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이 조명, 온도, 습도. 망했다.2022.03.28.
다음으로 향한 곳은 역사 퀴즈라는 고루한 팻말이 붙은 곳. 이벨리아와 엔리르는 자신들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고. 아가레스와 루드비히는 이를 일별하고는 둘이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더니 동시에 이벨리아와 엔리르 쪽을 엄지로 가리키며 망언을 내뱉었다.
“이 둘은 가망이 없다.”
“……맞는 말인데 기분이 묘하게 나쁘다, 엔리르. 그치?”
“응. 그런데 할 말이 없어. 나는 이 제국 역사 따위 몰라.”
아가레스 역시 한낱 인간의 역사 따위엔 별 관심이 없었기에, 결국, 출전자는 루드비히. 출제자가 20개의 문제를 다 읽기도 전에 모든 답을 말해버린 루드비히는 당당하게 토큰 하나를 이벨리아의 손 위에 얹어두었다.
“식량 도둑 대단하다!”
“애초에 내가 우리 제국 역사를 모르면 말이 안 되지.”
역사를 기반 삼아 차기 제국을 이끌어갈 황태자인데. 주변에서 감탄하는 군중들을 향해 루드비히가 훈계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다들 역사 공부에 정진하도록. 다섯 문제도 채 맞히지 못하는 것들을 보니 아주 한심하군.”
그러자 바로 옆, 세 문제를 채 맞히지 못하고 탈락한 참가자가 혀를 찼다.
“흥. 건방진 애송이가. 어디서 반말이나 찍찍 해대고 난리람.”
“뭐라!”
***
“놔 봐. 저 불경한 조동아리 한 번 후려갈기게!”
“참아! 네 제국민이야!”
“하여간 요즘 제국민들은 원……! 말세야, 말세!”
“우와. 식량 도둑 지금 굉장히 할아버지 말투야.”
이벨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정체 숨긴 입장에 뭘 어쩌겠어. 없는 곳에선 나라님 욕도 한다는데. 건방진 애송이 소리를 듣고 길길이 날뛰는 루드비히를 끌다시피 챙겨 향한 곳은 ‘수박씨 뱉기’라는 귀여운 명칭의 게임장. 커다란 수박 몇 통이 놓여 있는 것과는 달리, 막상 지원하고자 줄 서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응? 이 쉬운 곳에 왜 지원자가 아무도 없지?’
이벨리아는 내심 의문을 품었다. 바닥에 간간이 떨어진 수박씨를 바라보며 루드비히와 아가레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문어가 먹물 쏘듯 수박씨를 쏘다니. 가능하다면 난 하고 싶지 않다.”
“이하동문.”
“그럼 내가 할까? 내가 또 욕 뱉기엔 일가견이 있으니 수박씨도 잘 뱉겠지.”
나서려던 찰나. 엔리르가 후드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자원했다.
“누나. 이건 내가 할래.”
“꼭 토큰 따야 하는데. 엔리르 잘 뱉어?”
“걱정하지 마. 내가 왕년에 침을 좀 뱉었거든.”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기사단.”
하여간 만악(萬惡)의 근원들. 엔리르가 목을 돌렸다. 마치 출전 준비를 하는 선수처럼. 후드 아래서 적색 머리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진행자 쪽으로 다가가자, 사근사근한 말투의 진행자가 살짝 무릎을 굽히고 말했다.
“꼬마 신사님께서 수박씨 뱉기에 참여하시려나 보군요.”
“모욕적이군. 엄연히 다 컸다.”
그 말에 진행자가 멋쩍은 듯 웃었다.
“실례했습니다. 다 큰 신사님. 하지만 토큰을 얻으시려면 수박씨가 저 과녁에 닿아야 하는지라, 완전히 다 큰 신사님께서 참여하시는 것이 좋을 듯한데.”
과연. 진행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니 약 100보 정도 떨어진 곳에 사람 모양의 과녁이 세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저걸 맞추라는 모양인가 본데. 이벨리아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저게 뭐야! 수박씨를 저기다가 맞추라고? 이건 사기야! 내 토끼를 주지 않으려는 수작이야!”
차라리 실프를 불러서 수박씨를 날라다가 저 과녁에 맞혀달라고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이벨리아에게 엔리르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누나. 토큰 꼭 따다 줄 테니까.”
“수박씨나 뱉는 주제에 똥폼잡긴.”
“퉤. 너한테 뱉어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 개폼잡는 악…… 악당아.”
아가레스가 뭐라고 응수하려는 것을 이벨리아가 후드를 뒤로 끌어당겨 제지했다.
“출전 선수 보호 차원 후드 당기기!”
“알았어. 그만할게. 놔 줘, 손 다친다.”
