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특별재판, 개정2022.03.03.
에르카디아 수도 전역. 변복한 아르티나 기사단은 공녀님이 카시스 후작저에서 독을 드셨다고 흘리며 돌아다녔고, 소문은 바람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정세에 어두운 이들은 카시스 후작가와 아르티나 공작가가 드디어 반목하게 되었냐 되물었고. 정세를 조금 안다 하는 이들은 카시스 후작가와 아르티나 공작가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누군가의 소행이라 답했다. 그리고 정계의 한복판에 있는 이들은 곧바로 황비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돌렸다. *** 정기 귀족회의가 이 주에 한 번씩 열리기에, 임시 귀족회의가 소집되는 일은 드물었다. 기실 귀족들에게 그 이 주를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촌각을 다투는 일은 흔치 않았으니까. 임시 귀족회의의 소집자는 황제였는데, 공작과 후작은 단독으로, 그 아래의 귀족들은 귀족회의 구성원 10명 이상의 연명을 받아 황제에게 소집을 요청할 수 있었다. 휴고는 법정(法定)된 공작의 권한으로 황제에게 임시 귀족회의의 소집을 요청하였고. 황제의 옥새가 찍힌 소집문이 지체 없이 각 가문으로 송달되었다. 「임시 귀족회의를 소집한다. - 소집 요청자: 휴고 폰 아르티나(公)」 급히 개최되는 임시 회의이니만큼 안건이 기재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소집문을 받은 이들은 어떤 사안이 화두에 오를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참석을 망설이는 이는 없었다. 부재했다가는 아르티나 가문으로부터 어떤 의심을 받을지 모르니까. 소집문이 송달된 당일 개최되기에 일반적으로 참석률이 저조하던 임시 귀족회의는 이례적으로 만석이었다. 단 한 가문. 전 가주가 죽고, 현 가주가 전선에 나가 있는 데퐁트 후작가만 제외하고. *** 수평적인 논의를 신조로 하여 황제의 자리를 제외하고는 원형으로 구성된 임시 회의장.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엔 늘 괴리가 있듯, 원형으로 건축된 회의장 역시 그 목적을 다하진 못했다. 정계의 중심부에 있는 귀족들은 원형의 가장 앞자리에서 파벌을 대표하는 목소리를 내었고, 권력의 중심과 거리가 있는 귀족들은 그저 손뼉이나 치다 돌아가기 일쑤였다. 예상되는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회의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황제가 원형의 회의장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왕홀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아주 오랜만의 임시 회의로군. 논의할 안건을 상정하게, 공작.”
원형 가장 앞자리에 앉은 휴고가 에두르지 않고 말했다.
“제 딸이 음독하였습니다.”
황제 역시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예비 며느리로 점찍은 아이이니만큼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소식은 들었네. 참으로 유감일세. 공녀는 좀 어떠한가.”
“극독이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처럼 말하자,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설마!”
“아시다시피 제 여식이 지닌 능력이 여럿이라 그 덕에 목숨은 부지하였습니다만, 아직도 혼수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어찌 이런 일이!”
“아직 어리신 공녀님을 상대로……!”
아르티나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비탄에 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댔다. 기실 누가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공녀님을 노릴 이가 누가 있겠어.’
‘최근 황자 전하 청혼서 일로 감정이 상한 황비 전하밖에 더 있겠는가.’
‘겁도 없이 아르티나를 건드리려면 황비 전하 정도의 뒷배 없이 가능할 리도 없고.’
피해자가 이벨리아라는 사실만으로, 귀족들은 쉽게 황비를 연상했다. 이벨리아의 의도대로였다. 휴고가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청했다.
“제 딸을 살해하려 한 이를 피고인으로 하여 특별재판을 청구합니다.”
일반적인 형사 사건은 공판 이전에 수사기관이 증거를 모아 기소하나, 고위 귀족들은 인지한 범죄에 대해 곧바로 재판을 청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영지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자잘한 범죄들을 모두 수사기관에 고발하고 수사기관이 기소하기까지는 상당한 인력이 낭비되기에 주어진 특혜였다.
“특별재판이라…….”
황제가 말끝을 흐렸다. 그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황비와 아르티나의 갈등이 얼마 전 청혼서 건으로 극에 달했다는 것은 이미 수도 전역에 널리 퍼진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 다만 황제는 가족인 황비의 일에 대해서는 무 자르듯 객관적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황비의 심성이 그리 곱지 않다고 해도 황제와 황태자가 아껴 마지않는 공녀를 살해 시도할 정도로 악독하지는 않다고 믿고 있었다. 피곤해질 것 같은 예감에 황제가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피고인은 누구인가.”
휴고의 무거운 음성이 회의장을 짓눌렀다.
“황비 전하십니다.”
이럴 줄 알았다. 황제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깊은 애정을 품고 있진 않다고 한들 그래도 가족. 황제는 황비를 두둔했다.
