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작은 대정령사를 건드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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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작은 대정령사를 건드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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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작은 대정령사를 건드리면
2022.04.04.
“뭐야?”
그 간결한 물음이 누구를 향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다. 아가레스가 답했다.
“악마. 저쪽.”
가리키는 방향- 이곳에서는 조금 떨어진 거리.
연이어 무언가 깨지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잘 벼린 손톱으로 철판을 긁는 듯 거슬리는 소리였다.
“기분 나빠. 예전에 산맥에서 들었던 거랑 비슷해.”
나 아가일 때 우리 토끼 손에 죽은 붉은 갑옷 악마도 딱 저런 소리를 냈었는데.
이벨리아가 하, 헛웃음을 지었다.
제국 제일의 기념일인 축복제. 그 한복판에 악마라니.
아르티나가 있는데 이게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경비대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물으려 했는데. 멍청한 질문이다.
으아아악-! 살려줘! 오지 마!
경비대 일부는 두 팔을 휘저으며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다. 창칼도 어딘가로 내팽개쳐 버린 채.
보다 사명감 있는 일부는 소란 속으로 달려가고 있지만, 그저 일말의 시간을 벌고 목숨을 버리는 것밖에는 안 될 터다. 한낱 경비대 따위가 악마를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럼 기사들은!”
“오늘 황궁 연회. 모두 거기 있겠지.”
이벨리아가 발을 콩 굴렀다.
“제국 꼴 자알 돌아간다!”
수도 사방위의 성문에는 상주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나, 그들이 여기까지 당도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었고.
마찬가지로 황궁에 소식이 전달되어 가족들이나 황실 기사들이 연회를 박차고 나와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리고 그동안.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있는 이들을, 저 악마가 모조리 잡아 죽이겠지. 마치 놀이처럼.
사방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에 이벨리아의 손끝이 움찔 경련했다.
귓가로 살려달라는 애원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달라붙었다.
‘꼭 내가 나서야 할까? 조금만 기다리면 기사들이 올 텐데.’
악마라는 이야기를 듣고 일절 망설임 없다면 거짓이다.
끔찍했던 순간엔 늘 악마들이 있었다.
달이 기괴하리만치 가까웠던 설산.
그리고 비비안의 피가 떨어졌던 저택.
이벨리아는 입술을 꼭 깨물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현실감 없는 머리로 생각하면서.
그때였다.
“아가! 뛰렴!”
“여보, 저기 어린아이가 혼자 있어요! 이리 오렴! 어서!”
이벨리아는 자신에게 다급히 손짓하는 제국민들에게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이 상황에서도 저런 이들이 있구나.’
바로 뒤에서 악마가 날뛰고 있는데.
무력 하나 없는 이들로서는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찰 텐데.
자신들의 걸음을 멈추고 작은 이벨리아를 위해 길을 터주는 이들.
“……날 모르잖아.”
“지금 그게 중요하니! 어서 이리 와! 아줌마랑 같이 가자!”
“아이가 밟히겠어요! 다들 조심해요!”
이벨리아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빨리 도망이나 치지. 자기들이 뭔데.
가진 것도 없으면서 무슨 오지랖이야.
왜일까. 울컥 숨이 밭아졌다.
“……아.”
엔리르가 다 먹어버린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쥐여준 아저씨가 생각났다.
검은 토끼 인형을 얻었을 때 함께 손뼉 쳐 준 사람들이 떠올랐다.
두더지를 잡을 때 잘했다며 환호한 이들이 어른거렸다.
온정. 인정. 모르는 이에게 따뜻이 건네는 배려.
‘엄마. 엄마는 왜 이 제국을 지켰어?’
‘미워할 수가 없으니까.’
‘난 미운데. 바라기만 하고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아. 전쟁터에 떠밀기나 하잖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전쟁통에, 어떤 노인은 잔당군에게 쫓기는 나를 숨겨주었단다. 젊은 부인은 없는 살림을 털어 피죽을 만들어주었고, 한쪽 팔을 잃은 어린아이는 불탄 창고에서 유일하게 남은 감자 하나를 쥐여주기도 했지.’
‘…….’
‘그 모든 게, 나를 향한 그들의 보답이었어. 그래서 미워할 수가 없었단다. 그들은 항상 내게 손을 내밀었거든. 비록 초라하고 작아도.’
그땐 엄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우리 가족들을 전장으로 내모는 제국민들을 원망했었다. 하지만.
‘……그렇구나. 이래서였구나.’
이벨리아는 깨달았다.
