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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공녀님께 청혼서가 왔습니다! (138/323)

138화: 공녀님께 청혼서가 왔습니다!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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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위기는 전혀 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경직될 뿐. 여전히 얼굴을 가린 렐리안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16549755935287.jpg“호, 호, 혹시, 들으셨…….”

16549755935292.jpg“아니. 아무것도 못 들었다. 바람 소리가 거세서.”

16549755935287.jpg“여기 온실인데……. 다 들으셨구나! 세상에!”

벌떡 일어선 렐리안이 아르칸을 스쳐 밖으로 뛰쳐나갔다.

16549755935299.jpg“어어? 렐리안!”

이벨리아가 잡으려 해봤으나, 저 멀리 뛰어가던 렐리안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토마토같이 새빨개진 얼굴로 도망갈 뿐이었다.

16549755935299.jpg“…….”

16549755935292.jpg“…….”

멍하니 서 있던 아르칸이 초점 없는 눈으로 물었다.

16549755935292.jpg“이거 내가 잘못한 거지?”

마찬가지로 넋이 빠져 있던 이벨리아도 혼이 나간 눈으로 마주 물었다.

16549755935299.jpg“혹시 내가 결혼을 찬성한다고 해서 그런 걸까? 내가 잘못한 걸까?”

16549755935292.jpg“렐리안이 나를…….”

16549755935299.jpg“근데 오라버니. 나는 진짜 찬성이야.”

16549755935292.jpg“왜 나를…….”

16549755935299.jpg“그리고 오라버니. 렐리안 마법 진짜 많이 늘었다?”

16549755935292.jpg“그냥 여동생이나 다름없는데. 이안 자식이 날 죽이려 들 텐데.”

16549755935299.jpg“그리고 오라버니. 렐리안 말도 막 엄청 잘해.”

절친한 친구가 내 오라버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소중한 여동생의 절친한 친구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각자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남매가 흐린 표정으로 영 이어지지 않는 대화들을 마구잡이로 던지자, 지켜보던 아드니엘이 중얼거렸다.

16549755969396.jpg“지금 제일 놀라고 슬퍼야 할 사람은 나 아니야……?”

165497559694.jpg“그러게 넌 왜 개똥 같은 소리를 해선.”

16549755969396.jpg“누나는 대체 누구 편이야?”

165497559694.jpg“일단 네 편은 아니야.”

제대로 고백도 하기 전에 차여버린 아드니엘이 입을 삐죽였다. *** 후작저로 뛰쳐 들어온 렐리안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자, 응접실에서 고서를 읽던 이크리안이 화들짝 놀라 여동생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16549755969455.jpg“렐리안. 왜. 무슨 일이야. 공작저에 간 거 아니었어?”

16549755935287.jpg“응…….”

16549755969455.jpg“근데 왜. 혹시 하르벤타의 황족들이 널 괴롭혔어? 공녀님께서 계신데도?”

16549755935287.jpg“아니…….”

16549755969455.jpg“그럼 무슨 일이야. 응?”

16549755935287.jpg“방으로 가서 얘기할래.”

축 늘어진 걸음으로 이크리안의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렐리안이 검지로 테이블을 뽀득뽀득 문질렀다. 이크리안이 따뜻한 차를 우려 건네며 옆자리에 앉아 어깨를 토닥였다.

16549755969455.jpg“우리 동생이 무슨 일로 이렇게 시무룩할까.”

16549755935287.jpg“오라버니.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이크리안의 눈이 번뜩 불을 뿜었다.

16549755969455.jpg“누군데. 그 새끼가.”

16549755935287.jpg“새끼라니! 세상에서 제일 멋진 분인데!”

16549755969455.jpg“그래서 누군데. 그 죽일 놈이.”

렐리안이 머뭇거리다가 속삭였다. 테이블을 문지르던 얇은 손가락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16549755935287.jpg“아르칸 오라버니.”

16549755969455.jpg“이리 와. 너 흑마법에 걸린 것 같다.”

16549755935287.jpg“무슨 흑마법이야! 아니야!”

16549755969455.jpg“흑마법이 아니면! 그 고지식하고 재미없는 자식이 왜 좋아! 볼 건 얼굴과 몸과 돈과 가문과 검술 실력뿐인 그게!”

16549755935287.jpg“방금 오라버니가 말한 거에 내가 보는 게 다 들어가 있는걸.”

16549755969455.jpg“얼굴과 몸과 돈과 가문과 검술 실력?”

16549755935287.jpg“……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잘생긴 얼굴과 든든한 몸과 많은 돈과 뛰어난 검술 실력.”

16549755969455.jpg“너 취향이 이렇게 확고했어?”

16549755935287.jpg“응. 누구나 취향은 있잖아.”

16549755969455.jpg“그 취향이 하필 그 새끼고?”

