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악마의 것을 넘어선 권능2022.03.14.
굶주린 사자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본능적으로 등을 돌려 달아나던 황비는 얼마 가지 못해 벽에 등을 대고 섰다. 어둠 속에 형형히 빛나는 금빛 안광. 사냥을 앞둔 짐승의 것처럼 고요한 숨소리.
“루, 루페르트 백작……!”
아가레스가 황비 쪽으로 한발 다가갔다.
“엄연히 토끼라는 이름이 있는데.”
일견 가벼운 농담조. 그러나 말에 섞인 기운은 전혀 가볍지 않다. 마치 사냥감을 가지고 놀 듯 여유롭게 발을 내딛던 악마는.
“그, 그년이 나를 죽이라 했나!”
그 한마디에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황비의 목을 쥐었다. 벽에 등을 강하게 부딪친 황비가 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낮은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말 예쁘게 해야지. 내 주인을 입에 올릴 땐.”
“커헉! 고, 공녀가 나를 죽이라 했나?”
“내 상냥한 주인이 그럴 리가.”
아가레스가 고개 숙여 황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만, 네가 더는 필요 없다더군.”
이브가 필요로 하지 않는 쓰레기를 굳이 내버려 둘 이유가 없지. 인간 세상 그 어떤 위치에 앉아 있더라도 그에겐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그의 위에 설 수 있는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일하니까.
“고, 공녀! 공녀를 만나게 해다오! 이야기를 한 번만 나누게……!”
“쉬이. 금방 끝나.”
비굴하게 애원해도 대악마의 의사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황비는 이대로 죽고 싶진 않았다. 마지막 가는 길, 저주라도 시원하게 퍼붓고 가리라. 황비가 눈을 부릅떴다. 반쯤 미쳐버린 갈색 눈이 독기를 가득 담고 번뜩였다.
“공녀는 멀쩡할 것 같은가!”
“……?”
“날 이리 만들고 공녀라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냔 말이야!”
“이변은 없다. 내가 곁을 지키는 이상.”
“원혼이 되어서라도 저주하겠다! 이 제국을 떠도는 악령이 되어서라도 공녀를 저주하고, 저주하고, 또 저주하겠다!”
대악마의 일그러진 표정을 기대했건만. 아가레스는 외려 웃었다.
“그건 어렵겠는데.”
아가레스가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진보랏빛 마기가 냉궁 전체를 감싸고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곧이어 감긴 금빛 눈이 천천히 열림과 동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냉궁 안이 검붉게 물들었다. 악을 지르던 황비가 몸을 떨었다. 뱃속에서부터 뭔가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아가레스의 팔을 긁어내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게, 이게 무슨!”
분명 냉궁이었는데, 더는 아니다. 어느 공간인지도 알 수 없었다. 땅에서는 용암이 솟아오르고, 사방에는 작두날 같은 것들이 현란하게 흔들렸다. 벽면에는 얼굴만 남은 악귀들이 크게 입을 벌려 알 수 없는 소리를 빠르게 외쳐댔다.
“어, 어, 여기가, 어디……!”
끓고 있는 강에서 고통받고 있는 형체 하나가 황비의 옷자락에 손을 뻗자, 황비가 소스라치며 발로 걷어찼다. 빠져나가려는 형체들은 황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통을 가진 마물이 활로 쏘아 죽이고 있었다. 괴기한 광경이었다. 말 그대로 수라장. 굳어 말조차 내뱉지 못하는 황비에게 아가레스가 말했다.
“분명 말했었는데. 감히 나의 구원을 해한다면, 너와 네 아들은 마계 가장 참혹한 곳에서 죽지도 못하는 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으아아……!”
“지옥의 일각을 구현한 것이다.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넌 살아서는 육신이, 죽어서는 영혼이 이곳에 묶일 테니.”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황비가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은 애원하듯 사정없이 비벼졌다.
“사,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공녀의, 아니, 공녀님의 앞에서 이렇게 빌겠습니다, 제발! 제발!”
“지옥에서 받는 벌을 콘트라파소(contrapasso)라 부르지.”
역으로 겪는다는 뜻. 이승에서 거짓 예언으로 사람들을 기만하였던 이는 머리를 180도로 돌린 채 뒤만 보고 걷도록. 살아생전 거대한 몸집과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살해했던 이는 노쇠하고 병약한 모습으로 하루에도 수백 번 칼에 찔리도록. 이승에서 다 씻지 못한 죄업을 그대로 담은 푸른 불덩어리가 황비의 몸을 화르르 감쌌다. 황비의 입에서는 더 이상 비명도, 애원도 나오지 않았다. 끔찍한 고통에 그저 입만 뻐끔댈 뿐이었다.