저쪽에서 열심히 손짓하는 이들을 사랑하진 못해도,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적어도 내 눈앞에서 죽는 걸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것을.
하여, 끝내 부모님과 같은 길을 걷게 되리라는 것을.
막연했던 의무를 온몸으로 깨달은 아이가 천천히 숨을 내뱉는다.
“……그럴 순 없지.”
이곳에 희생을 기리는 석조 추모비가 세워지게 둘 수는.
제국력 1041년의 축복제가 역사에 길이 남는 추모일이 되도록 할 수는.
이벨리아가 작은 발을 내디뎠다.
사람들이 달리는 방향, 바로 그 반대로.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도망치라고 터준 길을 따라.
“뭐 하려고. 꼬맹이.”
“내 벽보 값 하려고.”
내가 있다. 그 의미는 보여줘야지.
후드 아래로 여린 입매가 단단하게 다물렸다.
제국 내 크고 작은 재난의 중심, 늘 앞장서 검을 들고 달리던 아르티나.
가장 어린 주인의 뒷모습 역시 가문 일원들의 그것과 한 치 다른 점 없었다.
***
소란의 근원지에 다다른 이벨리아가 황망하게 입을 벌렸다.
“뭐야. 저거 우리 잔디 아니지?”
상반신은 인간의 것인데, 머리와 하반신은 수사자의 모습. 갈기와 꼬리는 타는 듯 붉었다.
“으음. 머리 위가 잔디색이 아닌 걸 보니 아니네.”
잔디가 반만 사자로 변한 것인가 했더니, 자세히 보니 다른 점이 꽤 많았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잔디보다 훨씬 안 귀여워.”
그 말에 아가레스가 휙 고개를 돌렸다. 후드 아래 왼쪽 눈이 살짝 경련했다.
이벨리아가 괴기스럽게 생긴 악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쟨 누구야?”
“…….”
“토끼. 쟤 누구냐니까?”
“난 내 아랫것들은 잘 모른다.”
“……대부분이 네 아래잖아.”
“그래서 대부분 모르지.”
“마왕은 알긴 알아?”
“그건 워낙 깔짝대서. 언젠가 없애려고 알아뒀다.”
“……네가 왕이 되었으면 분명 폭군이 되었을 거야.”
“설마. 네 손에 모든 걸 쥐여주는 탕왕이 되었겠지.”
악마가 수도 한복판에 현현한 이 상황에서도 위기의식 하나 없이 아가레스가 씩 웃는 와중.
인간의 팔과 사자의 다리를 가진 악마는 입을 찢으며 대지를 박찼다.
향하는 방향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국민들이 행복에 젖어 있던 광장, 노점, 가판.
비명을 지르는 부모. 우는 아이.
갈라진 대지, 부서진 건물.
풍등이 떨어져 불이 옮겨붙은 옷자락. 천막.
말 그대로 아비규환-.
이명, 기마공.
55위 악마 오로바스(Orobas)의 현현이었다.
***
- 툭.
노란 나비 머리핀이 이벨리아의 발 앞으로 내팽개쳐지듯 굴러와 신발 앞코에 부딪혔다.
이를 내려다봄과 동시에 들리는 비명.
“안 돼! 아가! 아가!”
“으아앙-! 엄마아-!”
사자의 육중한 다리가 엉망이 된 작은 여자아이의 앞에서 멈추고.
이어 인간의 팔이 아이의 목을 한 손으로 잡고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켁! 켁! 어, 엄마아…….”
“사, 살려주세요, 누가 우리 아가 좀 살려주세요! 제발!”
부모의 찢어지는 외침에 사람들이 언뜻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는 손에 쥔 막대기, 나무 창 등을 들어 올렸으나……. 힘없이 손을 내린다.
이내 안타까운. 또 분노에 찬 눈을 힘겹게 돌렸다.
“마물이면 몰라도…….”
누군가의 읊조림. 틀린 것 없는 말이었다.
이곳, 마물도 아닌 악마를 대적할 수 있는 이는 그 누구도 없다.
미간을 찌푸리고 그 광경을 보던 이벨리아가 속삭였다.
“우리 엄마가 그랬어. 나는 힘을 숨기는 것하고는 영 인연이 없다고.”
“알지.”
“내가 해결하게 해 줘.”
“네가 원한다면 뭐든. 다만, 위험하다 싶으면 끼어들 테니 그건 용서하고.”
대악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벨리아가 조용히 정령을 불러냈다.
“실라페.”
[계약자! 뭐야, 또 악마야? 칵, 퉤!]
입이 제법 험한 독수리의 부리에서 마치 침처럼 바람 한 덩이가 툭 떨어졌다.
