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엘라임의 분노2022.01.27.
“청혼서?”
이벨리아보다 먼저 반응한 이는 책상에 드러누워 있던 엔리르였다.
“어떤 놈이 겁도 없이 결투장을 보낸 거지?”
말릴 틈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데친 시금치처럼 늘어져 있던 엔리르는 날쌔게 일어나 으르렁거리며 파닥파닥 날아갔다. 순식간에 방문이 열리고, 덩그러니 남은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청혼서? 나한테? 하델이 잘못 봤나?”
고위 귀족들의 약혼은 성년이 되기 전, 상당히 이른 시기에 진행된다고는 하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빨랐다. 몇 년 후면 황비 측에서 연을 맺자고 득달같이 달려들긴 하겠지만, 그 시점이 지금이기에는 지나치게 이르다.
“응. 난 아직 열 살인걸. 하델이 잘못 봤겠지.”
오라버니 중 한 명에게 온 청혼서가 분명했다. 다시 책상에 앉아 숙제를 마무리하려던 이벨리아가 문득 드는 생각에 만년필을 던지듯 내려두고 일어섰다.
“잠깐. 혹시 렐리안이 벌써? 사실 우리 렐리안 추진력이 엄청났던 걸까?”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이크리안 오라버니가 쳐들어와 우리 오라버니를 거의 악마 때려잡듯 때려잡으려 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카시스 후작가에서도 렐리안이 우리 오라버니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다는 건데…… 그래서 벌써 청혼서를 보냈구나!”
결혼은 멀었고 약혼부터 할 테지만, 이게 웬 경사야! 이벨리아가 방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가며 크게 소리쳤다. 1층까지 들리도록.
“나는 찬성이야! 찬성!”
***
“나는 찬성인데…… 분위기가 왜 이래?”
찬성을 외치며 계단을 후다닥 뛰어 내려왔는데. 응접실의 분위기가 누구 하나 목 자르고도 남을 분위기다.
“찬성이라고……?”
특히 우리 아빠 표정이 아주 좋지 않다.
“찬성?”
“좋다고?”
심지어 오라버니들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다.
“응? 응.”
“지금 이딴 새끼가 괜찮다는 거냐, 우리 딸?”
“……아무리 그래도 내 친구한테 이딴 새끼는 너무해요, 아빠.”
“언제 친구가 되었지?”
“언제라니.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였는걸.”
“이 아비가 미처 몰랐구나. 알았으면 진작 목을 자를 것을.”
“모, 목을? 내 친구 목을?”
이벨리아가 당황하는 사이. 찬성이라는 소리에 충격을 받아 바닥으로 떨어진 엔리르가 말랑한 앞발로 땅을 짚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오늘부로 이 제국 황가는 끝이야.”
어린 용의 발밑과 허공에서 푸르게 빛나는 마법진 몇 개가 두둥실 떠올랐다. 파닥파닥 날아오르자 마법진도 용의 몸체를 따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마 저것을 그대로 끌고 가서 퍼부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난데없는 황가의 멸망 소식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웬 황가? 우리 반역하러 가?”
“꼴뚜기 황자가 누나에게 청혼서를 보냈고, 누나가 좋다고 했으니, 나는 꼴뚜기를 없애야겠어. 이제 누나가 황제 해.”
그 말에 이벨리아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저게 꼴뚜기 황자가 보낸 청혼서라고?”
그럼 달리 올 청혼서가 있는가. 휴고와 엘리시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어린 딸을 돌아보았다.
“그럼 뭔 줄 알았던 거니, 우리 딸?”
“렐리안이 큰 오라버니한테 보낸 청혼서가 아니야?”
“어머, 렐리안이 우리 아르칸을 좋아한대? 엄마는 찬성이야!”
“응. 나도 그건 찬성이야. 그런데 진짜 나한테 온 청혼서였어?”
이벨리아는 높게 까치발을 들고 두 팔을 허공으로 쭉 뻗은 다음 휴고의 손에 들린 청혼서를 가까스로 빼앗아 천천히 읽어내렸다. 첫 문장부터 무시무시하다.
“봄이 오니 꽃을 봐도 그대 생각…… 웩.”
「봄이 오니 꽃을 봐도 그대 생각, 달을 봐도 그대 생각. 그대의 축하연에서 그대를 본 이후 그 무엇을 봐도 그대가 보이니, 아마 내 눈이 멀어버렸나 보오. 부귀와 영화는 황실을 떠날 수 없으니, 내 반려가 되는 순간부터 그대의 앞길에는 황금만이 줄줄 흐를 거요. 나와 열한 명의 아이들을 낳고 오순도순 잘살아 봅시다. 물론 아이는 꼭 그대가 다 낳아야 하는 것은 아니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하오.」
“아악, 내 눈.”
- 와그작. 이벨리아의 손아귀에서 처참하게 구겨진 청혼서가 응접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내 눈이 썩었다!”
