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네게 잠겨 죽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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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네게 잠겨 죽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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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네게 잠겨 죽어도 좋아
2022.04.11.
깜박. 눈을 감았다 떠도 여전히.
깜박. 조금 더 길게 감았다 떠도 여전히.
올곧게 바라보는 황금빛 눈에는 친애가 가득 담겨 있다.
마주하던 이벨리아는 또르르 시선을 피했다.
‘뭐가 저렇게 왕자님처럼 생겼담.’
동화책 공장 공장장이 그려준 동화책에 보면, 공주님은 꼭 저런 멋진 왕자님과 혼인했는데.
‘누군지 몰라도 나중에 토끼랑 혼인할 공주님은 아주 좋겠네.’
우리 토끼는 멋지고 다정하고 상냥하니까.
한겨울에 오렌지주스가 먹고 싶다고 하면 구해올 만큼 세심하고.
하기 싫은 것은 그 무엇이라도 강요하지 않을 만큼 배려심 있기까지.
“…….”
괜히 빼앗기는 기분이다. 이벨리아가 성난 오리처럼 입을 삐죽였다.
“너 그런 왕자님 표정 그거 금지야.”
“명하신다면.”
언젠가 토끼가 좋은 누군가를 만나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면 좋겠긴 한데…….
이기적이더라도 그런 날은 최대한 늦어졌으면 좋겠다.
내가 가장 친한 친구로 조금 더 오래 남을 수 있게.
‘……이게 바로 질투인가!’
친한 친구가 또 다른 친구를 사귀는 것을 시기하는 그런 마음인 건가!
‘세상에. 나 엄청 밴댕이 소갈딱지였잖아!’
차마 속마음을 고스란히 말하지는 못하고, 이벨리아는 다만 투정을 부렸다.
“너 그런 충성스러운 태도 그것도 다 금지야.”
“네게도?”
“내게만 해.”
“분부대로.”
이유 모를 투정마저도 기껍다는 듯.
아가레스는 여전히 온기가 담뿍 담긴 금빛 눈을 살짝 휘며 웃었다.
저렇게 태연하니까 더욱 심술이 난다.
이벨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토끼 나중에 공주님을 만나게 되면 나한테도 꼭 알려줘야 해.”
“음?”
“동화책에 보면 토끼 같은 왕자님은 나중에 멋진 공주님을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구.”
황금빛 눈이 더욱 호선을 그렸다.
“그래서?”
“나중에 토끼가 공주님을 만나게 되면 미리 알려줘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거 아니야.”
“무슨 준비.”
“나랑 제일 친하던 토끼를 놓아주는 준비.”
“놓아? 나를?”
나른하게 턱을 괸 맹수가 금빛 눈을 애처롭게 내리깔았다.
“진명(眞名)까지 가져가시고 이리 내치시면 서운한데.”
이내 경건하게, 또 충성스럽게. 마치 주인에게 복종하는 기사처럼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여 충의를 표한다.
“내가 섬기는 킹은 앞에 있잖아. 지금.”
“너어, 이 요망한 토끼. 그런 백 점짜리 대답도 다 금지야!”
“예, 나의 폐하.”
이익. 나는 심각한데 계속 장난이나 치고.
이벨리아는 자고 있는 엔리르를 답삭 집어 꼬리로 아가레스의 팔을 탕탕 내리쳤다.
어린 친우를 올려다보며, 대악마는 마치 배부른 포식자처럼 미소 지었다.
그에게 ‘사랑’이란 단 한 존재에게, 단 하나의 형태로 가닿으면 족했다.
네게.
잠겨 죽어도 좋을 경배(敬拜)로.
***
이벨리아와 아가레스가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과 달리, 루드비히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기사들을 지휘하랴. 불안해하는 제국민들을 달래랴. 복구에 쓰이는 예산을 검토하랴.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명 배후가 있을 텐데.’
이 사달을 일으킨 이를 찾느라.
하필 무력 없는 이들이 모인 축복제에. 그것도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시간에. 악마가 버젓이 나타난 것을 우연이라 보긴 힘들었다.
일사불란하게 천막을 들어 올리고 돌담을 쌓는 기사들 사이로 황가의 축복이라 불리는 눈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깨닫는다는 홍안(紅眼). 오래지 않아 수상한 이 하나를 잡아낸다.
‘저건가.’
기사들을 돕는 제국민들 사이로 멍하니 선 자.
일견 수도 한복판에 악마가 나타났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혼이 완전히 나가 흡사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은…….
‘악마의 서를 통한 계약은 서로 혼을 묶는 것이라 했지.’
