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이브의 유능한 부하들2022.02.28.
‘핫, 내 임무다!’
엔리르가 폴짝 날아올라 누나는 괜찮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그 잠깐의 말미도 주지 않고, 휴고의 몸에서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발산했다. 아르칸과 세드릭은 물론이고. 곁에 선 하인들과 하녀들까지. 모두가 짓누르는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단번에 바닥에 꿇어앉았다. 심지어 엔리르마저 바닥에 납작 눌려 겨우 날개와 꼬리만 파닥댔다.
“나, 나는 용인데……!”
왜 그 못된 악마가 휴고 아르티나의 보물창고를 털다간 짧은 용생 마감하게 될 것이라 충고했는지 알겠다. 용에게까지 이리 손속을 두지 않고 미치는 기운이라니.
“우리 집주인 굉장히 무서운 인간이었구나…….”
가진 존재력을 모두 끌어모아 겨우겨우 날아오른 엔리르가 앞발을 휴고의 이마에 턱 가져다 댔다.
“멈춰! 집주인!”
“비켜라. 새끼 용. 뒤지고 싶지 않으면.”
어린 용은 뒤지고 싶지 않아서 재빨리 본론을 말했다. 속사포같이.
“누나 멀쩡해. 계획이었어. 해독제 먹고 갔어. 코 자고 있어. 다친 데 없어. 아프지 않아. 금방 돌아와. 악마도 같이 있어. 보라 인간도.”
“……뭐?”
“못된 꼴뚜기 엄마. 보라 인간을 죽이려고 했지. 그래서 누나가 화가 나서 이렇게 저렇게 다 준비하고서 독약 꿀꺽.”
“대체 뭐라는 건가.”
본래도 풍부하지 않은 어휘력이 다급하다 보니 더욱 빈곤하다.
“으음, 보라 인간이…… 보라보라…….”
엔리르가 천천히 말을 고르는 사이를 참지 못한 휴고와 엘리시아, 아르칸과 세드릭이 공작저를 뛰쳐나갔다. 마찬가지로 하얗게 질린 아르티나 기사단 역시 뒤를 따랐다. 다급하게 말을 타고 가장 바깥 문을 나서자마자 그들은 공작저로 달려 들어오던 이크리안을 마주했다.
“각하! 잠시!”
이크리안과 휴고의 말이 모두 놀라 일제히 앞발을 높게 들자, 노련한 두 기수가 고삐를 잡아당겨 진정시켰다.
“이안!”
아르칸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크리안의 멱살을 잡고 채근했다.
“말해. 무슨 일이야!”
“……면목 없다.”
아무리 공녀님의 계획이었다 한들, 자신이 관리하는 후작저 안에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나저나 용님께 전후 사정을 들었다면 다들 이렇게 혼비백산하고 있을 리가 없는데? 이크리안이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용님께서 다 설명해주신다고 했다는데. 아무것도 못 들었어?”
“저건 단어 나열 수준이라.”
“용님이?”
그러자 세드릭의 등 뒤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엔리르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난 아직 어린 용이야!”
“용님이 아직 말도 못 뗐을 줄이야.”
“어린 보라 인간은 아주 올바른데 큰 보라 인간은 아주 불경하구나!”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진 눈으로 엔리르를 훑던 이크리안이 자신이 파악한 대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황비가 렐리안을 노렸다는 것. 이를 막고자 공녀님께서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독약을 대신 먹었다는 것. 미리 해독제를 먹었기에 안전하다는 것까지 모두. 엘리시아가 바득 이를 갈았다.
“감히 이브에게 손을 대진 못하니 대신 렐리안을 건드렸구나. 하여간 꼭 뭣도 없는 비루먹은 놈들이 아가들을 건드리지.”
공작부인의 과격한 언사에 살짝 흠칫한 이크리안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말했다.
“아마 아르칸이나 세드릭이 렐리안과 연을 맺을까 우려되었나 봅니다.”
“그렇게 되면 아르티나와 카시스 모두 잡기 어려워질 테니까.”
“그래서 공녀님께서 황비를 잡을 계획을 세우신 것 같습니다.”
“이브는 어떻게 알고?”
“저희 집안의 사생아…… 아니, 네피르가 알려드렸다고 합니다. 황비궁 시녀로 들어간 모양인데, 황비 입장에서야 후작저 출입이 가장 쉬울 패일뿐만 아니라 죄를 덮어쓰게 하기도 용이했겠지요.”
