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안됐지만 끝이로군2022.02.07.
황비궁의 시종들은 홀로 돌아갈 공작부인을 위해 마차를 호출하려 하였으나, 엘리시아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말 한 필을 가져오라 요청했다.
‘이리 속이 터지는데 마차 탈 기분이겠냐고. 말이나 좀 타다 돌아가야지.’
황실에서 관리하는 말답게 준수한 군마. 윤기 나는 털을 쓰다듬으니 더러웠던 기분이 눈곱만큼 풀리는 느낌이다. 시종들이 발을 디디라며 두 손을 모아 발아래 가져다 대는 것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엘리시아는 도약 한 번으로 거대한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황궁의 중문과 바깥문 사이. 시원하게 흐르는 분수 위에는 평화와 안녕을 기원한다는 여신상이 정갈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이를 본 엘리시아는 그쪽으로 말을 몰아 겸손한 자세로 눈을 감았다. 안내하기 위해 따라온 시종들은 흐뭇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공작부인께서도 믿는 신이 있으셨구나.’
‘그것도 평화와 안녕의 신이라니. 소문과 달리 아주 따뜻하신 분이었어.’
무엇을 기도하시려나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데. 청아한 목소리가 간절함을 담고 여신상에 가닿았다.
“기왕 시련을 주실 거면 화끈하게 주십시오.”
“……?”
“그래야 목이라도 다 쳐버리지요. 이리 깔짝거려서야 원.”
저게 평화와 안녕의 여신에게 여신 모가지 딸 기세로 할 말이던가. 시종들은 혹시라도 엘리시아와 눈이 마주칠까 봐 고개를 깊이 숙이고 황궁 바깥까지 정중하게 모셨다. ***
“저게 다 무슨 난리람.”
말을 타고 공작저로 돌아온 엘리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르티나 기사단을 비롯해 어린 딸까지 바글바글 공작저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상당히 부산스럽게.
“자! 내가 이걸 들어볼게!”
“아이고, 우리 아기씨 고운 손 아야 하십니다! 지지! 지지!”
“아냐! 끄응…….”
어린 딸은 황실 기사단이 일부 부숴놓은 문의 잔재를 낑낑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연히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를 흘끔 본 엔리르가 몰래 앞발로 턱 문을 짚으니 그제야 철 덩어리가 번쩍 들어 올려졌고.
“이것 봐! 내가 들었어!”
어린 딸은 마치 전리품이라도 얻은 것처럼 잔재를 번쩍 들고 자랑했다.
“다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벨리아가 휙 고개를 돌리고 환히 웃었다.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문의 잔재는 엔리르를 비롯한 기사들이 엉거주춤 잡아챘다.
“엄마!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지!”
“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걸 황비 머리에 메다꽂으려고!”
“그걸?”
“응! 아주 황천길로 보내버리려고!”
“……우리 딸. 잘 크고 있구나.”
엘리시아가 픽 웃으며 기사단 사이를 헤치고 이벨리아를 안아 들었다. 우르르 몰려온 아르티나 기사단이 기민한 시선으로 엘리시아의 표정을 살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마님? 혹시 황비를 살해하고 오셨는지요?”
“버릇없는 협박을 하길래 나는 좋은 말로 타일러주고 왔단다.”
“협박? 무슨 협박?”
“우리 아가는 알 필요 없는 시시한 협박.”
어느새 강단 있게 자라 제법 공작저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어린 딸의 이마에 키스를 남기며, 엘리시아가 짙게 미소 지었다. 황비는 상대를 한참 잘못 가늠했다. 검 한 자루에 기대 수많은 사선을 넘나든 아르티나 가문이다. 휴고도. 그녀도. 이 가문 그 누구도.
“우리 아가는 그저 평안하면 된단다.”
이 바람 하나 지키지 못할 정도로 무르게 살지 않았다. *** 한편 엘리시아가 황비의 궁에서 나왔을 시각. 귀족 회의를 막 끝마친 휴고는 황제와 독대하고 있었다. 곧바로 주제 모르는 황자의 엉덩이를 걷어차러 가지 않고 귀족 회의에 참석한 것은 모두 엘리시아의 조언 덕이었고, 이는 결론적으로 아주 옳은 일이었다.
‘역시 부인의 말을 듣길 잘했어.’
휴고는 엘리시아의 충고를 다시 떠올렸다.
“오늘 귀족 회의 안건은 분명 황자비 책봉일 테고, 황비의 입김을 받은 귀족들이 우리 아가를 거론할 거예요. 당신이 가서 잘 막아두고 와요.”