긴밀히 연결되었던 악마가 손쓸 새도 없이 소멸해버렸으니, 웬만한 인간의 정신으로야 잠시나마 작지 않은 충격을 입는 것이 당연했다.
품에 안은 저 너덜너덜한 책이 필경 악마의 서일 터.
루드비히는 연회에서 곧바로 뛰쳐나오느라 아직 손에 애피타이저용 나이프를 들고 있는 이크리안에게 눈짓했다.
“저거 잡아.”
“예이.”
차기 대마법사라 불리는 이. 이런 기초 마법 따위엔 연산조차 필요하지 않다.
이크리안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마나가 숨 쉬듯 배열되고.
마치 장난치듯 식사용 나이프를 휙휙 휘두르니 발밑에서 푸른 넝쿨 줄기가 뻗어 나와 멍하니 선 사내의 목을 세게 쥐고 바닥에 꿇어 앉혔다.
임무를 완수하고도 마치 성난 뱀처럼 쉭쉭대는 넝쿨들. 루드비히가 의아하다는 듯 돌아봤다.
“좀 진정하지 그래. 오늘따라 거칠군.”
“심혈을 다해 만든 마법진이 부서졌으니 마법사로서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무슨 마법진이…… 아.”
제작자 이크리안 카시스라고 적힌 그 해괴한 마법진.
“말이 나와서 말인데. 대체 요즘 뭘 하고 다니는 건가.”
“혹시 보셨습니까?”
“두더지가 신명 나게 튀어 오르는 마법진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쓸데없이 진짜 같은 라이칸슬로프가 튀어나오는 마법진을 말하는 건가.”
“오. 두더지는 신명 났고 라이칸슬로프는 제법 진짜 같았군요.”
역시 내 실력. 참으로 뿌듯하다.
자아도취에 빠진 이크리안을 보며 루드비히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그런 마법진을 만들고 다니는 거지?”
차기 마탑주는 떼놓은 당상이라고 소문 자자한 불세출의 천재께서 대체 왜 두더지가 뿅 튀어나오는 유아 놀이용 마법진이나 그리고 계시냔 말이다.
이크리안이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여우같이 곱게 눈을 접으며.
“렐리안의 마법 실력이 만만치 않더군요.”
“서적을 살 돈이 부족한가?”
“아뇨. 서적이야 전하께서 두둑하게 얹어주시는 봉급으로 충당 가능한데…….”
“그럼 왜.”
“이거 아르칸에게는 비밀입니다?”
“카시스 영애의 이미지는 지켜주지.”
고개를 끄덕인 이크리안이 소리 낮추어 속삭였다.
“렐리안의 비밀 연습실에서는 날마다 대(對) 마법 허수아비들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갑니다.”
“그거 아주 비싸지 않은가.”
“마력 측정과 동시에 주변을 파괴하지 않도록 흡수까지 도우니 금값도 그런 금값이 없지요.”
“그걸 수도 없이 부수고 있다고? 그 카시스 영애가?”
“부수다 뿐입니까. 얼렸다 녹였다 태웠다 가뒀다 난리도 아닙니다.”
“허어…….”
“얼리면서 공녀님을 한 번 외치고. 태우면서 공녀님을 한 번 외치고. 이러다 우리 렐리안이 흑마법사로 전직하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입니다.”
루드비히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카시스 영애를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얌전하다가, 이벨리아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확 돌아버리는 것이…….
“광신도 같긴 하더군.”
“동감입니다. 여하간 얌전하던 여동생이 학살자처럼 허수아비들을 도륙하는 바람에 유일한 후원자인 제 허리가 휘는 중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크리안이 두 손을 앞으로 쫙 뻗었다.
“가불 좀 해주십시오. 전하.”
“내 살다 살다 후작가의 영식한테서 가불 소리를 들을 줄이야…….”
루드비히가 고개 젓고 돌아서자, 이크리안이 졸졸 따라붙으며 마치 불경 외듯 읊었다.
“싸다. 싸. 차기 마탑주의 마법진.”
“안 산다.”
“골라-. 골라-. 바닥에서 두더지가 튀어나오는 귀여운 마법진부터.”
“안 산다.”
“생활 결계까지 없는 게 없는 마법진 공장 공장장.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안 산…… 잠깐. 결계?”
오호. 결계에 관심이 있으시군. 돈에 환장한 여우의 눈이 번뜩 빛났다.
“소형 결계부터 대형 결계까지. 색도 무지갯빛으로 가능합니다. 거르고 싶은 대상도 지정할 수 있지요.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 겁니다?”
“넓은 범위에도 가능한가.”