“억울할 것 없다. 그대가 한 만큼 겪을 뿐이니.”
아가레스가 황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만, 억겁의 시간 동안.”
억겁! 감각을 초월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황비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어, 어, 어, 어떻…… 악마…… 심판…….”
아가레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 어떻게 악마가 인간을 심판하나, 뭐 그런 얘긴가.”
다신 현실로 돌아오지 못할 이를 향해, 아가레스가 자비롭게 답했다.
“모든 존재는 으레 본질이 중요하지.”
*** 냉궁을 나온 아가레스는 습관처럼 공작저로 향하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악마의 육신이 가진 힘을 넘어 사용하는 바람에 그 잔재가 어지러이 붙어 있었다.
“…….”
꼬맹이랑 놀고 싶은데. 인간이 보기엔 크게 티가 나진 않을 텐데. 그냥 공작저로 바로 갈까.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공작저가 아닌 이바스 저택으로 향했다.
“이브 앞에선 늘 착한 토끼여야지.”
그의 상냥한 친우에겐 불편한 것, 잔인한 것, 나쁜 것, 그 어느 하나의 한 조각이라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모든 좋은 것들만 그러모아 쥐여주어도 부족하니까. 세차게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목욕을 마치고 옷을 단정히 갈아입은 아가레스는 그제야 이벨리아 곁으로 돌아갔다.
“토끼 왔어? 아주 뽀송뽀송하네?”
“쉬다 왔거든.”
“어디서?”
“이바스 저택. 쉬다가 너랑 저녁 먹고 싶어서.”
평소와 같은 아양에 작은 친우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맑게 웃었다. *** 미쳐버린 황비가 냉궁 안에서 밤낮없이 울부짖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시녀 하나가 음식을 넣으며 슬쩍 들여다보니, 황비가 가만히 선 채로 허공 어딘가를 보고 용서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본디 산 사람에게 지옥은 보이지 않으니, 다른 이들이 보기엔 황비가 완전히 미친 것으로 보이긴 했다. 로아나. 로아나. 잘못했어, 로아나. 종종 서거한 황후의 이름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황비가 황후를 독살했다는 야사가 기정사실처럼 황궁을 휘돌았다. *** 그로부터 며칠 뒤. 공작저에서 저녁을 먹던 이벨리아가 말했다.
“아빠. 황비가 미쳤대요.”
“음. 들었다.”
“이상해. 너무 빠른데……. 누가 내 허락도 없이 손을 썼나?”
“안 이상하다. 냉궁은 원체 무서운 곳이지.”
에드윈을 죽이겠다 협박하고 온 휴고가 시선을 회피하며 시치미를 뗐다. 그러자 이벨리아가 옆에서 자신의 접시 위에 놓인 고기를 썰어주고 있는 아가레스를 바라봤다.
“토끼야. 이상하지 않아?”
규칙적으로 잘리던 고기의 두께가 불규칙적으로 변했다.
“아니. 안 이상해. 거긴 아주 무서운 곳이더군.”
“무서운 곳이더군? 그걸 토끼가 어떻게 알아?”
“무서운 곳이라더군. 고기 써느라 집중해서 말이 헛나왔다.”
이벨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안 이상해.”
“안 이상하다. 딸.”
“아니, 시선을 피하는 아빠랑 고기를 삐뚤빼뚤 자르는 토끼가 이상한데…….”
시선을 마주친 휴고와 아가레스는 빛보다 빠르게 상대방을 팔았다.
“아빠는 아니다. 악마가 본성 숨기지 못하고 뭘 했나 보군.”
“난 아니야. 공작이 뭘 했나 본데.”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이벨리아가 커다란 미끼를 던졌다.
“둘 다 아니란 소리지? 아쉽네. 칭찬해주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시선을 마주친 휴고와 아가레스는 빛보다 빠르게 자신을 팔았다.
“나다. 황자 목숨을 거두겠다 협박했지.”
“나야. 지옥에 처박아버렸거든.”
“…….”
어이가 없다. 이럴 줄 알았어! 둘 다지! 하나는 아들을 죽이겠다 으름장 놓고 하나는 지옥에 처박아버렸으니 안 미치고 배기겠냐고! 이벨리아는 자기 몫의 고기 한 덩이를 아빠의 접시에, 다른 한 덩이를 아가레스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자! 칭찬!”
