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넌 죽어선 안 되겠다2022.02.10.
황비가 명을 내렸다고 해서 곧바로 네피르에게 독약 병이 전달되는 것은 아니었다. 제법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기에, 시일은 필연적으로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수석 시녀는 적당한 상급 시녀를 물색하여 병을 전달하고, 상급 시녀가 직위 낮은 시녀에게 병을 전달하면 상급 시녀를 몰래 죽여 없앴다. 그래야 설령 카시스 영애가 음독하여 사망한 것이 밝혀지더라도, 독과 황비의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워질 테니까. 그리하여 네피르가 아직 독약을 받기 이전. 황비는 대화를 나눌 상대가 필요하다며 네피르를 데리고 오라 명했다. 따로 대담을 나눈다는 것은 총애를 받는다는 의미. 오래전부터 일하던 시녀들의 질투 어린 시선이 황비의 방으로 들어가는 네피르에게 향했다.
“황비 전하. 부르셨습니까.”
“오, 그래. 이리 와 앉거라.”
여유로운 황비와는 달리, 네피르의 속은 온갖 생각들로 시끄러웠다.
‘전하께서 힘도 재주도 없는 날 왜 부르셨을까.’
카시스 후작가에 입적되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니, 살길을 찾다가 시녀로 들어오게 된 것인데.
‘나를 이용해 우리 가문…… 아니, 카시스 후작가에 무슨 해라도 끼치려고? 아니면 나를 밀정처럼 이용하려는 건가?’
네피르가 영악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자 그 불안을 눈치챈 듯 황비가 온화한 미소를 띠며 차를 건넸다.
“불안해하지 말거라. 그저 이야기나 조금 나누자고 부른 것뿐이니. 나와 황자, 그리고 너는 닮은 점이 있지.”
“하늘이신 두 전하와 미천한 제가 감히 어떤 것이 닮았겠습니까.”
“능력이 있음에도 적통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설움.”
“……!”
“알고 있단다. 네가 카시스 후작가에서 얼마나 많은 모멸감을 느꼈는지.”
“저, 저는…….”
“몸과 심성 모두 연약한 영애보다야, 너처럼 현숙한 아이를 적통으로 내세웠다면 카시스 후작가가 보다 큰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황비가 네피르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애잔하게 웃었다. 마치 너의 아픔을 나는 모두 이해한다는 듯.
“참 억울하지 않으냐. 어느 태에서 나는지를 우리가 결정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 말에 네피르가 마치 억누르던 것을 분출하듯 답했다.
“예, 억울합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저 어머니가 다른 것뿐인데. 그걸 제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그래. 그래. 잘 알고 있단다. 누가 나보다 너를 더 잘 이해할까.”
황비가 네피르의 손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내 일전에 너와 대화를 나누어보고 알았지. 너는 출신을 이유로 이대로 저물기엔 너무나 아까운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황비 전하…….”
“내 곁에 머물거라. 혹시 아느냐. 우리 황자가 너를 마음에 두면, 네가 차기 황후가 될지.”
네피르의 눈이 언뜻 불을 뿜었다. 그 안에서 야욕을 본 황비가 온화하게 입매를 올렸다.
‘세레스와 네피르. 둘을 잘 이용하면 아쉽지 않게 쓰고 버릴 패가 될 수 있겠어.’
권력과 지위에 눈먼 영애들은 자신의 손바닥 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 자신이 이들과 같은 것을 바라, 같은 길을 걸어왔으니. *** 네피르는 황비의 방에서 나와 시녀들이 사용하는 별채로 갈 때까지 세상 처량하게 눈매를 내리고 있었다. - 끼이익. 그러나 방문이 닫힘과 동시. 고개를 든 네피르의 눈꼬리에는 비틀린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상단을 일으켜 세울 돈만 벌고 나가려 했더니.”
이내 키득키득 숨죽인 웃음소리가 간헐적으로 흘렀다.
“나를 아주 바보로 아네.”
황비는 자신을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영애로 봤다.
