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대악마의 진명(眞名) (159/323)


159화: 대악마의 진명(眞名)
2022.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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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호기롭게 말했건만. 물덩이 계약자가 미동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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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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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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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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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이 온다. 감이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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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졌구나!’

자기 잘못은 또 귀신같이 알아서, 이벨리아가 축 처진 고양이 눈망울로 울망울망 엘라임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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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임, 걱정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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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안 했겠습니까. 고작 늑대 하나 불러놓고 악마 앞에 서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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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이…… 나는 그냐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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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앞발만 휘둘러도 휙 날아갈 작은 몸으로. 그런 안일한 사고(思考)가 사고(事故)를 부르는 거라고 누군가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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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운다인으로도 잘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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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가 계약자는 그럴 필요 없습니다.”

편한 길만 걸으라고 제가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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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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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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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럴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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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럴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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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계약자인지. 참 착하십니다.”

검을 막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이벨리아의 머리를 톡 쓰다듬은 엘라임이, 오른손을 한 번 휘저었다.

- 쾅!

악마의 대검이 단번에 팽개쳐져 견고한 담벼락을 뚫고 틀어박혔다.

모두가 짐작하는 사내의 정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제국민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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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 정령왕이라니!”

오로바스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엘라임이 짧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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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이 느리군. 우리 아가 계약자의 뛰어난 능력이 제국 전역에 퍼진 지가 언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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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이야.”

이벨리아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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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무리 정령왕이라 하더라도, 나는 수만의 마족을 거느린……!”

그 허세에 같잖다는 듯 엘라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세계를 휘돌던 물이 일순 대양(大洋)이 되어 휘몰아치며 광장에 들이쳤다. 마치 왕의 작은 몸짓 하나를 애타게 기다렸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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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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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숙여!”

높게 솟아 사방에서 해일처럼 덮쳐드는 물에 경악한 제국민들이 제각기 천막을 둘러쓰거나 낮게 고개를 숙였다.

하나 방대한 물은 그들에겐 젖는 것 이외에 어떠한 해도 가하지 않고.

- 촤아아악!

거대한 뿔 달린 수룡의 형상으로 빚어져 오로바스에게 그대로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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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아악-!”

악마의 지배력과 상극인 자연력. 그것도 비할 수 없이 상위 격의 자연력이 쏟아지자, 오로바스가 괴로운 듯 몸을 비틀었다.

힘의 상하에 그 누구보다도 예민한 악마는 직감했다. 승산은 없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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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허무하게는 못 죽는다-!”

저 꼬맹이. 악마의 대적자라 이름 높은 아르티나 가문의 핏줄.

죽더라도 저것 하나는 길동무로 삼아야겠다.

결심한 악마의 사자 머리, 아몬드 모양 눈이 섬뜩하게 빛을 발했다.

허공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고. 이내 어디선가 날아온 검은 별 무리가 이벨리아의 주위를 감쌌다.

오로바스의 고유 권능-.

「과거의 연옥(purga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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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륵.”

별들의 흐름이 이벨리아의 과거를 마치 상영하듯 비췄다.

권능의 주인인 오로바스의 머릿속에. 낱낱이.

그의 권능은 상대의 과거를 모조리 읽은 뒤, 가장 괴로웠던 층단에 감금하는 것.

다시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영원히 같은 장면을 헤매고 헤매 영(靈)이 닳아 없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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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하하하학-!!”

이벨리아의 과거 편린을 엿본 오로바스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여전히 엘라임의 자연력을 받고 있어, 얼굴은 기괴하게 뒤틀린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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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너! 정령왕이 왜 네 곁에 붙어 있나 했더니, 전생을 아주 기구하게 살다 비참히 죽……!”

- 툭.

채 말을 끝내지 못한 채, 오로바스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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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린 본인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믿지 못하듯 크게 뜨인 눈.

이벨리아의 몸을 휘돌던 검은 별들은 포악한 힘에 의해 강제로 쥐어뜯긴 채였다.

감히 소중한 이에게 닿은 별을 한 손으로 터뜨리며, 아가레스가 거칠게 후드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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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량한 권능으로 내 주인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마라.”

파들거리던 오로바스의 몸이 경련하다 그대로 축 늘어졌다.

감히 눈으로, 또 감각으로 따라갈 수 없었던 속도에 일행들을 비롯한 제국민들이 모두 침묵하고.

이내 터지는 환호성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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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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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르트 백작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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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이다-!”

긴장 풀린 제국민들의 환희에 찬 경탄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리고. 자신들을 향한 환호성 따위는 전혀 관심 대상이 아닌 이들.

엘라임과 아가레스는 이벨리아의 눈치를 슬슬 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악마를 가지고 놀던 기세는 가져다 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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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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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벨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친구들의 이 표정. 어디선가 본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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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정원사 글렌의 강아지가 아무 데나 쉬야 한 다음 보이는 표정.’