16549755935287.jpg“운 좋게도 그분이고.”

이크리안이 벽에 걸린 샴쉬르를 냅다 뽑아 쥐었다. 그리고서는 마력 운용을 원활하게 해주는 작은 완드까지 손에 들었다.

16549755969455.jpg“이 자식을 진짜!”

16549755935287.jpg“내가 좋아하는 건데 왜 아르칸 오라버니를 욕해!”

16549755969455.jpg“그런 얼굴로 태어나서 내 여동생 홀린 죄는 그놈에게 있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듯하자 와락 허리를 부여잡는 여동생을 흘끗 돌아보며, 이크리안이 물었다.

16549755969455.jpg“그 자식도 알아? 네가 그놈을 좋아하는 거?”

16549755935287.jpg“……방금 알게 됐어. 내가 공작저에서 말해버렸어.”

16549755969455.jpg“그럼 다짜고짜 쳐들어가도 억울하진 않겠군.”

그 자식이 마법을 난사 당할 이유는 충분하다.

16549755935287.jpg“오라버니! 안 돼!”

16549755969455.jpg“진짜 죽을 자식은 아니니 화풀이나 좀 하고 올게.”

16549755935287.jpg“오, 오라버니!!”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부르는 여동생을 뒤로한 채, 이크리안은 망설임 없이 공작저로 향했다. 미리 몸을 풀어두고자 어깨를 휘휘 돌리며. 그리고 조금 뒤. - 콰과광.

16549755935292.jpg“윽. 적당히 좀……!”

아르칸은 다짜고짜 자신의 방으로 쳐들어온 이크리안의 마법을 힘겹게 막아냈다.

16549755969455.jpg“네 죄를 알렷다!”

16549755935292.jpg“……미안.”

이후 불평은 일절 없었다. 입장을 바꿔서, 만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여동생이 이크리안을 좋아한다고 선언했다면…….

16549755935292.jpg“이안. 더 때려라. 더. 이건 내가 맞아도 싸다.”

16549755969455.jpg“알면 됐다!”

아르칸의 방에서는 한참 동안 마법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온실 쪽에서 마나를 느끼던 어린 용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며칠 이벨리아와 신나게 놀러 다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샤트가 사절단 업무를 완전히 손에서 놓은 것은 아니었다. 호방한 성격 덕에 있는 대로 사고를 치고 다니기는 하나, 명색이 하르벤타 제국 차기 황제. 실컷 놀고 들어온 날에는 새벽까지 등을 켜고 업무를 처리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이벨리아가 조언하며 도왔다. 최근 엘리시아와 현자에게 여러 정세를 혹독하게 배우고 있기에, 이벨리아의 충고는 이샤트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 이샤트와 이벨리아의 방에는 어스름한 새벽녘까지 등이 꺼지지 않았다.

165497559694.jpg“공녀. 교역에 요청할 항로는 이쪽이면 될까.”

16549755935299.jpg“아니. 최근 왕국 잔당들이 이 항로에서 종종 약탈하곤 해. 이쪽 항로가 더 안전할 거야.”

165497559694.jpg“공녀. 우리 제국 향신료와 맞바꿀 교역 물품은 에르카디아의 원석 어떨까.”

16549755935299.jpg“원석이 있으면 뭐해. 그걸 세공할 기술자가 없는걸. 요즘 하르벤타의 비단이 새로운 유행이라고 하니, 향신료에 비단까지 얹어서 기술자 몇 명도 보내 달라고 협상하는 게 나을 거야.”

165497559694.jpg“역시 공녀야.”

양피지에 사각사각 교역 내용을 써 내려가던 이샤트가 한참 뒤 기지개를 켜고 서류를 이벨리아에게 넘겼다.

165497559694.jpg“자. 한번 봐줘. 문제없는지.”

졸음에 겹던 이벨리아의 눈은 양피지를 받아들자 반짝 빛을 발했다. 꼼꼼히 읽어내려가는 친구에게 이샤트가 물었다.

165497559694.jpg“그런데 공녀. 데퐁트 후작가는 어쩔 거야?”

16549755935299.jpg“후작의 꼬리는 리카드나 세레스를 통해서 잡을 수 있을 거야. 리카드는 아직 전장에 있으니, 황궁에 있다는 세레스가 뭘 꾸미는지부터 알아야겠지.”

165497559694.jpg“데퐁트 후작 영애가 어떻게 황궁으로 들어왔을까?”

16549755935299.jpg“황비를 통해서.”

165497559694.jpg“황비는 왜 받아주고?”

다 읽은 양피지를 돌돌 말아 이샤트에게 넘겨주며, 이벨리아가 답했다.

16549755935299.jpg“황비는 우리 가문에 목을 매고 있어. 꼴뚜기 황자를 황제로 올리려면 우리 가문의 힘이 필요하거든. 아, 이 문서는 그대로 진행하면 되겠다.”

