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이브의 벽보를 훔쳐라2022.03.17.
“있지. 나는 아무래도 휴가가 필요해.”
열한 살의 이른 봄. 비밀기지에 대자로 드러누운 이벨리아가 멍하니 나뭇잎을 응시했다.
“휴가?”
“땅 도둑은 매일 휴가 아니었나.”
“누나는 매일 놀고먹는데.”
오전부터 자비 없이 내리꽂히는 망언들에 이벨리아가 벌떡 몸을 일으켜 손에 쥐고 있던 강아지풀을 휙 집어 던졌다.
“내가 얼마나 바빴는데!”
“얼마나 바빴는데?”
“엄청! 푸딩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그 손에 든 건 뭔데.”
“푸딩.”
“…….”
세상 당당한 논리적 모순. 누구보다 이성적인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황한 루드비히를 제쳐두고 아가레스가 이어서 물었다.
“뭐 하느라 바빴는데?”
“반성문 쓰느라!”
“무슨 반성문…… 너 설마.”
“맞아. 악마. 누나는 반년 전에 왕 꼴뚜기 그 반성문 아직도 쓰고 있어.”
“아직도 다 못 채웠어?”
“하루에 다섯 줄씩 써도 기미가 안 보이는걸.”
“다섯 줄…….”
이벨리아를 제외한 비밀기지의 공유자들은 시선을 마주쳤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의 소중한 병아리가 하는 일이라곤 약간의 수업을 받거나. 반성문을 반년째 쓰거나. 가끔 나타나는 못된 이들을 퇴치하는 것뿐이었다. 즉, 한가하게 햇볕 쬐고 모이 쪼아먹는 보송보송 병아리와 별 다를 바 없다는 소리다. 이미 일상이 휴가인데 대체 무슨 휴가를 원하는 것인가. 그들은 양심을 가져다 버린 이벨리아에게 물었다.
“여행이라도 가고 싶어?”
“아니! 왠지 여행은 평탄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야.”
“그러면 별장이라도 지어 줄까?”
“아니! 그건 너무 거대해.”
“그러면 누나, 나랑 내 동굴에 놀러 갈래?”
“아니! 거긴 너무 꼬질꼬질해. 저번에 갔을 때 커다란 벌레도 봤어.”
충격. 허공에서 날갯짓하던 엔리르가 바닥에 툭 떨어져 내렸다. 이것도 저것도 싫으면 대체 뭘 원하냐는 듯한 눈빛들에, 이벨리아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마치 비밀 얘기를 하듯 속닥였다.
“곧 축복제가 열린대!”
“답은 정해져 있었군.”
“답은 정해져 있으니 우린 대답만 하면 된다고 말하지 그랬어.”
보아하니 휴가가 아니라 일탈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하긴, 황비의 일로 한바탕 난리가 난 뒤 밖을 나가지도 못할 정도로 과보호를 받아 왔으니 그럴 법도 했다.
“이번엔 누구랑 갈 거야?”
“아마 오라버니들이랑?”
그 호칭에 아가레스와 루드비히 둘 모두의 귓가가 약간 붉게 물들었다. 과거 바로 이 비밀기지에서 축복제는 오라버니와 함께 갈 거라는 말에 홀랑 낚여버린 일이 생각났던 터다.
‘그땐 오라버니가 나와 저 자식이라고 오해했었지.’
‘이번엔 넘겨짚지 않는다. 속지 않아.’
마음을 다잡으며, 루드비히가 물었다.
“소공작, 아니면 공자?”
“갑자기 우리 오라버니들이 왜 나와?”
마찬가지로 옛날 일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이벨리아가 빙긋 웃는 반면, 아가레스와 루드비히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었다.
“그러면. 누군데.”
“설마 카시스 소후작은 아니겠지.”
“동화책 공장 공장장은 같이 나가기엔 재미가 없어. 나한텐 우리 집 오라버니들이나 공장장 빼고도 오라버니들이 더 있는걸!”
“누구야. 그 망할 놈이.”
“나도 모르는 그게 누군데.”
