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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파라반트의 거지 소년 (135/323)

135화: 파라반트의 거지 소년202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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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라반트 밖으로 나오니 어스름하게 해질녘이 되어가고 있었다. 꽤 많은 탈이 있었지만 어쨌든 보석 경매장도 성공적으로 다녀오고, 파라반트에서도 들키지 않고 잘 해냈다. 이벨리아는 개운하게 두 팔을 올려 기지개를 켰다.

16549754757833.jpg“흐음- 아주 완벽한 하루였다! 이렇게 평생 어른이면 얼마나 좋을까!”

16549754757836.jpg“막상 어른이 되면 아이로 돌아가고 싶을지도.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니까.”

이샤트의 말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부모님을 보면 그렇긴 하다.

16549754757841.jpg“근데 병아리. 너 왼손잡이였어?”

16549754757833.jpg“아니. 난 오른손이 편해.”

16549754757841.jpg“아까 보니까 왼손으로 글 쓰던데.”

16549754757833.jpg“어느 손으로 글을 쓰는지도 정보가 될 수 있으니까. 우리 엔리르를 보호하려면 내 신원은 단 한 톨도 밝혀지면 안 되잖아.”

16549754757841.jpg“……뛰는 정보상 위에 나는 병아리가 있었군.”

16549754757865.jpg“우리 꼬맹이 꼭 중요한 데서 똑똑하긴.”

두 친구의 칭찬에 뿌듯해진 이벨리아는 가슴을 펴며 자랑을 이어갔다.

16549754757833.jpg“하나 더 자랑할 테니까 열심히 칭찬해! 사실 300만 리브르 준다는 말에 깜짝 놀란 것도 다 연기였지!”

16549754757865.jpg“오구, 그랬어? 대단한걸?”

16549754757841.jpg“이야, 역시 우리 병아리 아주 현명해.”

두 친구는 이벨리아의 지령을 착실히 이행했고.

16549754757833.jpg“이미 내가 귀족이라는 건 눈치챘을 텐데, 그 큰돈에 놀라지 않으면 돈 많은 집안이라고 또 좁혀질 수 있을 테니까!”

16549754757841.jpg“땅 도둑만 있으면 걱정 없겠어.”

16549754757865.jpg“대단해. 이 제국에서 가장 똑똑하군.”

이벨리아의 콧대는 하늘 모르고 솟았다. 이샤트가 와락 이벨리아의 팔짱을 꼈다.

16549754757836.jpg“공녀. 우리 제국에 와서 내 참모가 될래? 아니면 재상? 공작부인이 그리 현명한 전략가라더니. 피가 어디 가질 않는구나!”

16549754757833.jpg“엣헴. 이 정도는 기본이지!”

저 안에서는 제법 어른 귀족 흉내를 잘 내더니. 밖에 나오자마자 말투가 다시 평소와 같아졌다. 그렇게 이벨리아가 혼자만 알았던 교란작전을 열심히 펼친 결과. 정보 제공자의 신원은 이렇게 기록되었다. [왼손잡이. 성인. 쉽게 성질을 냄. 차가운 말투. 호위를 셋이나 대동하는 것으로 보아 겁이 많은 성격. 그러나 300만 리브르에 과히 놀라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귀족 가문으로 추측.」 이벨리아와 단 하나도 맞지 않는 엉터리 기록이었다. *** 마도구의 효능이 얼마나 지속되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것 없지만, 이샤트는 기록에 따라 대략 6시간 정도 지속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 말이 맞다면 효력이 풀릴 때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더 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거리에서 몸집이 작아지는 놀라운 광경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16549754757833.jpg“이제 돌아…… 엥?”

16549754757841.jpg“병아리. 왜.”

16549754757833.jpg“정보 길드가 사람을 때리기도 해?”

이벨리아가 정보 길드 옆으로 난 샛길 안쪽을 가리켰다. 건장한 성인 장정 여럿이 어린 소년 하나를 발로 짓밟고 있었다.

16549754757841.jpg“뭐. 양지에 나와 있긴 하지만 그 본질은 음습한 이들이라. 크게 놀랍지도 않군.”

16549754757833.jpg“어떻게 저럴 수 있어? 싸우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때리고 있잖아. 그것도 어른들이 아이 하나를.”

16549754757836.jpg“공녀. 소년이 잘못한 게 있을 수도 있다.”

16549754757833.jpg“아니, 이샤트. 어린아이가 아무리 큰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어른 여럿이 저렇게 때리는 건 나빠. 아직 시간 조금 남았지. 잠시만.”

