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말랑말랑 이브2022.01.17.
통성명은 없었다. 서로 알기에 이벨리아의 이름은 너무 귀했고, 소년의 이름은 아직 그 값이 없었으니까. 여하간 파라반트의 소년 때문에 복귀하는 시간은 예상보다 늦어졌고. 마도구의 효능은 기어이 길거리에서 풀려버렸다.
“어어! 몸이 쭈글쭈글 이상해!”
이벨리아가 당황하는 사이. 낌새를 미리 눈치챈 아가레스가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골목으로 세 아이를 들고 뛰었다. 이벨리아는 팔에 안정적으로 앉혀두고, 남은 두 꼬맹이는 마치 짐짝처럼 옆구리에 대충 낀 채였다. 홀로 편안하게 들린 이벨리아가 해사하게 웃으며 발을 동당거렸다.
“토끼 엄청 빠르다. 토끼라서 그런가.”
“어억. 숨 막힌다!”
“큭. 제대로 좀 들어……!”
골목 안에 두 꼬맹이를 휙 패대기치고 이벨리아를 조심스레 내려둔 아가레스가 손을 탁탁 털며 눈을 살짝 찌푸렸다.
“우리 꼬맹이 빼고는 길거리에 버리려다 자비를 베풀었다. 감읍하게 여기도록.”
이벨리아가 혼미한 정신으로 널브러져 있는 루드비히와 이샤트에게 다가가 등을 톡톡 두드려주자, 입고 있던 커다란 어른 옷이 줄줄 흘러내렸다.
“옷이 너무 커. 내 몸이 작아져 버려서.”
“자. 이거.”
아가레스가 혹시 몰라 아공간에 넣어둔 아이들의 옷을 꺼내어 이벨리아에게는 살포시 건네주고 루드비히와 이샤트에게는 발치 앞에 휙 던져버렸다. 어린 친구 외에 이 버릇없는 황족 꼬맹이들까지 돌보게 된 것이 아주 마음에 안 들었지만.
“역시 내 토끼!”
꼬맹이의 칭찬 한마디에 기분이 풀어지는 것을 보면 자신도 참 어지간히 중증이다 싶었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를 애써 부여잡고 옷을 움켜쥔 이샤트가 물었다.
“그런데 아무리 골목길이라 한들 길거리에서 어떻게 옷을 갈아입지? 에르카디아에서는 이게 일반적인가?”
“아니! 내가 운디네랑 카사를 불러서 벽을 만들어 줄게. 안에 들어가서 갈아입어.”
“옷 갈아입는 데 정령의 힘을 쓸 줄이야…… 아주 호화롭네.”
대정령사 친구 둔 덕에 남들 하지 못하는 경험을 하게 된 이샤트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낮게 한숨 쉬었다. 달게 꾸던 꿈에서 순식간에 깨버린 느낌이었다.
“공녀랑 언제 또 이렇게 놀아보나.”
“나중에 어른이 되면 또 같이 나오면 되지! 생각보다 하르벤타와 에르카디아는 멀지 않아. 게이트 타면 금방이야!”
“공녀. 하르벤타에 계속 놀러 올 거야? 내가 황제가 되어도?”
“당연하지.”
“만약 공녀가 이 제국 황후가 된다면 오기 어려울 텐데?”
당연한 일이다. 황제나 황후가 황궁을 비우는 것은 국가 중대사. 심지어 황후가 친정을 방문하는 것조차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일이다. 타 제국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여하간 황후라는 말에 루드비히의 귓가가 화르륵 붉어지자, 아가레스가 언짢다는 듯 루드비히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벨리아를 바라보지 않는 척하면서도 기실 모든 신경이 대답에 향해 있는 것이 빤히 보였다. 아가레스와 루드비히의 미묘한 긴장감을 눈치챈 이샤트가 씩 웃었다. 아마 저 둘은 지금 본인들이 어떤 표정인지 일절 모르고 있을 터다.