입 여는 순간 족쳐버릴 기세로 안광을 번뜩이는 두 친구를 보며 이벨리아가 키득 웃었다. 역시 놀리는 맛이 있다. 이벨리아는 두 손을 양옆으로 펼쳐 두 친구를 가리켰다.
“여기 오라버니들!”
“……?”
“아스도 루이도 나한테는 오라버니지!”
“…….”
“…….”
두 지배자의 얼굴이 속절없이 붉어졌다. 아가레스는 괜히 오두막으로 시선을 돌렸고. 루드비히는 엄한 생각 하지 않게 날아가는 새를 응시했다.
“오, 오라버니…….”
“흠. 흠.”
“반응이 왜들 그래? 굉장히 떨떠름한데.”
“아니, 그냥, 뭐, 네가 꼭 굳이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나, 나도 마찬가지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좋…… 아니, 어쩔 수 없지.”
왠지 모르게 삐걱삐걱 움직이고 달각달각 말하는 악마와 황태자를 바라보며, 이벨리아가 그들의 눈앞에 손을 휘휘 휘저었다. 그러나 각자 오두막과 새를 응시하는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뭐야. 둘 다 왜 이래?”
둘 다 고장이 나버렸다. 왜인지 모르게.
*** 이벨리아는 러그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두 다리를 동당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아빠랑 엄마랑 오라버니들을 다 떼어두고 토끼랑 식량 도둑이랑 축복제를 갈 수 있을까?’
도주부터 호소까지 극과 극을 오가는 생각이 머릿속을 동동 떠다니던 차. 아주 채신머리없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 똑. 또독. 똑. 똑. 또독. 똑. 똑.
“딱따구리 같은 노크 소리!”
물을 필요도 없이 작은 오라버니다.
“쿠키를 들고 있다면 들어오고 아니라면 썩 물렀거라!”
“이 초콜릿 쿠키가 네 것이더냐, 이 레몬 마들렌이 네 것이더냐.”
“모두 제 것이니 얼른 들어오시지요, 오라버니!”
허락하자 아르칸과 세드릭이 쿠키 바구니를 든 채 들어왔다. 이 시간쯤이면 여동생이 간식에 굶주려 있을 것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았다.
“쿠키! 엄청 많이 가져왔네!”
이벨리아는 세드릭이 든 바구니로 호다닥 달려가다가 무언가를 보고 끼익 뜀박질을 멈췄다. 큰 오라버니 손에 저건…….
“종이……? 종이 금지령! 종이 금지령!”
“우리 아가가 금지령을 내리신다면 내던져 버려야지. 이 종이 마음에 안 들어?”
“반년 동안 반성문을 썼더니 종이란 종이는 다 꼴도 보기 싫어. 그 종이도 엄마가 나 반성문 쓰라고 준 거지!”
“아니. 이거 황실에서 우리 아가한테 준 건데.”
황실에서 온 종이에는 아주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이벨리아가 냅다 종이를 뺏어 들어 요리조리 살폈다.
“선전포고인가!”
“그랬다면 내가 먼저 황제의 목을 쳤지.”
하긴. 황비의 일 이후로 불경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진 오라버니가 선전포고를 군말 없이 두고 봤을 리가 없다.
“그러면 뭔데? 엄청 무식하게 커다란데!”
“곧 있으면 축복제잖아.”
“응. 응.”
“이번 축복제 이벤트래. 요즘 마족들이 날뛰는 빈도수도 높아졌고, 또 황비 건으로 황실의 명성에도 작지 않은 타격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고개를 갸웃하자 세드릭이 생긋 웃으며 설명조로 되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망 높은 귀족들이 힘내라는 취지의 좋은 말을 적어서 모두가 보는 길거리에 부착한다면?”
“쓰레기가 늘어나겠지?”
“……그걸 보는 제국민들이 와아, 우리 제국 귀족들은 이렇게 제국민들을 생각하는구나, 하고…….”
“화가 나겠지? 고작 종이 쪼가리 하나로 우리의 마음을 풀려고 하다니, 하면서?”
“……밤톨만 한 게 벌써 똑똑해져서는. 솔직히 아가 의견에 동감이야, 나도.”