이것들 지금 대단한 뭔가를 숨기고 있구나!

이벨리아는 조금 전 들었던 악마의 말을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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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기구하게……?”

역시 들었나! 엘라임과 아가레스가 표정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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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쩐다. 우리 말랑말랑 아가 계약자에게 뭐라고 둘러대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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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꼬맹이가 알아서 좋을 게 없는데.’

소중해 마지않는 이에게 ‘예, 당신은 전생에 죽어도 아쉽지 않은 기구한 삶을 살다가 어처구니없는 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라고는 죽어도 말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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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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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와 정령왕이 드물게 머뭇거리자 이벨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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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생이 기구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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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랬을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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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세계든 우리 아가 계약자를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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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내가 미움을 받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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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너 물 덩어리, 말 제대로 못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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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아니, 그게…….”

손사래까지 치는 대악마와 정령왕을 보며 이벨리아가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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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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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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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알지도 못했던 전생이 있었든 없었든. 기구했든, 비참했든. 외로웠든, 쓸쓸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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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엘라임하고 토끼하고 다들 같이 있는걸.”

이벨리아가 자신보다 더 당황한 일행들과 천천히 시선을 마주했다.

내 소중한 사람…… 아니, 존재들.

만일 저 악마가 말한 그 전생이 날 여기로 이끈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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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다시 돌아가도 기구하게 살고 비참하게 죽을 거야.”

그렇게 해서라도 다시 여기, 나란히 서고 싶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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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친애하니까.”

 

***

일행들 모두 감격에 겨워 저마다 귓가를 붉히고, 우리 계약자 찬양을 외치고, 입을 틀어막고, 꼬리를 휘두를 무렵.

황궁에서는 수십 기의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체 없이 달려 나왔다.

축복제 한복판에 악마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먹던 음식과 마시던 술을 모두 내팽개치고 곧장 말 위에 오른 일부 귀족들과 기사들.

가장 앞서 달리는 이는 늘 그렇듯 휴고와 아르칸, 세드릭이었고.

엘리시아 역시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옆을 대충 찢어버리고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 와아아아아!

멀리서부터 파도를 타듯 들려오는 환호성.

악마는 이미 처치되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마주한 물바다. 순도 높은 자연이 한바탕 휩쓸고 갔다는 증거로 그새 바닥에 돋은 새싹과 나무에 열린 탐스러운 열매들.

휴고가 아득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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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바다. 그리고 자연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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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 있는 건 우리 아가밖에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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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한바탕했나 보네.”

굳이 저 함성을 차치하고라도, 그들의 어린 딸이 위험에 처했을 거라는 걱정 따위는 들지 않았다.

엘라임도 엘라임이거니와, 바로 옆에 마치 호위견처럼 붙어 있는 악마는 마왕이 강림해도 대적할 수 있는 자니까.

그래도…….

휴고가 씁쓸한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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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가가 의무를 지는 시간은 최대한 늦어지길 바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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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원했다면, 내가 이브를 가졌을 때 배에다가 그런 동화책을 읽어주지 말았어야죠.”

강인한 공주가 말 타고 활 쏘고 검 들고 전장을 지배하는 동화를 주야장천 읽어줘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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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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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내내 세뇌라도 하듯 읊어대는데 안 깨고 배기겠나요. 그때 당신 등을 얼마나 차고 싶었는지 몰라요. 시끄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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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문 휴고가 크흠 헛기침하며 광장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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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로군.”

여전히 환호성이 그치지 않는 쪽으로 말을 몰아 다가가니, 어린 딸이 마치 개선장군처럼 제국민들의 칭송을 받으며 당당히 서 있었다.

잔망스럽게 손을 들어 여기저기 화답하는 것으로 보아 이 관심이 제법 즐거운 모양이다.

그 모습이 꼭 과거의 자신들 같아서 휴고와 엘리시아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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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잘한 것 같지 않소. 그 동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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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멋있긴 하네요. 엄마인 내가 봐도.”

아르티나(Artina).

이제는 사(死)한 대륙 고대어로 가로되, 멸(滅).

적에게 가차 없이 칼을 들이대는 어린 딸은, 그 누구보다도 가문의 기치에 가까웠다.

***

광장은 엉망이었다.

악마와 정령왕이 정면으로 격돌하고, 대악마 하나도 날뛰었으니 멀쩡할 리가 없긴 했다.

말 그대로, 사람을 포함해 모든 것들이 상해 있었다.

어린 공녀님이 악마를 멸했다는 안도에 환호성을 지르면서도. 제국민들은 내심 자신들의 터전을 어떻게 복구하나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루드비히는 황실 기사단의 앞을 가로막고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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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구를 도와라. 부상자들은 의료원으로 옮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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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꼬맹이가 건방지게 반말을…….”

루드비히가 후드를 살짝 젖혔다. 그 아래 빛을 발하는 홍안(紅眼).