“음.”
이벨리아의 입이 열리자 무려 두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악마, 그리고 한 마리 용에게서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나는 황궁에서 살기 싫은데.”
“왜!”
자신도 모르게 냅다 소리친 루드비히가 어물어물 변명했다.
“아니, 나도 네가 황궁에서 사는 건 싫어. 그냥 왜 싫은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나 황후 폐하 연대기를 봤었어. 외출도 편하게 못 하고, 가족들도 마음대로 못 보고, 일도 정말 많아서 잠도 못 주무셨다던걸.”
“…….”
그 말엔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황제. 황후. 황족. 겉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영광되어 보이지만, 그 이면이 얼마나 어두운지 모르는 이는 없다. 특히 여기 있는 이들은 더더욱.
“그리고 역사서에서 봤는데, 제 명에 죽은 황후는 거의 없대.”
그것도 옳은 말이다. 황후란 자리는 곧 정쟁(廷爭)의 한복판에 서는 것. 유구한 역사를 뒤져보더라도 일평생 순탄한 길만 걷다 세상을 떠난 황후는 찾기 어렵다. 이권 다툼이 끊이지 않는 황궁 전체가 수라장인데, 황후 홀로 평안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본인은 원치 않았다 하더라도 역모의 명분으로, 숙청의 대상으로, 따르는 이의 간절함으로, 대적하는 이의 원한으로. 한평생 그리 살다 가는 것이 대부분. 이벨리아 역시 모르지 않는다. 누구보다 권력에 가까운 가문에서 태어났으니까.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평생.”
“…….”
황궁이 곧 감옥이자 지옥인 루드비히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감히 내 손을 잡아달라. 지지대가 되어 달라. 그런 말로 소중한 빛을 이 수라장에 끌어들일 수야 없었다. ***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후드를 폭 덮어쓴 이샤트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황궁까진 거리가 좀 있는데. 어떻게 가지.”
다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다른 이들의 이목이 조심스러웠다. 어른 모습일 때는 내가 아니라며 발뺌이라도 할 수 있지, 이 모습이면 후드가 내려가는 순간 정체가 발각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몰래 나온 걸 제국민들한테 들켜서 그게 엄마 귀에 들어가는 날엔…… 너희들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거야. 왜냐면 나 하늘나라에 가 있을 거거든.”
“나도다. 공작부인은 내 목도 칠걸.”
“어머니로부터 에르카디아의 공작부인은 야차나 다름없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 내 목도 함께 칠 게 분명하다.”
우리 엄마라면 그럴 수 있지. 상대가 황태자든 황태녀든 가릴 분이 아니시다. 자칫하면 죄다 뒤엎고 새 제국을 세울지도 모른다. 심지어 곁에서 아빠가 잘한다, 잘한다, 외치실 테니까.
“그럼 이건 어때? 우리 집에서 저녁 먹고 황궁으로 돌아갈래? 우리 집은 여기서 가까우니까 후드 쓰고 후다닥 뛰어가면 돼!”
확실히 황궁보다는 공작저가 훨씬 가깝긴 하다. 이렇게 수상한 꼴로는 거리를 지나다니는 마차를 부를 수도 없을 테니, 걸어서 갈 수 있는 공작저가 낫다.
“갑자기 우리가 들이닥치면 공작부인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다 같이 황궁에서 놀다가 엄마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끝이야!”
“그걸 공작부인이 믿는다고?”
“내가 엄마가 너무 그리워서 왔다고 말하는 순간 믿으실 거야.”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는 그런 원리인가. 그게 낫겠군.”
“그러지. 안 그래도 공녀가 그리도 자랑하던 요리장의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다!”
“좋아! 가자!”
일행들은 신나게 공작저로 향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줄 꿈에도 모르고. ***
“아이고! 우리 아기씨! 무려 외박을 하고 돌아오시다니요!”