“해독제는. 네가 도왔나?”
“아닙니다. 해독제 건은 저도 누구의 도움이 있었는지 잘…….”
이때다.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정보가 나오자 어린 용이 파드닥 날아올랐다.
“악마! 악마가!”
“악마가?”
“응. 해독제 만들 수 있는 인간 없어서. 물론 나도 가능하지만 나는 아직은 어려서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하니까…….”
“그래서 루페르트 백작이 도왔다는 말이지?”
“응. 응.”
휴고와 엘리시아는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그자는 그럴 것 같았어.”
누군가를 아끼면 위험한 것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다. 누군가를 보호하고자 하면 위험한 길을 밟지 못하게 앞을 막는다. 누군가를 존중하면 위험 속을 함께 걷는다. 감히 의사에 반하지 못하고 의지를 꺾지 못하는 것. 그것이 존중을 기반으로 한 애정이니까. 엘리시아와 휴고는 서로 깊이 존중하여 모든 길을 함께 손잡고 걸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이벨리아를 이 세계보다도 존중하는 대악마가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을 리 없다는 것을. 이벨리아가 원한다면 얼마든 곁에서 함께 걷고, 그 역경 속에서 이벨리아가 안전할 수 있도록 제 몸 불살라 지킬 이라는 것을. ***
“이브!”
“아가!”
“아기씨!”
카시스 후작저에 이벨리아를 부르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식을 듣고 급히 귀가한 카시스 후작과 후작 부인이 뛰어나가 이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마침 밖으로 나가던 네피르는 심히 당황했다.
“…….”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들 천지인 데다가, 얼른 나가서 몸을 숨겨야 하니 조용히 살금살금 문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하필 아르티나 가문 사람들과 카시스 가문 사람들 사이에 딱 끼어버렸다.
“……지나가겠습니다.”
앞이나 뒤나 긴장이 되기는 매한가지다. 네피르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하며 문을 막고 있는 아르티나 가문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여기 날 지켜줄 사람은 없어.’
황비의 계략을 알렸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자신을 황비로부터 보호해 줄 의리까지 있을 리 없다.
‘내 목숨은 내가 부지해야 해.’
공녀님께서 준비해주신 피신처에 얼른 몸을 숨기고,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가, 돈을 더 벌어 상단을 일으킬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누군가 팔을 뻗어 자신이 갈 길을 막는 것이 아닌가. 네피르가 황망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공작 각하……?”
“네가 이브의 음식에 독을 탔다고.”
이것 봐.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자칫하면 다 뒤집어쓰게 될 줄 알았어. 네피르는 곧장 무릎을 꿇었다.
“그, 그것은! 미리 공녀님과 말을 맞추고!”
휴고는 절박한 표정으로 자신을 변호하려는 네피르의 말을 끊었다.
“만에 하나, 렐리안이 잘못되었다면 내 딸의 상처는 헤아릴 수 없었을 터.”
무슨 의도이실까. 네피르는 바닥을 향해 있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황비의 눈을 피해 당분간 몸을 숨겨야 할 테지.”
아무래도 꾸짖으시려는 건 아닌가 보다. 네피르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순순히 대답했다.
“예. 공녀님께서 자비롭게도 은신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은신처? 혹시 아주 멋진 오두막이라며 자랑하던가.”
“예. 아주 멋진 오두막에 비상식량도 가득하다 하셨습니다.”
“…….”
하긴. 우리 딸 은신처가 비밀기지 외에 더 있겠나. 거기에 애 혼자 둬봤자 밤에 우짖는 산짐승들 때문에 두려움에 떨기밖에 더하겠는가. 종종 가서 노는 것 외에 사람이 상주하는 곳은 아니니까. 휴고는 딸의 편에 선 이를 위한 합당한 보상을 베풀기로 했다.
“좋은 곳이기는 하나 혼자 지내기 마땅한 곳은 아니지. 당분간 공작저에 머물거라.”
“예?”
“내 딸이 덫을 쳤다면 황비의 목은 곧 날아갈 것이다. 불편하더라도 그때까지는 공작저에 머물도록. 그보다 안전한 은신처는 없을 테니.”
“하지만…… 그건 제게 너무 과분한…… 제가 어찌 감히 공작저에…….”
그러자 카시스 후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각하. 네피르는 카시스에서 보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 딸인데 공작가에 신세를 지게 하기는…….”