그에 휴고는 감격한 듯 커다랗게 눈을 떴고, 아가레스는 자랑하듯 접시를 슬쩍 들어 아르칸과 세드릭에게 보여주었다. 엘리시아와 아르칸, 세드릭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부러움이 가득 들어찼다.
“……우리 아가가 고기를 주다니.”
“정말 엄청난 칭찬이다.”
“남의 고기도 다 뺏어 먹는 앤데…….”
“없는 고기도 만들어서 뺏어 먹는 아가인데…….”
그 사이에서 네피르는 양손으로 자기 뺨을 한 번 살짝 내리쳤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정신 놓는 순간 나도 저 사이에서 저러고 있을 수도 있어.’
*** 그날 새벽.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난 네피르는 주섬주섬 짐을 쌌다.
‘챙길 것도 없네.’
애초에 집도 재산도 없으니 보따리가 무색하게도 안에 들어가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그저 맨몸 하나에 간단히 먹을 만한 건조식품 조금.
‘이럴 줄 알았으면 카시스 후작가에 있을 때 금화라도 조금 더 모아둘걸.’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네피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래 봬도 목적한 바가 대상인인데. 돈이야 어딜 가서든 벌 수 있지 않겠나 싶은 마음이었다. 공녀님이 상냥하게도 자신에게 내어준 가장 좋은 손님방. 한 바퀴 빙 둘러보던 네피르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기 싫다.”
가시방석일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따스한 곳이었다. 공작님은 자신을 비호해주셨고, 공자님들은 눈치 주지 않았다. 공작부인과 공녀님은 살뜰하게 챙겨주었으며, 말하는 털 뭉치는 자신을 물 빠진 보라 인간이라 부르며 날아다녔다. 기실 그래서 떠나는 거였다. 더 머물렀다가는 정말 눌러앉고 싶어질까 봐. 주제도 모르고 그렇게 될까 봐. 「은혜는 갚겠습니다 – N」 공녀님 앞으로 짧은 쪽지 하나를 남겨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조용히 방문을 열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새벽 특유의 옅은 물안개 냄새와 청량한 공기. 네피르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좋아.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꼭 상단을 되찾아서. 꼭 금의환향해서. 렐리안의 코를 납작 눌러주겠어. 다짐한 작은 발걸음이 머뭇거림 없이 공작저 문을 나서 바깥 대문으로 향하던 찰나.
“네피르!”
부르는 소리에 네피르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여기! 여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위를 올려다보니, 2층 발코니 난간 사이로 공녀님이 얼굴을 내밀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공녀님?”
놀란 듯한 표정에 이벨리아가 씩 웃었다.
“이럴 줄 알았지!”
이렇게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도망가 버릴 줄 알고 운디네에게 미리 시켜뒀었다. 언젠가 네피르가 떠나려 하거든 자신을 꼭 깨우라고. 그 장난기 어린 시선을 회피한 네피르는 이를 꽉 깨물고 땅을 내려다보았다. 어렵게 결심했는데. 더 머물지 말고 빠르게 떠나자고.
‘잡지 말아주세요, 공녀님. 제 결심을 흔들지 말아주세요.’
속으로 간청하는 네피르의 발 앞으로 묵직한 주머니 하나가 툭 떨어졌다. 황금빛 천으로 만든, 금색 용이 수놓아진 비단 주머니. 누가 봐도 아르티나 가문의 것이다.
“……?”
“열어봐!”
허리 숙여 주머니를 들고 끈을 푼 네피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두둑한 금화. 원하는 곳 어디든 쏘다녀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네피르는 뻣뻣한 목을 움직여 2층 발코니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전 이런 건 필요 없는데…….”
“저 먼 왕국 어딘가에는 배추를 매운 양념에 비벼 먹는 음식이 있대.”
“……?”
“또 다른 왕국 어딘가에서는 찹쌀에 꽃을 넣어 지져 먹기도 한 대.”
난간 사이. 이벨리아가 환히 웃었다.
“궁금하지.”
“네? 네.”
“나도 궁금해. 근데 내가 아는 상인은 너밖에 없어서 너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네. 그것들을 나한테도 보여줘.”
“……!”
잡아두시는 게 아니었구나.
“그 금화는 미리 치르는 값이야.”
