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판을 잘못 짜셨습니다, 황비 전하2022.02.03.
외부 일정을 소화하던 엘리시아는 급히 달려온 시녀의 전언을 받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녀가 어린 딸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뒤, 바닥에 놓인 밧줄을 발로 지그시 밟았다.
“가주와 내가 모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참으로 비겁한 짓을 벌였구나.”
하필 아르칸과 세드릭도 없고, 우리 아가만 있을 때 쳐들어와 이게 무슨 횡포람. 엘리시아가 예리한 눈으로 빠르게 기사들을 훑었다.
‘황제 폐하의 친위대는 아니고 황비를 따르는 자들이로군. 황비의 독단이야.’
황제가 아닌 황비라면, 아르티나의 이름으로 맞서지 못할 것 없다.
“공작부인, 황비 전하께서…….”
“제국법 어디에 황비의 신분이 규정되어 있던가.”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황제 폐하의 명도 없이 감히 이 공작저를 밟은 그대들이 할 말은 아니지.”
제국법을 들어 따지면 기사들도 할 말은 없다. 황제의 유일한 반려, 황후. 그 외에 제국법 그 어디에도 황비의 신분을 인정하는 조항은 없다. 다만, 황제의 총애를 받고 황자를 낳았으니 관례에 따라 예우해주는 것에 불과할 뿐. 즉, 황제의 사랑과 황자의 가능성에 기대는 황비와 제국법상 명실상부 유일한 공작위에 있는 아르티나는 그 기반부터가 격이 다르다.
“일단 따라가지. 이 일은 제대로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으니.”
“아, 그렇다면…….”
“밧줄은 넣어 둬. 그대들이 날 그걸로 묶어 끌고 가면 내 남편 눈이 돌아가서 말이야.”
엘리시아가 흘끗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소란 피우지 말고 하던 일 하도록. 이브는 기사들 좀 진정시키고.”
“엄마 혼자는 못 보내.”
당황했을 법함에도 서러운 표정 한 번 짓지 않은 이벨리아가 의연히 정령을 불러냈다.
“일레스트.”
기사들을 한입에 물어 흔들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늑대가 풍성한 갈기를 휘날리며 나타났다.
[음? 왕의 아가 계약자가 웬일로 나를? 드디어 나도 출세하는 건가?]
“엄마를 따라가 줘. 위해를 가하려는 이가 있다면 주저 없이 죽여버려도 좋아.”
“공녀님! 사, 상급 정령이라니, 이건 너무 과한……!”
“다짜고짜 끌고 가려는데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보낼 순 없어.”
“하지만, 상급 정령은 황족에게 위협을 가하기에 충분한…….”
“방금 내가 하는 말 못 들었어? 누군가 위해를 가하려 한다면 죽여도 좋다고 했는데. 다들 착하게 군다면 내 정령도 해를 가하지 않을 거야.”
[이봐. 갑옷 병정. 더 쨍알대면 네놈부터 물어 삼키겠다.]
일레스트가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내자 기사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공작저를 나섰다. 황실 소속 기사들을 따라 공작저 밖으로 나온 엘리시아가 씩 웃었다.
‘우리 아가, 언제 저리 멋있게 커선.’
아직 몸집은 저렇게도 작은데. 바람 불면 꼭 날아갈 것만 같은데. 한순간도 눈 떼지 않았다 여겼는데 미처 모르는 새 저렇게 단단하게 자라 있다. 엘리시아가 고개를 숙이고는 눈시울을 훔쳤다.
“이건 내 공이야.”
뭐든 오냐오냐 잘했다 잘했다만 외치는 남편과 아들들 사이에서 우리 딸을 저리 키워낸 건 마땅히 내가 잘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육아법이 대단했기 때문이야.”
엘리시아는 자화자찬하며 발걸음도 가볍게 황궁으로 연행되었다. *** 분을 이기지 못해 황비가 던진 화병이 여기저기 나동그라져 있었다. 이럴 때의 황비를 건드리는 것은 신상에 하등 좋을 것 없다. 심지어 조금 전에 호위 기사와 의원의 목이 날아가는 것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통상 황족을 가까이서 모시는 수석 시녀들은 유수의 귀족 가문 영애들이니, 가문 내에서 패악을 부리면 부렸지 패악 부리는 이를 달래는 처지는 영 난처했다. 괜히 다가갔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자신들의 손해다. 그러니 모두가 몇 걸음 떨어져 말로만 대충 황비를 달랬다. 그때였다. 연보랏빛 머리칼의 어린 소녀 하나가 황비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갑게 속살거렸다.
