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존중한다, 네 모든 선택을2022.02.17.
그날 늦은 밤. 네피르는 어둠을 틈타 시녀들의 별채에서 빠져나와 공작저 문을 두드렸다. 이벨리아는 가장 아끼는 노란 병아리가 그려진 잠옷을 입고 눈을 비비며 맞이했다.
“……공녀님. 잠옷이 참…….”
“귀엽지? 하나 줄까?”
“싫습니다.”
이렇게 귀여운데 왜 싫지. 단호한 거절에 이벨리아가 살짝 입을 삐죽였다. 네피르가 변죽을 울리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공녀님. 일을 빠르게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황비 눈초리가 부리부리해?”
“네. 아주 부리부리……. 크흠. 탐색하는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네피르가 카시스 후작저에 들어가기 어렵지 않다는 건 황비도 알고 있을 터. 미적대는 시간이 길어지면 쓸데없는 의심을 사게 될 것은 뻔했다.
“슬슬 그럴 것 같았어. 네피르, 그 약 잘 가지고 있지?”
“예, 여기 있습니다.”
네피르가 곧장 약병을 건넸다.
“혹시 어떤 계획인지 제게도 미리 귀띔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도 맞춰서 준비하도록 할게요.”
이벨리아가 약병을 집어 들고 네피르의 눈앞에서 살짝 흔들었다.
“이거. 마실 거야.”
“공녀님! 어떻게 렐리안에게 그러실 수가! 걔는 몸이 약해서 그런 걸 마셨다간……!”
“응? 아. 내가 정확히 얘길 안 했네. 내가 마실 거야.”
그 말에 네피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안 돼요. 이건 해독제가 없댔어요!”
“해독제야 만들면 그만이지.”
“그 어떤 사람도 만들지 못하니 아직도 없는 걸 거예요.”
“내 친구 중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라서.”
“그러면 귀신도 있나요?”
예전엔 얄밉게만 보였던 그 처연한 표정으로 진지하게도 되묻는다. 이벨리아의 입에서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귀신? 아하하하-!”
“……실수했습니다.”
한 박자 늦게 루페르트 백작에 대한 소문을 떠올린 네피르가 붉어진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그런데 꼭 드셔야 하나요? 그것도 공녀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곰 모양 젤리를 네피르의 손 위에 얹어주며, 이벨리아가 말했다.
“물증은 이미 황비가 모두 없애버렸어. 지금 우리가 가진 게 뭐지?”
“제 증언이요.”
“그렇지. 네가 사람들 앞에서, 황비 전하께서 렐리안을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진술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황비 전하께서 렐리안에게 무슨 원한이 있느냐, 적통을 증오하던 네 단독 범행이 아니냐, 그렇게 얘기하겠죠.”
답하면서 현실을 깨달은 듯 네피르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황비가 렐리안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그 누구를 부여잡고 하더라도 ‘왜?’라는 질문부터 나올 게 뻔했다. 둘은 접점이 없어도 너무 없다.
“……제가, 다 뒤집어 쓸 수 있겠군요.”
이벨리아가 세게 입술을 깨무는 네피르를 도닥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네가 사람들 앞에서, 황비 전하께서 공녀님을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진술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얼마 전 청혼서 일로 분노한 황비 전하께서 공녀님께 보복하고자 하셨다, 또한 공녀님께서 황태자 전하와 연을 맺을까 우려하여 화근을 없애려 했다, 그렇게 얘기할 것 같아요.”
아. 네피르가 나직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내게 독약을 먹임으로써 가장 이득을 얻는 이가 누군지 생각할 테고. 모두가 황비를 떠올리겠지.”
이벨리아가 곰 모양 젤리 하나를 더 얹어주며 생긋 웃었다.
“렐리안이 독약을 먹으면 황비에게 시선이 쏠릴 수가 없어.”
네피르는 홀린 듯 곰 모양 젤리를 입에 넣었다.