“산을 덮을 수도 있지요.”
“……그 결계. 사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전하. 자색 눈이 유려한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어디에 치면 되겠습니까.”
“이브의 비밀기지.”
“거기엔 이미 결계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얼마 전에 심사 뒤틀린 대악마 하나가 부숴버려서 말이지.”
어딘지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듯한 비밀기지의 이유를 물으니, 이벨리아가 답했었다.
자신이 독약을 먹는다고 말하는 바람에, 미쳐버린 흑표범처럼 날뛰던 아가레스가 결계를 부숴버렸다고.
“땅 도둑은 자칫하면 야생동물에게 물려갈 테니 결계가 꼭 필요하다.”
“……전하의 땅 도둑께서는 무려 대정령사십니다만.”
“부스러기만치 작으니 멧돼지가 먹이라고 착각하고 낚아채 가기 딱 좋지.”
“예. 뭐. 예.”
최근 이크리안은 새롭게 깨달음을 얻었다.
이 제국에는 공녀님 광신도들이 몇 있는데, 그들과는 공녀님에 대한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은 렐리안이 부술 새 마법 허수아비나 잔뜩 사주면 그만이다.
“멧돼지가 부스러기 공녀님을 물어가지 않게 마법진을 그리려면…… 어디 보자.”
천재라는 타이틀답게 온갖 연산에 익숙한 이크리안은, 마법진 설치에 필요한 비용을 아주 신속하게 계산해냈다.
“가격은 200만 리브르입니다.”
“200만?!”
“예, 호갱…… 아니, 고객님.”
“여봐라! 이 사기꾼을 지하 감옥에 냉큼 가두어라!”
***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진짜 가두실 줄은 몰랐는데.”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고문하여 실토받을 때 사용하는 외따로 떨어진 감옥.
촘촘한 창살 안에 갇힌 이크리안이 황망하게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뭐라도 캐 봐. 그러면 내보내 준다니까.”
“여기 고신 전문가들이 즐비한데 제가 뭘 더 캡니까.”
“말이 안 통해. 뭐라 계속 얘기하긴 하는데. 무슨 말인지를 모르니 고문해봤자지.”
투박한 의자에 양팔과 양다리가 묶인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내뱉는 죄수.
루드비히와 기사들이 이 악마의 서는 어디서 얻은 것인지.
축복제에 악마를 지상으로 불러내어 이루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제국을 다시 전쟁의 구렁으로 밀어 넣고자 하는 다른 세력이 존재하는지.
물었으나 계속해서 알 수 없는 구절만 읊조린다.
“그대는 온갖 고서를 섭렵하였으니 혹시 알지도 모르잖나.”
“저 정도의 귀한 인력을 고작 번역 따위에 이렇게…….”
“마법진에 이번 일까지 얹어서. 250만 리브르.”
“현명하게 쓰시는 분은 전하밖에 없으실 겁니다. 이 제국에 영광 있으라.”
“……내가 인재를 얻은 건지 여우를 주운 건지, 원.”
“자. 어디 250만 리브르짜리 개소리를 번역해볼까.”
이크리안이 씩 웃으며 죄수에게 다가가 거칠게 턱을 들어 올렸다.
“다시 짖어볼래?”
“으어어…….”
텅 빈 죄수의 눈동자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채 가늠하지 못하는 듯했다.
죄수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자. 흐릿한 등불이 내리는 위치에서는 눈동자 안에 아스라한 술식이 보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읽은 이크리안이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계약한 악마가 소멸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정신을 빼진 않을 텐데.”
“그러면?”
“애초에 정신을 붕괴시킨 뒤 악마의 서를 쥐여준 겁니다.”
빠르고 낮게 중얼거리는 죄수의 입가에 이크리안이 귀를 가져다 댔다.
“ㅡㅡㅡㅡ.”
분명 지금 통용되는 언어는 아니다.
이크리안은 몇 개의 음절을 통해 유추했다.
‘에트루리아(Etruscan)어. 이건 추가수당 받아야겠는데.’
에트루리아. 북쪽 금기의 협곡 주변에 실존했다 전해지는, 기원 불명, 특징 불명의 말 그대로 고대(古代) 문명.
들리는 음절을 하나하나 떼어 기재하던 이크리안은 이내 마력을 담은 백묵으로 바닥에 작은 소환진을 그렸다.
- 탁.
발을 가볍게 한 번 구르자 이크리안의 마력을 닮아 선명한 보랏빛으로 빛나고.
곧이어 이크리안의 무릎까지 닿을 정도로 두꺼운 책 하나가 둥실 떠올라 떨어졌다.