“날 구슬리고 싶었으면, 적어도 황후 이야기는 꺼내지 말았어야지.”
황비가 배경이 부족한 황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유수의 가문들에 줄 대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카시스의 적통인 렐리안도 아니고, 사생아인 자신에게 황후를 운운하다니.
“뭐 엄청난 일을 시키려고 개도 안 물 먹이를 던지는 건지.”
내가 얼마나 많은 걸 겪었는데. 이 정도 눈치, 없으려야 없을 수 없게 자랐지. 자조적으로 웃은 네피르가 표정을 갈무리하며 방을 나섰다. 황비의 속셈이 드러날 때까지는 충실한 시녀 역할을 하며 지켜볼 심산이었다. ***
‘이거였구나.’
불과 며칠 뒤였다. 네피르는 불쑥 내밀어진 짙은 색 크리스털 병을 마주했다.
“이게 뭔데요?”
“음. 그냥 앓게 하는 물약이야. 먹어서 좋을 건 없는.”
‘거짓말.’
조금 앓게 하는 물약을 이리 수상한 크리스털 병에 담아 굳이 렐리안의 식사에 몰래 타라며 넘겨준단 말인가. 독약이겠지. 극독이겠지.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아 원래 몸이 약한 렐리안이 그저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한 것이겠지.
“…….”
네피르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네. 그럴게요.”
배다른 동생이 아주 미웠던 아이는 병을 받아들었다. *** 병을 받은 지 불과 이틀 뒤였다. 황궁 정원에 선 네피르가 옅은 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하필 이럴 때. 이 꼴로 마주칠 건 뭐야.’
정원 반대편. 진보랏빛 드레스를 입은 렐리안은 못 본 새 훌쩍 자라 있었다. 네피르가 서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그 걸음걸이조차 마치 대귀족임을 보여주듯 군더더기 없이 우아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네피르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내 동생.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네피르. 왜 여기에……. 아니, 그보단, 잘 지냈어?”
“잘 지냈냐는 말이 나와? 이 꼴을 보고도?”
“…….”
네피르처럼 어리고 신분이 좋지 않은 시녀는 황비의 말 상대가 되는 경우보다는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종일 심부름을 하다가 돌아오던 중이라 시녀복은 끝단과 소매가 잔뜩 더러워져 있었다.
“넌 잘 지낸 것 같네. 이젠 날 보고도 눈을 피하지 않고. 공녀님과 어울리더니 많이 변했어.”
“그분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공녀님이 무슨 성역이시니?”
“내겐 신 그 위에 있는 분이셔. 감히 그 입에 올리지도 마.”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쩔쩔매던 예전과는 아주 달라졌다. 그 되바라진 태도가 못마땅하여, 네피르가 소매 안에 있는 독약 병을 살짝 움켜쥐었다.
“성질 죽여, 렐리안. 공녀님을 뒷배로 두고 있다고 그리 막무가내로 굴다간 명을 단축하게 될 테니까. 물론 원래 네 수명이 그리 길진 않겠다만.”
날카롭게 쏘는 목소리에 렐리안이 담담하게 물었다. 예전과 달리 당황하지도, 울지도 않은 채.
“네피르. 그런 말까지 할 정도로 내가 미워?”
“미워. 죽을 만큼, 아니, 죽일 만큼 미워.”
“왜?”
“본디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에게는 질투심이 이는 법인걸.”
“내가 뭘 가졌는데?”
“몰라서 물어?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그 자리도, 다 네가 가졌잖아.”
마음을 단단히 먹었어도, 죽일 만큼 밉다는 말은 제법 충격이었다. 화가 나서 미약하게 붉어진 얼굴로 렐리안 역시 쏘아붙였다.
“너도 가졌잖아.”
“뭘? 불쌍함? 비극? 불운? 아, 이렇게 보니 가진 거야 많네. 하나 줄까?”
