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공작부인을 밧줄로 묶어 끌고 와라2022.01.31.
에드윈의 양손을 박살 내고 어깨에 진한 발자국을 남긴 엘라임은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마음 같아서는 이 황자를 죽이고 황궁을 온통 물에 잠기게 하여 모든 인간에게 경고하고 싶었다. 우리 아가 계약자에게 허튼소리 하는 이들은 편히 죽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아가 계약자의 허락이 없는 이상 그건 월권이다. 엘라임에게는 그 무엇보다 아가 계약자의 의사와 명령이 중요했다. 엘라임이 정령계로 돌아가자 황자궁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던 물들이 일제히 밀려 나갔다. 마치 조수간만의 차가 극한으로 치달은 바다의 썰물처럼. 덕분에 황자궁 주변은 물바다가 되었지만, 황비에게 그깟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불규칙적으로 만들어진 물웅덩이를 첨벙첨벙 걸으며 황비가 허겁지겁 황자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황자! 우리 아들!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 으허엉- 어머니!”
소리가 들리는 곳은 위층. 황급히 뛰어 올라간 황비는 아들의 꼴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허억-!”
부러져 비틀린 손. 어깨에 짙게 남은 멍. 마치 길거리 걸인처럼 바닥을 기고 있는. 이 제국의 황자. 자신의 소생. 자신의 목숨줄.
“이게, 이게, 무슨…….”
전신의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화산 끓듯 터졌다.
“어머니-! 공녀가 부리는 정령왕이 제 손을 부러뜨렸습니다! 흐어엉- 너무 아픕니다. 너무 아픕니다!”
“감히, 감히……. 이 제국의 황자를……. 황제의 자리에 앉을 고귀한 내 아들을……!”
의원들이 황급히 달려와 에드윈의 양손을 살피자, 황비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어떠냐.”
“그, 그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오른손은 접합이 가능할 듯하나, 왼손은 뼈가 모두 조각난 상태라, 치료하더라도 이전과 같이 자연스럽게는…….”
“저 의원의 목을 베라.”
의원이 뭐라 변명하기도 전이었다. 입도 뻥긋하지 못한 의원은 기사의 칼날에 스러졌다. 황비가 그 뒤에 있던 의원에게 물었다.
“자. 네가 말해보거라. 어떠냐.”
“가능합니다! 치료로 어렵다면 마법과 성수를 쏟아부어서라도, 예, 가능합니다!”
지목을 받은 이가 바닥에 꿇어앉아 사시나무처럼 떨며 답했다.
“거짓이라면 네 목도 날아갈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의원들은 부산스럽게 에드윈의 손에 부목을 대고 궁 내의 치료실로 데려갔다. 실려 가는 아들을 입술 깨문 채 바라보던 황비가 에드윈을 호위하는 기사의 뺨을 세게 올려붙였다. - 짝! 짜악! 짝! 연거푸 세 대를 맞고도 미동 없던 기사는 황비의 손이 내려가자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주인을 지키는 것이 개의 본분이거늘! 황자가 저리될 때까지 뭘 했던 것이야!”
“불민한 소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황비 전하.”
“오냐. 벌하여야지. 쓸모없는 개는 벌해야 마땅하지.”
싸늘하게 읊조린 황비가 옆에 서 있던 기사의 검을 빼 호위 기사의 목을 단칼에 그어버렸다. 분칠하여 부자연스럽게 흰 얼굴에 새빨간 피가 튀었다. 황비의 잔혹함이 익숙한 시녀들은 무너져내리는 기사의 몸과 끈적하게 흐르는 핏물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이건 그저 화풀이나 다름없다. 일개 인간이 정령왕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광기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황비가 에드윈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수석 시녀의 멱살을 끌어 앞에 꿇어 앉혔다.
“화, 황비 전하! 사, 살려주시옵소서!”
시녀가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고개를 조아렸다.
“네 손이 대신 부러졌어야지. 네 어깨가 대신 떨어졌어야지.”
“맞습니다, 맞습니다, 전하. 다 제 불찰입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전하!”
“저 호위처럼 죽여야 마땅하나, 살 방도 하나를 주겠다.”
“예, 예, 무엇이든 잘할 수 있습니다. 황자 전하께서도 제가 일 잘한다고 얼마나 아끼셨는지……!”
황비가 금으로 만든 패 하나를 꺼냈다. 황제의 친위대를 제외하고 황실 기사들을 동원할 수 있는 패. 황족의 특권이다. 황비가 이를 시녀에게 쥐여주며 속삭였다.
