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흩날려라, 두더지 인형!2022.03.24.
무언가에 막혀 텅, 튕겨 나가버린 빗자루, 그리고 이상한 소리로 우짖는 짐승을 멍하니 보며 가게 주인이 어어, 당황하던 차. 이를 보고 달려온 이벨리아가 후드로 얼굴을 조금 더 가리고 물었다.
“내 여우한테 무슨 짓이지?”
가게 주인이 흠칫했다. 말투만 보더라도 귀족이다.
‘재수도 더럽게 없지! 하필 귀족이 기르는 반려동물이었다니!’
입 잘못 놀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기 십상이다.
“그, 이 동물이 떡 하나를 훔쳐 가서……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빗자루를 휘두르기는 하였으나 맞지는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떡을 훔쳐 갔어?”
흘끗 돌아보니 두 앞발로 입을 꼭 막은 엔리르의 볼이 통통하다.
“너 이 자식.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누나가 이건 안 가르쳤어!’
“길거리에서 파는 걸 먹으려면 돈을 내야 하는 거야! 이렇게!”
이벨리아가 크론 몇 개를 주인에게 내밀어 값을 치렀다.
“미안하네. 내 여우가 아직 돈 내고 물건 사는 법을 익히지 못하여.”
“아이고, 아닙니다. 여우라면 익히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지요.”
“내 여우는 아주 똑똑하거든.”
어린 영애께서 참으로 반려동물을 사랑하시는군. 잘못하여도 외려 큰소리 내는 진상 귀족일까 걱정했건만. 드물게 교육 제대로 받은 귀족 영애인가 보다. 가게 주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귀여운 영애에게 떡 하나를 건네주었다.
“고귀하신 입에 맞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번 드셔보시지요. 최근 하르벤타에서 유행하는 음식인데, 쌀로 만든 떡을 매운 양념에 버무린 것입니다.”
“좋아! 고맙네!”
루드비히는 엔리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작은 병아리가 먹어도 문제없는 것인지를 살피기 위해. 그런데 용이 입을 틀어막고 팔딱팔딱 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붉은 털이 더욱 시뻘게진 채로. 마치 주화입마에 빠진 것처럼.
‘독인가!’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의 손에 들린 떡을 빼앗기 위해 황급히 손을 뻗었으나.
“잠깐, 땅 도둑!”
“냠.”
호기심으로는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이벨리아는 이미 떡을 입에 집어넣은 채였다.
“뱉어! 뭔 줄 알고 냉큼 먹어 그걸!”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의 입 앞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우우웅!”
이벨리아는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 꿀꺽, 떡을 삼켰다. 괜찮은지 살피는 루드비히의 시선 속. 아직 젖살이 다 빠지지 않아 맑고 통통한 얼굴이 점점 발갛게 달아올랐다.
‘혀, 혀에 불이 났나 보다!’
이내 식은땀이 흘렀다. 혀가 아프고 목이 타는 것 같았다. 마치 강아지처럼 혀를 쭉 빼야 호흡이 가능했다.
“헤엑, 혀가 아하…….”
“혀가 아파?”
“뜨거어…….”
“속이 뜨거워?”
병아리의 눈에 기어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자, 루드비히가 상점 주인의 멱살을 잡아 벽에 강하게 밀치고 단검을 목에 가져다 대었다.
“무슨 독이냐. 누가 사주했나.”
“예에?”
“바른대로 말하면 시체는 보전하게 해주지.”
“아니, 이게 무슨……!”
상점 주인과 루드비히가 대치하고 있던 그때. 화닥화닥 손부채질을 하던 이벨리아는 냉큼 엔리르의 목덜미를 잡고 아가레스의 후드 속으로 파고들었다.
“흐아, 흐아, 운디네!”
[병아리? 뭐야. 독 먹었어?]
“독인가 봐. 혀가 아프고 목이 따가워. 물 좀 줘! 물!”
“나도. 나도. 태양이 내 혓바닥에 올라탔나 봐.”
[뭘 먹었길래 이래! 독 먹인 인간은 어딨어! 그 인간부터 조져야지!]