“저 무식한 팔 좀 떼어줘.”
[몸체가 아니라 팔만 치라는 거면 쉽지!]
화마 속, 불길을 뚫고 활공하는 푸른 독수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정령……?”
“정령이다…….”
누군가 멍하니 읊조리는 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답게 빠른 속도로 날아간 실라페는 아이의 목을 죄던 팔을 그대로 두 동강 내버렸다.
아이가 허공에서 툭 떨어지자, 그대로 등에 받아 태운 실라페가 휙 날아 이벨리아의 앞으로 돌아왔다.
[나 잘했지, 계약자!]
아이가 이벨리아의 앞에 주저앉아 목을 부여잡았다.
“콜록! 콜록!”
시뻘겋게 자국이 남은 아이의 목. 막혔던 숨을 밭게 뱉어내자 아이의 부모가 달려와 아이를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크르륵-!”
아이를 죽여 살심을 채우려던 악마의 미간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실라페가 잘라낸 팔은 눈 깜짝할 사이 재생되어 있었다.
이벨리아는 악마와 아이, 그리고 부모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시선은 악마에게 둔 채, 손을 뒤로 뻗어 건넨다.
“자. 머리핀. 네 거 맞지?”
“가, 감사합니다…….”
“아가, 너도 얼른 도망쳐! 얼른!”
아이의 인사와 부모의 외침을 모두 흘려들으며, 이벨리아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악마에게 물었다.
“넌 몇 위야?”
제국민들이 기겁하며 걸음을 멈췄다.
감히 악마에게 위(位)를 묻다니!
심지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묻는 것처럼 맑고 해사하다. 저 아이는 악마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72 악마.
각자 마계에서 자신의 영토를 지닌 이들을 지칭한다.
즉, 마계 한 영지의 왕(王), 또는 제후(諸侯).
또한, 모든 마족과 마물들의 경배를 받는 이들.
설령 72위라 한들, 지닌 힘이 인간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 자체만으로도 재난 또는 재해나 다름없는 것들.
1위든 72위든 중요치 않다. 어차피 대적할 수 없으니.
저 일행 중 누군가 정령을 불러내긴 하였으나, 공작부인이나 황실 정령사 정도가 아니라면 어림도 없다.
“키르륵-!”
오로바스가 특유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사자의 이가 딱딱 맞물렸다. 다리가 땅을 구르자, 쿵- 지축이 울렸다.
“사자 머리여도 말할 줄 알 텐데. 안 알려주네.”
기왕이면 우리 오라버니가 잡았던 악마보다 높으면 좋을 텐데.
이벨리아가 씩 웃으며 후드를 내렸다.
황금빛 머리칼이 화염과 달빛을 동시에 받아 진한 색으로 반짝였다.
동시에 정적.
그리고 제국민들의 숨 들이켜는 소리.
“설마…….”
“고, 공녀님……?”
“맙소사……!”
“도망치십시오. 공녀님! 여긴 저희가 어떻게든 막고 있을 테니……!”
“여기 공녀님이 계시다! 다들 활로를 뚫어! 어서!”
조금 전만 해도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들이 주변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 들었다.
연약한 팔로 자신을 지키겠다 웅성이는 제국민들.
이벨리아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그러자 순식간에 다시 적막.
오만한 푸른 눈이 똑바로 오로바스를 향한다.
“내가 악마를 길들이는 덴 일가견이 있는데.”
어때, 못생긴 고양아.
“날 주인으로 섬긴다 약조하면 살려주지.”
***
제국민들은 더 이상 달아나지 않았다.
바로 이벨리아가 후드를 벗는 순간부터.
기대감, 호기심, 그리고 어떤 의무감이 두려움을 몰아냈다.
그들에게 아르티나란, 유일한 대정령사란, 어린 공녀란 그런 의미였다.
한편 화가 난 듯 콧김을 씩씩 뿜는 악마를 보며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으음. 못생긴 고양이라는 말이 콤플렉스였던 걸까?”
“굳이 그 말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사자의 발로 땅을 차던 악마가 푸르르 고개를 털더니 입을 뗐다.
“황금빛 머리카락. 아르티나인가.”
“봐. 말할 줄 알면서 몇 위인지 왜 안 알려줘.”
이벨리아의 태연한 답에 오로바스가 그르렁 쇳소리로 목을 울렸다.
“참새 잡으러 왔다가 꿩을 잡아가게 생겼군.”
“엥. 꿩이 뭐야. 나 정도면 피닉스지.”
“운이 아주 좋은 날이야.”