아니나 다를까, 불과 두 식경 전에 있었던 귀족 회의에서는 황비의 줄을 잡은 귀족들이 가열하게 황자비를 들이십사 청했다. 물론 그들은 황자가 이벨리아에게 청혼서를 보낸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따라서 황자비로 입방아에 오른 이 또한 이벨리아였다. 진한 보드카 한 잔을 털어 넣으며 황제가 푸념하듯 투덜댔다.
“황태자가 그리 분노하는 건 내 처음 봤네.”
황자비로 이벨리아가 거론되자마자 루드비히는 마치 불덩어리를 뱃속에 삼킨 호랑이처럼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더랬다.
“하디 남작의 머리에 상소문을 던져버리다니. 품위를 중시하던 황태자가 상소문으로 귀족을 두드려 팰 줄이야.”
반들반들한 머리에 진하게 남은 상소문 자국 때문에 황제는 회의 내내 웃음을 참느라 퍽 애를 썼다. 그 난장판을 다시 떠올리던 휴고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군의 자질이십니다.”
“신하의 머리를 상소문으로 북 치듯 쳐버린 것이? 폭군의 자질이겠지!”
“적당한 폭정은 귀족들을 누르는 데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도 지지 않는 휴고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황제가 화살을 돌렸다.
“공작도 잘한 것 하나 없네. 너무 과했어.”
“제가 무엇을요.”
“그대가 빵칼로 요제프 백작의 새끼손가락 옆을 찍어버렸지 않은가. 이거 원. 앞으로 황궁 내에서 빵칼 사용을 금지할 수도 없고.”
“펜촉으로 멱 따는 것도 가능하니 펜도 금지하시지요.”
황제가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새삼 공녀의 위세가 참으로 무섭구먼. 청혼서 한 번에 황태자와 공작이 발칵 뒤집어지다니.”
“뒤집어질 이가 몇 더 있기는 합니다. 인간이 아닌 자들로.”
“……어쨌든, 청혼서 건은 내 사과하지. 아까도 말했지만 내게는 알리지 않고 벌인 일이었어.”
“다시 이런 일 없도록 폐하께서 잘 단속해 주시지요.”
그러자 황제가 슬쩍 시선을 돌리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전형적으로 답변을 피하는 자의 몸짓이다.
“폐하.”
대답 없는 황제를 향해 휴고가 느리게 고개를 기울이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장식장을 향하던 황제의 애매한 시선이 그제야 눈앞의 친우에게 가닿았다. 이어지는 말은 꽤 맥락 없었다.
“공작. 공작은 아르칸과 세드릭, 이벨리아 중 누구를 가장 아끼나.”
“더 아끼고 덜 아끼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셋 모두 이 목숨 내어줘도 아깝지 않은 자식들인 것을.”
“그렇지. 그게 부모 마음이지.”
제대로 부모 노릇도 못 하는 주제에 갑자기 웬 자아 성찰인가. 의아한 듯 바라보는 휴고를 향해, 황제가 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말했다.
“공작. 나도 아비일세.”
“알고는 계셨습니까.”
“……머리 위에 관 하나 얹고 있다고 부정이 사라지고 냉정만 남게 되는 건 아니더라고.”
“에둘러 말하는 거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그만큼 공작에게 면목 없어서 그러네.”
한참 뜸을 들이던 황제가 다시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솔직히 공녀가 황가와 연을 맺어주었으면 좋겠네.”
“이브의 의사가 우선입니다.”
“알지. 알아. 그냥 마음은 그렇다는 걸세. 그렇다고 내가 공녀에게 뭘 강요하길 하겠는가. 그랬다간 대악마나 정령왕의 손에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될 텐데.”
“그럼 왜 이렇게 말을 길게 꺼내십니까.”
“루드비히나 에드윈이나 내겐 같은 자식이네. 그리고 말했다시피 내 욕심으론 공녀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고. 그러니 결론은.”
황제가 독한 술 한 잔을 머금어 삼키고 보다 단호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에드윈이 공녀에게 청혼서를 보내는 것이나, 귀족들이 공녀를 황실로 들이라고 읍소하는 것이나,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아낼 의사는 없다는 걸세.”
“결론이 아주 이기적인 쪽으로 나는군요.”
“비난하게. 아비의 마음도, 황제의 마음도, 내게 공녀를 황실로 들이라 말하고 있으니 내가 뭘 더 어쩌겠는가.”
“그 어심(御心)에 충신이나 친우를 위한 마음은 없나 봅니다.”
“맹세코 강요는 없을 걸세. 그저 흐르는 대로 둔다는 것뿐이지.”
“그로 인한 결과까지 용인하신 것이기를 바랍니다.”
