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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누가 내 영역에서 깽판을 쳐? (157/323)


157화: 누가 내 영역에서 깽판을 쳐?
2022.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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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군중들의 심리. 읽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표정에 떡하니 드러나 있었다.

잠행 나온 귀족인가. 아니. 아무리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라이칸슬로프 떼거리를 단번에 처치할 수 있을 정도면 웬만한 귀족은 아닐 텐데. 정도의 의문들.

다급해진 이벨리아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마침 인원수도 딱 넷이라, 자칫했다가는 우리 엄마를 제외한 아르티나 일원들로 오해받기도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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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다른 제국 귀족인 척하자. 나는 이샤트다. 나는 이샤트다.’

스스로 세뇌한 이벨리아는 다시 한번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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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역시 에르카디아 제국은 참 대단해! 이런 축복제까지 마법진에 가져다 놓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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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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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 이런 마법진에 축복제까지 가져다 놓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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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제에 마법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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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제에 마법진까지 가져다 놓다니!”

말을 잘 못하는 것을 보니 제국 공용어를 쓰지 않는 오지에서 온 이방인인가? 군중들의 얼굴에 궁금함이 들어찼다.

이벨리아가 짐짓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아주 과장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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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아주 큰일 날 뻔했네! 너무 무서워서 깜짝 놀랐지 뭐야! 아마 늑대들한테 불이 붙어서 순식간에 사라졌나 보다!”

그런가? 아닌데, 이상한데. 군중들의 고개가 갸우뚱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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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주 먼 곳에서 와서 온갖 게 다 신기하네! 아하하하!”

그 말엔 고개들이 일제히 끄덕였다. 역시 이방인이었군.

누군가 앞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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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우리 제국 귀족 나리들께선 모두 황궁에서 여는 연회에 참석해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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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아르티나 가문인가 해서 깜짝 놀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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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제국 축복제엔 이방인들도 많이 방문하니 놀랄 일은 아니지.”

제국민들이 나름대로 이유를 만들어 납득하자 이벨리아는 진행자의 손에 들린 토큰 하나를 빼앗듯이 손에 넣고는 슬슬 뒷걸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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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어. 이 사고뭉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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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뭉치에 포함되기엔 상당히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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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한 방에 없애버린 게 누군데!”

후드를 깊이 눌러쓴 채, 네 명의 일행이 거리를 가로질러 다급하게 발을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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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니다. 황태자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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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니야. 이 용이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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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모함이야. 분명 저 악마가 손을 휘두르는 걸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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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다 검 휘두르는 거 전부 봤어!”

어디서 밑장빼기야. 이 사기꾼들 오냐오냐했더니 나한테까지 사기를 치려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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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세상 어느 일반인이 불타는 늑대 20마리를 단번에 없애냐고!”

우리 병아리 화났다. 일행들의 감각에 오로지 이벨리아의 감정에만 반응하는 경고 센서가 켜졌다. 그들이 황급히 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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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브레스를 뿜지 않은 나 자신을 칭찬해. 내가 브레스를 뿜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는데 잘 참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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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가의 검 대신 나눠준 목검을 휘두른 나도 대단하지. 문양 있는 검을 휘둘렀다간 더욱 주목받을 뻔했는데 잘 숨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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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기를 쓰지 않은 나도 대견하다. 자칫하면 이 수도가 날아갈 뻔했는데 잘 억눌렀지.”

일행들의 절실한 합리화에 이벨리아가 조막만 한 손으로 꽉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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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너희 등짝을 불나게 두드리지 않은 내 인내심이 가장 경이로워.”

 

***

이후로도 게임은 별 어려움 없이 계속되었다.

체스는 루드비히. 실에 달린 도넛 먹기는 이벨리아. 물풍선 던지기는 엔리르.

각자 개성을 십분 살려 하나하나 게임을 클리어하던 와중.

마지막 게임을 앞두고 일행들은 위기에 봉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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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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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나도 이런 건 처음 봐.”

