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쓰러진 이브2022.02.21.
바로 그날 밤. 아가레스는 마르바스에게 악마 중 독과 약초에 가장 능하다는 이를 잡아 오라 명했다.
“주군께서 웬 해독제를 찾으십니까? 독을 콸콸 쏟아부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실 분께서?”
“우리 꼬맹이 먹을 거다.”
“그 땅콩이 웬 해독제를 찾습니까? 그리 곱게 자란 인간이 독을 먹을 일이 뭐가 있다고?”
“……닥치고, 찾아서 데려와.”
땅콩 주제에 공사도 참 다망하다. 툴툴대며 명을 수행하려 나가려던 마르바스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혹시 땅콩 독 먹었습니까, 주군?”
“아니.”
“어휴. 깜짝 놀랐네. 그 땅콩 진짜 좁쌀만 해서 독을 먹는 게 아니라 한 방울 떨어뜨리기만 해도 다칠 겁니다.”
“…….”
놀란 마음 가라앉힌 마르바스는 독으로 가장 이름 날리는 악마 하나를 착실히 잡아 왔다. 아주 빠른 속도였다. 아가레스가 무릎 꿇은 악마를 향해 이벨리아로부터 받은 병을 툭 던졌다.
“해독제.”
단단히 봉인된 마개를 열고 킁킁 냄새를 맡은 악마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오오. 참 훌륭한 독입니다. 들이켜고 두 식경이 채 지나기도 전에 오장육부가 모두 녹아 급사를 면할 수 없겠습니다.”
누가 독에 환장하는 악마 아니랄까 봐. 묻지도 않았는데 악마는 지식을 뽐냈다.
“디펜바키아와 디칼리스가 함께 들어갔군요. 이렇게 되면 음독한 지 10분 만에 흔적이 모두 사라지지요.”
‘저걸 먹는다고. 우리 꼬맹이가.’
과히 상세한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가레스의 속이 마치 저 독약 수십 병을 입에 털어 넣은 것처럼 타들어 갔다.
“……해독제. 가능하겠나.”
“물론입니다. 지배자시여. 그런데 만들어드리면 지배자께선 제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이명, 우행(愚行)의 구도자. 46위(位)의 악마 비프론즈(Bifrons). 그는 아가레스의 휘하 악마가 아니었다. 딱 보아하니 이 해독제가 마계 전역을 짓누르고 있는 지배자께 참으로 중요한 모양이니, 자신의 안위를 담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아가레스가 아무런 말도 없이 선뜩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자, 그가 손을 비비며 알량하게 웃었다.
“저는 그저 지배자께서 제 목숨만 보장해주신다면 완벽한 해독제를 만들어 올 수 있는데…….”
“그 해독제가 제대로 제조된다면, 맹세하지. 내 손으로 직접 네놈을 죽일 일은 없을 것이다.”
마계의 드넓은 영토를 지배하는 이에게 이런 약조를 얻어내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다름없다. 비프론즈가 환하게 웃으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그러나 일말의 오류라도 있다면, 이 또한 맹세하지. 네놈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죽어갈 것이다.”
짙은 마기가 내리누르자, 그 위압감에 저절로 무릎을 꿇은 비프론즈가 황급히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어쭙잖은 알랑임으로 거래가 통할 상대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목숨 부지해 나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수지맞는 거래이니.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거의 기다시피 밖으로 나가는 비프론즈를 향해, 아가레스가 물었다.
“아. 해독제는 쓴가.”
“예? 예, 아주 씁니다. 온갖 약초가 배합되어 들어가니…….”
“오렌지 맛으로 만들어.”
“……예?”
“오렌지 맛.”
아가레스의 힘을 어깨 위로 직접 받은 비프론즈는, 불과 하루 뒤.
“여, 여기 있습니다!”
오렌지 맛으로 완벽하게 제조된 해독제를 아가레스의 손에 올렸다. ***
“좋은 아침! 도넛이 먹고 싶은 아침!”
그리고 독을 먹는 날 아침! 상쾌하게 일어난 이벨리아는 침대 위에서 테사가 가져다 준 도넛과 우유를 먹으며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구멍은 없어.”
예전 비밀기지에서 식량 도둑을 잡기 위해 만든 이후,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를 잡기 위해 만든 덫은 나름대로 완벽한 것 같았다. 도넛을 다 먹은 이벨리아는 엔리르를 끌어안았다. 앞발에 초콜릿 잔재가 조금 묻어나자, 엔리르가 날름 핥았다.
“엔리르. 아빠랑 엄마 놀라지 않게 잘 전해줘야 해.”
그 말에 엔리르가 앞발에 쥐고 있던 도넛을 휙 내팽개치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말랑한 앞발 두 개가 이벨리아의 옷자락을 꼭 부여잡았다. 어린 용은 그 상태로 뒤로 휙 드러누워 버렸다.
“그거 안 하면 안 돼?”
“해독제도 만들어 놨는걸. 잠깐 꼴깍 기절하고 일어나면 그만이야. 아플 것도 하나도 없어.”
“……누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못 살아.”
