변덕 어린 처단자요, 세계가 해방 없는 감옥이면 어떤가.

간수가 너라면.

나는 이 창살 안에 영원을 더 머물러도 기꺼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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