“공작. 아무 증거도 없이 황족을 재판정에 세울 순 없네.”
황제가 이렇게 나오리라 예상은 했다. 가족을 건드리고 딸을 건드린 이에게, 휴고 역시 망설임 없이 이를 드러냈다.
“제국법 제3조 제1항. 다음의 자는 황족이라 한다. 제1호. 황제. 제2호. 황후. 제3호. 황제의 소생.”
“……공작.”
“이 중 어디에 황비가 있습니까.”
“공작!”
“증거라 하셨습니까. 증인과 물증. 어느 것부터 보시겠습니까.”
“…….”
증거가 있는가. 정말로 황비가 그랬는가. 참담함에 황제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친우. 부인. 두 아들. 그 어느 것 하나 놓지 못하는 이기심 사이에서 모두가 소용돌이치듯 충돌하고 있었다. 휴고는 굳이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증인부터 보시지요.”
그렇게 네피르가 들어와 황비의 시녀로부터 독약 병을 받았음을 고하는 순간에도. 휴고가 소견서를 내미는 순간에도. 황제는 이 모든 것이 실로 비현실적이라 느끼면서 또 한 걸음 동떨어졌다. 성군일지 몰라도 좋은 남편은, 좋은 아비는, 좋은 친우는 결코 되지 못하는 이.
“……좋다.”
이번에도 다를 것 없었다.
“공작의 재판 청구를 받아들인다.”
왕도(王道)를 이유로 부인의 편을 들지 않았고, 사정(私情)을 빌미로 신하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는 왕관을 방패 삼아 모든 것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익숙하게도.
“공판기일은 일주일 뒤로 한다.”
특별재판을 허가하는 황명이 떨어지자, 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회의장을 나섰다. *** 그 시각. 화려한 방을 정신 사납게 휘저으며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던 황비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직 소식이 없느냐!”
“지금 막 논의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전하. 조금만 기다리시면…….”
고하던 시녀의 얼굴에 작은 꽃병이 날아갔다. 피할 겨를도 없이 눈 위를 맞은 시녀가 주저앉아 침음을 흘렸다.
“감히 나를, 이 황족을 재판정에 세워? 감히?”
엄밀히 말하자면 황족은 아니지만, 그 말에 토를 달만큼 간이 부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결백하다! 결백하단 말이다!”
황비는 힘껏 소리치면서 동시에 자신을 세뇌시켰다. 그래. 나는 공녀를 죽이려 한 적이 없다. 후작 영애를 죽이려 했으나 무슨 영문인지 모르게 공녀가 약을 먹었으니, 애초에 고의조차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결백하다!”
스스로 다짐하듯 외치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황비는 그녀의 지위를 지탱하는 유일한 지지대, 황자를 목 놓아 찾아댔다.
“황자는 어디 있느냐!”
“어머니! 어머니! 고정하십시오, 어머니! 제가 있지 않습니까!”
에드윈이 황급히 뛰쳐 들어와 황비의 목을 꽉 껴안자, 그제야 안심한 황비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오오- 그래, 그래요, 황자. 내겐 황자가 있지요.”
“예, 어머니. 제가 여기 있습니다.”
“감히 황자의 모후인 나를 재판정에 세울 수 있을 리가 없지요.”
“그럼요, 어머니. 황족은 재판을 받지 않습니다. 황족은 하늘이 내린 것인데 인간들이 무슨 수로 벌하겠습니까.”
그래. 나는 황족이다. 하늘이 내려 이 제국 만인지상과 혼인하고, 그 아들을 낳은. 황비는 자신의 동아줄을 꼭 껴안고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특별재판이라니.’
황비의 손이 속절없이 떨렸다. 역사상 황후나 황비가 재판정에 선 유례가 없었다. 그 불명예스러운 처음을 장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고. 재판 끝에 자신에게 어떤 선고가 내려질지 모른다는 불확실함도 신경 쓰였다. 그 무엇보다도, 하필 당한 이가 공녀라는 것과 특별재판을 신청한 가문이 아르티나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 모든 일이 그저 불운한 우연이라고만 여겨지지 않았다.
‘무슨 계략이라도 세운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 없다. 무슨 증거가 남아 있어야 엮을 계획이라도 세울 것 아닌가. 관련자는 모두 죽여 없앴고, 카시스 가문의 사생아 꼬맹이 역시 곧 없앨 것이니 켕기는 구석은 없다. 그렇게 스스로 다독이던 중.
“황비 전하. 황제 폐하의 시종장이 뵙기를 청합니다.”
시녀가 고하자 황비는 버선발로 달려나갔다.
“오! 폐하께서 보내셨느냐!”
“예, 황비 전하.”
황비의 만면에 가득 웃음이 들어찼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래! 어디 폐하의 총애를 받는 나를! 황자의 모후인 나를!”
소리 높여 웃은 황비가 우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공작의 표정이 참으로 볼만했겠구나!”