“아무 일도 안 생겨. 아스도 같이 가잖아.”
엔리르가 이벨리아의 다리에 복슬복슬한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울먹였다.
“그래도.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나는 전설에 길이 남는 악룡이 될 거야.”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도넛도 저렇게 휙 던져버리고!”
“몰라. 누나가 없으면 인간들은 다 꼴도 보기 싫어. 도넛도 누나가 안 주면 싫어.”
오늘따라 투정이 늘었다. 이벨리아는 찹쌀떡처럼 찰싹 달라붙어 영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어린 용을 도닥였다.
“부탁해. 응?”
자신이 카시스 후작저에서 쓰러지고, 이를 가족들이 들으면 아주 난리가 날 것이었다. 난리가 다 뭔가. 이벨리아가 눈을 뜨기도 전에 제국은 내전에 휩싸여 있을지도 모른다. 에르카디아 황가와 아르티나 공작가의 내전이 발발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이벨리아는 엔리르에게 단단히 일러둔 참이었다. 자신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누군가 전하자마자, 아무 이상 없음을 곧바로 알리라고.
“엔리르가 잘 전해주지 않으면 내가 눈을 뜨자마자 내 머리 위에 황관이 올라가 있는 걸 보게 될 수도 있어.”
아마 아빠와 엄마가 황궁을 점령하고 그거 내 머리에 씌울 것 같거든. 으. 진짜 싫다. 엔리르 역시 미간을 팩 찌푸렸다.
“……그건 지지야.”
“맞아. 지지야. 그러니까 엔리르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지.”
“대신 꼭 다치지 말고 돌아와야 해. 아니면 누나는 눈을 뜨자마자 이 제국이 불에 타고 있는 걸 보게 될 거야.”
……우리 아가 용 협박도 제법이다. 이벨리아는 목도리처럼 목에 뱅뱅 감겨드는 엔리르를 힘겹게 떼어두고 방을 나왔다. ***
“토끼야!”
이벨리아는 미리 아르티나 공작저 앞으로 와 있던 아가레스에게 폴짝 달려갔다.
“같이 가려고 왔어?”
“모셔가려고 왔지.”
정중한 에스코트에 이벨리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이러니까 진짜 왕자님 같잖아.
“공작저에는 뭐라고 말했어?”
“렐리안하고 점심 먹으러 간다고!”
“공작 속 좀 썩겠군.”
“엔리르한테 잘 전달해달라고 했어!”
“공작부인에게 아주 혼이 나겠는데.”
“엔리르가?”
“아니. 네가.”
하긴. 뒤늦게 알게 된 우리 엄마가 날 가만둘 리 없다.
“……도와줄 거지?”
“…….”
왜 대답이 없어? 넌 내 편을 들어줘야지?
“토끼야?”
“공작부인에게 혼나고 나면 이런 짓 안 할까.”
“호되게 혼나면 무서워서 못 하겠지?”
“응원한다.”
“고마워!”
“공작부인을.”
“……야.”
***
“이브! 왔어요? 루페르트 백작님도 오셨네요.”
“렐리안. 밀가루에 얼굴을 담갔다 뺀 것 같아.”
평소보다 많이 창백해진 얼굴로, 렐리안이 애써 웃음 지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오늘 있을 일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한 듯했다.
‘렐리안은 아직도 자신이 독을 먹을 줄 알고 있으니까. 무서울 만도 하지.’
이벨리아가 차디찬 렐리안의 손을 꼭 잡아 가볍게 흔들며 후작저 안으로 들어섰다.
“렐리안. 걱정 마. 오늘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테니까.”
“네. 이브가 있어서 안 무서워요.”
렐리안은 이벨리아를 맹목적으로 신뢰했다. 독약을 먹으라고 한대도 망설임 없이 그러마 대답할 정도로. 후작저에서 주로 사용되는 식당이 아니라, 사적으로 소소한 식사를 할 때 사용되는 작은 식당에는 이벨리아와 렐리안만을 위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주변을 슥 둘러본 이벨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렐리안. 하녀들을 더 불러.”
목격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공녀님의 시중에 만전을 기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렐리안이 하녀들을 조금 더 부르라 명하는 사이. 이벨리아는 아가레스가 준 해독제 병의 마개를 열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고약한 맛이 날 줄 알고 코를 막았으나, 혀에 남은 맛은 달달했다.
‘……쓸 줄 알았는데. 오렌지 맛이네?’
어떻게 해독제가 오렌지 맛이지? 어린이용 해독제인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해독제 병을 다시 살피는데.
“이브. 뭘 드시는 거예요?”
“으앗!”
몰래 먹으려고 했는데 들켜버렸다. 이벨리아는 황급히 변명을 생각해냈다.
“이거, 그, 영양제! 영양제야! 캬아, 오렌지 맛이 아주 달콤하다!”
“영양제요?”
“나이가 들었더니 몸이 영 예전 같지 않아서!”
“……이브 이제 열 살인데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내 몸도 강산 변하는 만큼 여기저기 음…… 쑤셔!”
“…….”