“하지만 독을 먹은 이가 나라면, 모든 이들의 시선은 황비에게 쏠릴 거야. 우리 부모님부터, 귀족들, 제국민들까지. 모두. 그리고 그 정도는 되어야 이 자료도 의미가 있지.”
이벨리아가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살랑 흔들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아직은 비밀이야. 재판정에서 제출할 거라.”
“대체 언제 그런 것까지…….”
젤리를 입에 물어 빵빵해진 볼로 감탄하던 네피르가 은근히 물었다.
“공녀님. 혹시 이번 일에 공작부인의 도움을 받으셨습니까?”
“아니! 왜?”
“그럼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혼자 생각하시고…….”
“난 평생 아빠와 엄마를 보고 자랐는걸. 우리 부모님은 매일 이런 세계에 있고.”
“…….”
“그리고 이 계획을 엄마와 아빠가 알아봐. 바로 무산이야.”
무산이 다 뭔가. 아르티나가 역모로 사라지든 황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든. 둘 중 하나는 끔찍하게 망해버릴 터다.
“하지만 난 이번에 꼭 황비를 잡아야겠어. 데퐁트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데, 황비까지 남아 있으면 골치 아프다고.”
“공작부인께서 제국 제일의 지장이셨다더니…….”
뒷말을 삼킨 네피르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공녀님께 알리길 잘했어. 그렇지 않았다면 나까지 없애셨을 분이야.’
그렇게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네피르는 또 곧장 떠나려 했다. 이벨리아는 마치 야생 동물을 길들이듯 자신의 비상식량을 고이고이 모아둔 서랍장 앞에서 커다란 쿠키 박스를 꺼냈다.
“네피르. 이것 좀 먹어봐. 내가 제일 좋아해서 몰래 숨겨 둔 과자야.”
“지금 이 과자가 넘어가게 생겼습니까!”
“맛있는 건 언제든 옳아.”
막을 새도 없이, 네피르의 입에 부드러운 쿠키 하나가 쏙 들어왔다.
“봐. 맛있지?”
쿠키 두 개를 양손에 얹어주며 이벨리아가 네피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안위는 걱정하지 마.”
“…….”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구해줄게.”
또 눈물이 흐를 것 같아 네피르는 쿠키를 황급히 삼켜버렸다. 약간 목이 메 어렵게. 양손에 쿠키 하나씩을 들고 도망치듯 나가버리는 네피르의 뒤로 정겨운 말이 와닿았다.
“또 와. 네피르.”
네피르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 네피르를 보낸 뒤. 이벨리아는 엔리르를 꼭 껴안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픈 건 싫은데.’
아무 대책 없이 독약을 먹을 생각은 당연히 없다.
‘확실한 해독제를 만들어 둬야 해. 아빠랑 엄마랑 렐리안도…… 다들 걱정하지 않게.’
그러나 황비가 쉽게 해독 가능한 독약을 제조했을 리가 없다. 황비 본인은 물론이고 제조한 이조차 해독법을 모를 가능성이 크다. 인간이 못 한다면.
‘역시 우리 토끼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을까.’
그 사실이 이벨리아를 망설이게 했다.
‘우리 토끼 엄청나게 걱정할 텐데.’
고민하며 버릇처럼 엔리르의 복슬복슬한 털에 얼굴을 비비자 엔리르가 간지럽다는 듯 푸르르 몸을 털었다.
“좋아. 얘기를 잘 해 보자.”
대충 미쳐버린 고양이를 대하듯 살살 대하면 우리 토끼도 마음을 열어줄지 모른다. 이벨리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산토끼, 토끼야, 이리로 오너라.”
상큼한 노래를 부르며 비밀기지를 휘젓자 어느새 뒤에 나타난 아가레스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그런 이상한 노래를 배워왔어.”
“우리 토끼 소환 노래야.”
“내게만 불러주는?”
“그렇지. 가사에 토끼가 들어가니까 우리 토끼 노래지.”
“명곡이군.”
아가레스가 펼쳐진 돗자리 위로 이벨리아를 안내했다. 마치 황제를 모시는 시종처럼 정중한 태도였다. 이벨리아는 돗자리 위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도 언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우리 토끼가 덜 노할까를 생각하며 슬슬 눈치를 보았다. 아가레스가 시원한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내밀며 물었다.