“황비 전하. 따뜻한 차를 한 잔 드시고 심신을 평안히 가라앉히셔요.”
“지금 찻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으냐! 금쪽같은 내 아들이, 이 제국의 황자가, 저리 농락을 당했는데!”
“그래서 공작부인을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황비 전하의 혜안에 감탄했답니다.”
자신을 올려세우는 말에 황비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소녀를 바라봤다.
“가주이신 공작 각하나 당사자이신 공녀님이 아닌, 공작부인을 부르신 것은 공작부인을 통해 아르티나의 방향을 아는 것이 가장 수월하기 때문이겠지요.”
“…….”
“어쩌면 자식을 가진 어머니로서 마지막으로 타협할 수 있는 상대로 여기셨기 때문이겠고요.”
“……호오.”
“복잡한 일은 아무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황자님과 공녀님께서 좋은 연을 맺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홍복이겠으나, 혹여 회유될 상대가 아니라면 다른 참한 영애를 황자비로 들이시고 버릇없는 가문은 짓밟으면 그만일 것인데요.”
황비가 한층 누그러진 표정으로 소녀가 건넨 찻잔을 받아들었다. 처음 보는 시녀인데. 제법 똑똑하고 말이 통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
“흥. 아르티나를 짓밟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아느냐.”
“황비 전하께서 지닌 보루야 많지 않습니까. 유수의 가문 하나를 택하여 황비 전하께서 뒤를 받쳐주신다면, 아르티나의 대적마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지요.”
“너. 어려 보이는데 꽤 이치를 아는구나. 제법 맹랑해.”
“황공합니다. 없는 대로 힘겹게 자라면 이리되지요.”
황비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마음에 든다. 역시 아랫것들은 뒷배가 없어야 한다. 저기 저들을 봐라. 저 시녀들은 돌아갈 가문이 있으니 정작 필요한 일에는 몸을 사리기 일쑤지 않은가. 공작부인이 들었다는 기별에 방을 나서던 황비가 고개 돌려 소녀를 가리켰다.
“너. 이름이 뭐지.”
“고귀한 분께 올리기엔 부끄러운 이름입니다만, 물으시니 감히 답하겠습니다. 네피르라 합니다.”
“네피르? 네피르라…… 어디서 들어본 듯도 한데.”
소녀가 청초한 자태로 고개를 숙였다. 연보랏빛 머리칼이 허리께에서 찰랑거렸다.
“불운하게도 카시스 후작가의 이름을 잇지 못한 서녀이지요.”
*** 황궁의 실권을 틀어쥔 황비와 귀족들의 수장 격인 엘리시아가 사적으로 독대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황비의 성정을 닮아 지나치게 화려한 방. 자리를 지키는 시녀들은 감히 두 여인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자 숨소리조차 낮게 죽였다.
“왔는가.”
“인사 올리기 전에, 의도부터 알아야겠습니다, 전하.”
“의도에 따라 인사가 달라지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친우에게 묻는 안부와 적에게 건네는 인사는 같을 수 없지요.”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앉아버리는 엘리시아를 고깝게 바라보며 황비가 시녀에게 눈짓해 잔을 채웠다.
“공작부인. 베르타샨 영애였을 적엔 이리 무례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르티나의 이름을 업고 나니 꽤 안하무인이로군.”
“언제적 이야기를 꺼내십니까.”
“왜. 아직 아프기라도 한가.”
“한날한시에 부모와 가문을 모두 잃었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요.”
“공작부인 정도 되는 이도 그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머금은 황비가 태연하게 말했다.
“같은 아픔을 공녀도 겪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엘리시아가 낮게 웃었다.
“끌고 온 의도가 이거였습니까. 협박.”
“불러낸 의도가 이거였네. 회유.”
“회유라기엔 말씀이 꽤 날카롭군요.”
“협박이라기엔 분위기가 꽤 평화롭지.”
