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이브의 계략2022.02.24.
입가를 붉게 물들인 피. 창백한 얼굴. 미약한 숨소리.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가벼운 몸. 또 흐릿한 온도.
“…….”
아가레스는 마치 사제가 신상을 닦듯 경건하게, 애달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조심스럽게 이벨리아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속에서 휘몰아치는 기운이 금방이라도 소중한 친우를 제외한 모든 주변인들을 난도질해버릴 것만 같았다. 이벨리아의 당부를 되새겨 애써 안으로 삭이니 심장이 터질 듯 아파왔다. 마치 분출되지 못한 기운이 내부를 갈기갈기 찢는 것처럼.
“……다 네가 알려줘 놓고.”
참는 법도. 견디는 법도. 모두 이 작은 손으로 차근차근 일러주고선 이리 눈을 감고 있으니. 목줄 잡은 이가 손을 놓아버리자 속절없이 길을 잃은 기분이다.
“네가 명이라도 남겨서 다행이야.”
그게 내겐 이정표나 다름없으니까.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속삭였다.
“착하게 따르고 있을게.”
부서질 듯한 몸을 품에 안고 일어선 아가레스가 여전히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렐리안을 향해 말했다.
“밖에 대기시켜 둔 의원들을 부르도록.”
그러나 충격에 휩싸인 렐리안에게 아가레스의 목소리는 제대로 닿지 않았다. 렐리안에게는 이브와 피. 그 외의 모든 것은 또렷하지 않게 보이고 선명하지 않게 들렸다.
“아…… 안 돼…… 이브…….”
미처 떨어지지도 못한 눈물이 보랏빛 눈에 애절하게 고였다.
“그, 그릇이 왜 바뀌어서…… 내가 먹었어야 했는데, 이브가……. 아아…….”
렐리안의 입에서 두서없는 말이 더듬더듬 새어 나오자 아가레스가 차가운 어조로 일갈했다. 저렇게 넋 빼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브의 선택이었다. 헛되이 하고 싶지 않다면 정신 차리고 움직여. 이브가 괜히 밖에 저자들을 모두 불러 준비시켜 둔 것은 아니니.”
“선택……?”
“이브가 손댄 음식부터 얼리도록. 그 독, 10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 말에 렐리안이 퍼뜩 정신 차린 듯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뜻인지 더 채근하여 물어볼 틈도 없는 듯했다. 이브의 선택이었다면 자신은 그저 믿고 따라야 했다. 마법을 배운 이래 가장 열심히 연마한 빙계 마법이 이벨리아가 먹었던 스튜 그릇을 완벽하게 감쌌다.
‘이브가 악마에 대적할 때 돕기 위해 익혔던 빙계 마법인데.’
결국, 돕고자 했던 이를 위해 쓰이긴 했다. 방향은 완전히 다르지만.
‘너무해요. 공녀님.’
렐리안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공녀님께서 이 판을 원하신다면. 부족함 없는 장기 말이 되어드릴게요.’
이윽고 천천히 열린 눈. 보랏빛 눈동자가 선명한 결의를 담았다. 나의 공녀님. 부디 좋은 꿈 꾸고 돌아오시길. ***
“공녀님께서 독을 드셨다! 의원들을 모두 불러라!”
식당 밖, 작은 홀을 넘어 후작저 회랑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사용인들은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이 후작저의 작은 주인이신 영애께서는 생전 저리 큰 소리를 내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얼떨떨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니.
“뭣들 해! 어서!”
곧바로 일갈하는 단단한 목소리. 서늘하게 돌아보는 보랏빛 눈동자. 평소의 병약하고 여린 기운은 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어린 주인에게서는 처음 느끼는 서슬 퍼런 기운에, 사용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의원들에게 손짓했다. 이벨리아의 지시에 따라 제국 내 유능하다는 의원 다수가 식당 바로 밖에 대기하고 있었기에 시간이 지체되는 일은 없었다. 황급히 들어온 의원 하나가 아가레스에게 쭈뼛쭈뼛 다가와 말했다.
“저…… 공녀님을 내려두셔야 수월하게 확인할 수가…….”
“이대로 확인해.”