쪼로로. 운디네의 물줄기가 이벨리아와 엔리르의 입에 쏟아졌다. 마치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이들처럼 갈급하게 받아먹자, 운디네의 소환을 후드로 잘 가려주고 있는 아가레스가 옅게 웃으며 고개 내려 물었다.
“괜찮아?”
입을 냠냠 움직여보니 혀도 덜 아프고 뜨거움도 거의 사라졌다.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응. 다 나았어. 해독제가 물이었던 걸까? 뭐가 지나간 거지, 지금?”
“매운 거야. 독이 아니라. 에르카디아에는 매운 음식이 발달하지 않았으니 모를 만도 하지.”
“매운 거야? 나도 매운 음식 먹어봤는데.”
“에르카디아의 매움과 하르벤타의 매움은 차원이 달라. 그들은 이 맛을 즐기거든.”
“혀를 불구덩이에 집어넣은 느낌을 즐겨……? 이샤트는 참 강한 아이였구나.”
훌쩍. 나오는 콧물을 쓱 훔친 이벨리아가 여전히 상점 주인의 멱살을 잡고 있는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근데 쟤는 왜 저래?”
“너한테 독을 먹였다면서 추궁 중이거든.”
“나 독 먹은 거 아니라며. 왜 안 말렸어?”
“재밌잖아. 저 바보 같은 꼴이.”
루드비히는 상점 주인에게 실토하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착실하게 흑역사를 쌓아가고 있었다. 아가레스가 좌판에서 붉은 떡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여간해선 웃지 않는 악마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샜다.
“이 제국 가장 강한 것은 바로 이 떡이로군.”
“응?”
“대정령사와 용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고, 황태자를 천치로 만들었으니.”
*** 조금 뒤. 멀쩡해진 이벨리아의 얼굴을 보고 사실을 알게 된 루드비히는 민망한 표정으로 자기변명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이벨리아와 엔리르는 자기들도 몰랐던 주제에 알고 있었던 척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멍청하긴. 그런 머리로 황제 자리에 앉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군.”
“…….”
“인간 황태자는 참 멍청하구나.”
“…….”
“식량 도둑은 빨간 떡에 패배했어.”
“……가지.”
귓가가 붉어져 앞으로 향하는 루드비히의 뒤를 이벨리아가 까르르 웃으며 따랐다.
“아- 역시 나오길 너무 잘했다-!”
쭉 기지개 켜며 하는 말이 청량했다. 루드비히와 아가레스의 입가도 선선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들 역시 다를 것 없었기에. ***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활보하던 이벨리아는 어느 순간부터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으음.”
정확히 말하자면 몇몇 사람들의 손에 공통적으로 들린 인형을 보고 있었다. 토끼 인형. 색은 빨간색부터 파란색까지 다양했고, 뾰족하게 솟은 귀와 통통한 팔다리가 아주 귀여웠다.
“사람들이 전부 엄청 귀여운 인형을 들고 있어.”
“사줘?”
“응. 가지고 싶어. 귀여워.”
그 말에 아가레스는 곧바로 토끼 인형을 들고 가는 행인 앞을 가로막았다.
“흐업. 뭐, 뭡니까!”
“그 인형.”
“이, 이건 제 딸아이 줄 인형이라…… 빼앗지는 말아주십시오!”
“어디서 얻을 수 있지?”
“아. 아아. 강도처럼 다가오셔서 놀랐지 뭡니까. 저쪽으로 쭉 걸어가시면 닭꼬치를 파는 포장마차 하나가 있습니다. 그 바로 맞은편에 붉은색 천막이 있는데, 그 천막에 가시면 얻는 방법을 알려줄 겁니다.”
“방법을 알려줘? 돈을 내면 될 것 아닌가.”
그러자 행인이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 제국 분들은 아니신가 봅니다. 몇 년 전부터 생긴 축복제의 묘미인데, 한번 가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주 흥미롭지요.”
기실 이방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넷 모두 축복제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긴 했다. 하나는 구중궁궐에 사는 황태자요, 하나는 마계에 사는 대악마요, 하나는 돈 주고 떡 사 먹는 법도 모르는 용이요, 하나는 그냥 병아리니까.