자식이 걸리고 황권이 걸린 이상 더 이야기해봐야 절충점이 있을 리 없다. 휴고는 주저함 없이 일어나 집무실 문으로 다가갔다. 시종장이 하늘 위의 권위를 상징하듯 두껍고 무거운 문을 열자. 뒤에서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군신 관계와 정치적 방향을 떠나, 이 일로 우리의 우정에까지 영향이 있겠는가.”
“…….”
잠깐 걸음을 멈췄던 휴고는 이내 대답 없이 방을 나섰다. 권력자들의 우정은 정립될 때부터 불완전하게 금이 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입맛이 쓴 것은 휴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 한편 궁 안에는 공공연한 비밀 두 개가 입에서 입을 타고 회자되었다. 귀족 회의를 마친 황태자가 곧바로 황자궁을 찾아와 일방적으로 황자를 두들겨 팼고, 그로 인해 황자의 온몸에는 짙은 타박상이 들었다는 것이 첫째였고. 대악마, 이제는 루페르트 백작이라는 형식적인 칭호로 불리는 자가 황비궁에 들이닥쳐 황비의 목을 한 손에 쥐고 모종의 대화를 나눴고, 황비가 실신하였다는 것이 둘째였다. *** 며칠 뒤. 치료뿐만이 아니라 신력과 마법까지 동원한 뒤에야 에드윈의 손은 삐걱대며 원래대로 움직일 기미를 보였다. 루드비히의 무력행사로 인해 온몸에 든 타박상도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뼈가 심하게 바스러져서…… 감쪽같이 붙이느라 아주 고생을 했습니다.”
손을 비비며 자신의 공로를 알리는 의원을 향해, 황비가 금덩어리 가득 든 주머니 하나를 휙 던져주었다.
“황자가 어려운 치료를 아주 의연히 견뎌내었지.”
아닌데. 울고불고 아주 난리란 난리는 다 쳤는데. 눈을 도르르 굴리던 의원은 이내 황비의 의도를 짐작하고는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예! 황자 전하께서는 뼈를 접합하는 그 대수술 중에도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아니하시고 의연히 견뎌내셨습니다!”
“이는 궁 내 사람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황자의 덕목이로구나.”
“예, 예! 그렇지 않아도 제가 여기저기 칭송하고자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의원의 발 앞에 주머니 하나가 더 떨어졌다. 두 개의 묵직한 주머니를 탐욕스럽게 소매 안으로 쑤셔 넣은 의원이 뒤뚱뒤뚱 뒷걸음질 쳐서 나가자, 황비가 곁에 앉은 아들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우리 황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습니까.”
“괜찮습니다, 어머니. 이 정도야 별거 아닌 상처이니까요. 하지만 능욕당한 마음은 쉬이 나아지지를 않습니다.”
황비의 눈썹은 세상 가장 가련한 이를 보듯 아래로 축 내려갔다. 우리 아들.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쥐어도 모자란 아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황태자의 관과 원하는 배필을 모두 가져야 마땅하건만.
‘내 힘이 부족해서. 내 태생이 좋지 않아서. 그래서 우리 황자가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구나.’
눈물을 글썽인 황비가 에드윈을 바짝 끌어안으며 토닥였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 어미가 반드시 가지게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형님도 제게 와서 패악질을 부리셨고, 그 무시무시한 루페르트 백작도 어머니를 찾아가 난리를 피웠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며칠 전의 대담이 떠오른 황비가 작게 진저리를 쳤다. 루페르트 백작, 그 본질이 대악마인 자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너와 네 아들이 감히 나의 구원을 해한다면, 그리 애써 얻은 황좌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게 무슨…….’
‘이 제국은 없어질 테니까. 역사에 흔적도 남지 않도록. 아주 처참하게.’
‘어떻게 그런! 그게 가능할 것이라 여기는 오만이……!’
‘새겨듣도록. 내 손으로 이 제국을 지우게 된다면, 너와 네 아들은 마계 가장 참혹한 곳에서 죽지도 못하는 생을 살게 될 것이니.’
마치 그 확언이 오만이 아님을 증명하듯, 마계의 최하층부가 환영처럼 황비의 앞에 펼쳐졌고. 자신을 물어뜯으려는 듯 달려드는 마물들을 목도한 황비는 귓가에 울리는 낮은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혼절하고 말았었다.
“어머니?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러운 듯 부르는 아들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황비가 다시금 토닥토닥 손을 움직였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꼭 손에 쥐여 드릴 겁니다, 황자.”
“……예, 어머니.”
“그때까지는 다른 이로 만족하시지요.”
“다른 이라니요?”
“무릇 가장 단단한 동맹은 혼인에서 얻을 수 있는 법입니다.”