“가서. 공작부인을 끌고 와. 당장.”
“고, 공작부인을…….”
시녀가 바들바들 떨며 패를 받아들었다. 떨리는 손 때문에 패가 미끄러져 떨어지자, 황비가 칼등으로 시녀의 어깨를 세게 내리쳤다.
‘아르티나는 일개 신하가 지닐 수 있는 힘을 넘어섰다.’
황권조차 위협하는 힘.
‘내 손에 쥘 수 없다면 철저하게 부숴야지.’
공작부인을 끌고 와 그 태도를 보면 결정할 수 있을 터다. 사죄의 의미로 공녀를 내놓고 납작 엎드려 빈다면, 차기 황후, 황제의 외척이라는 달콤한 권력을 주며 길들일 것이고. 잘못을 모르고 감히 배짱을 부린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여길 정도로 치욕적인 결말을 맞게 해줄 것이다. 황비가 여전히 금패를 쥐고 주저앉은 시녀의 뺨을 세게 붙잡았다. 눈에는 기괴한 안광이 번들댔다.
“공작부인이 반항하면 밧줄로 묶어서라도 끌고 와. 정 오지 않겠다면 황명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목을 베어도 좋다.”
“예, 예! 전하!”
황비의 명은 황명이 아니다. 그럼에도 시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황비의 명을 받은 황실 기사단이 아르티나 공작저 앞으로 밀어닥쳤다. 가주인 휴고가 부재중이기에 사용인들은 성문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바깥문을 열지 않았고. 결국, 황실 기사들은 바깥문을 훼손한 채 공작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아르티나 기사단은 황실의 문양을 보고도 일말의 주저 없이 검을 겨눴다. 가장 앞에서 들어오던 기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배에 힘을 주고 외쳤다.
“물러서라! 황비 전하의 명이시다!”
황비 전하의 명을 들먹이면 아르티나 기사단이 벌벌 떨며 물러설 줄 알았는지, 꼼짝 않는 태도가 의아하다는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헤롤드가 픽 웃으며 금방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것처럼 입을 달싹였다. 그러자 단장 에딘이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헤롤드의 어깨를 짚었다. 저 재앙의 조동아리에서는 다짜고짜 ‘황비? 개나 줘라, 이 새끼들아.’ 같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 나올 게 뻔했다.
‘함부로 나서지 말아라. 만일 이 일에 황제 폐하가 연관되어 있다면, 자칫 아르티나가 역모의 누명을 쓸 수도 있다.’
‘칫. 나도 압니다, 단장.’
헤롤드가 혀를 차며 뒤로 슬쩍 물러서자 에딘이 황실 소속 기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공작부인을 모시고 오라는 황비 전하의 명이시다.”
“모시고 오라는? 이게 모시러 온 이들의 태도인가?”
그 말에는 본인들도 멋쩍었는지 기사들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공작부인께서 얌전히 동행하신다면 우리도 거칠게는…….”
“얌전히?”
아르티나 기사단의 마지막 남은 이성, 에딘이 목을 돌려 뚜둑 섬뜩한 소리를 냈다. 전투를 치르기 전에 하는 버릇.
“감히 우리 마님께 얌전히? 누가 보면 네놈들이 상전인 줄 알겠군.”
에딘이 검을 들고 천천히 다가섰다. 가장 앞에 있던 기사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 발을 뒤로 뺐다. 아무리 황실 소속 기사들이라고는 하나, 아르티나 가문의 위상과 그 기사단의 위세를 자신들의 아래로 둘 순 없었다. 오히려 황실 소속이기에 더욱 잘 알았다. 이 기사단이 얼마나 돌아버린 자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말을 내뱉던 기사가 일견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다.
“잠깐! 이래서야 그대들도 좋을 것이 없소! 황비 전하의 명을 받고 온 우리에게 해를 가해서야……!”
에딘이 영문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슬쩍 올렸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은 어느새 기사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우린 주군의 명을 따른다. 황실이 아니라.”
“그, 그러면 공작 각하를 뵙게…….”
“주군께서 출타 중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거야. 계셨다면 네놈들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 목이 잘렸을 테니.”
아직 검의 끝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에딘 역시 이 제국 내 소드마스터에 가장 근접한 이를 꼽자면 항상 거론되는 자. 황실 기사단 중에서도 말단에 해당하는 이자들쯤이야. 무더기로 상대하게 되더라도 밀릴 일은 없다 봐도 무방했다.
‘주군께서 귀가하실 때까지 계속 대치하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님을 보낼 수는 더더욱 없다. 어쩔 수 없군. 치워야지.’