“그건 뭔가.”
“마탑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서입니다. 이제는 사멸한 언어들을 연구한 책이지요.”
“마탑 기록은 외부 반출이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
“천재는 뭐든 예외인 법입니다, 전하.”
“잘나셨군.”
“공기 마시듯 들었던 칭찬이라. 다음번엔 더 참신한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약 두 시간.
이미 연구된 극히 일부 글자를 토대로, 연구되지 아니한 글자의 의미를 추정하여, 이크리안은 죄수의 말을 번역했다.
“신들이 온다. 악마의 손을 잡고.”
이크리안이 어쩌시겠냐는 듯 루드비히를 돌아봤다.
“신이 말 그대로 저 하늘에 계신 신을 의미하는 건 아닐 테고.”
“너 자신이 신임을 알라. 금제탑 연금술사들의 첫 계율이지요.”
루드비히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높게 쳐줘봤자 타 왕국의 첩자 혹은 몰락한 왕국의 잔당이 벌인 일인 줄 알았건만.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니군.’
1차 인마전쟁 당시, 제국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짓밟아버린 연금술사들의 금제탑.
그리고 악마.
두 집단 사이에 어떤 이해관계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일 진정 거래가 이뤄진 것이라면…….
‘마계만 상대하기도 쉽지 않은데.’
고심에 빠진 루드비히를 바라보며 이크리안이 생긋 웃었다.
“사직서 제출하면 언제쯤 수리되겠습니까?”
“왜. 악마와 연금술사라니 새삼 두렵기라도 한가.”
“녹봉쟁이에게 악마와 연금술사보다 두려운 것은 야근입니다.”
보아하니 당분간 뼛골까지 다 갈아드실 것 같은데.
“금제탑과 악마가 손을 잡았을지 모르는 시점에서 그대 같은 인재가 사직서라니.”
“그래서 쓰는 겁니다, 사직서. 지금 발 못 빼면 일하다 시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녹봉 인상은 어떤가. 두 배.”
“흐음…….”
“세 배.”
“그 사직서 지금 바로 막 찢어버렸습니다.”
역시 제가 줄을 잘 섰다니까요.
너스레에 픽 웃은 루드비히가 검을 쥐고 죄수에게 다가갔다.
이내 망설임 없이 정확하게 휘둘러지는 검.
일격에 절명한 죄수가 의자 위에서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얼굴에 튄 핏물을 대충 닦아낸 루드비히가 지하감옥을 나서자, 따르던 이크리안이 물었다.
“집무실로 돌아가십니까?”
“연무장.”
“산더미 같이 쌓인 서류는 어쩌시고요.”
“새벽에.”
“잠은 언제 주무시고요.”
“죽어서.”
“그 빌어먹을 명언의 출처가 전하셨습니까.”
최근 아카데미 교수들이 잠은 죽어서나 실컷 자라며 학생들을 채찍질한다더니만.
이크리안의 ‘그렇게 살지 마세요’ 외침을 흘려들으며, 루드비히는 검 한 자루를 챙겨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평소보다 강하게 힘이 들어간 검이 짚 인형을 사선으로 내리쳤다.
‘나도 모르게 이브를 생각했어.’
마계와 금제탑이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그 악재를 듣자마자.
‘이브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정령왕과 대악마가 보호하는 아이니까.
이브가 제국을 적대하지 않는 한, 이 제국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고.
‘네가 아무 의무 없이 평안할 수 있는 제국을 만들자 다짐했는데.’
그런 황제가 될 거라고 수도 없이 되뇌었는데.
‘나도 모르게 네게 의지하고 있었구나.’
……역겹다.
여전히 부족한 내가.
어쩌면 기어코 네게 의무라는 굴레를 씌워버릴지도 모르는 내가.
제국을 지키기 위해 혹여라도 널 떠밀게 될지도 모르는 내가.
상념이 휘돌자 루드비히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니. 그딴 어중간한 황위라면 줘도 안 가져.”
보다 힘이 들어간 검이 이내 방어 마법이 걸린 짚 인형을 깔끔하게 베어낸다.
어느새 열다섯. 단단해진 소년의 몸 위에 흐르는 땀방울을 시원한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검을 툭 내던지며. 루드비히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난 아버지 같은 황제는 되지 않아.”
제국인가. 핏줄인가. 너인가.
어느 것이 가장 중한지 결정하기 위해 어쭙잖은 저울질을 할 생각은 없다.
감히 널 저울 위에 올린다면, 반대편에 오른 것이 널 제외한 모든 것이라 하더라도 네 쪽으로 기울 것은 자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