고작 하루, 고작 황궁이었지만 어쨌든 공작저를 떠나 있었던 아기씨가 저녁 먹겠다고 들어오자 사용인들의 얼굴에 웃음이 만개한 것은 당연했다.
“우리 아가가 왔다고?”
“우리 딸!”
반응은 휴고나 엘리시아도 다르지 않았다. 누가 보면 타 대륙으로 사절단 다녀온 줄 알 정도의 반응이었다. 이벨리아는 엘리시아가 의심하기 전에 변명거리를 냅다 던져버렸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왔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왔어!”
“세상에, 기특한 내 딸!”
엘리시아가 한 치의 의심 없이 이벨리아를 번쩍 안아 들자, 이벨리아가 일행들에게 브이를 그려 보였다.
“아빠! 오라버니이! 그리고 세토!”
아르칸이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다다다 달려오는 여동생을 위로 들어 껴안고는 저 멀리 국자를 들고 서 있는 세토를 흘끗 노려보았다.
“세토가 우리와 함께 불리다니. 당장 해고해야…….”
“나 세토 밥 먹고 싶어!”
“그렇다면 지금은 그냥 두고.”
“앞으로도 세토 밥 먹고 싶어!”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냥 두마.”
“아이고, 우리 아기씨! 그렇지 않아도 아기씨 좋아하시는 것들로만 저녁 식사 준비하고 있었지요!”
감격한 세토의 국자가 바들바들 떨리는 바람에 진한 스튜 국물이 뚝뚝 떨어졌다. 곰 같은 덩치의 세토는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기씨뿐만이 아니라 무려 두 제국의 국본들께서 방문하셨으니, 평소보다 더욱 상다리 휘어지게 준비해야 했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아가레스가 휴고를 슬쩍 일별하며 후드를 벗었다.
“공작. 아까도 봤지, 우린.”
“쉬잇.”
휴고가 그 입 다물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아주 다급하게. 그러나 엘리시아가 이를 듣지 못할 리 없었다. 그녀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음? 아까도 만났어요, 당신과 루페르트 백작이?”
“아니.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군.”
발하일 경매장에 가서 무려 낙찰까지 받아온 것을 알면. 그것도 심지어 3,500만 리브르를 주고 낙찰을 받은 것을 알면…….
‘닥쳐라. 악마.’
휴고는 미세하고도 단호하게 고개 저으며 아가레스에게 눈짓했다.
‘피차 잡혀 사는 사이에 이래봤자 좋을 것 없을 텐데.’
그 간절한 눈빛을 모두 이해한 아가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음 지었다.
‘아. 알지, 공작. 알지.’
‘안다니 다행이로군.’
보기 드물게 인자한 대악마의 표정에 휴고가 안심한 듯 앞장서서 저택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턱을 쓸던 아가레스가 픽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 발하일 보석 경매장에서 만났지.”
“……여보!”
“악마! 이러기인가!”
“낙찰도 받던데. 3,500만 리브르였던가.”
“3,500만? 매해 정말!”
짝. 어김없이 휴고의 등짝에는 엘리시아의 매서운 손이 날아들었다.
“너 나중에 두고 보자.”
매섭게 노려보는 휴고를 태연하게 지나치며 아가레스가 속삭였다.
“흥. 복수다.”
나도 아까 그대와 경쟁하다가 우리 꼬맹이에게 혼났다고. *** 과연 세토가 차린 저녁상은 화려했다. 이대로 수도의 귀족들을 불러 모아 연회를 열어도 부족함 없을 만큼. 서대륙 음식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이샤트는 과히 흥분 상태에 빠져 폴딱폴딱 뛰었다.
“공녀! 공녀! 이건 뭔가!”
“이건 아주 맛있는 거야.”
“공녀! 그럼 이건?”
“이건 죽이게 맛있는 거지.”