헉. 기사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 척.

한 치의 오차 없는 소리.

황가의 축복 아래 황실 기사단 전원이 곧바로 무릎 꿇고 예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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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제국의 국본을 향한 경배가 광장을 울리자 제국민들의 환희는 더욱 짙어졌다.

높으신 분들은 우리를 내팽개치고 황궁에서 즐기고 있다며 원망했었는데.

공녀님과 루페르트 백작뿐만 아니라 황태자 전하까지도 계신다.

이곳에. 그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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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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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국에 광영 있으라-!”

함성은 제법 오랜 시간 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애국(愛國)은 추상적이다.

그러나 때로, 이는 전환점을 통해 애국심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가치. 눈에 보이는 위기. 눈에 보이는 사람.

혹은,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

제국민들에게 그 전환점은 바로 오늘.

어린 공녀와 기반이 약한 황태자,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악마를 멸한 대악마로 인해서였다.

***

공작저로 돌아온 이벨리아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검은 토끼 인형은 여전히 소중하게 꼭 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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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너무 썼나 봐. 피곤해.”

루드비히는 광장 복구를 위해 그곳에 남았고, 엘라임은 돌려보낸 채였다.

고요가 만족스러운 듯 아가레스는 소파 아래 기대앉았고, 엔리르는 소파 등받이 위에 식빵을 굽는 자세로 웅크려 앉아 잠이 들었다.

아가레스가 가만히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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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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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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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임을 소환할 땐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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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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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급이 높은 악마를 만나면 엘라임도 상처를 입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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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임을 걱정할 만큼 친해졌구나!”

말도 안 되는 단정에 아가레스가 드물게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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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 덩어리 죽든 말든 관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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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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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의 위험부담은 정령이 입는 상처지. 특히 상위 격의 정령일수록 정령사가 부담해야 하는 위험도 커진다.”

음.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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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정도 되면 그 부담은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정도에 이를 거야.”

하긴. 제국 한복판에 바다를 끌어오고 온 도시를 물로 뒤덮을 정도의 힘을 구사하는데, 대가가 없으면 생태계 교란종 되기에 딱 알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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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 어떡해. 앞으로도 악마를 만날 일은 있을 텐데.”

소파 아래 등을 대고 앉은 자세 그대로, 아가레스가 툭, 머리를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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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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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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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말 잘 듣고,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싸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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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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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주 비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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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어! 뭔데? 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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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까진 못 바라고. 감히.”

아가레스가 몸을 돌려 소파에 팔을 걸고 턱을 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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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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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악마가 진명(眞名)을 알려준다는 것은, 복속조차 기껍다는 굴종.

망설임 없이 작은 손에 목줄을 쥐여주며, 세계를 발아래 둔 대악마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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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레스.”

소파에 누운 이벨리아의 얼굴 바로 옆.

가까이에 턱을 괸 채 바라보는 금빛 눈이 느리게 깜박인다.

고개 돌려 눈을 맞추자, 기다리는 말이 있다는 듯 피하지 않고 마주 닿아오는 시선.

이벨리아의 입술이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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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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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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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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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더 불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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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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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브.”

거칠 것 하나 없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굴려지는 이름.

이게 네 이름이었구나.

나의 토끼. 나의 친우. 나의 악마.

부를 때마다 악마의 황금빛 눈, 그 안에서 일견 이해할 수 없는 문양, 또는 회로가 언뜻 비쳤다 자취를 감췄다.

환상이었을까. 실제였을까.

이벨리아는 환희로 빛나는 금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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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들에게 진명은 아주 소중한 거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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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중하던, 감히 너만큼 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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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역마 계약이라도 맺자고 조르면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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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날 수 없는 종속. 영광이지.”

이제는 익숙해진 배려.

아니. 이건 배려가 아니다.

맹목(盲目). 눈이 멀어버린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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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하여 나를 묶어달라 청은 못 해.”

내 목줄이 네 작은 손에 벅차다면, 그 또한 네 의사가 우선이라.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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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가 필요하거든, 불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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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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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찾아갈게. 그 어떤 명령이든 따르러.”

네가 신을 죽이라 명한다면, 난 망설임 없이 신살자가 될 것이고.

네가 세상을 없애라 명한다면, 난 거리낌 없이 파멸자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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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친구라서. 빛이니까. 구원자라서…….

엇비슷하게 정의할 수 있는 단어들을, 악마는 막상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감히 형체 있는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지닌 마음이 너무도 커서.

아가레스는 그나마 그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가 아는 가장 거대하고, 깊고, 따뜻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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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니까.”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는 친우의 손등에 악마의 이마가 경건하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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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브니까.”

그 이유면 바다가 하늘이 되고 땅이 바다가 된다 해도 설명이 되는 거잖아.

이해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설명하고, 단정하고, 정립할 수 있는 절대적인 명제.

나에겐 네가 세계보다 넓고 신보다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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