카시스 후작이 미처 말을 맺기도 전. 휴고가 서릿바람같이 차가운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대 딸인 건 알고는 있었나?”
“예?”
“렐리안과 네피르 모두 그대의 딸이라고 생각하긴 했나?”
“물론입니다, 각하. 어찌 그러시는지…….”
“전혀 그리 보이질 않아서. 그대가 아랫도리 관리 못 해 이 사달을 만들었으면 적어도 둘 다 상처받지 않게 책임을 졌어야지.”
“각하……!”
“다른 이의 가정사를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니 말은 줄이겠네만, 네피르는 우리 가문에서 보호하도록 하지.”
휴고가 쯧 혀를 차며 작게 뇌까렸다.
“여기 뒀다가 세 아이 모두에게 또 무슨 일을 겪게 하려고.”
엘리시아가 네피르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자신의 뒤로 데려오자, 네피르가 얼떨결에 엘리시아를 올려다보았다. 내려다보는 눈이 공녀님의 것과 너무도 닮아 왜인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의무실로 안내하도록. 내 딸 얼굴을 봐야겠으니.”
“……예, 각하.”
이제 와선 도저히 네피르를 받아들일 수 없는 후작 부인. 렐리안과 네피르 그 누구도 놓지 못하고 마치 저울질하듯 두 아이를 방치했던 후작. 그들도 최소한 염치는 있어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기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이벨리아는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눈만 빼꼼 내민 채 아가레스에게 말했다.
“토끼. 토끼. 나 코 잔다고 해. 아직 못 깨어났다고 해.”
“왜?”
“엄마가 날 혼낼 거잖아!”
아가레스는 답하지 않았지만, 이벨리아는 악마 친구를 철석같이 믿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이벨리아는 재빠르게 눈을 감고 코오 코오 소리를 냈다. - 콰앙. 마치 부서질 듯 문이 열리고. 앞서 들어온 휴고가 이벨리아의 상태를 살폈다. 안색이 크게 나쁘진 않다. 휴고가 아가레스에게 물었다.
“이브는.”
“걱정할 것 없다. 미리 해독제를 먹었으니.”
다행이라는 듯 숨을 몰아쉬는 사람들 사이로, 엘리시아가 물었다.
“아직 안 깨어났나요?”
아가레스가 슬쩍 이벨리아를 돌아봤다. 여전히 눈을 감고 도롱도롱 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가레스는 엘리시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한참 전에 깨어났다.”
이벨리아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서 아가레스의 팔뚝을 짝 내리쳤다.
“너! 이 못된 토끼!”
*** 이벨리아는 대차게 혼났다. 생애 이렇게 크게 혼난 적이 없었다.
‘이브를 구해줄 용자를 찾습니다!’
렐리안, 네피르, 오라버니들을 차례로 바라보았으나, 모두 시선 돌리기에 급급했다.
‘주군을 위해 나설 충성스러운 기사를 찾습니다!’
아르티나 기사단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나, 그 누구도 이벨리아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혼난 뒤 잔뜩 풀이 죽은 이벨리아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크림빵을 베어 물었다.
“훌쩍-. 세상에 내 편은 없어. 훌쩍-.”
“여기 모두가 네 편이야. 네가 조금 더 네 안위를 신경 썼으면 하는 마음에 이러는 거지.”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검지로 부드럽게 쓸어 입으로 가져가자 더욱 서러워진 이벨리아가 손가락을 콱 깨물었다.
“내 크림이야!”
“맞아. 우리 꼬맹이 크림이지. 주려고 했어.”
눈이 매섭게 올라간 어린 친구를, 아가레스는 손이 발이 되게 빌며 달랬다.
“자. 이것도 먹을까?”
“내가 먹을 거면 화가 다 풀리는 줄 알아?”
훌쩍거리면서도 이벨리아는 악마의 손에 들린 쿠키를 쏙 뺏어 입에 넣었다.
“맛있다. 아니, 화난다.”
단 쿠키에 슬슬 눈꼬리가 내려가자 다시 바짝 치켜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화가 났구나, 우리 꼬맹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화를 풀까? 응?”
여전히 심술이 난 이벨리아는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언젠가 마계에 가보고 싶어. 데려가.”
“마계?”
“응. 왜, 어려워?”
당연히 어렵겠지. 거긴 토끼 외에도 여러 악마들이 살고 있으니까. 못 들어준다고 하면 또 손가락을 깨물어야지. 이벨리아는 속으로 씩 웃었다. 날 배신하고 홀랑 일러바친 벌이다!