“꼬맹이. 나한테 할 말 있지.”
“으아아니?”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어?”
네 눈길 한 번 받고자 나는 늘 기다리니까. 아가레스는 말을 삼켰다.
“무슨 말이길래 이렇게 눈치를 봐.”
“으음, 그게…….”
“편하게 말해. 네가 다시는 나를 보지 않겠다고 말한다 해도 그리 눈치 볼 것 없으니까.”
“……그럴 일은 없어. 그게, 토끼야.”
“응.”
이벨리아는 감히 아가레스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저 멀리 흔들리는 나뭇잎을 응시하며 네피르와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이 착한 토끼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일은 없겠지만, 자신의 계획을 듣고 얼마나 마음을 졸일지 생각하니 마냥 편할 수가 없었다. 온갖 미사여구가 잔뜩 붙은 이야기를 다 들은 아가레스가 반문했다.
“그래서. 우리 꼬맹이가 원하는 게 뭐야.”
“그 독약. 아무래도 내가 먹어야 할…….”
말을 다 맺기도 전. 농도 짙은 마기가 비밀기지를 묵직하게 채웠다.
“어어?”
비밀기지를 만들 당시 쳐뒀던 보호막이 속절없이 깨져나갔다. 마기가 발산하면서 마치 파동처럼 일렁이자, 비밀기지의 나무와 풀들이 모두 바람에 스러지듯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으아아! 토끼야!”
“……뭘 먹어?”
“토끼야! 저거 깨진다! 저거 쓰러진다!”
“……독약? 네가?”
마치 화염 속에 들어온 느낌이다. 기운이란 건 마땅히 형체가 없어야 할 것인데. 분노한 아가레스의 기운은 그 한계를 넘어 일렁이는 불과 다름없는 형체를 가지고 한없이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미쳐버린 고양이 달래듯 달래려 했는데!’
이벨리아는 당황했다.
‘돌아버린 흑표범 달래듯 해도 안 되겠네!’
화를 낼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밀려드는 마기에 정신이 어질했다. 상반되는 힘인 자연력이 통제를 잃고 용솟음치는 것이 느껴졌다.
“으, 토끼야, 나무도 쓰러지고 풀도 쓰러지고 오두막도 쓰러지고 나도 쓰러지겠어.”
그 말에 뚝. 비밀기지를 메우던 마기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단번에 증발했다. 절대 쓰러져선 안 될 것 하나가 포함되어 있으니. 자그마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비틀거리는 아이의 앞에, 아가레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미안. 미안해.”
이벨리아가 호흡을 나눠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레스가 어린 친우의 작은 손을 잡고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애원하듯.
“독. 그거. 하지 마. 아니, 하지 말아줘.”
“하지만 황비를 잡을 좋은 기회야. 이번에 잡지 않으면 엄마랑 아빠, 오라버니들, 렐리안, 그리고 나까지. 앞으로도 계속 괴롭힐 거야.”
돌려 말하는 거절에 하늘 아래 무서울 것 없는 대악마의 표정이 애처롭게 일그러졌다.
“……이브. 난 네게 감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알잖아.”
감히 네 의사에 반하지 못하고. 감히 내 의사를 따라 달라 강요하지 못한다.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것이 애원밖에 더 있을까.
“그러지 마. 이브. 널 다치게 하지 마. 응? 가서 내가 죽이고 올게. 다 없애고 올게.”
무릎 꿇고 올려다보는 눈이 애절하다. 단단한 손은 속절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이의 두 손이 대악마의 큰 손 하나를 힘겹게 감쌌다.
“아스. 미리 해독제를 만들어서 먹을 거야. 내가 다칠 일은 없어.”
“…….”
“우리가 먼저 황비를 살해하면 안 돼. 내가 독약을 먹었을 때 곧바로 범인으로 지목될 이가 황비이듯, 황비의 신변에 일이 생기면 곧바로 아르티나가 지목될 거야.”