“황실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여하간 다른 가문은 가주들만 하는데, 우리 가문은 전원 대상자야.”
“굉장히 쓸데없다. 어느 머리에서 나온 괘씸한 쓰레기야?”
“꼴뚜기.”
“쓰레기 생산지는 거기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 무능력하긴.”
이벨리아는 커다란 종이 위에 발을 콩 굴렀다. 발로 밟고 지나다녀도 한참인데 이걸 어느 세월에 쓰고 그리고 꾸민담.
“한 달 정도 있으면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아가. 축복제는 일주일 뒤에 시작이야.”
“……이 커다란 종이를 일주일 만에 채우라고?”
“당연히 아니지. 복사해서 붙이는 기간 고려하면, 모레까지.”
모레? 모레에?
“꼴뚜기를 모래 속에 처박아버리는 게 빠르겠다!”
*** 꼴뚜기의 명이었다면 더 볼 것 없이 항명했겠지만, 꼴뚜기 파의 신료들과 굳이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한 황제의 합작 때문에 칙서가 도달한 것이 문제였다. 황명이라면 대놓고 발로 밟아버리기도 난감하다. 이벨리아는 옆에서 빙글빙글 돌며 비눗방울이 나오는 마법진을 퐁퐁 띄우고 있는 엔리르에게 물었다.
“엔리르. 마법으로 이거 어떻게 안 돼?”
“내가 발 도장을 마구 찍어줄까?”
어린 용은 앞발 두 개를 코코아에 푹 담근 다음 꺼내 들었다.
“그거 아직 먹고 있는 코코아인데! 발을 집어넣었어!”
“다시 타올게!”
아가 용이 잔을 들고 파닥파닥 날아가자 앞발에서 떨어진 코코아 방울이 방에 궤적을 남겼다. 방문 앞까지 날아간 엔리르가 슬쩍 뒤를 돌아 조언했다.
“대충 써. 누나. 큰 글자로 가득가득 채워버리면 되잖아?”
“……!”
그러면 되겠다! 굳이 표준 글자 크기로 이 커다란 종이를 다 채우라는 명령은 없었으니까. 역시 용은 똑똑하다.
“뭐라고 쓰지?”
마족들로 인한 제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목적이라면, 간단하다. 잠시 생각하던 이벨리아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좋았어.”
엔리르가 새 코코아 잔을 들고 파닥파닥 날아서 들어오자, 이벨리아가 어린 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엔리르. 이리 좀 와봐.”
“응. 응.”
“여기 코코아 잔에 꼬리 좀 담가봐.”
“응. 응. 앗 뜨거워. 식은 코코아 잔에 담글래.”
폭. 코코아 잔에 빠졌다가 나온 풍성한 꼬리가 마치 먹물을 머금은 커다란 붓처럼 촉촉해졌다.
“이걸로 뭐 해? 마구 휘둘러?”
“아니! 내 손에 들어와 봐!”
어린 용이 고개를 갸웃하며 뒷걸음질로 이벨리아의 손에 답삭 안기자.
“잉차.”
이벨리아는 엔리르의 몸통을 잡고 꼬리를 붓처럼 사용해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나 용인데.”
“꼬리가 풍성한 용이지!”
일필휘지. 삐뚤빼뚤한 글씨가 커다랗게 종이 위에 새겨졌다. 붓의 역할을 다한 엔리르가 파드득 날아올라 허공 위에서 종이를 내려다봤다.
“우와…….”
“어때?”
“세상에서 제일 대충이지만 내가 보기엔 가장 예뻐.”
후한 평가에 이벨리아는 종이를 후후 불어 말리고 돌돌 접었다. 감히 자만할 수 있었다.
“아마 제국민들에겐 이 말이 가장 안심될걸?”
*** 축복제 이틀 전날 밤. 각 지역의 순찰병들은 귀족들이 제국민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쓴 대자보들을 제국 전역 광장과 길목마다 빈틈없이 붙였다. 귀족들의 습성이 으레 그러하듯, 온갖 난해한 미사여구들로 떡칠하여 종이를 여백 없이 채운 줄글들 사이. 마치 포고나 다름없는 단순명료한 종이 하나가 극명하게 눈에 띄었다. 「내가 있다.」 작성자 - 이벨리아 폰 아르티나. *** 드디어 축복제 전날. 웬일로 새벽부터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아르티나 기사단이 마치 먹이를 빼앗긴 곰들처럼 씩씩대고 있었다. 간식을 먹으며 연무장을 돌아다니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와 물었다.