차가운 바닥에 단 한시라도 닿게 할 수 없다. 의원은 불편한 자세로 이벨리아의 눈과 혀, 혈맥과 손끝 등을 확인했다.
“어떤가.”
“음독하신 것이 맞습니다.”
아가레스는 고개 돌려 얼어버린 음식에서 독을 판별하고 있는 의원에게 물었다.
“성분 채취 가능한가.”
“얼려두신 덕분에 시간만 조금 주시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빠르게 판단하셨군요. 언뜻 본바, 이 독의 특성상 10분만 지나도 인체와 음식에 각각 완벽히 흡수되어 음독인지 여부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아가레스가 이벨리아를 진료하는 의원에게 말했다.
“……공녀님께서 음독하셨다는 소견서를 남겨라.”
“예. 그런데 해독제 제조가 훨씬 다급하신데……!”
아가레스가 무감정한 시선으로 의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의원은 그 시선의 의미를 단번에 파악했다. 내가 네놈의 해독제 제조 따위를 필요로 할 것 같은가. 그런 의미가 분명했다. 루페르트 백작에 대한 소문을 익히 알고 있던 의원은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곧장 고개를 조아렸다.
“예. 바로 소견서를 남기겠습니다. 아주 상세하게.”
고개를 까닥인 아가레스가 여전히 음식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다른 의원에게 명했다.
“분석하여 독의 성분을 정확히 기록하도록.”
“예!”
의원은 가방에서 기다란 바늘을 꺼내 이를 음식에 꽂고 독을 뽑아 올렸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원들을 보며, 아가레스가 렐리안에게 말했다.
“사실 확인서가 필요하다. 이브가 저것을 먹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는 것을 목격한 이들의.”
“네. 하녀들에게 받아둘게요. 그런데 이브는…….”
아가레스가 턱짓으로 식당 안의 하녀들과 의원들을 모두 물렸다. 그리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 해독제를 먹었다.”
그제야 안심한 듯 렐리안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이브가…….”
“네 안위를 위해서.”
그리 말하는 아가레스의 표정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있었다. 그를 모르는 다른 이들이 봤다면 저 굳건한 표정 어디에 균열이 있냐고 되물을 법하지만, 이벨리아의 곁에 있던 아가레스를 봐온 렐리안은 알 수 있었다. 이벨리아의 곁에 선 그는 그 어느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목이나 다름없었는데. 지금의 그는 작은 바람이 스쳐도 아파할 짐승 같았다.
‘저 악마를 그리 강하게 만드는 것도, 이리 아프게 만드는 것도 오로지 공녀님이시구나.’
고서에 따르면 신에 필적한다던 이 대악마의 뿌리. 근간. 이루는 모든 것의 중심은 공녀님이 분명했다. 계획을 알면서도 못하도록 다그치고 막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따르며 그 안에서 다치지 않을 방도를 찾아내는 저 맹목적임. 계획을 알았다면 곧바로 아르티나 가문에 일러바쳐 이벨리아의 걸음을 묶어버렸을 렐리안의 마음과는 격도, 결도 다르다. 공녀님께 제 심장까지 내줘버린 이 악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렐리안은 죄책감에 휩싸였다.
“죄,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가레스가 온기 없는 눈으로 렐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 적의 어린 시선에 렐리안이 어깨를 움츠렸다. 잊고 있었다. 이 악마가 어떤 이인지. 공녀님의 통제 없이는 다가오는 모든 이들의 목덜미를 찢어발길 포식자라는 것을. 자신을 살려두는 것 역시 공녀님의 의사에 기반한 자비일 터. 깨달은 렐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대로 서.”
“네?”
“후작가의 주인으로든. 마법사로든. 다신 이브가 널 대신해 다치지 않도록.”
물러서던 렐리안이, 그 말에 작은 발을 땅에 붙이고 단단히 섰다.
“노력할게요.”
아니.
“반드시 그럴게요.”
렐리안이 세게 주먹을 쥐었다. 핏기 없는 얼굴이 부러지지 않을 다짐을 담았다. 자신에게는 저 멀리 계신 분이라. 그저 우러르고 뒤따르면 될 줄 알았는데. 미처 알지 못했다. 가장 앞서 달리는 자는 필연적으로 가장 많은 칼을 받아낸다는 걸. 렐리안은 축 늘어진 이벨리아의 손등을 잡아 자신의 이마에 댔다.