응원이었고.
“또 와. 꼭.”
또 잘 다녀오라는 인사였고.
“……네. 공녀님.”
기어이. 기꺼이 그 인사에 답하게 하시는 따뜻함이었다. *** 발코니 창을 닫은 이벨리아의 등에 엔리르가 매달려 앞발로 눈을 비볐다.
“물 빠진 보라 인간한테 준 금화 다 어디서 났어?”
“땄지!”
“어디서?”
“도박해서!”
황금이라면 환장하는 어린 용의 눈이 번뜩 빛을 발했다.
“도오박? 그거 하면 황금 나와?”
“응. 황금 100개를 뱉어내면 1개를 얻어, 보통!”
“황금을 얻어! 최고…… 아니, 잠깐. 100개를 주고 1개를 받으면 손해인데?”
“응. 역사에 길이 남는 거지 용이 되고 싶다면 해도 좋아!”
악룡도 아니고 거지 용이라니! 끔찍하다! 엔리르는 다른 쪽을 탐내기로 했다.
“그럼 물 빠진 보라 인간한테 준 주머니는 어디서 났어? 반짝반짝 예쁜데.”
“그거 테사한테 부탁해서 만들었어. 네피르는 어린 여자아이니까. 누가 소매치기할 수도 있잖아.”
“주머니가 황금이면 더 훔쳐 갈 텐데?”
“주머니에 우리 가문의 인장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웬만한 좀도둑들은 무서워서 못 훔쳐 갈 거야. 자칫하면 우리 아빠가 잡으러 갈 수도 있다고 여길 테니까.”
그 말에 어린 용이 털을 삐죽 세웠다.
“……집주인 문양 찍힌 거 훔쳐 가면 집주인이 잡으러 와?”
“당연하지! 언젠가 꼭 찾으러 갈걸?”
“잡아서 어떻게 해?”
“아마 감옥에 가두거나 목을 베거나 하겠지?”
“…….”
“왜, 엔리르?”
“아무것도 아니야…….”
*** 몇 시간 뒤, 이른 새벽. 연무장으로 향하고자 방문을 연 휴고는 문 바로 앞에 가득 쌓인 각종 펜던트, 브로치 등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도둑맞았던 것들이다.
“털뭉치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걸 다 돌려놨지.”
*** 그리고 같은 날 새벽. 황태자 궁 역시 불이 꺼질 기미가 없었다.
“전하. 이만 주무시지요.”
“됐다. 물러가라.”
“며칠째 식사도 거르시고 잠도 제대로…….”
“물러가래도.”
루드비히의 보좌관, 에르트 백작은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겼다.
‘공녀님과 황비 사이의 일을 보고드린 후부터 당최 뭘 드시지도 않으시니…….’
마족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남부지역, 격려 겸 민생을 살피기 위해 직접 다녀왔던 루드비히는 며칠 전 황궁에 돌아오고 나서 계속 이 상태였다. 이미 모든 일은 끝난 뒤였지만, 그 때문에 더욱 속이 뒤집혔다. 같이 있지 못했음에. 어떤 도움도 되어주지 못했음에. 수도로 올라오는 길. 소식을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우레가 치는 듯한 충격에 비틀거렸었다. 무사하다는 사실을 뒤이어 듣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황비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나 때문이다.’
내가 강했다면. 내가 황태자의 지위를 견고히 했다면. 내가 이미 황위를 받아냈더라면. 내가 황비와 에드윈을 미리 죽여 없앴더라면.
‘다 내가 그러지 못해 생긴 일이야.’
그의 불확실한 기반으로 인해 둘도 없는 친우가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꽃만 밟아도 아까울 걸음으로 쓰레기를 밟고, 하늘만 담아도 아쉬울 눈으로 더러운 것들을 감내하느라 버거웠을 터다.
“……이브.”
친우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자 자신도 모르게 작은 읊조림이 흘렀다. 마치 사죄하고자 조심스럽게 돌려세우듯.
“…….”
루드비히는 다시 깃펜을 잡았다. 먹고 잘 시간 따위 없다. 며칠 동안 손에서 놓지를 않아 깃펜엔 피가 배어 있었지만, 이 역시 신경 쓸 것이 아니다. 제국 설립 이래 모든 대립과 정책을 머릿속에 넣으며, 루드비히는 다짐했다.
‘강한 황제가 될 거다. 너의 평안을 위해, 내 손에 피를 묻힐 수 있는 황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