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이 결혼 찬성일세!2022.01.20.
당황한 이벨리아가 머리를 쥐어뜯으려 했지만, 머리가 커지고 팔은 짧아지는 바람에 제대로 닿지도 않았다. 이 가분수 몸! 이렇게 불편한 몸으로 내가 살았었다니! 심정도 모르는 가족들과 친구들은 모두 이벨리아 근처로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심지어 이벨리아의 의자를 쭉 빼서 식당 한가운데 두더니, 마치 조각상에 기도라도 하듯이 원하는 바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아가. 아빠, 해보렴. 아! 빠!”
“나 아가 아냐!”
“우리 아가는 엄마라는 말을 먼저 뗐어요! 엄마, 해보렴!”
“엄마.”
“토끼도 해봐. 토끼.”
“저리 가, 또끼!”
위협적으로 팔을 휘둘렀으나 하찮다는 듯 픽 웃은 아가레스가 또끼, 또끼, 발음을 따라했다.
“우리 아가. 이거 줄까? 푸딩? 숟가락질 어려우니까 오라버니가 먹여줄까?”
“내나. 통째로 내나.”
작은 오라버니 손에서 푸딩 그릇을 빼앗은 그때였다. 바깥에서 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기씨가 오셨다면서!”
“아주 돌아오신 건가, 황궁에서? 저녁 식사 중이시라고?”
“앗, 도라버린 멍뭉이들!”
이런. 미친개들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다. 다시 아가로 변한 꼴을 기사단에게 보였다가는 어떤 비참한 꼴을 겪을지 모른다! 이 모습만큼은 절대 보여줄 수 없다. 어차피 우리 가족들이 식사하고 있는 곳에 감히 들어오지는 못할 테니, 고된 수련을 마친 기사단이 기사단 숙소로 밥을 먹으러 가거나 잠을 자러 갈 때까지 잠깐만 기다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식사 마치실 때가 다 되신 것 같은데. 여기서 기다리면 곧 나오시겠군.”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아무래도 근성만 좋은 저 미친개들은 자신의 모습을 볼 때까지 물러가지 않을 심산인 것 같았다. 식당 안에 없는 척 테이블 밑으로 꼼질꼼질 숨어보려 했건만.
“우리 아기씨 좋아하시는 디저트입니다!”
마침 날라져 들어오는 디저트 때문에 식당 문이 열렸고.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문 때문에 내부는 훤히 보였고. 밖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던 아르티나 기사단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것도 밑으로 기어들어 가려는 자세를 취한 상태에서.
“……아, 앙 대!”
내 존엄성! *** 오가는 시선 속에 당혹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
“…….”
“…….”
“……뭐, 뭘 바!”
이벨리아가 바락 외치자 잠깐 멈춰 있던 기사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뭐냐. 이거.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거냐.”
“아니. 우리 단체로 악마의 공격을 받아 과거로 돌아온 건 아닐까.”
“신빙성 있군.”
“아니면 우리 아기씨는 원래 아가인데 우리가 어린이 아기씨를 미래로 가서 보고 왔다거나?”
“그것도 말이 되네.”
자기들끼리 원인을 찾던 기사들의 시선이 천천히 다시 이벨리아에게로 모였다. 테이블보를 들어 올리고 그 아래 기어들어 갈 듯 딱 멈춰서 동공을 마구 흔들고 있는 그들의 아기씨에게로.
“……으아아! 과거로 돌아왔으면 어때! 우리 아기씨 말랑말랑 모습을 다시 봤으니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아기씨! 이 장난감 드릴까요?”
“이 딸랑이는 어떻습니까!”
“이놈들! 분경하다!”
짐짓 위엄있게 불경하다고 외쳐보았지만 기사들이 만면에 띤 미소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작아진 주인의 기분을 기가 막히게 파악한 카론이 기사들의 시선에서 이벨리아를 가렸다.
“다들 우리 아기씨한테서 떨어지십시오. 불경합니다.”
“짜란다, 카롱!”
“감사합니다. 말랑말랑…… 아니, 아기씨. 그 빵 이리 주시고 이 쪽쪽이 앙 무시지요.”