“……또 이리 저를 다그치시네요. 공녀님.”
뒤에 서지 말라고. 옆에서 함께 걷자고. *** 이벨리아는 카시스 후작저 의무실로 옮겨졌다. 해독제를 먹은 것을 아가레스와 렐리안은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서 좋을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연신 초조해하던 네피르도 슬그머니 의무실로 들어왔고, 마침 후작저에 있던 이크리안도 황급히 달려와 의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공녀님께선!”
“괜찮으셔. 진정해, 오라버니.”
“대체 누가!”
분노를 가득 담은 보랏빛 눈이 네피르를 향했다. 이크리안은 렐리안을 괴롭히는 네피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여태 폭력은 물론이거니와 말로라도 단 한 번도 상처 준 적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피르는 괜히 주눅이 들어 몸을 움츠렸다. 공녀님과 미리 입을 맞춰두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식사에 독을 부은 것은 자신이다.
‘당장 날 끌고 가라 외쳐도 할 말 없어.’
어쩌면 내 멱살을 잡고 던지실지도 모르지. 아니나 다를까. 방 안에 있는 이들을 재빠르게 훑으며 상황을 파악한 이크리안이 네피르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너!”
“오라버니, 잠깐!”
혹시 네피르에게 해를 가할지도 몰라 렐리안이 황급히 막으려 했으나. 네피르의 두 어깨를 잡은 이크리안은 깊은 눈으로 마치 확언하듯 물었다.
“황비가 사주했구나.”
네피르의 눈이 커졌다. 날 의심하지 않아? 내가 그리 못되게 굴었는데?
“황비가 렐리안의 식사에 약을 타라 시켰겠고. 공녀님께서 대신 드신 거야.”
“……그걸 어떻게.”
“그리고 공녀님께 알린 건 네피르 너고.”
“……네.”
네피르는 감탄했다. 불세출의 천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있었던 일들을 이크리안은 설명 없이도 정확히 이해했다. 방 안의 인원들을 한 번 훑는 것만으로. 경탄하는 네피르의 시선을 멋쩍다는 듯 받아내며 이크리안이 아가레스를 슬쩍 가리켰다.
“무엇보다, 이 모든 상황이 공녀님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제국은 이미 수면 아래 가라앉아 버렸을 테니까. 저자의 손에.”
여하간 황비를 잡을 덫은 마음먹고 제대로 치신 것 같은데. 동시에 사고도 제대로 치셨다.
‘아무래도 공작부인께 호되게 혼나시겠군.’
이크리안이 명복을 빌 듯 짧게 합장했다.
“일단 공작저에 알려야 하니 다녀올게. 공녀님께서 해독제를 드셨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야 할 테니까.”
“가면 털 뭉치 하나가 도울 거다.”
“털 뭉치? 설마…….”
“빨간 먼지 덩어리.”
“……그 존재가 그리 불릴 존재가 아닌데.”
세상 유일한 용을 털, 먼지 따위로 지칭하는 대악마에 경악하던 이크리안은 밖으로 나서려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네피르를 응시했다.
“고맙다.”
“선의로 한 일은 아니에요.”
“의도가 무엇이든. 네가 렐리안을 살렸어.”
살렸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좋고 나쁨을 따지자면 오히려 나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네피르는 외려 차갑게 내뱉었다.
“얼른 가보세요. 소후작님.”
네피르를 지나치던 이크리안이 작게 속삭였다.
“……다음번엔 다른 호칭으로 불러주면 좋겠구나.”
천천히. 아주 느리더라도. 네가 나아가듯 우리도 나아갈 테니까. *** 이크리안이 나가고 난 뒤. 렐리안이 네피르에게 바짝 다가섰다.
“네피르. 나랑 얘기 좀 해.”
“할 얘기 없어. 너랑.”
“……이럴 거야?”
“이럴 거야.”
“아직도 내가 미워서 그래?”
“말했을 텐데. 죽일 만큼 밉다고.”