렐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 애는 늘 저랬다. 내가 가장 원하는 걸 가져놓고도, 매번 불행 속에 빠져 살았다. 한 번도 네가 가진 것이 부럽다고 말한 적 없다. 자라는 내내 그랬다. 입 밖으로 내기에는 너무 비참할 것 같았으니까. 그럼에도 렐리안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너는 건강하잖아. 너는 사랑스럽잖아.”
“하, 고작 그깟 게 뭐라고. 남들 다 가진 것들을 나도 가졌으니 그냥 만족하며 살라는 거야?”
그깟 거라니. 남들 다 가진 거라니. 내가 평생을 원하던 것을. 무엇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원하는 것을. 자신이 목을 매고 원하는 것을 고작 그깟 거 취급하자, 렐리안의 눈에 슬그머니 눈물이 들어찼다. 나는. 사실.
“너는 잘 걷고. 잘 뛰고. 잘 놀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잖아. 늘 너에게만 보석을 선물하셨어.”
네가 정말로.
“너는 자고 일어나면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되잖아!”
정말로 부러웠다.
“적통? 다 필요 없어! 네 말대로 나는 몸이 약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걸!”
그 말에 네피르도 언성을 높였다.
“네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게 내가 원했던 전부였어! 그 핏줄!”
둘 다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조금 빨리 어른이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고작 열세 살 어린아이. 렐리안처럼, 네피르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보석?”
하. 네피르가 조소했다.
“넌 마법서를 받았잖아.”
“봐. 나는 마법 할 줄도 모르는데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시고……!”
“아니! 그게 무슨 의미인데! 아버지에겐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너만 소중했어.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고. 너는 카시스의 적통이니까 마법서를 선물 받은 거고! 나는 발버둥 쳐도 카시스의 일원이 되지 못하니 목걸이 따위나 선물 받은 거라고!”
렐리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자 보랏빛 눈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뭘 잘했다고 울어! 네가 뭐가 서럽다고 울어!”
네피르가 렐리안의 어깨를 팍 떠밀었다.
“네가 미워!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다 가진 네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나동그라진 렐리안이 휙 뒤를 돌아 빠르게 걸어가는 네피르에게 중얼거렸다.
“나도 네가 미워.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날 미워하는 네가. 내가 원하는 유일한 것을 가진 네가.”
그 말에 잠시 걸음을 멈춘 네피르의 뒤로, 힘없는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부유했다.
“……우리 둘 다 잘못은 없는데.”
그냥 우리는 태어나보니 이랬던 것뿐인데. 네가 날 덜 미워했으면. 네가 날 덜 저주했다면. 혹은 내가 더 건강했으면, 내가 더 마음이 넓었다면.
“……어쩌면. 좋은 자매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
*** 방으로 돌아와 문을 쾅 닫아건 네피르가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을 비웠었다. 만인이 우러러보는 후작가의 영애 자리는 내 것이 될 수 없었으니까. 가족이라는 따뜻한 울타리도 아마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 같았으니까. 그저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상단을 되찾아 대륙 여기저기 바람처럼 누비는 상인이 되고 싶었다. 카시스 후작가는 평생 미워하려고 했다. 훗날 자신이 대상단의 주인이 되더라도, 그들에겐 절대 교역을 허락해주지 않으려 했다. 사람마다 기댈 구석 하나쯤은 필요하다고. 렐리안과 카시스 가문에 대한 증오가 자신이 아득바득 버틸 힘을 주었으니까.
“잘못이 없긴 왜 없어. 네가 너로 태어나고, 내가 나로 태어난 게 잘못인데.”
네피르가 거칠게 눈가를 훔쳤다.
“좋은 자매는 얼어 죽을. 같은 집에 살았어 봐라. 둘 중 하나는 이미 초상 치렀지.”
뚝뚝 흐르는 눈물이 생소했다. 울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곧 죽긴 누가 죽어. 그 성질머리로는 아득바득 백 년도 살겠는데.”