“아이고. 삭신이야.”
영 믿지 않는 표정의 렐리안. 이벨리아는 보란 듯 무릎을 통통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때였다. 타이밍 좋게 쟁반을 든 하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식사 올리겠습니다, 공녀님, 아가씨.”
“와, 와아! 밥이다!”
렐리안의 주의를 해독제 병에서 음식으로 돌리려고 이벨리아가 과장되게 소리쳤다. 식전 빵. 샐러드. 수프. 간단히 먹을 애피타이저가 두 아이의 앞에 정갈하게 놓였다.
“잘 먹을게, 렐리안.”
“맛있게 드세요, 이브.”
생긋 웃으며 포크를 드는 렐리안의 손이 처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느 음식에 독이 들었을지 모르니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벨리아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렐리안을 슬쩍 바라보았다.
‘독을 먹는 건 네가 아닌 나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미안. 렐리안. 그랬다간 네가 밥상을 뒤집어 엎고 우리 아빠한테 당장 달려갈 걸 알아.’
샐러드의 마지막 방울토마토까지 먹고 하녀들이 빈 접시를 치우자 렐리안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톡톡 떨어졌다.
‘이번 접시는 아니었나 봐. 후. 긴장하지 말자. 공녀님과 루페르트 백작이 앞에 있는걸.’
괜찮을 거야. 잠깐 아프면 공녀님께서 다 낫게 해주실 거야. 렐리안은 끊임없이 자신을 다독였다. 다음으로 들어온 음식은 송아지 고기. 그리고 함께 곁들여 먹도록 나온 따뜻한 스튜. 붉은 스튜를 담은 흰색 다기 옆면에는 보일 듯 말 듯한 금가루가 흘려져 있었다. 이벨리아가 손으로 그릇을 살짝 훑었다.
‘이거구나.’
네피르와 미리 말을 맞춰 뒀었다. 독을 넣은 음식에는 그 접시 위에 금가루를 뿌려두기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놓은 이벨리아가 스푼을 집어 들었다.
‘막상 먹으려니까 조금 무섭네.’
한편 식사 내내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이벨리아만 응시하고 있던 아가레스는 그 찰나의 머뭇거림을 인지했다. 저 음식에 독이 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이 불쑥 나가 저지하려는 것을, 다른 손이 필사적으로 눌러 잡았다.
“…….”
저 스튜 그릇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해독제를 먹었다 한들, 전혀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그는 그의 구원이 다칠 가능성 따위 단 한 톨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친우의 저 굳건한 각오가. 감히 그로 하여금 선을 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벨리아가 스튜를 한 스푼 떴다. 아가레스의 잇새에서 섬뜩하게 갈리는 소리가 났다. 단단한 턱이 악물 듯 다물어졌다. 작은 스푼이 붉은 입술 가까이 다가갔다. 아가레스가 손에서 피가 나도록 세게 주먹을 쥐었다. 부드러운 입속에 들어간 스튜가 꿀꺽. 기도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을 고작 세 번 깜박일 정도의 찰나.
“아…….”
주룩. 입에서 뭔가 새는 것이 느껴졌다.
‘스튜를 흘렸나.’
손등으로 닦아보니 아주 새빨갛다.
‘스튜는 이렇게 빨갛지 않은데.’
눈을 들어 앞을 보니, 마주 앉은 렐리안의 동공이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뜨여 있었다.
‘아. 이거 피인가 보구나. 효과 좋은 독이네.’
“이, 이브……!”
렐리안. 괜찮아. 나 해독제 먹었어. 이거 아주 잠깐이야. 금방 감쪽같이 나을 거야.
“아, 안 돼. 안 돼……!”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 하얗게 질려가는 친구에게 말해주고 싶었건만.
‘더럽게 아프네.’
시야가 흐려지고 입에서는 거친 숨이 새는 소리만 흘렀다.
‘토끼야. 네가 잘 전해줘. 렐리안에게.’
시선으로나마 부탁하고자 어렵게 고개를 돌렸건만.
‘……야. 너까지 이러면 안 되지.’
믿었던 토끼의 표정마저 렐리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더욱 심했다. 오로지 친구의 안위 앞에서만. 대악마는 이리 바닥 없이 무너졌다.
“이브…….”
심상치 않은 마기가 일렁이자, 이벨리아가 힘겹게 팔을 들어 아가레스에게 손짓했다. 작은 까닥임이었지만 한달음에 달려온 대악마는 곧장 이벨리아를 고쳐 안았다. 이벨리아가 할 말 있다는 듯 올려다보자, 아가레스는 바로 고개를 낮췄다.
‘음식에 묻은 독…… 소견서…….’
꺼져가는 정신으로도 원하는 건 확고했다. 아가레스는 커다란 손으로 이벨리아의 눈을 덮어 가렸다. 시야가 막혀 예리해진 청각으로, 깊이 침잠한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독제에 오류는 없어. 이브.”
졸렸다.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따뜻한 손길에 이벨리아는 속절없이 눈을 감았다.
“푹 자고 일어나.”
나의 주인.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 둘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