“씨이…… 카롱이 더 나빠!”
갑자기 작아진 몸과 웃어대는 기사들, 그 옆에서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 심지어 말리긴커녕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 친구들에 있는 대로 화가 난 이벨리아가 결국 가진 능력 중 가장 커다란 것을 꺼내고야 말았다.
“엔라임!”
발음은 엉망이었지만 충실한 계약자는 제대로 알아듣고 지체 없이 맑은 대해를 흩뿌리며 나타났다.
“아니, 우리 아가 계약자!”
“엔라임! 저것들을 다 혼내버려요!”
“우리 아가 계약자가 더 아가가 되었군요!”
“그러니까! 저것들을 다 혼내줘요!”
“세상에. 여기 좀 보시겠습니까? 우루루루루 까꿍!”
“…….”
망할. 세상에 믿을 이 하나 없다더니! 심지어 아빠는 다시 아가가 된 자신을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었는지 하늘 위로 번쩍 들어 올려 응접실로 나갔다. 다시 아가가 된 어린 주인을 보겠다고 기사들부터 사용인들까지 와글와글 몰려들자 정신이 하나도 없어 혼란하던 찰나. 앞에서 알짱대던 헤롤드가 알약 병을 흔들며 아가레스에게 물었다.
“아. 갑자기 궁금한데. 이거 악마한테도 듣나?”
“안 듣는다.”
“왜?”
“이깟 마도구가 내게 영향을 미칠 리 없다.”
“아무리 그래도 마도구인데? 악마한테는 아무 영향이 없다고?”
“악마 중에서도 나 정도 되니 영향이 없다는 소리다.”
“그럼 먹어 봐.”
마치 도발하듯 내미는 알렉의 손에 올려진 작은 알약. 픽 웃은 아가레스가 망설임 없이 입에 털어 넣었고.
“……젠장.”
득의양양하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으하하하하핫-!”
“안 통한다더니! 대악마도 별것 없군! 하하핫-!”
아르티나 기사단이 왁자지껄하게 웃는 소리 사이로 휴고의 비웃는 소리도 들려왔다.
“또끼가 아가 또끼로 변했다!”
이벨리아마저 키득키득 웃자 아가레스가 작아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보지 마.”
그러고 보니 이거 용이 만든 거랬나. 오랜 시간 흘러 새겨진 마력이 상당 부분 날아갔음에도 그 잔재로 잠시나마 자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니. 느껴지는 마력이 지극히 희미한 것으로 보아 채 5분도 가지 못하고 풀릴 것이 자명했으나, 기분이 더럽긴 하다. 아가레스가 자신의 눈높이로 날아올라 신나게 웃는 엔리르의 날개를 휙 잡아채며 짓씹듯 읊조렸다.
“망할 용 새끼들.”
*** 다음날. 아주 이른 시간. 아드니엘은 이벨리아와 이샤트의 방문을 쿵쿵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신경질적인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깬 이샤트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방문을 열었다.
“뭐야, 너.”
“어제 나만 두고 그렇게 다 가버리기 있어?”
“그러게 누가 애기로 변하래.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고.”
“나빠!”
“아침부터 이렇게 횡포 부리는 네가 더 나빠.”
아드니엘이 가져온 베개로 이샤트의 얼굴을 퍽 내리치자, 이샤트 역시 침대에서 베개를 가져와 아드니엘의 얼굴을 퍽퍽 내리쳤다.
“으아아!”
“으아아아!”
“으웅…… 둘 다 뭐 해.”
“공녀! 이리 와! 얼른 와서 내 편에 가세해라!”
“아냐! 공녀는 내 편이야! 도와줘, 누나가 날 베개로 죽이려 해!”
“……하르벤타의 황족 나리들. 나가서 싸워. 베개 터져서 깃털 날리잖아.”
이벨리아는 실프를 불러 두 황족의 등을 밖으로 떠민 다음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 다시 폭신한 흰 이불에 얼굴을 묻자 금세 잠이 밀려들었다.
“아침부터 저게 무슨 행패람.”