“왜들 그래?”
“아기씨의 벽보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에엥?”
“이 좀도둑 새끼, 아니 아가들이…….”
“누가 훔쳐 간 거야? 내 벽보들?”
흥분한 아르티나 기사들 사이로 그나마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던 알렉이 말했다.
“죄다 훔쳐 갔습니다. 그 많은 벽보가 하나도 안 남았어요.”
“다른 사람들 것도?”
“아니요. 아기씨 것만요. 어떤 개자…… 아니 멍멍이들인지는 몰라도 잡아서 확 그냥 손모가지를 분질러…… 아니 바삭바삭 부숴버려야 하는데.”
말 그대로였다. 다른 벽보들은 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건만. 이벨리아의 벽보만 그 많은 것들이 죄다 사라졌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내가 열심히 쓴 건데! 왜 내 것만 다 사라진 거야?”
“들어보니 부적이라던가.”
“간명해서 읽기가 좋다던가.”
“그냥 아기씨가 쓰신 것이니 가지고 싶다던가.”
“그런 이야기들을 거리에서 듣긴 했습니다. 모두 가지는 데 실패한 이들의 말이었습니다만.”
“…….”
축복제 날 자신의 벽보만 쏙 빼고 걸린다는 사실이 조금 속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국민들이 좋아했으면 그걸로 됐다. 어깨를 으쓱한 이벨리아가 자신의 멍멍이 기사단을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없어진 건 내 벽보인데 너희들은 왜 이렇게 화가 잔뜩 났어?”
“그거야 저희가 훔치려고 새벽 일찍 나갔는데 이미 다 사라져…… 헙.”
“…….”
이벨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니까. 너희 멍멍이들이 오늘따라 새벽 일찍 나갔다 온 게.”
“부지런히 순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내 벽보를 훔치려고 그랬다는 거네.”
“순찰하는 김에 보이면 슬쩍 떼어올까 생각도 했지만요.”
“너희가 훔칠 것을 누가 먼저 훔쳐 가서 이렇게 성질이 난 거고.”
“……말 나온 김에 몇 장 더 없습니까, 아기씨? 한정판으로?”
“엇, 저는 아기씨 서명도 같이 주십시오!”
기사단이 좀비 떼처럼 달려들어 한정판 같은 소리를 해대자, 귀찮아진 이벨리아가 손을 휘휘 저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너희는 기사도란 게 있기는 해?”
“그 무슨 섭한 말씀을. 저희는 기사가 아닙니다!”
“기사단인데 왜 기사가 아니야!”
“기사라기보다는 우리 아기씨의 멍멍이지요. 기사도가 밥 먹여주는 거 아닙니다, 아기씨?”
“그런 의미에서 한정판 벽보 주십시오.”
“저는 두 장 주십시오. 하나는 나중에 웃돈 받고 되팔게.”
이벨리아는 웃돈 타령하는 알렉의 단단한 배를 조막만 한 주먹으로 팡팡 응징했다.
“우리 아빠는 대체 왜 이 멍멍이들을 수도로 부른 거야?”
*** 그날 저녁. 이벨리아는 오랜만에 이바스 저택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가 이상한 모습을 적발했다.
“얍! 나 왔다!”
문을 쾅 열고 들어가자마자 잔디 악마가 화들짝 놀라더니 뒤로 뭔가를 후다닥 숨기는 것이 아닌가.
“너는 그렇게 문 쾅 여는 버릇 좀 고쳐! 밥풀 주제에 기력만 밥솥만 해서는.”
심지어 분홍 머리의 예쁘고 성질 더러운 언니 악마도.
“그래! 놀랐잖아!”
둘 다 자세가 아주 엉거주춤한 것이 아주 수상하다. 이벨리아가 바짝 붙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