렐리안의 뺨을 올려붙이지 못해 분통이 터졌다. 테이블을 쾅 내리치자 소매에서 극독이 든 약병이 떨어져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네피르가 천천히 약병을 집었다.
“네가 미워…….”
뚜껑을 열어보니 아무 향도 나지 않는다. 쪼록 조금 흘려보니 색도 없다. 식사에 섞으면 실로 알 수 없을 법하다.
“…….”
네피르는 서늘한 바람이 드는 창문 아래 웅크리고 앉았다. 생각이 많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약을 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와중에도, 자꾸 아까 전 렐리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난 언제 죽을지 모른다, 우리 둘 다 잘못은 없는데, 좋은 자매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따위의 아무 형체도 없고 의미도 없는 말들이. 그렇게 꼬박 밤이 지나고 어슴푸레 동이 튼 새벽.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네피르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러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지금 여기엔 없는 자매를 향해.
“……보여주고 싶었어. 사생아라도 이렇게 잘 해낼 수 있다는 걸. 멋진 상단을 세워서 너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어.”
그러면 그토록 고고하던 너는 내가 이룬 성과에 압도되어 말조차 제대로 못 하겠지.
“멋진 배필을 만나서 널 내 결혼식에 부르고 싶었어. 그 어떤 귀족도 차마 엄두 내지 못하는 아주 화려한 결혼식에.”
그러면 세상 부족할 것 없던 너는 네 것보다 화려한 내 결혼식을 보고 속상해하겠지.
“나중엔 자서전을 써서 네게 보내고 싶었어. 상단 일을 하면서 본 모든 신기한 것들을 담아서.”
그러면 늘 집에만 머물렀던 너는 세상을 누비는 나를 향해 부러움을 느끼겠지.
“…….”
창문 아래 웅크려 있던 네피르가 차가워진 몸을 끌어안으며 조소했다. 널 이기고 싶고. 널 불행하게 만들고 싶고. 널 당황하게 하고 싶고. 네게 인정받고 싶고.
“……내 목표가 다 너네. 렐리안.”
어느 순간부터 그랬어. 그래서 네가 미웠고. 그래서 널 부여잡고 버텼어. 그러니까. 렐리안. 너는.
“죽어선 안 되겠다.”
앞으로도 내 증오로. 내 목표로. 가닿고 싶은 자매로. 너는 그렇게 남아줘야 하니까. *** 시녀들의 출궁은 자유롭지 않다. 네피르는 모으고 모아뒀던 휴식일을 사용하여 겨우 궁 밖으로 빠져나왔다. 혹시 뒤를 밟힐까 변장도 하고, 마차도 여러 번 갈아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도착한 곳은.
“공녀님을 뵈러 왔어요. 카시스 후작가의 네피르라 말씀드리면 아실 겁니다.”
아르티나 공작저였다. ***
“오랜만이다! 불경한 조동아리! 날 보자 했다고?”
‘그냥 돌아갈까.’
고귀하신 공녀님의 첫마디가 심상치 않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본론부터 말해. 나 바빠.”
“업무 중이셨습니까?”
“지금 막 따끈따끈한 팬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려고 했단 말이야. 식기 전에 돌아가야 해.”
“…….”
렐리안은 이런 공녀님의 어디를 보고 신처럼 따르는 거야.
‘믿어도 될까.’
잠시 머뭇거리던 네피르가 품속에서 짙은 색 병을 꺼내 이벨리아 앞에 두었다. 이벨리아가 갸웃하며 마개를 뽑자, 네피르가 말했다.
“독약입니다. 공녀님.”
이벨리아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마개를 덮었다.
“이걸 왜 나한테 줘? 암살하겠다는 도전장인가?”
“황비 전하의 말단 시녀가 제게 주었습니다.”
“왜?”
“……렐리안의 식사에 타라고요.”
일견 장난스럽던 이벨리아의 눈이 순식간에 서늘한 빛을 띠었다. 5년 전에 뵈었던 것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네피르가 숨을 들이켰다.
“팬케이크는 잊어버려, 올바른 조동아리.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