“공녀. 공녀도 사실 모르지. 이게 뭔지.”
“……맛있는 거야.”
그렇게 아르티나 가문의 일원들과 손님 셋이 너른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통 이벨리아와 이샤트가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를 다른 이들이 듣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지만. 조금 전까지는 하르벤타에 마족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며 투덜대던 이샤트가 잘 익은 송아지 고기를 한 점 물며 이벨리아에게 말했다.
“아. 공녀. 남은 마도구는 공녀…… 헙.”
아차. 이거 여기서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드마스터의 청력은 어디 가는 게 아니다. 휴고가 곧바로 시선 돌려 물었다.
“무슨 마도구.”
끝이 딱 떨어지는 말투가 제법 위협적이다. 자기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위해가 갈까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이샤트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아니. 그냥 별거 아닌 마도구다. 아주 쓰레기나 다름없는 물건이라 우리 폐하께서도 방치하고 계신 것을 내가 그저 주워온 것이다.”
“무슨 효능입니까. 우리 아가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면 곁에 둘 수 없습니다.”
“그게…….”
“전하께서 보물고를 털어오셨다고 알리기 전에 솔직히 말씀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 말에 이샤트가 대번에 사실을 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이 어머니에게 알려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나이를 변경하는 마도구! 몸에 해가 되는 것은 일절 없는 마도구지. 그저 이브와 한 알씩 나눠 먹고 밖을 나갔다 온 것뿐이야. 물론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악마랑 황태자랑 용님도 함께.”
이샤트는 나름대로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주절주절 말한 것이었으나, 이를 듣는 엘리시아의 표정은 더욱 심각하게 굳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 여기 있는 모두가 함께 밖을 나갔다 왔다는 말씀이십니까? 호위 하나 대동하지 않고?”
아가레스가 송아지 고기를 잘라 이벨리아의 그릇 위에 올려주며 답했다.
“호위 따위가 왜 필요해. 내가 있고, 꼬맹이가 있는데.”
“나도 있고.”
슬쩍 거든 어린 용은 엘리시아의 무시무시한 눈초리에 마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비실비실 내려와 식탁보 속으로 쏙 숨어들었다.
“나는 없고.”
“만에 하나 누구라도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시지요! 특히 황태녀 전하께서 털끝 하나라도 다치셨더라면 곧바로 외교 문제로 비화될 것을!”
엘리시아가 이 와중에도 마치 자기 일 아닌 듯 고기를 냠냠 씹어먹고 있는 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브 너도 마찬가지야. 황태녀 전하를 말리진 못할망정 황태자 전하와 루페르트 백작까지 우르르 끌고 돌아다녀?”
“……우웅.”
“고기 그만 먹고!”
“냐암.”
이러다가 엄마한테 또 한 시간은 잔소리를 듣게 생겼다. 물론 위험한 짓을 한 것은 맞지만 실력에 자신이 있었기에 벌인 일탈이었으니, 마냥 혼만 나기에는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이벨리아가 함께 일탈을 저지른 이들에게 눈짓했다. 누구라도 빨리 화제를 돌려 이 위기에서 나를 좀 구해달라, 그런 의미로. 찰떡같이 이를 알아들은 이샤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부인. 마도구를 사용해서 이브가 어떤 나이로 변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지금 그게 중요……!”
“어엿한 성인으로 변했지. 무려 어른 영애로!”
그러자 휴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세게 넘어갔다.
“그걸 왜 지금 말합니까!”
의미를 파악하느라 잠시 멈춰 있던 아르칸과 세드릭도 다를 건 없었다.
“어른으로 변했다고?”
“조금만 일찍 오지!”
“어른이라니. 이브가 어른이 되었었다니! 어땠습니까, 전하. 제국 사내놈들을 미리 다 죽여 없애야 하겠지요, 분명?”
그리고 불과 조금 전까지 마치 불 뿜는 용처럼 성을 내던 엘리시아의 태세 전환이 가장 급격했다.