“나야말로. 놀러 나왔다가 전공 하나 세우게 생겼네.”
같잖다는 듯 킬킬 웃은 악마의 손에 이 빠진 대검이 쥐여졌다. 누군가를 베어 죽이기보다는 때려죽이는 것이 목적일 뭉툭한 대검.
이벨리아 역시 실라페를 돌려보내고 다른 존재를 불러냈다. 상대가 악마라면 이 정도는 불러줘야겠지.
“일레스트.”
계약자를 보호하려는 듯 앞을 가로막고 세차게 이는 물보라.
사방으로 휘돌던 물방울이 한 데 모이더니,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빚어냈다.
[뭐야. 나 또 출세하는 건가.]
“역시 같은 고양이여도 역시 이쪽이 훨씬 귀엽네.”
[고양이라니! 난 늑대다!]
“쟤는 사자래.”
[저건 누가 봐도 고양인데.]
감히 사자인 자신을 두고 고양이 운운하자, 악마가 으르렁 송곳니를 내보이며 일레스트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일레스트가 말랑한 앞발을 허공에 동글동글 움직였다.
그러자 허공의 한 꼭짓점에서부터 이벨리아를 둘러싸고 좌르륵 흘러내리는 물의 장막.
- 쾅!
악마의 대검과 일레스트의 장막이 맞부딪혀 산천이 울리는 소리를 냈다.
지켜보던 제국민들이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계약자.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꽤 센데.]
이벨리아 역시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상당히 강한 악마다.
악마의 대검이 횡으로, 종으로, 무자비하게 휘둘러졌다.
쾅. 쾅. 연이어 공기마저 진동하게 하는 굉음이 울렸다.
그러나 여전히 장막에는 작은 실금조차 없다.
입맛을 다신 악마가 비죽 웃으며 검의 방향을 틀었다.
방향은 제국민들이 모여있는 곳. 이벨리아가 와락 달려들며 외쳤다.
“이 얌생이가!”
“킬킬킬. 네가 지금 성직자라도 상대하고 있는 줄 알았나?”
“일레스트, 저쪽!”
이벨리아로부터 보호막을 거둔 일레스트가 동떨어져 서 있는 제국민 전체를 덮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보호막을 생성했다.
그것이 목적이었다는 듯, 악마의 검은 이벨리아와 제국민을 오가기 시작했다.
검의 경로에 따라 장막을 옮기기는 하나, 지속되자 영 벅차다.
‘일레스트의 힘은 부족하지 않은데. 내 정령술이 못 따라가.’
정령왕을 제외한 정령들은 정령사의 구체적인 지시를 받아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상급의 정령을 불러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령사의 실전 경험.
엘리시아는 중급 정령으로도 악마의 발을 효율적으로 묶고, 이벨리아는 그보다 상위 정령인 일레스트를 불러내고도 효과가 미적지근한 이유였다.
‘안 되겠네.’
이벨리아는 일레스트에게 보내던 자연력을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
[어엇!]
삽시간에 흩어지며, 일레스트가 억울한 듯 외쳤다.
[계약자! 이건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내 출세 잊지 마라!]
“정령이 왜 저렇게 출세에 집착하나 몰라.”
“키르륵. 잘 생각했다! 때론 포기가 편하지!”
“공녀님! 피하십시오! 뒤, 뒤에!”
머리 위로 드리워진 대검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이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컨트롤 부족한 건 인정. 하지만 그래서 뭐.
모자란 능력은 무식한 힘으로 땜질해버리면 그만인 것을.
“엘라임.”
석 자를 읊음과 동시에 조금 전과는 비할 수 없는 존재감이 광장 전체에 묵직하게 들어찼다. 그리고.
- 콰르르릉.
사방에서 덮쳐오는 해일의 환영이 모든 이들의 앞에 나타났다가, 이내 썰물 빠져나가듯 순식간에 증발했다.
흡사 바닷속에 들어온 것처럼 몸이 눌리는 기분.
세계가 굽어보는 듯한 압도적인 감각에 제국민들은 꽉 감았던 눈을 하나둘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공녀님과 등을 마주 대고 서서 악마의 대검을 한 손으로 막아내고 있는, 장신의 사내.
물빛 머리칼이 마치 물의 흐름처럼 은은하게 흔들렸다.
슬쩍 뒤를 돌아본 사내가 책망하듯, 그러나 정중히 투덜댔다.
“빨리도 부르십니다, 나의 맹약자.”
이벨리아가 씩 웃으며 한곳에 모여 있는 제국민들에게 말했다.
“다들 우산이나 써. 좀 젖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