에드윈의 이름을 달고 청혼서가 온 것부터 아주 언짢은데, 그 청혼서에 첩 들이겠다는 개소리나 당당하게 지껄이고 있다니!
“이 정신 모자란 꼴뚜기가 감히 나를 만만하게 봐?”
“누나. 죽이자.”
“우리 딸. 반역하자.”
“아빠가 황자 목을 치마.”
“제가 황비를 맡죠.”
가족들의 과격한 언사에 평소 같으면 고개 저었을 이벨리아가 이번만큼은 부정하지 않았다. 황자가 이 제국 유일한 공녀에게 청혼했다는 사실과 그 청혼서의 내용은 아르티나에서 함구한다고 하더라도 에드윈과 그 측근들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갈 것이다.
“이걸 그냥 둬서는 내가 웃음거리가 될 판이야.”
모욕적인 청혼서에 부들부들 떨던 이벨리아는 칼이자 방패가 되겠다던 맹약자를 불렀다.
“엘라임.”
“우리 말랑말랑 아가 계약자. 왜 이렇게 화가 나셨나요?”
평소처럼 놀자고 부른 줄 알았는데. 아가 계약자의 표정이 둥지를 빼앗긴 참새와 비슷하다.
“이이…… 이익…….”
“……계약자?”
이벨리아가 씩씩대기만 할 뿐 말이 없자, 엘라임이 시선을 휴고에게 돌렸다. 휴고가 바닥에 떨어진 종잇조각을 눈짓하자, 엘라임은 힘을 사용해 청혼서를 두둥실 띄워 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물의 정령왕답게 차분하고도 고아한 표정이었다.
“이 종이 쪼가리가 뭐길래 우리 아가 맹약자를 이리 화나게 했을까.”
그리고 시선이 청혼서를 읽어내려갈수록 온화하던 얼굴이 점점 차갑게 굳었다. 끝에 이르러서는 엘라임의 곁에서 일렁이던 물이 서늘하게 얼어붙어 공작저 전체를 서리가 낀 듯 희뿌옇게 만들었다.
“엘라임. 사실은 얼음의 정령왕이었어요?”
“종종 눈이 돌면 이렇게 됩니다, 아가 계약자. 그래서. 이 인간 신상정보가?”
휴고가 즉각 답했다. 에드윈을 사정없이 짓밟고 싶은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황궁. 황자. 에드윈 에르카디아.”
“하위 정령들은 계약자의 의지를 따르나, 정령왕은 다르지요.”
“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 독단이라는 말입니다.”
섬뜩하게 웃은 엘라임의 형체가 스르르 사라졌다.
“이게 뭐야. 차가워.”
“이건 서리라고 하는 거란다, 엔리르.”
“서리? 차가워. 차가워.”
왕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분노는 한참 남아 공작저를 맴돌았다. 앞발을 털던 엔리르는 공작저 여기저기에 퐁퐁 불을 뿜으며 서리를 녹였다. *** 황비와 에드윈의 궁은 황제궁에서 제법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황제궁을 중심으로 권력에 따라 황족의 거처와 각 관서의 위치가 정해진다는 것을 고려하면, 황제궁에서 약 1시간가량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황자궁은 빈말로라도 좋은 위치라 할 수는 없었다. 기실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한 황자들은 출궁하는 것이 관례라는 것을 고려하면, 황제로서는 차고 넘치는 대우를 해주고 있음이 분명했으나.
‘이게 다 루드비히 그놈을 죽이지 못해서……!’
이 순간, 황비에게는 그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에드윈이 황태자였다면 다들 이리 미적거리고 있었겠는가! 기사들이 오는 데 이리 오랜 시간이 걸렸겠는가! 황비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얼른! 기사들과 의원들을 더 불러라!”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기사들의 관저에서 여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황비가 기사의 멱살을 잡으며 거세게 뺨을 내리쳤다.
“폐하의 친위대라도 부르란 말이다!”
“황비 전하, 위험하십니다. 혹시 모르니 뒤로 물러나시지요!”
“내 아들이 저 안에 있다! 내 아들이!”
“전하! 전하! 들리십니까!”
에드윈이 기거하는 궁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전조 없이 밀려든 물은 다른 이들을 모두 밖으로 떠밀고 오로지 에드윈 하나만 안에 남겨두었다. 그 후 마치 보호막처럼 단단해지더니,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도,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마치 황자궁만 이 세상과 동떨어져 바닷속으로 가라앉아버린 듯했다. 물 앞에서 기사들이 마구 검을 휘둘렀으나,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물은 갈라졌다가도 순식간에 다시 하나의 물줄기인양 단단히 흘렀다.
“……이게 대체!”
“대체 어떤 이의 사특한 짓이란 말입니까!”
경악하여 외치는 기사들의 뒤에서, 황비가 바득 이를 갈았다. 물. 저 방대한 물. 흐르는 물줄기가 아니라 물 그 자체다. 퍼내도 퍼내도 닳지 않는 자연 그 자체의 물. 저걸 다룰 수 있는 자가 이 제국에 누가 있을까. 아니, 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
“……정령왕.”