“어른……? 우리 딸의 어른 모습……?”
“얼마나 아름답던지! 나만 보기 아까웠지 뭔가!”
“그 정도였습니까?”
“그럼! 공작부인을 아주 빼다 박았던데!”
그 엄청난 광경을 놓쳤다는 속상함에, 엘리시아가 손을 바들바들 떨며 놓인 알약 하나를 이벨리아에게 들이밀었다.
“아가. 한 알만 더 먹어보련?”
“에엥? 또?”
“엔리르. 이걸 연달아 먹으면 탈이 있겠느냐?”
파닥파닥 테이블 위로 올라온 어린 용이 알약을 말랑한 앞발에 얹고 요리조리 살폈다.
“없어. 여기에 큰 마력이 들어가 있지도 않아. 제작된 지가 너무 오래됐어.”
“틀림없겠지.”
“난 용이야.”
아무리 몸집 작고 어리다고 해도 마법과 마나에 있어서 이 작은 용을 따라올 수 있는 자는 없다 봐도 무방했다. 하루에 두 알을 먹어도 아무 탈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엘리시아는 간절한 눈으로 딸을 바라봤다.
“딸. 하나만 더 먹어보자. 이 엄마도 우리 딸 어른 모습이 너무 보고 싶어. 오늘 호위 하나 없이 외출했다 돌아온 것은 용서할게. 응?”
“그래. 우리 아가. 이 아빠도 사실 궁금하긴 하구나.”
“이브가 변하는 모습을 보고 사내놈들 모가지를 미리 다 쳐놓을지 말지를 결정해야지.”
가족들은 먹던 음식도 내팽개치고 이벨리아의 의자로 복작복작 몰려와 한 번만 더 마도구를 사용해보라며 살살 꼬드기기 시작했다.
“공작부인. 그거 그 유리병에 든 게 전부라 꽤 값어치 있는 것이다.”
“용이 만든 거라면서요. 우리 아가 용이 나중에 크면 한 병 더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능력을 인정받은 엔리르가 식탁보를 헤치고 나와 가슴 털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좋아! 사실 나중에 아꼈다가 쓰려고 했는데. 엄마랑 아빠랑 오라버니들한테도 보여줄게!”
성화에 못 이겨 유리병 속에서 알약 모양의 마도구 하나를 더 꺼내든 이벨리아가 냉큼 삼켰다. 가족들 모두가 두 손을 모으고 긴장된다는 표정으로 이벨리아를 응시했다. 꾸물꾸물하는 느낌 뒤에, 신체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자 이벨리아가 당당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 떴다. 자, 이제 다들 엄마랑 똑 닮아서 예쁘다고 얘기해라!
“세상에!”
“맙소사!”
그렇지! 그런 반응 아주 옳아!
“우리 아가 이 모습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아가는 모를 거다!”
응? 그리워?
“우리 말랑말랑 아가!”
“영상석! 영상석!”
엘리시아와 휴고, 아르칸은 탄성을 지르고, 세드릭은 영상석을 가져오라며 소리쳤다.
“처음 만났을 때의 땅 도둑이 딱 저만했지.”
“처음 만났을 때의 꼬맹이가 딱 저만했는데.”
루드비히와 아가레스는 씩 웃으며 추억을 되새겼다. 그리고 반응에 당황하던 이벨리아는 더 이상 음식이 보이지 않도록 확 낮아져 버린 시야에 허둥댔다. 손을 마구 휘두르는 바람에 손에 잡혀 있던 포크와 나이프가 속절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모…… 모야!”
아니. 내 말투가 왜 이래. 내 목소리는 또 왜 이래.
“이게 모야!”
더듬더듬 볼을 만져보니…… 이 익숙한 말랑말랑함.
“열심히 자랐떠니 다시 아가가 되어버려따!”
이런 통탄할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