“줄게.”
“그럴 줄 알았……, 응? 뭐를?”
“마계. 네가 원할 때 언제든 오갈 수 있도록.”
“엥? 마왕이 있잖아.”
“원한다면, 그 자리는 오늘부터 네 거야.”
쉽게도 말한다. 공수표라 생각한 이벨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다른 이들은 입을 떡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대악마가 고작 어린 인간 하나 앞에 무릎을 꿇고 절절매는 광경은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심히 생소한 것이었다.
“흠. 흠.”
이크리안이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냥 두면 둘이 재잘대다가 날이 넘어갈 판이다.
“공녀님. 이제 저희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저 동화책 공장 공장장도 날 돕지 않았기는 매한가지다! 이벨리아가 사나운 눈으로 이크리안을 노려보며 답했다.
“재판을 열어야지!”
“재판을?”
되묻는 작은 오라버니도 날 돕지 않았기는 매한가지다! 이벨리아가 역시 무시무시한 눈으로 세드릭을 노려보았다. 모두의 머릿속에 세차게 날갯짓하는 뱁새 한 마리가 떠올랐다. 다들 두려움에 떠는 표정을 연기하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이를 꿈에도 모르고, 모두가 자신이 화난 것을 보며 무서워하고 있다고 생각한 이벨리아가 한층 누그러진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래. 재판. 황제 폐하를 움직여서 황비를 폐위하는 건 안 돼. 꼭 재판을 열어야 해.”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딸이 귀여워 엘리시아가 낮게 웃음 지으며 첨언했다.
“동의한다. 제대로 이유도 공표되지 않고 황비가 폐위되면 황자에 대한 동정론만 높아질 뿐이야.”
세드릭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하지만 황비가 재판을 통해 폐위된 적은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없지. 황족은 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까.”
“일단 황비를 재판정에 세울 수 있는지부터가 문제 되겠군요.”
“엄연히 말하자면, 제국법상 황족은 황제와 황후, 황제의 자식들일 뿐. 황비의 지위는 규정되어 있지 않단다.”
“그래도 쉽지 않겠네요. 전례 없는 일은 늘 반감을 사게 마련이죠.”
그 말에 여전히 침대 위에서 크림빵을 오물거리고 있던 이벨리아가 훌쩍 답했다.
“그 어려운 일, 내가 한번 해보려고.”
그래서 독까지 먹어가며 이 큰 판을 짠 건데.
“다시는 우리 가족들이랑 렐리안이랑 네피르를 못 건드리게.”
예상치 못하게 자신의 이름도 불리자 네피르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벨리아가 먹던 크림빵을 아가레스에게 넘겨주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살짝 비틀거리자 아가레스가 자신의 어깨를 짚을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춰주었다.
“다들, 내가 독약을 먹어 쓰러졌다고 소문을 내줘. 해독제를 먹었다거나 깨어났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고.”
“우리 딸이 독약을 먹어 쓰러졌다는 사실은 이미 수도에 파다하게 퍼졌을 거다. 우리가 이리 달려왔으니까.”
“바로 임시 귀족회의를 소집하여 황비의 소행임을 밝히고 특별재판을 요청하지.”
“그 과정에서 제 진술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저는 공작 각하와 함께 갈게요.”
의무실 구석에 서 있던 카론도 덧붙였다.
“아기씨께서 제게 지시하셨던 일도 잘 끝내두겠습니다.”
“우리 꼬맹이가 명했던 소견서도 준비됐고. 성분 분석도 요청해뒀으니 재판 전까진 받을 수 있을 거야.”
“하녀들로부터 사실 확인서도 모두 받아뒀어요. 혹시 증인으로 설 필요가 있을까 봐 몇 명을 선별도 해뒀습니다.”
아가레스와 렐리안도 마찬가지. 굳이 이벨리아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전에 모두가 차질 없이 자신의 몫을 제대로 준비했다.
“나 지금 동화책에서 보던 동물 경찰대의 대장이 된 것 같아.”
동화책에서는 호랑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다람쥐랑 토끼가 알아서 팍팍 움직여줬는데.
“유능한 부하들과 일하면 이런 느낌인 걸까.”
문득 인재에 집착하는 식량 도둑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그럼 다들 부탁할게. 재판을 열어줘.”
모두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벨리아가 악동처럼 씩 웃었다.
“에르카디아 역사서에 첫 이야기를 남겨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