진행자가 시작을 알리는 깃발을 아래로 내리자, 엔리르가 오물오물 수박을 입에 물었다. 그런데.
“저 모지리 지금 뭐 하나.”
“엔리르?”
바쁘게 움직이는 입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먹고 나서 씨를 얻었으면 퉤퉤 뱉어야 할 텐데. 의아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엔리르는 여전히 수박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작은 손으로 쥐고 냠냠냠. 손에 든 것을 다 해치우자 다음 수박에 손을 올리면서.
“잠깐.”
그러고 보니.
“우리 엔리르 수박 먹어본 적 없던가……?”
아마 그랬던 것 같은데. 게다가 지금 딱 배고플 시간이기도 하고. 축복제에서 먹은 것이 아까 그 매운 괴물뿐이니까. 루드비히가 쯧 혀를 차며 작금의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저거. 수박에 완전히 홀렸군.”
보다 못한 대회 진행자가 수박에서 엔리르를 떨어뜨리자, 엔리르가 눈을 반짝이며 진행자를 올려다봤다.
“이거 굉장히 맛있다. 달고 시원해. 마음에 들어.”
“많이 먹기 게임이 아니라 수박씨를 뱉는 게임입니다!”
“알아. 내가 수박을 많이 먹는 이유는 다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야.”
“그렇다기엔 입안에 씨가 하나도 없으신데요!”
“씨를 뱉으려면 먼저 수박하고 친해져야 해. 이제 넣으려고 했어. 딱 한 입만 더 먹고서.”
엔리르는 최대한 입을 크게 벌리고 와앙 수박을 물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통을 다 비워버린 참가자에, 진행자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꼼질꼼질 입을 움직여 씨를 모은 엔리르가 선 앞에 서자, 이벨리아는 두 손을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과녁을 바라봤다. 반면 진행자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성공할 리가 없지.’
기실, 이 수박씨 뱉기와 몬스터 토벌 체험은 검은 토끼를 획득하지 못하게 하려고 만들어 둔, 그러니까 대놓고 클리어하지 말라고 만든 극악의 난이도였다.
‘세상 어느 인간이 활로도 맞추기 힘든 과녁을 수박씨를 뱉어 맞추겠어.’
- 퉤! 인간 아닌 용이 뱉은 수박씨가 표적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 탁! 표적 바로 뒤에 서 있던 깃발 든 이가 이를 크게 휘두르며 소리쳤다.
“며, 며, 명중이오! 명중이오!”
수박씨는 표적의 이마를 정확히 뚫고, 깃발 든 이의 이마에 떡하니 달라붙어 있었다. 진행자는 기함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사기를 치신 겁니까!”
“사기 친 건 너희겠지. 저걸 인간이 무슨 수로 맞춰.”
“지금 맞추셨잖습니까!”
“그야 난…… 대단한 인간이니까.”
어린 용은 얼어버린 진행자의 바지 주머니를 직접 뒤적여 토큰 하나를 꺼내 이벨리아의 손에 올려주었다.
“누나. 토큰 여기.”
“진짜 왕년에 침 좀 뱉어 봤구나! 기특하다, 내 동생!”
“또 뭔가 뱉을 곳이 있다면 내게 말해. 목적지가 저 둘의 얼굴이면 더욱 좋고.”
기꺼운 칭찬을 받으며 엔리르가 씩 웃었다. 날아간 수박씨는 옅게 그을려 있었다. 추진력을 얻기 위해, 날아가는 수박씨 바로 뒤에 작은 브레스를 함께 날렸다는 것은 엔리르만 아는 비밀이었다. *** 그다지 어렵지 않게 토큰을 얻고 나니 자신감이 한껏 붙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몬스터 토벌-체험판’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천막. 아무나 지원하지 못하도록 시뻘건 경고 문구들이 사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검은 토끼를 얻지 못할 거라고 여기던 사람들의 반응은 아무래도 이 게임의 존재에서 기인한 것인 듯했다. 진행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진행자가 경고 문구를 넓게 펼쳐 들며 말했다.
“이 게임은 4인 1조입니다! 트라우마 및 부상 등에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우린 딱 네 명이야! 나름 강하고.”
“강하시다고요……?”
진행자가 특히 작은 몸집의 이벨리아를 미심쩍은 듯 훑으며 반문했다.
“물론 내가 아니라 이들이. 난 그냥 투명 인간쯤으로 여기면 돼!”
“흠. 좋습니다. 참가는 자유이니 룰을 설명드리지요. 저 거대한 마법진 보이십니까.”
“응!”
“저 위에 서시면 환영으로 만든 몬스터가 잔뜩 나타납니다. 나타난 것들은 실제 몬스터와 똑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완전히 같은 정도의 물리력이 가해져야 사망하지요.”