나무로 만든 커다란 네모판 위에 공 네 개가 달랑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기다랗고 얇은 막대기와 파란색 가루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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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기 위에 공을 얹어서 빙글빙글 돌리면 되는 걸까?”

당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벨리아가 고개 돌려 루드비히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루드비히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막대기를 톡톡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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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빌리어드(billiards)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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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어드? 그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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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경기다. 평민들이 즐기는 게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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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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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루드비히마저 모르다니!

평민들이 즐기는 게임인데, 하필 여기엔 대악마와 용, 그리고 황족과 대귀족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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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검은 토끼 인형…….”

이벨리아의 어깨가 처량하게 내려가자, 아가레스가 툭 머리를 쓰다듬고는 진행자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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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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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 설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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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없다.”

그 묘한 당당함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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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이거 할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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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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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우리도 못 하는 인간 게임을 토끼가?”

아가레스가 기다란 막대기를 쥐고 파란 가루를 끝에 묻힌 뒤, 허리 숙여 자세 잡으며 후드 아래로 낮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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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유능하니까.”

그 말이 끝남과 정확히 동시.

- 딱.

막대기와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공은 이벨리아가 이해할 수 없는 궤적으로 부드럽게 움직였으며. 진행자는 계속해서 점수판을 들어 올렸다.

유려한 자세와 보고도 믿기 어려운 점수에 행인들이 하나둘씩 근처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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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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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신사분 좀 봐요!”

빌리어드는 평민들 중에서도 그나마 주머니 사정이 좋은 이들이 즐기는 스포츠.

그러다 보니, 그 실력은 자연히 인기의 척도가 되고는 했다.

어린 숙녀들은 후드를 썼음에도 가려지지 않는 탄탄한 몸과 다부진 손마디를 보며 외마디 감탄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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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말 좀 걸어봐요. 경기가 끝나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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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까요? 슬쩍 손수건이라도 흘려봐야겠어요.”

경기는 오래지 않아 끝났다. 토큰을 받을 수 있는 최소 점수를 한참 넘긴 채로.

은근히 몰려들어 손수건을 떨어뜨리는 숙녀들을 헤치며, 아가레스가 인상을 옅게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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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를 바닥에 버리는 문화는 여전하군.”

다른 곳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로지 어린 친우만 눈에 담은 채 아가레스는 이벨리아의 손에 토큰 하나를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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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네 토끼 데리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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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걸로 전부 모았다!

이벨리아는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용볼 일곱 개를 다 모은 것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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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 부하들은 유능해!”

 

***

토큰 열 개를 모두 손에 쥔 이벨리아는 빨간 천막을 당당히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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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헴. 내 토끼는 잘 있겠지!”

흡사 수금하러 온 뒷골목 불량배 같은 거만한 말투와 뒷짐 진 걸음.

교환석에 앉은 이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이벨리아가 토큰 열 개를 교환석에 좌르르 올려놓았다.

제각기 각 게임을 의미하는 심볼이 있는, 서로 완전히 다른 토큰 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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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이걸 정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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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 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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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몬스터 토벌에서 라이칸슬로프를 한 번에 없애버렸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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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아주 열심히 발버둥 쳐서 이겼거든! 너무 무서워서 소리도 꽥 질렀는걸!”

흐음. 교환원의 눈이 의심하듯 가늘어지자, 이벨리아가 냅다 토끼를 내놓으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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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내 토끼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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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여전히 검은 토끼가 가지고 싶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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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검은 토끼!”

그렇게 원하던 검은색, 말랑말랑한 토끼가 이벨리아의 품에 폭 안겼다.

천막 밖으로 나온 이벨리아는 만족한 듯 토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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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은 이제 토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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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치……. 그 토끼 울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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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이 용치면 난 펑펑 울었을 거야.”

멋진 이름에 대한 박한 평가는 모두 내 네이밍 재능을 시기 질투하는 이들의 헛소리다. 이벨리아는 가볍게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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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어, 꼬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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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것 봐. 내 토끼랑 꼭 닮은 토끼. 그래서 가지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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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 말랑말랑한 솜덩어리가 어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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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 검은색. 토끼 검은색. 아스 눈 황금색. 토끼 눈 황금색.”