상상만 해도 즐겁다. 아르티나 가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 한들, 어쩔 것인가. 자신을 재판정에 세울 그 어떤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을 터인데. 한참을 웃은 황비가 시종장이 두 손으로 들고 있는 화려한 받침대를 가리켰다.
“그건 무엇인가.”
“황비 전하. 이것은 폐하께서…….”
“아. 내 놀랐을까 봐 걱정하시어 폐하께서 내리신 것이로구나.”
내가 좋아하는 찻잎인가. 혹은 마음을 달래려는 보석인가. 황비가 가림막을 걷어 올렸다. 응? 달랑 종이 하나?
“폐하께서 전하라 명하신 출석 요구서입니다.”
“……뭐라?”
멍하니 되묻는 황비를 향해, 시종장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공판기일은 1주일 뒤입니다. 전하.”
“무슨…… 어찌, 감히…….”
두 손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는 황비를 대신하여 수석 시녀가 요구서를 받아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태도로 시종장이 돌아가자, 황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요구서를 펼쳤다. 「제국법 제221조 규정에 따른 금번 특별재판에서 피고인 베나카 륜 에르카디아의 진술을 듣고자 하니 지정된 시간에 참석하라.」 고귀한 자신의 이름이. 황족인 자신의 이름이. 출석 요구서에 한낱 피고인의 것처럼 고급스럽지 않은 잉크로 기재되어 있었다. 황비는 패악을 부리며 요구서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황제의 옥새가 찍힌 요구서가 발로 밟히는 것을 보며 시녀들이 소리 없이 기겁했다.
“나는 결백하다! 결백하단 말이다!”
황비는 목이 쉴 때까지 억울하다 외쳐댔다. *** 특별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에 제국 전역이 떠들썩했다. 제국 전역의 눈과 귀가 모두 이 재판에 쏠렸다. 신문사들은 연신 사실과 추측이 적절히 섞인 흥미 본위의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뽑아댔다. 황비가 아르티나의 공녀를, 황비가 제국 유일한 대정령사를, 황비가 대악마의 친우를. 피해자 앞에 어떤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한 번쯤 돌아볼 만한 것들이었으니, 화제가 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었다. 특별재판 당일. 이벨리아 역시 후드를 푹 눌러쓰고 아가레스와 함께 재판정으로 향했다.
“사람이 와글와글해.”
“네가 친 덫이 제국을 집어삼켰나 본데. 불쾌하면 돌아갈까?”
“아냐. 그래도 내 눈으로 보고 싶어.”
말을 마침과 동시에 행인에게 툭 치이자, 아가레스가 어린 친우의 허락을 받고 번쩍 들어 안았다. 인파를 뚫고 지나다 보니 비교적 결 좋은 옷을 입고 있는 신사들 사이에서 동전 주머니가 오가고 있었다.
“황비 전하께는 아무 처벌도 내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데 500크론 걸지!”
“나는 3개월 근신에 1000크론!”
황후가 타계한 뒤. 제국민들의 인식에서 현 황비는 이 제국의 어머니이자 황족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그런 황비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황제의 칙서에 의해 내쳐지는 것은 차치하고, 판결로 중형을 받게 될 것을 상정하기는 어려웠다.
“나도 근신에 300크론!”
그렇기에 내기 대상은 대부분 근신의 기간이었고. 그나마 세게 부르는 이가 벌금에 그쳤다. 가만히 듣던 이벨리아가 살포시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죽을 뻔했는데 이것들이 돈 내기나 하고 있다니.”
“엎을까?”
“아니. 그건 안 되지.”
엎긴 왜 엎어. 이 좋은 판을.
“나 깊이 상처를 받았으니까 저 돈은 위로금으로 내가 가져야겠다!”
“음?”
의아한 듯 반문하는 아가레스를 뒤로 하고, 후드를 조금 더 눌러쓴 이벨리아가 금화 주머니 하나를 도박판에 휙 내던졌다.
“유폐에 30리브르.”
확연히 단위가 올라간 금액에 놀라던 사내들이 이내 왁자하게 웃었다.
“어린 영애께서 뭘 잘 모르시나 본데.”
“저희야 판돈을 늘려주시면 좋지요!”
“유폐 장소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냉궁.”
“거긴 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오지 못하는 곳인데. 도박엔 영 소질이 없으십니다, 영애.”
내기를 벌인 이들의 웃음이 더욱 커졌고, 마찬가지로 후드 아래 이벨리아의 입매도 씩 늘어졌다. 뭘 모르는 건 네놈들이지. 그 돈, 곧 죄다 내 주머니에 들어올 텐데. *** 특별재판정. 공정함을 의미하는 저울이 천장을 뚫을 듯 솟아 있었다. 법정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12인의 재판관과 1인의 재판장 뒤에는 정의의 여신을 형상화한 마크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사건번호 1040특가1. 특별재판을 시작합니다.”
제국 역사상 전례 없이, 황비를 피고인으로 세운 재판이 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