“공녀가 아닌 다른 이와 혼인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잠깐입니다. 황제가 되고 공녀를 얻고 나면 황자비로 들인 이를 폐위하든 죽이든 황자의 마음인 것을요.”
곰곰이 생각하던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가 좋겠습니까, 어머니? 요즘 델포이 자작가의 영애가 꽤 아름답다 소문이 났던데.”
“그런 영애는 차후 비로 들이십시오. 황후가 될 황자비는 마땅히 후작가 이상의 영애여야 합니다.”
“하지만 백작가 중에서도 괜찮은 영애들이 많던걸요.”
황비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렀다. 이 철없는 아들이 언제 정신을 차릴지 걱정이었다.
“황태자가 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황자보다 잘나서? 우리 황자보다 먼저 태어나서?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그럼 무엇입니까?”
“정통성. 황후 소생이라는 정통성 하나가 황태자를 지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어미가 못나 우리 황자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으니, 그만큼 좋은 가문의 영애를 배필로 맞이하여 그 의문을 종식하여야지요.”
타당하다는 듯 제 어미의 팔에 얼굴을 비비던 황자가 물었다.
“그렇다면 저는 카시스 영애가 더 좋습니다. 데퐁트 영애는 포악한 것이 저와 딱 상극이 아니겠습니까. 카시스 영애는 나긋나긋하여 황자비에 제격일 듯합니다.”
“아니. 카시스와 아르티나는 그 자식들까지 매우 친밀하니, 두 가문의 연은 대를 넘어서도 쉬이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카시스 영애와 혼인하시면 오히려 사사건건 방해가 될 테지요.”
그 말에 황자가 마뜩잖다는 듯 인상을 팩 찌푸리고 의자를 퍽퍽 걷어찼다.
“그렇다면 데퐁트 영애밖에 없겠군요. 그 영애는 성질머리가 곰처럼 난폭하다 들었는데.”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제법 현명하더이다. 이 어미 마음에는 쏙 들던걸요.”
무엇보다 반드시 황후가 되겠다는 그 야심이. 무슨 수를 써서든 아르티나를 무너뜨리겠다는 그 증오가.
“아마 우리 황자에게 아주 좋은 파트너가 되어 줄 테지요.”
황비의 가느다란 손이 거대한 뱀 문양을 부드럽게 쓸었다. *** 그날 밤. 황비는 자신을 아주 오래 섬긴 시녀 하나를 불렀다. 렐리안과 세레스. 기실 둘 다 버리기 아까운 패였다. 둘 다 쥘 수 없다면, 선택하지 않은 하나는 다른 이가 주워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밟아 없애야 했다. 고운 손이 짙은 색 크리스털 병을 천천히 돌리다가 시녀에게 건넸다.
“이것을 카시스 영애의 식사에 타거라. 흔적은 남지 않으니 후환은 없을 것이다. 물론 늘 하던 대로 나와 연관 짓지 못하게 많은 손을 거치도록.”
“아르티나 공녀가 아니라 카시스 영애 말씀이십니까?”
“지금 공녀를 건드렸다간 역풍을 맞기 십상이다. 누가 봐도 나의 소행임을 알 수 있을 터이니. 그러나 카시스 영애는 다르지. 부딪힌 적이 전혀 없으니 누구도 내게 의심을 돌리지 못할 것이야.”
“감히 카시스 영애가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혔나 봅니다.”
사가에서부터 자신을 보필했던, 제법 아끼는 시녀였기에 황비는 의중을 털어놓았다.
“공자들과 카시스 영애는 어릴 적부터 친분이 깊었지. 그 관계가 언젠가 혼인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지 않겠느냐.”
황비가 창틀에 기대 차갑게 웃었다.
“혼인으로 아르티나가 카시스까지 얻는다면 에드윈의 황권에 반드시 걸림돌이 될 것이다.”
시녀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런 상황에서 만일 공녀가 황태자와 혼인이라도 하면. 황태자는 아르티나와 카시스를 한 번에 얻게 될 것이니, 그 일만은 막아야지.”
“황비 전하의 혜안에 그저 감복할 따름입니다. 아랫것들에게 카시스 후작가의 하녀로 들어가라 명하여…….”
“아니. 아니지. 좋은 패가 있지 않으냐.”
“소인의 우둔함을 깨우쳐 주십시오, 황비 전하.”
“얼마 전 내 시녀로 들어온 아이. 그 아이라면 후작저 출입이 수월할 것이다.”
눈치 빠른 시녀는 대번에 알아챘다.
‘아. 카시스 후작가의 사생아라던 아이.’
시녀는 거의 엎드리다시피 고개를 조아리며 짙은 색 크리스털 병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안됐지만 카시스 영애는 끝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