마계의 지배자와 집먼지 진드기로 가득한 인형은 접점 하나 찾기 어려웠으나, 아가레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무엇보다 네가 곁에 둘 인형이 날 닮았다면 그건 아주 기껍다.

아가레스는 만족스럽게 토끼 인형의 귀를 매만졌다.

***

해가 완연히 지고 어둑해진 사위. 거리 정중앙과 가까운 곳에 자리하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이미 축복제에 참석한 전적이 있는 이벨리아는 이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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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 지나갈 시간인가 보다! 꽃잎 뿌려주는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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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봤던 거기서 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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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스가 알려줬던 분수대 거기!”

이벨리아는 7년 전 서 있던 그 분수대 위, 정확히 같은 자리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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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난 마차에 오를 수 없을 거야. 이만큼 커버렸으니까.”

제법 옛날의 일이지만 퇴색 없이 선연한 과거를 회상하던 와중.

가장 앞 열에 서 있는 제국민들의 환호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마차가 가까이 도착했다는 뜻.

분수대 위에서 폴짝폴짝 뛰는 이벨리아를 바라보며, 아가레스와 루드비히는 짙은 미소를 띠었다.

그들에게도 여전히 선명한 기억이다.

모든 것이 마모되어 소멸만을 기다리던 무료함 속.

모든 것이 자신을 찔러와 사방이 칼날이나 다름없던 위태로움 속.

무엇인지 가늠하기도 전에 대뜸 손에 올려졌던 꽃잎. 불려졌던 친구라는 호칭.

아가레스가 손을 쥐었다 폈다. 마치 그날의 그 감촉을 다시 되새기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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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꽃잎. 아주 효험이 좋던데.”

루드비히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마치 있는 것처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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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긴 하더군.”

그들은 서로 무엇을 빌었는지 묻지 않았다. 아마 비슷한 것을 빌었을 테니.

어느새 본래 형태로 돌아온 어린 용만 눈치채지 못하고 날개로 아가레스의 무릎을 톡톡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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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빌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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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것 없다.”

그러자 꼬리로 루드비히의 팔을 탕탕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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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빌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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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치워.”

그 야박함에 어린 용이 으르렁 송곳니를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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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꽃잎을 잡으면 제일 먼저 악마랑 황태자를 없애 달라고 빌 거야. 아주 재수가 없어.”

이를 깔끔히 무시하고, 아가레스와 루드비히는 분수대 위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들의 친우를 바라봤다.

흐름조차 의미를 갖지 않는 시간을 홀로 걷던 대악마는 언젠가 너에게 친구라 불릴 수 있기를 빌었고.

정적으로 뒤덮인 왕의 길을 홀로 걷던 황태자는 평생 자신의 친구가 되어 달라 빌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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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온다! 다들 집중해!”

가까이 다가온 마차에서 뿌리는 꽃잎이 휘날리자, 이벨리아는 폴짝 뛰어 두 손으로 텁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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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실프를 불러 꽃잎을 싸그리 손안에 안착시키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제국민들이 잡을 꽃잎이 사라질 테니 그럴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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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잡았어?”

일행들을 바라보니 손과 앞발에 여지없이 놓인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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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다들 이름값 하네!”

이 정도도 못 잡았으면 대악마, 용, 황태자 지위 박탈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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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소원 빌자! 꽃잎 꼭 잡고 빌면 다 이뤄진대!”

선선한 웃음을 매달고 이벨리아가 눈을 감았다.

반면 일행들은 그 누구도 눈을 감지 않고 그들의 소중한 이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이는 그 어딘가 존재하는 신이 아니었다.

오로지 이벨리아 뿐.

그러니 다른 곳에 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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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내 친우로 남아주길.’

루드비히는 일곱 해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을 빌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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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네 뒤를 허락하길.’

아가레스는 조금 더 욕심내어 따르게 해달라 빌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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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필요 없어. 지킬 수 있게만 해줘.’