사르르 다시 꿈에 빠져들려던 찰나. 퍽. 뭔가 방문에 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샤트이거나, 아드니엘이거나, 둘 중 누군가 던진 물건일 터다.
“……하여간 저 남매는 적당히를 몰라.”
***
“아드니엘. 미안해. 응?”
“흥.”
“오늘도 같이 놀면 되지! 오늘은 아드니엘이 하고 싶은 거 하자!”
“진짜?”
“그럼! 진짜!”
“……그럼 티파티. 공작저에서. 황태자랑 용도 같이.”
“그래! 그러자!”
결국, 잔뜩 토라진 아드니엘을 달래주기 위해 오늘은 함께 차를 즐기기로 했다. 그것도 공작저에서.
“있지. 티파티 여는 김에 내 친구도 초대해도 될까?”
“누구?”
“렐리안! 카시스 후작가의 영애인데, 아주 멋진 친구야!”
“아. 그 마법사 가문의 영애로군. 좋다!”
그렇지 않아도 렐리안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던 이샤트와 아드니엘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 결과. 아르티나 공작저 온실에는 엔리르의 것까지 총 여섯 개의 찻잔이 준비되었다. 바깥 날씨는 제법 더웠지만,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온실은 적당한 따뜻함이 느껴져 시원한 차를 마시기엔 제격이었다.
“이야. 영애는 마법에 능하다고?”
“공녀님은 제가 지켜드려야 하니까요. 열심히 연습 중이랍니다.”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돼? 마법은 봐도 봐도 늘 신기해서!”
그 말에 렐리안이 생긋 웃더니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루드비히를 빤히 바라보면서. 얼음송곳과 불덩어리들이 온실 속 식물들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이샤트가 살짝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그, 근데 영애. 왜 황태자를 그리 빤히 바라보면서 마법을 써?”
“제가요? 어머, 언제요?”
렐리안이 시치미를 뚝 뗐지만 루드비히는 잘 알고 있었다.
‘이브의 첫 친구가 누구인지를 두고 싸운 이후로 보기만 하면 저러는군.’
저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마법 난사. 자기가 이브한테 더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도발이다.
‘나도 질 수 없지.’
루드비히가 그깟 마법 같잖다는 듯 웃었다.
“그거 알고 있나. 내 검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
고고하게 찻잔을 내려둔 황태자가 천천히 일어나더니 난데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더니 렐리안이 날리고 있는 마법 사이에 걸어 들어가 하나하나 쳐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 격렬한 칼 놀림에 렐리안의 마법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파훼 되었다.
“……어때.”
불덩어리 때문에 고운 얼굴에 검댕이 묻은 채로 루드비히가 살짝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제 힘은 반도 쓰지 않았는걸요.”
그러자 렐리안의 손에 조금 더 큰 불덩어리와 얼음송곳들이 생성되기 시작하고.
“나도 마찬가지다. 반의반 정도밖에 안 썼지.”
루드비히의 검도 단단히 고쳐 쥐어졌다. 이를 보던 이샤트가 손뼉을 짝짝 치며 외쳤다.
“에르카디아의 전사들은 모두 열정적이로군! 싸워라! 싸워! 검술과 마법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는 풀리지 않는 난제이니!”
이샤트의 말에 콧김을 뿜은 엔리르가 렐리안에게 파닥파닥 날아가 팔을 톡톡 쳤다.
“아가 용님?”
“누가 마법을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써? 이렇게 하란 말이야. 이렇게.”
엔리르의 앞발에서 붉은 구체가 만들어졌다. 렐리안이 만든 것보다 십수 배는 커다랗게.
“이렇게가 어떻게인가요?”
“그냥 이렇게! 딱 보면 몰라?”
“……아가 용님. 원래 천재는 범인을 가르칠 수 없다 했어요.”
“이렇게! 이렇게! 이걸 왜 못해!”
답답하다는 듯 계속 이렇게를 외치는 엔리르를 휙 잡아채며 이벨리아가 둘을 말렸다.