세상 무서울 것 없이 티격태격하던 두 벌꿀오소리는.
“둘 다 지옥에 처박혀 얘기하고 싶지 않다면 나가.”
“네.”
“네.”
세상보다 더 무서운 대악마의 한 마디에 곧장 꼬리 내리고 입을 다문 다음 의무실 밖으로 나섰다. 굳이 경치 좋은 정원이나 달콤한 디저트가 준비된 응접실에 가서 얘기 나눌 이유는 없었다. 그럴 사이도 아니었고. 둘은 대충 보이는 대로 바로 옆방에 들어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문을 닫자마자 렐리안이 휙 돌아서 네피르에게 물었다.
“날 죽이고 싶다며. 왜 공녀님께 알렸어?”
“…….”
“안 그랬으면 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나였을 텐데. 네가 원하는 거 아니었어?”
“아까도 말했잖아. 선의가 아니었어.”
“그럼?”
네피르는 홀로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을 삼켰다. 널 증오하니까. 널 미워하니까. 네가 내 목표이자 지지대니까. 그런 구질구질한 말을 굳이 하고 싶진 않았다. 대신 네피르는 조금 더 멋지게 보일만한 말을 꺼내 보기로 했다.
“난 상단주가 될 거야. 세상 모든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기행록도 쓸 거야.”
“…….”
“그리고 너에게 보여줄 거야.”
“나한테……?”
“네가 부러워서 미칠 정도로. 나는 그렇게 살 거야. 아주 잘.”
그러려면 네가 살아 있어야 하잖아. 네피르가 특유의 애잔한 미소로 렐리안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맞추었다.
“살아서 똑똑히 봐. 렐리안. 내가 얼마나 멋지게 사는지.”
내가 널 살린 이유는 오직 그거 하나야.
“이만 가볼게. 공녀님께서 자비롭게도 숨을 곳까지 마련해주셨거든.”
황비 궁에 돌아가자마자 죽을 목숨이라. 렐리안은 일견 가볍게 말하고 돌아서는 네피르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고마워.”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어.”
“여전히 네가 밉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래도. 네피르.”
“뭐.”
“……또 보자. 언니.”
“…….”
언니. 렐리안은 해본 적 없는 말이었고, 네피르 역시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들 사이에 동생이란 호칭은 비꼬는 것에 불과했고, 언니라는 호칭은 차마 입에 담기조차 싫은 것이었으니까. 매몰차게 손을 뿌리치고 문고리를 잡은 네피르가 들릴 듯 말 듯 하게 말했다.
“몸 조심해.”
“누가 할 소릴.”
“흥. 몸도 약한 게.”
세상엔 신분, 배경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바뀌지 않는 것들도 있었지만. 관계, 유대처럼 작은 행동 하나로 손쉽게 바뀌는 것들도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어렵기만 했던 네피르에게는 생소한 일이었다. ***
“우웅…….”
과연 해독제 효과는 대단했다. 어렴풋하게 부유하는 정신 사이. 작은 칭얼거림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러자 고요하게 곁을 지키던 아가레스가 순식간에 자세 낮추어 커다란 손으로 이벨리아의 작은 손을 덮었다.
“이브.”
“웅…….”
“쉬이. 더 자도 괜찮아.”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리려는 듯 눈가가 파르르 떨리자, 악마는 다른 손으로 친우의 눈을 가려주었다. 이벨리아는 흐릿한 감각으로 애정하는 토끼의 토닥임을 느꼈다.
‘우리 토끼가 걱정하는데. 너무 오래 자면.’
그럴 순 없지. 우리 토끼가 얼마나…….
“착한 토끼인데…….”
“네겐 한없이 그렇지.”
창백한 입술이 옅은 웃음을 담자, 아가레스는 친우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이벨리아가 힘겹게 손을 들어 아가레스의 손등을 토닥였다.
“좋은 아침이야.”
점심이 지나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지만. 아가레스는 주저 없이 화답했다.
“응. 좋은 아침이야.”
이벨리아를 마주하는 순간은 늘 새로운 시작이며 또 유일한 아침이었기에. *** 그리고 비슷한 시각. 공작저에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고, 공녀님께서, 공녀님께서…… 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