엔리르는 난생 처음 따뜻함을 안겨준 은인이 자신으로 인해 안녕하기를 빌었다.

모두가 간절함을 담고 바라보며 제각기 바람을 읊고 있는 것을 모르는 이벨리아 역시, 두 손을 모아 소원했다.

창공에 흩날리는 꽃잎이 이벨리아의 머리 위로, 또 뺨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 간지럽고도 포근한 감각에 감은 눈이 살짝 휘어지고, 다문 입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원하는 건 간명했다.

누군가 들어주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나아가 앗으려 해도 마찬가지다.

기어코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낼 각오이자 바람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신의 힘을 조금이나마 빌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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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모두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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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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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돌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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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검은색 토끼 인형도 얻었고 꽃잎도 잡았으니까! 이제 돌아가도 여생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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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이 없다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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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하나 잘못 썼다가 아주 무서운 말이 되는 수가 있어, 꼬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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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거. 여한.”

예전 축복제 때는 참 이상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어느 순간 눈을 뜨니 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분명 카론이나 세드릭 오라버니가 무슨 수를 썼던 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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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신 바짝 차리고 집에 가야지. 중간에 기억이 삭제되어버리는 수가 있어.’

검은색 토끼 인형을 들고 만족스러운 걸음으로 걷던 이벨리아는 지나치는 모든 포장마차에 가서 코를 킁킁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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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지. 이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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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이거 안 먹고 가면 여한이 남아. 이거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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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방금 닭꼬치랑 만두 먹었잖아. 그러다 굴러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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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아가는 살이 다 키로 가는 거랬어. 이걸 더 먹는 건 내 의무야!”

기어코 손에 들린 커다란 아이스크림.

마차 행진이 끝난 뒤 다시 인간으로 변해 옆에서 한입만을 외치던 엔리르가 입을 한껏 벌려 아이스크림의 3분의 2를 베어 물자 이벨리아가 위협적으로 발을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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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입만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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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입 먹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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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 막대기밖에 안 남았잖아! 이래서 한입만들이 제일 싫어!”

그렇게 투덜대자, 포장마차 주인이 새 아이스크림 하나를 잔뜩 쌓아 이벨리아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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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영애.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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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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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제는 모두가 행복한 날이어야 하지요. 일행분께서 아이스크림을 다 드셔버렸으니, 새 아이스크림을 드리겠습니다.”

뭐야. 이 포장마차 주인.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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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인가……?”

이벨리아가 눈을 크게 깜박이며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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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영애께 축복제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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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주인도. 주인은 천사니까 아마 축복이 가득할 거다.”

엔리르가 새 아이스크림도 한입만을 외쳤으나, 다시는 속아 넘어가지 않기로 다짐한 이벨리아는 아이스크림을 막대기까지 와앙 베어 물어버렸다.

이 활기가 좋았다. 인심도. 사람들의 웃는 낯도.

이벨리아는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주변 모든 것을 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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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우리 가문은 이 제국을 지키는구나.’

때로 이 제국이 밉더라도, 이루는 작은 요소를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어서.

때로 냉혹하지만, 또 시선 돌리면 작은 따뜻함이 손을 뻗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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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만족스러운 얼굴로 공작저로 향하던 도중.

걸어왔던 길에서부터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이 조금씩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흥겨움에 노래 부르고 웃고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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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소리가 인파를 타고 가까이 오자 조금 더 명확히 식별할 수 있었다.

공포에 질린 비명. 도망치라는 외침. 살려달라는 애원.

몇 블록 뒤. 좌판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무언가 담장에 처박히듯 쾅, 거대한 소리.

무력 없는 제국민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더욱 커지고. 도망치는 발걸음이 흐름을 역류하여 사방팔방으로 향했다.

이벨리아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조금 전만 해도 공짜 아이스크림에 기뻐하던 어린아이는 간데없고, 수호의 의무를 아는 대귀족의 비정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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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감히.”

척. 이벨리아가 짝다리를 짚고 머리를 쓸어올리며 눈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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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역에서 깽판을 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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