“둘 다 그만해. 자꾸 그렇게 마법 쓰고 검 쓰고 하면 우리 오라버니들 나와서 다 두드려 팬다? 마침 지금 둘 다 집에 있어.”
“내가 공자들의 눈을 신경 쓸 것 같으냐!”
루드비히가 호기롭게 헛웃음 치며 자세를 잡았으나, 렐리안의 손에서는 곧바로 얼음송곳들이 사라져버렸다.
“고, 공자님들께서 계시는군요.”
살짝 말을 더듬은 렐리안이 자리에 다소곳하게 앉더니, 마나의 운용으로 인해 흐트러진 머리칼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귀는 왜인지 모르게 은은히 붉어진 채였다.
“영애가 이러면 내가 뭐가 되나?”
“……흠, 흠. 공작저에서 이러는 것도 실례이니까요.”
렐리안과 루드비히의 대결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저만치 도망가 있던 아드니엘이 슬금슬금 다가와 물었다.
“영애는 마탑 소속 마법사가 꿈인가?”
“아뇨. 마탑에 들어가진 않을 거예요.”
“마법사들은 제각기 소속이 있다고 들었는데.”
“저는 공녀님의 마법사가 꿈이에요.”
“공녀의? 왜?”
“은인이니까 진 빚을 갚고 싶고, 친구니까 곁에서 지켜주고 싶고, 언젠가 전우로서 나란히 서고 싶으니까요.”
“……참으로 멋있군.”
명확한 꿈과 목표가 없는 아드니엘은 늘 목적지를 정하고 걷는 이들을 동경했다. 용기 없고 소심하기에, 반대로 용감하고 적극적인 이들을 부러워했다.
“멋있긴요. 고작해야 공녀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다인 걸요.”
아드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를 위해 강해지는 저 모습은 누가 뭐래도 멋있었다. 이 보랏빛 머리칼 영애의 뒤에 환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눈이 시렸다. 시린 눈을 깜박 감았으나, 이번에는 눈앞의 아이가 내뿜는 제비꽃 향이 지독히 향기롭게도 밀려들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두근대는 것 같았다. 아드니엘이 왼쪽 심장 부근을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눈은 여전히 렐리안을 향한 채로.
“이게…… 사랑일까?”
그 말에 빠르게 시선을 돌린 이벨리아가 경악하여 입을 벌리고.
“개똥같은 소리 하네!”
이샤트가 너 또 정신줄 놓았냐며 엉덩이를 걷어차려던 찰나. 자신을 묘한 눈으로 보며 사랑 운운하는 황자를 본 렐리안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죄송하지만 황자 전하께선 제 취향이 아니셔요!”
“영애의 취향이 뭔데?”
“저는 다정하고, 듬직하고, 검술에 능하고, 똑똑하고, 현명하고, 부지런하고, 반짝반짝한 그런 분이 좋아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긴 해?”
“그럼요!”
“어디?”
“아르칸 오라버니요! 헉!”
자신이 뱉은 말에 자신이 놀란 듯 입을 재빨리 틀어막은 렐리안이 새빨개진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이브, 이건 그냥.”
- 파삭. 그때 온실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뭔가 밟히는 소리. 아이들이 일제히 뒤돌아보았다.
“헉!”
렐리안이 크게 숨을 들이켜며 두 손으로 얼굴을 폭 가렸다. 온실 입구에는 아르칸이 늘 그렇듯 단정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 방해하려던 건 아니고. 마나가 느껴져서 혹시 뭐 위험한 일이 있을까 봐 잠깐 와본 건데…….”
남들이 보기엔 평소와 전혀 달라 보이지 않겠지만, 동생인 이벨리아는 알 수 있었다.
‘우리 오라버니 엄청 당황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한쪽 발은 뒤로 빠져 있고, 귀는 살짝 붉어져 있고. 무엇보다 평소라면 그깟 나뭇가지를 못 보고 밟을 리 없음에도 밟고 서 있지 않은가.
‘이 분위기 어떡하지. 이 숨 막히는 정적.’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이벨리아가 더듬더듬 외쳤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나…… 나는 이 결혼 찬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