흐리게 흔들리는 호롱불을 훅- 불자 방 안에는 시린 달빛만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16549755935299.jpg“그런데 우리 가문은 미적지근하지. 굳이 황실에 줄 대지 않아도 될 만큼의 힘은 갖추고 있으니까.”

이벨리아가 침대 위로 올라가며 말을 이었다.

16549755935299.jpg“세레스는 보루야. 곧 내게 어떤 제의가 올 테고, 내가 걷어차면 그건 세레스 차지가 되겠지.”

165497559694.jpg“무슨 제의?”

16549755935299.jpg“황자비.”

내가 거절하면 황비로서는 아르티나를 대신할 가문을 잡아야 할 테니까. 아마 카시스 후작가의 렐리안과 데퐁트 후작가의 세레스를 저울질하겠지.

16549755935299.jpg“카시스 후작가는 아르티나와 너무 가까워. 어차피 아르티나와 척질 수밖에 없다면, 황비로서는 데퐁트 후작가를 선택할 가능성이 커.”

그리고 그때가 되면 황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르티나를 제거하려 들 것이다. 자신의 편으로 묶이지 않은 거대한 말은, 필경 에드윈의 황위 쟁탈전에 가장 큰 장애물로 설 테니까. 일견 순한 얼굴에 차가운 비소가 짙게 새겨졌다.

16549755935299.jpg“형편없어. 아르티나 대신 데퐁트. 나 대신 세레스라…….”

대신해 내세우는 패가 영 격이 떨어지지 않는가. 평소 해사하던 눈에는 마치 그물 같은 치밀함이 들어찼다.

165497559694.jpg‘아무 생각 없어 보였는데. 이미 황비의 의도를 읽고 있었네.’

내심 감탄하던 이샤트는 생각했다. 대륙 제일의 지장이었다는 공작부인이 저런 모습이었을까, 하고. *** 하르벤타의 사절단과 에르카디아의 협상은 소소한 이권 다툼이 오고 갈 뿐, 거시적 측면에서는 대승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두 대륙 모두에서 급증하고 있는 실종사건의 원인을 알게 되면 공유할 것. 마족에 대해서는 과거 그러했던 것처럼 두 제국이 연대하여 대응할 것. 이 두 가지 취지에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히 원만한 협상 타결이라 기록될만했다. 그리고 사절단의 귀국을 하루 앞둔 늦은 밤. 베개를 껴안고 가만히 달을 올려다보던 이샤트는 침대에 고요하게 누워 있는 이벨리아에게 속삭였다.

165497559694.jpg“공녀. 설령 언젠가 에르카디아와 적대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공녀만큼은 미워하지 않을게.”

이불 위로 이벨리아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좋은 꿈을 꾸길 빌던 이샤트도 곁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뒤, 이른 새벽. 이벨리아는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이샤트의 머리를 쓸어올려 주었다.

16549755935299.jpg“이샤트. 설령 언젠가 내가 하르벤타 모두의 목을 벤다고 하더라도, 너만큼은 살려줄게.”

165497559694.jpg“……조금 더 감동적으론 어려울까, 공녀.”

16549755935299.jpg“안 잤어?”

165497559694.jpg“공녀야말로.”

16549755935299.jpg“아쉬워서.”

165497559694.jpg“나도.”

푸핫, 웃은 두 아이는 잠들기를 포기하고 발코니로 나가 동틀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저 풀벌레는 왜 저렇게 찌륵찌륵 우나.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 성대한 환영회를 비롯하여 부족함 없는 환송회까지 열었기에, 막상 하르벤타의 사절단이 복귀하는 당일은 소란스럽지 않았다.

16549756174881.jpg“먼 길 부디 평안히 귀환하시길.”

165497559694.jpg“값진 경험을 하고 갑니다. 폐하의 환대는 잊지 않고 에르카디아의 사절단에 갚도록 하겠습니다.”

황제와 고위 귀족들이 사절단의 무사 귀환을 비는 인사말을 건네고, 이샤트는 두 제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비는 답을 건네는 것으로 끝이었다. 부족함 없는 의젓함으로 인사를 마친 이샤트가 이벨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입을 삐죽 움찔거렸다.

165497559694.jpg“흐읍…….”

16549755935299.jpg“……?”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제국의 황태녀로서 손색없는 태도였는데. 난데없이 흐느끼는 소리가 나자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은 귀를 의심하며 의아한 듯 크게 눈을 떴다.

165497559694.jpg“공녀어…….”

16549755935299.jpg“이샤트으…….”

게다가 공녀까지 함께 울먹거리며 손을 앞으로 쭉 뻗고 황태녀에게 도도도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이벨리아를 덥석 끌어안은 이샤트가 세상 떠나가라 외쳤다.