역시. 지옥도의 현실판인 황궁에서 이리 오랜 기간 살아남았다면. 그것도 황후와 황태자를 제치고 여태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면 보통 이는 아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 황비에 엘리시아 역시 흥미가 일었다.
“그래서. 무엇을 위한 협박입니까.”
“공녀와 황자의 인연을 위한 회유일세.”
“아르티나의 힘을 얻기 위한 것이겠지요.”
“세간에선 그걸 바로 인연이라 부르네.”
“우리 아가를 황자비로 앉혀 황태자 전하를 밀어내고 싶으신 모양인데.”
“밀어내다니. 황태자도 내 아들인 것을. 다만, 이 제국의 모후로서 보다 나은 자질의 아이를 차기 황제로 앉히고 싶은 마음일 뿐이야.”
“둘 중 누가 황위에 앉든, 우리 아가를 이 수라장에 들여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황비가 비소하며 테이블에 팔을 괴었다.
“약조하지. 황후의 자리는 공녀에게 줄 것을.”
“그 말씀은 어폐가 있군요. 만에 하나 황자 전하와 약혼하여, 황자 전하께서 차기 황제의 자리에 오르신다면 당연히 황후의 자리는 이브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오해가 있었군. 황자가 장성하여 비를 들이더라도 공녀의 황후 자리는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네.”
“비를 들이더라도?”
“무릇 황제라면 황후뿐만이 아니라 여러 여인을 들여 후사를 탄탄하게 해야 하니 말일세.”
엘리시아가 풀어헤친 머리를 쓸어넘기며 키득 웃음 지었다. 그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시원한 폭소로 변했다.
“아하하하-!”
“뭐가 웃긴가.”
“첩실 들인다는 이야기를 아주 당당하게 하십니다, 황비 전하.”
“첩실이라니. 귀족가에서나 첩실이고 사생아지, 황실에서는 엄밀히 황비이고 황자일세.”
타고나길 종잇장처럼 얇고 얇은 엘리시아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였다. 안 그럴 수가 없었다. 공작저에 다짜고짜 쳐들어와 자신을 끌고 온 것도. 휴고와 자신을 한날한시에 죽여 제 딸에게 아픔을 주겠다는 협박도. 이브와 황자를 결혼시키면 당연히 따로 첩실을 들일 것이라는 말도. 어느 하나 엘리시아를 돌아버리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엘리시아가 앞에 놓인 차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다 마신 찻잔을 위로 휙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조금 전까지 정숙하던 공작부인의 모습은 다 거짓이었다는 듯 방종하기 그지없는 태도. 마치 거친 전쟁터를 누비는 장군의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품위 없는 태도인가, 공작부인.”
“제가 본디 이렇습니다. 말이야 공작부인이지, 일평생 병사들을 이끌고 전장을 구른 몸인 것을.”
- 쨍그랑! 찻잔을 황비 쪽으로 던져 깨버린 엘리시아가 천천히 일어서 황비의 목덜미를 잡았다.
“이게 무슨 무례인가!”
“쉬잇.”
그녀가 허리를 낮추어 황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황실이라고 다를 것 없습니다. 제국법은 한 황제에 하나의 반려를 인정하고 있지요. 그 어디에도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당신은 그저 첩실일 뿐.”
“감히! 허억.”
뿌리치려는 황비의 목을 더욱 세게 당기며 엘리시아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황비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내가 눈감아주고 있기 때문이란 걸 알아야지. 그깟 모래성 같은 자리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것도.”
몸을 일으켜 천천히 돌아서는 엘리시아의 뒤로 황비가 날카롭게 외쳤다.
“나는 황자의 모후다! 내가 이 제국의 황자를 낳았단 말이다!”
“그러니 그 목숨줄 잘 잡고 있으셔야겠지요. 끊어지지 않게.”
“에드윈이 황제에 오르는 날 아르티나가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귀 따갑게 박혀 드는 목소리에 엘리시아가 픽 웃으며 새끼손가락으로 귓가를 문질렀다.
“판을 잘못 짜셨습니다, 황비 전하.”
온갖 저주를 내뱉는 황비에도 엘리시아는 초연했다. 창칼 난무하던 전쟁터에 비하면, 세 치 혀로 내뱉는 바늘은 따갑지도 않다.
“협박이든, 회유든. 내 딸이 대상이고 목적이라면 나는 그 어느 것에도 응하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