순식간에 변한 에딘의 기백에 황실 기사들 모두가 황급히 검을 빼 들었고, 그에 맞서 아르티나 기사단 역시 무기를 들어 올렸다. 차이가 있다면, 황실 기사들 쪽에는 짙은 긴장이 흐르고, 아르티나 기사단 쪽에는 여유와 가벼움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점 정도.
“이게 얼마 만이야.”
“인마전쟁 때는 황실 기사들하고 자주 싸웠는데.”
“고지식하기 짝이 없어서 힘으로 눌러줘야 전략을 제대로 따라오곤 했지.”
“네놈 전략이라곤 다 검으로 뭉개버리는 것뿐이었으면서.”
“우리 마님 정도의 전략가가 아니라면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낫다니까.”
투덜대던 헤롤드가 씩 웃으며 땅을 박찼다.
“지금처럼.”
- 쾅. 크게 검을 휘두르자 황급히 막아내던 기사 두엇이 뒤로 죽 밀려나 돌벽에 등을 세게 부딪혔다.
“크윽! 이게 무슨! 이건 반역이오!”
“개소리.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으면 칙서를 내놔.”
“저 자식, 칙서 내놔도 못 본 척하고 때릴 거면서…….”
헤롤드의 돌격을 지켜본 알렉 역시 몸이 근질거린다는 표정으로 쌍검을 꺼내 들었다. 헤롤드의 등 뒤에서 달려드는 이들에게 검을 날리려던 찰나.
“이게 무슨 짓이야?”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기씨!”
“아기씨!”
돌아보니 그들의 작은 아기씨가 단단히 화가 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엇, 대련 중지, 아니 싸움 중지!”
“거기 네놈들도 다 검 내려. 우리 아기씨 털끝이라도 다치셨다가는 진짜 뒤진다.”
“살살 내려라. 아기씨 쪽으로 돌이 튀잖아.”
허둥대는 아르티나 기사단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온 이벨리아가 기사들의 면면을 살폈다.
“너희!”
정원에서 이리 소란을 피웠으니 당연히 혼날 것이라 지레짐작한 기사단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며 싹싹 빌려고 한껏 처량한 표정을 지었으나. 에딘의 팔을 손으로 툭 두드리며 지나간 이벨리아가 황실 기사들 앞에 서서 턱을 치켜들었다.
“내게 말해. 이게 무슨 행패야.”
“처음 뵙습니다, 공녀님.”
“처음이고 나발이고 태평하게 인사나 주고받을 분위기가 아닌데. 무슨 용건인지 말해.”
“그게, 황비 전하께서 공작부인을 모시고 오라 명하셨습니다.”
“무슨 용건인지를 말하랬어.”
“황자궁에 갑자기 물이 들이닥쳐 황자님께서 크게 다치셨습니다. 이를 본 황비 전하께서 크게 노하시어…….”
“그게 용건이면 날 데려가야지. 이 제국에 그 정도 물을 다룰 수 있는 자가 나 외에 누가 있어?”
“하오나 공녀님께서는 아직 어리시어 중대사를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으시고…….”
“무슨 중대사. 내 혼인?”
기사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뻥긋댔다.
‘공녀라는 지위 때문인가. 아직 어리신데 무슨 기백이…….’
저 산더미 같은 덩치의 헤롤드 앞에서도 할 말 다 하던 기사는 왜인지 이벨리아 앞에서는 주눅이 들었다.
“내 중대사라면 더더욱 내가 논해야지. 앞장서.”
그 말에 카론이 이벨리아의 앞을 가로막고 외쳤다.
“아기씨, 안 됩니다! 저도 데려가십시오!”
“황궁에는 호위 기사 대동 금지. 여차하면 엘라임을 부르면 되고, 황궁 안에는 황태자 전하도 계신걸. 금방 다녀올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생긋 웃은 이벨리아가 황실 기사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훼손된 바깥문으로 인해 떨어진 부산물을 휙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기특하긴 한데, 우리 아가. 그런 수라장에 들어가는 건 아직 이 어미 몫으로 남겨주면 좋겠구나.”
“마님!”
“엄마?”
난데없이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황실 기사 하나가 들고 있던 밧줄을 툭 떨어뜨렸고. 흉흉하게 두꺼운 밧줄을 물끄러미 보던 엘리시아가 섬뜩하게 웃었다.
“저걸로 나를 묶어서 개처럼 연행하겠다?”
“화, 황비 전하의 명으로……!”
“이것들 간이 부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