“가 보자! 얼른! 재미있을 것 같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기대된다. 아가레스와 루드비히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삐죽 튀어나와 버린 엔리르의 날개를 꾹꾹 눌러 집어넣으며 뒤를 따랐다. ***
“닭꼬치 포장마차 앞에 빨간 천막! 여기다!”
이벨리아가 천막을 휙 젖히자, 그 안에는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누군가는 토끼 인형이 가득 진열된 진열대 앞에. 또 다른 이들은 토끼 인형 없고 안내서만 가득 쌓인 진열대 앞에. 이벨리아는 곧바로 토끼 인형을 받을 수 있는 줄로 가서 섰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차례가 다가오자, 맑은 목소리로 요구했다.
“토끼 인형을 받으러 왔다!”
“즐거운 축복제 보내고 계시는지요, 꼬마 아가씨. 토큰을 주시면 토끼 인형으로 바꿔드리겠습니다.”
“……토큰?”
갸웃한 이벨리아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들었다.
“이것?”
인형 교환석에 앉은 안내인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토끼 인형은 보통의 돈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오로지 이 축복제의 행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토큰으로만 살 수 있지요.”
“어디서 행사를 하는데?”
“거리 여기저기에서 게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게임 하나를 클리어하실 때마다 토큰을 하나씩 받으실 수 있고, 그 토큰을 이 토끼 인형으로 교환하실 수 있지요.”
이벨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게임이라면 자신 있지!
“나는 검은색 토끼 인형이 가지고 싶은데! 토큰 몇 개가 필요한가?”
“검은색 토끼 인형은 가장 많은 토큰이 필요합니다. 축복제의 모든 게임을 클리어하셔야 얻으실 수 있지요.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입니다.”
토끼도 색깔별로 교환 토큰 수가 다른 모양이다. 실제로 토큰 두 개를 요하는 연갈색 토끼 인형은 산더미만큼 쌓여 있었고, 사람들도 이를 가장 많이 들고 있었다.
“검은 토끼 인형은 딱 하나밖에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오기 전에 누가 가져가 버리면 어떡해?”
“그럴 리 없을 겁니다, 꼬마 아가씨. 축복제의 게임은 만만치 않거든요. 작년 축복제에도 검은 인형을 가져간 이는 없었지요.”
“그래? 그럼 조금 이따가 봐! 그 토끼 인형 가지러 올게!”
천막 안에 있던 이들은 어린아이의 당찬 포부에 웃음을 흘렸고, 이벨리아는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인 양 크게 손을 흔들며 천막을 나섰다. 안내서를 들고 뒤를 따른 아가레스와 루드비히가 이를 펼치며 가장 가까운 게임 장소를 가늠했다.
“흠. 이런 이벤트가 생긴 줄은 몰랐는데.”
이벨리아가 안내서를 보려고 폴짝폴짝 뛰자 아가레스가 무릎을 굽혀 안내서를 낮춰주었다.
“두더지 잡기. 수박씨 뱉기. 몬스터 토벌 체험……. 신기한 게 많네! 재밌겠다! 제일 가까운 곳부터 얼른 돌자!”
총 10개의 게임. 빨리 돌고 토끼 인형을 획득한 다음 인형을 안고 닭꼬치를 먹고 싶었다. 이벨리아가 당장이라도 달릴 야생마처럼 발을 구르자, 루드비히가 반대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두더지 잡기가 가장 가깝군. 저기부터 가자.”
“좋아!”
그러자 꼬리를 마구 흔들던 엔리르가 이벨리아의 옷자락을 물어 잡아당겼다.
“누나. 나도 인간으로 변해서 게임 하고 싶어.”
“그래, 같이 하면 더 재밌을 거야! 저기 가서 몰래 변신하자. 내가 가려줄게!”
아가레스는 이벨리아를 위해 몇 벌 더 챙겨뒀던 후드를 꺼내 들었고, 골목길에서 몰래 인간으로 변신한 엔리르는 폭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인간으로 변해 자박자박 걸어온 엔리르를 향해, 이벨리아가 마치 배신자 지탄하듯 손가락질했다.
“너어……!”
“왜?”
“너어어……!”
“누나?”
“나보다 커졌어! 이건 배신이야!”
“아. 한참 됐는데. 난 용이잖아. 누나는 병아리고.”