“왜 여기만 참여자가 적은지 알겠군. 구현도가 상당해.”
“물론 축복제를 위해 만들어진 환영이니만큼 여러분을 해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과연 몬스터를 코앞에서 보고도 놀라 도망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진행자가 바람잡이를 하며 킬킬 웃었다. 루드비히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별것 없네. 시작하지.”
그러자 진행자가 확성기를 들어 크게 외쳤다.
“몬스터 토벌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자, 자, 흔치 않은 기회! 몬스터 사냥을 구경하실 분들께서는 이쪽으로 어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제각기 일을 보던 군중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몬스터 사냥은 단연 축복제에서 가장 큰 볼거리이다. 애초에 이 게임에 참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 네 명이 구성되기는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좋은 날 망신당하는 것보다는 아예 도전하지 않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와글와글 몰려든 군중들을 등지고 이벨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마법진으로 걸어 들어갔다.
‘환영이 아니라 실제 몬스터라고 해도 안 무서운걸.’
우리 일행 면면들이 몬스터를 궤짝으로 풀어놓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이들이라.
“그나저나 누가 이렇게 쓸데없는 마법진을 정성 들여 만들었대?”
“저기. 제작자가 적혀 있군. 이크리안 카시스라고.”
이벨리아가 루드비히에게 속삭였다.
“대체 동화책 공장 공장장은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나도 미처 몰랐다.”
“큰 보라 인간 마법 실력이 꽤 쓸만한데! 물론 내가 가르치는 작은 보라 인간이 곧 따라잡을 거야!”
일행들이 여유롭게 잡담하는 사이. 마법진이 우웅 진동하며 푸른빛을 뿜었다. 작동이 시작되었다는 뜻. 이벨리아가 일행들에게 당부했다.
“다들 연기 잘해.”
“무슨 연기?”
“토끼 넌 한 번에 마기로 쓸어버리지 말고, 엔리르 넌 마법 쓰지 말고, 루이 넌 검술 실력 잘 숨기라고! 무서운 척들도 좀 하고!”
“귀찮은데.”
“꼭 그래야 해?”
“당연하지. 어디까지나 평범한 제국민인 척해야 하니까.”
단번에 해치우고 토큰을 얻으려던 아가레스와 루드비히, 엔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신다면 별수 있나. 명하신 대로 해야지. - 화르륵. 마법진에서 푸른 불길이 치솟고. 화염에 불타고 있는 늑대인간 약 스무 마리가 나타났다. 7급 괴수종. 라이칸슬로프. - 크아아아아! 환영으로 소환된 라이칸슬로프들이 네 명을 표적으로 삼아 포효하며 사냥 시작을 알렸다. 몬스터를 처음 본 제국민들은 마법진에서 멀찍이 떨어져 꺄악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기도 했다. 아이들은 부모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한편. 이벨리아는 직관적인 감상을 내뱉었다.
“우왕. 불타는 늑대다. 고기.”
그리고 일행들은 이벨리아의 명을 나름대로 아주 충실하게 이행했다.
“무섭군.”
“아이고. 사람 살려.”
“덜덜. 나 떨고 있어.”
억양도 표정도 없는 연기를 보던 이벨리아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해서 퍽이나 무서워 보이겠다.”
하긴. 저것들이 뭐 두려운 감정을 느껴보기나 했겠나. 믿은 내가 잘못이지.
‘믿을 건 일평생 갈고닦은 나의 연기력뿐이다!’
마침 라이칸슬로프가 이벨리아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울부짖었고. 이벨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마음껏 연기력을 뽐냈다.
“꺄아아아아-!!”
한껏 무서운 척을 한 뒤에 손에 든 검으로 처리하려 했건만.
“이브!”
“꼬맹이!”
“누나!”
세 명이 순식간에 앞을 가로막더니.
“어어, 잠깐……!”
말릴 새도 없이 그 많던 라이칸슬로프들을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처리해버렸다.
“…….”
처리라기보다는 몰살이라고 봄이 맞겠다.
“나, 나, 연기였는데. 무서운 척한 건데.”
당황하던 이벨리아는 이내 깨달았다. 라이칸슬로프를 처리했으면 마땅히 환호성이 터져 나와야 하건만. 사위가 지나치게 고요했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박힌다.’
이벨리아가 또르르 눈을 굴렸다. 군중들의 반응을 살피고자.
‘제발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저희는 그저 조금 강한 일반인이에요.’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진행자가 확성기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소리가 정적 속 우레처럼 울려 퍼졌다. 구경하던 군중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턱을 떡 벌리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음식들은 모두 바닥에 떨어뜨린 채. 이벨리아는 직감했다. 이 조명, 온도, 습도…….
‘망했다. 개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