165497559694.jpg“공녀! 난 못 간다!”

16549755935299.jpg“나도 못 보내! 이샤트 여기서 살아!”

165497559694.jpg“그럼 우리 제국 황제는 누가 하지?”

16549755935299.jpg“아드니엘이 하면 되겠네!”

165497559694.jpg“저놈이 했다가는 우리 제국 폭삭 말아먹는다!”

울먹이던 이샤트는 결국 땅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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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켜보던 귀족들이 당황하여 눈을 돌렸다. 비록 우리 제국 국본은 아니라 하나, 타 제국 황태녀의 추태를 지켜보기가 참으로 민망했다. 귀족들은 이참에 휴고나 아가레스와 한 마디라도 더 나눠보고자 만면에 미소를 띠고 한껏 뿌듯한 척 말했다.

16549756202827.jpg“공녀님과 황태녀 전하께서 참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으셨나 봅니다!”

16549756202831.jpg“엄밀히 말하자면 내 딸에게 일방적으로 달라붙은 거다.”

16549756202827.jpg“아…… 어쨌든 두 분께서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시면 그야말로 경사 아니겠습니까! 하하!”

1654975620284.jpg“절친한 친구는 나고. 쟤는 그냥 친구다.”

16549756202827.jpg“하하하!”

1654975620284.jpg“웃어? 공녀님께서 저리 속상해하고 계시는데, 웃긴가?”

16549756202827.jpg“죄, 죄송합니다, 루페르트 백작.”

농담에는 웃는다는 사회적 합의 따위. 이 대악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여전히 훌쩍이던 이샤트가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이벨리아의 손을 꼭 잡았다.

165497559694.jpg“공녀. 2년 뒤에 볼 수 있으면 좋겠다.”

16549755935299.jpg“다음 사절 때 못 가더라도 언젠가 꼭 찾아갈게, 이샤트.”

울먹임이 남은 인사 끝에 이샤트가 말을 타고 황궁을 떠나자, 이벨리아가 정령을 불러냈다.

16549755935299.jpg“실라페.”

16549756202827.jpg[요즘 자주 부르네, 계약자! 내 독수리 날개에 반한 건가?]

16549755935299.jpg“……저기 이샤트랑 아드니엘을 따라가서 게이트까지 잘 지켜줘. 내 친구들이야.”

16549756202827.jpg[우울해 보이네, 계약자. 걱정 마! 나만 믿어!]

그렇게 날아간 실라페는 하르벤타 제국 사절단원들이 게이트를 탈 때까지 이샤트의 말 상대이자 호위가 되어주었고. 게이트로 들어가던 이샤트는 실라페에게 작게 속삭였다.

165497559694.jpg“공녀에게 전해줘.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나든, 나는 늘 공녀의 친우라고.”

  *** 이샤트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던 이벨리아는 며칠간 식어버린 팬케이크처럼 눅눅하게 처져 있었다. 친우의 기분을 늘 기민하게 파악하는 아가레스는 시도 때도 없이 공작저를 찾아와 어린 친구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자 애썼다. 그 결과 이벨리아의 방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정원에는 아가레스가 메다꽂은 각종 과일나무와 어디선가 가져와 심은 푸른 수국이 장관을 이뤘다. 계절이 바뀌면서 황제가 보낸 현자와의 수업은 점점 심화 과정으로 들어섰고.

16549756202827.jpg“공녀님께서는 습득 속도가 상당히 빠르십니다.”

16549755935299.jpg“혹시 제가 천재인 걸까요?”

16549756202827.jpg“아닙니다. 그냥 노력과 재능이 적절히 겸비된 학생입니다.”

16549755935299.jpg“노력과 재능이 대단히 겸비되어 천재인 것은 아닐까요?”

16549756202827.jpg“아닙니다. 천재시라면 이런 문제쯤은 답할 줄 아셔야 합니다.”

16549755935299.jpg“내보시지요!”

16549756202827.jpg“마나를 구성하는 쿼크와 글루온은 질량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모여 만들어진 마나 입자는 질량이 있는 모순이 생기지요. 이 간극을 증명하는 것은 이 세계 그 누구도 풀지 못한 7대 난제입니다. 공녀님께서 해보시겠습니까?”

16549755935299.jpg“저는 그냥 노력과 재능이 적절히 섞인 학생이에요.”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냉큼 받아들인 이벨리아는 더욱 부단히 노력하면서 추운 겨울을 났다. 그사이 해가 바뀌어 아가레스가 꽂아둔 목련 나무에 붓을 닮은 꽃이 춤추던 어느 봄날. 집사 하델의 목소리가 온 공작저에 쩌렁쩌렁 울렸다.

16549756202827.jpg“청혼서가 왔습니다!! 우리 아기씨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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