“종족이 무슨 상관이야! 분명 나보다 작았었는데!”
“누나도 곧 클 거야. 지금은 작은 게 더 어울려.”
키가 부쩍 커진 엔리르가 옅게 웃으며 이벨리아의 머리에 손을 턱 얹었다. 빌어먹을 종족 깡패!
“아아, 대악마와 용과 정령왕 사이에 끼인 한낱 인간은 성장이 느려 슬픈 짐승이로다……!”
어디선가 들은 시를 변형하여 읊으며 이벨리아가 서럽게 눈꼬리를 내렸다. *** 첫 게임인 두더지 잡기. 무려 스무 개의 구멍에서 두더지 인형이 불규칙적으로 튀어 오르는 마법 물품이 비치되어 있었다.
“누가 저런 거 만드는 데 마법을 썼대? 참 할 일 없는 마법사인가 봐.”
“저기. 제작자가 적혀 있군. 이크리안 카시스라고.”
“……아하?”
일행 중 누가 참여하시겠느냐는 물음에 이벨리아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었다.
“나! 나다!”
“괜찮겠어? 여기서 지면 토큰 못 따는데?”
“당연하지. 다 방법이 있어!”
검사에겐 빠른 순발력이 실력이고, 마법사에겐 뛰어난 두뇌가 실력이듯. 정령사에게는 정령의 도움을 받는 것도 실력이다. 이벨리아는 후드 안으로 오른손을 꼼질꼼질 집어넣어 도우미를 불렀다.
“실프.”
[계약자! 계약자! 내 도움이 필요해? 나는 아주 잽싸고 날쌘 실프!]
“응. 그래서 불렀어.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고 내 손에 좀 붙어봐.”
[나는 바람이니 그건 쉽지! 안 보이게 찰싹 달라붙었어!]
“이제 튀어나오는 두더지를 때려잡으면 돼.”
[그건 자신 있지! 내가 노움들도 이 손으로 마구 때려잡았다고!]
좋아. 필살기 장착 완료. 바람의 정령이 두더지 인형 하나 못 잡을 리가 없다. 그리고.
“세상에!”
“아니, 저 게임하는 아이 좀 보세요!”
“두더지를 냅다 패고 있어요!”
“잘한다! 휘익-!”
이벨리아는 튀어 오르는 두더지 인형 수십 마리를 신들린 손놀림으로 한 치의 오차 없이 때려 맞췄다. - 뾱! 뾱! 뾱! 뾱! 뾱! 뾱! 뾱! 경쾌한 뿅망치 소리가 거리를 울렸다. 숙련된 요리사의 칼질 같기도, 저명한 검사의 검 놀림 같기도 한 뿅망치 휘두르기.
“흩날려라, 두더지 인형!”
기묘한 주문 그대로, 사방으로 튀어 허공에 휘날리는 두더지 인형들. 오래 지나지 않아 모든 인형이 유효타를 맞고 널브러졌다. 진행자는 바닥에 드러누워 차라리 죽여달라 외치는 듯한 두더지 인형의 눈을 애써 외면했다. 이벨리아가 두더지들 사이에서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자! 모든 두더지가 쓰러졌다!”
“마, 맙소사. 이렇게 올망졸망한 두더지를 이리 자비 없이 쥐어패시는 분은 처음입니다.”
각종 행사 주관으로는 잔뼈 굵은 담당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비며 토큰 하나를 아주 공손하게 손에 얹어주었다.
“토큰! 내가 얻었어, 토큰!”
위풍당당하게 작은 토큰 하나를 번쩍 치켜든 아이를 향해, 군중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거 뿅망치를 참으로 잘 휘두르는데!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도 되겠어!”
“에르카디아 제국의 미래가 밝구먼, 밝아!”
“내가 전망유명하지!”
“전도유망.”
“응, 그거! 전도유망!”
겸손을 겸양하고 사양을 사양하는 이벨리아가 엣헴 헛기침하며 가슴을 탕탕 쳤다. 마치 전쟁터에서 승리한 장군 같은 세리머니. 꽤 멋있는 모습이었다. 해치운 적이 작고 귀여운 두더지 인형이라는 점을 제외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