그렇다면 이 사달을 벌인 이는 굳이 찾지 않아도 뻔하다. 황비의 손이 세게 주먹 쥐어졌다. 손톱에 찔린 손바닥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땅에 흔적을 남겼다.
“공녀, 감히……!”
***
“어서 나를 보호하거라! 다들 어디 갔느냐!”
밖에서 사달이 난 그 시각. 홀로 황자궁에 갇혀버린 에드윈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 무엇보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해야 하는 기사들이 어디로 증발한 건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푸른 물 뿐. 물이 일렁이면서 공간 역시 마치 왜곡되는 것처럼 흐리게 번졌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괴기한 광경에 눈을 세게 깜빡이고 손으로 물을 휘적이며 출구를 찾는데.
“으아악!”
누군가 뒤에서 에드윈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잡아챘다.
“무엄하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대야말로 내가 누군 줄 알고.”
“반란인가!”
“반란.”
따라 읊으며 엘라임이 픽 웃었다. 인간들의 사고방식이란.
“내, 내가 황제가 되면 재상의 자리를 약속하겠다! 이것 놓고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라!”
추잡스러운 발버둥에 엘라임이 혀를 차며 본론을 꺼냈다.
“그대가 나의 아가 계약자에게 보낸 청혼서.”
그 말에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이의 정체를 유추한 에드윈이 숨을 죽였다.
“형편없더군.”
조롱하는 듯한 말투. 동시에 목을 옥죄는 힘이 강해졌다. 에드윈이 켁 거친 기침을 뱉었다.
“주제넘고.”
왕의 분노를 느낀 물이 마치 에드윈을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시린 얼음으로 변했다.
“건방져.”
더러운 것을 털어내듯 손을 탁 털자, 에드윈이 바닥에 꼴사납게 나동그라졌다.
“으, 으아악!”
엘라임의 얼굴을 본 에드윈이 손을 뒤로 짚으며 엉덩이를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그 어디에도 당찬 구석 하나 없는 모양새. 엘라임이 조소하며 뒤로 벽을 세워 퇴로를 차단했다. 난데없이 생긴 물의 벽을 더듬거리던 에드윈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 들어 엘라임을 올려다보았다.
“왜 정령왕이……!”
“말이 짧군. 혀도 짧아지고 싶은가.”
“……공녀가 보냈습니까?”
“그럴 리가.”
에드윈을 오시하던 엘라임이 허리를 숙여 덜덜 떨리는 턱을 검지로 들어 올렸다.
“으으……. 사, 살려…….”
“죽이는 건 우리 아가 계약자의 허락이 있어야 하고.”
“제발…….”
“오늘은 적당히 경고만 하고 돌아가지.”
끄덕끄덕, 자신을 죽이지 않겠다는 말에 안심한 에드윈이 황급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소중한 계약자에게 그 더러운 욕망 한 자락도 보이지 마.”
“…….”
에드윈은 대답 없이 머뭇거렸다. 그는 정말로 공녀가 갖고 싶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황태자가 좋아하니까. 그리고 황족인 자신보다 빛나 보이는 그 고고함을 형편없이 망가뜨리고 싶어서. 가족도 잃고 친우도 잃고 자리도 잃고.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은 공녀가 자신에게만 의지하고 고분고분 굴었으면 해서. 그 머뭇거림 속에 더러운 욕망이 가득하다는 것을 눈치챈 엘라임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하. 사태가 잘 파악되지 않나 본데.”
그는 살심이 치밀어오르던 청혼서의 내용을 곱씹었다. 열한 명의 아이, 근데 네가 낳을 필요는 없는 아이. 생각만 해도 소중해서 가슴이 지끈거리는 우리 아가 계약자를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아주 잘 알겠다. 엘라임이 바닥에 엎어진 에드윈의 손 위에 발을 올렸다.
“자…… 잠깐!”
바로 힘이 가해지자, 우득, 뼈가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에드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
표정 없이 에드윈의 발버둥을 내려다보던 엘라임이 에드윈의 어깨를 발로 세차게 걷어찼다.
“어억. 커헉!”
어깨를 부여잡은 에드윈이 엉금엉금 기어와 엘라임의 옷자락을 잡았다.
“주, 죽이지 않는다고 했잖아! 사, 살려줘!”
“멀쩡히 살려준단 얘기도 한 적 없지.”
“알았어. 알았다고! 공녀는 안 가질게! 응?”
이 멍청한 황자는 아직도 뭘 모르는 게 분명하다.
“네가 가지고 말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의 계약자는.”
아가 계약자를 지키는 이들이 몇인데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있으니. 엘라임의 발이 에드윈의 남은 손 위에도 올라갔다. 또다시 울려 퍼지는 비명을 들으며 엘라임이 단언했다.
“넌 단명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