논리적이다. 이성적이다. 하지만 아가레스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어린 친우의 작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도 싫어.”
인간들의 삶이란 뭐가 이리 복잡한가. 그에겐 다시 없을 소중함인 친구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뺏어서 대신 짊어지고 싶지만, 원치 않으니 그저 함께 받쳐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속상했다.
“나 봐, 아스.”
혹시 의견을 번복할까 싶어 아가레스는 옅은 희망 어린 눈으로 이젠 자신의 주인이 되어버린 이를 올려다보았다.
“믿어줘. 미리 해독제 잘 챙겨 먹을 거니까, 독약을 먹고 해독제 효과가 들 때까지 잠깐 깨꼬닥 기절만 해 있으면 그만이야.”
“……먹는 척만 하면?”
“황비는 만만하지 않아. 증거는 최대한 많이 모아야 해. 이번에 잡지 못하면 분명 역풍을 맞을 거야.”
여전히 불안한 듯 올려다보는 아가레스에게 이벨리아가 속삭였다.
“해독제 효과가 돌기 전에 의원들에게 소견서를 받아 둘 거야. 음식에 독이 들어 있다는 것, 독의 성분, 내가 독을 먹어 쓰러진 것이 맞다는 것까지 전부.”
그렇게 되어야 모든 증거가 황비를 가리키게 된다. 네피르의 증언. 카론이 준 서류. 신병을 확보한 증인. 음식에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 서류와 맞아떨어지는 독약의 성분. 실제로 독약을 먹어 쓰러진 공녀. 완벽하다. 빠져나갈 수 없게. 잘 짜인 덫이다.
“그건 네게 부탁할게. 나와 함께 카시스 저택으로 가줘. 내가 쓰러지면 곧바로 의원을 불러서 모든 자료를 남겨줘.”
“…….”
“그 독은 음식에 타거나 사람이 먹고 나서 10분이 지나면 흔적을 찾을 수가 없대. 네피르에게 음식을 내기 직전에 타라고 해뒀으니까, 내가 먹자마자 바로 의원들을 불러줘. 의원들도 식당 바로 밖에 대기시켜 둘 거야.”
“…….”
“음식은 렐리안에게 부탁해서 얼려줘. 독이 스며들기 전에 증거로 남겨둬야 해.”
아가레스의 속 타는 마음도 모르고, 이벨리아는 자신과 친구들의 안위를 위해 숨 가쁘게 계획을 그려나갔다.
“아. 그리고 이 독약은 인간 중에선 해독제를 만들 수 있는 이가 없대. 혹시 토끼의 수하 중에 독에 똑똑한 이가 있다면 해독제를 부탁해도 될까?”
대악마는 기어코 고개를 떨궜다.
“……이브. 정말 잔인한 부탁이야.”
차라리 대신 마셔달라는 명령이라면 기꺼이 따를 텐데. 그가 앞서 지킬 수도 없게 명하고, 그가 홀로 했던 맹세대로 자신의 뒤만 걷게 만든다. 이리 당당하고 꼿꼿해선. 누구보다 강하고 곧아선.
“아스. 부탁해. 응? 믿어줘.”
“…….”
오로지 네 뒤를 걷겠다고 맹세했는데. 네가 가려는 길이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불구덩이 속이라면. 그러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안전을 위해 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야 할까. 아니면, 그럼에도 네 결정을 존중해야 할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럴게.”
아가레스가 대답했다. 괴로운 듯 얼굴은 여전히 작은 친구에게 묻은 채.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너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감정은 나의 것이고.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을 걷는 의지는 너의 것이다. 나의 전부보다 너의 사소한 것이 비할 바 없이 중요하니, 이번에도 다를 것 없다. 네가 설령 불 속으로 뛰어들더라도. 그렇대도 네가 타버리지 않도록. 네가 언제든 붙잡고 나올 수 있도록. 나는 그저 네가 원하는 만큼. 네가 원하는 자리에.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존중한다. 네 모든 선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