이벨리아는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 골목길로 향했다.

16549754757865.jpg“난 우리 꼬맹이 저런 면이 참 좋아.”

16549754757841.jpg“나도. 나는 가질 수 없는 올곧음이라.”

일행들도 말리는 이 없이 친우의 뒤를 따랐다. 골목길로 가까이 다가가니 멀리서 봤을 때보다 훨씬 처참했다. 같은 성인끼리 싸워도 나지 않을 법한 구타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번화가라 오가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모두가 못 본 체하며 그저 자리 피하기 바빴다.

16549754757833.jpg“운…….”

아니지. 정령을 불러냈다가는 만에 하나라도 신분이 탄로 날 수 있다. 이벨리아는 목소리와 자세를 다시 가다듬었다. 어른처럼. 어른처럼. 걸음걸이도 최대한 엄마의 것을 흉내 내며 샛길로 들어선 뒤, 덩치 커다란 사내들 바로 앞까지 다가가 툭 내뱉었다.

16549754757833.jpg“불쾌하군.”

16549754818265.jpg“이건 뭐야.”

바닥에 쓰러진 어린 소년으로부터 시선 돌려 이벨리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은 장정들이 누런 이로 음흉하게 웃었다.

16549754818265.jpg“이건 우리 길드 내의 일이니 가던 길 가시지. 괜히 피 보지 마시고.”

때리는 장정들도, 맞는 소년도 모두 파라반트의 길드원인가보다. 방금 만나고 온 정보상과는 비할 수 없는 낮은 지위겠지. 이벨리아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에 빠졌다.

16549754757833.jpg‘어떡할까. 어떻게 얘기해야 저 아이가 덜 맞을까.’

여기서 ‘어떻게 어린아이를 때릴 수가 있어! 난 귀족이다!’ 이딴 소리나 해댔다가는 자신이 떠나고 나서 저 소년의 처우는 보복성으로 더욱 안 좋아질 터다. 잠시 침묵하면서 여러 경우를 가정한 이벨리아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엘리시아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 했다.

16549754757833.jpg“A급 정보 거래상은 나쁘지 않았는데.”

16549754818265.jpg“A급……?”

손속 봐주지 않고 소년의 배를 걷어차던 장정들이 흘끗 이벨리아를 돌아보았다.

16549754757833.jpg“기분 좋게 거래를 마치고 내려와서 이런 더러운 꼴을 볼 줄이야.”

사내들이 서로 흘끗 눈을 마주치다가 슬쩍 물었다.

16549754818265.jpg“고객이셨습니까. A급 정보를 거래하신?”

16549754757833.jpg“그게 뭐가 중요하지. 내가 이 길드와 다시 거래할 일은 없을 텐데 말이야. 더 알게 되는 정보가 있다면 다시 방문해달라고 하던데, 다른 정보상이나 찾아봐야겠어.”

저 소년에게 보복성 구타가 이뤄지지 않으려면 윤리적인 말을 내뱉을 게 아니라 돈 많고 말 안 통하며 철모르는 괴팍한 고객을 연기하는 게 낫다. 때리지 말라. 그만하라.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불쾌한 것을 보았다는 듯 돌아서 버리자 오히려 장정들의 마음이 급해졌다. A급 정보를 거래하였다면 파라반트의 우량 고객이 될 가능성이 충분한 이다. 그런 이가 자신들 때문에 거래를 끊는다면…….

1654975484672.jpg‘마스터의 손에 목이 날아갈 거다.’

앞장서서 아이를 구타하던 장정이 이벨리아의 앞을 막고 두 손을 비비며 씩 웃었다.

16549754818265.jpg“귀인께서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이 아이는 우리 길드의 지침을 어겨 교육을…….”

16549754757833.jpg“내가 네 길드의 지침까지 알아야 하나.”

16549754818265.jpg“……아, 아닙니다.”

16549754757833.jpg“저 아이가 왜 저 꼴이 되었는진 궁금하지 않아. 내 눈을 더럽히는 게 싫었을 뿐.”

그러자 개중 가장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깊이 고개 숙여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16549754818265.jpg“송구합니다. 변명의 여지 없이 저희의 실책입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길.”

잘 알고 있으면 그만 사라지라는 듯 이벨리아가 까닥 턱짓했다. 후드를 쓰고 있다고는 하나 꽤 앳돼 보이는 몸집과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정들은 단 한마디 불평도 뱉지 못하고 돌아섰다. 끝까지 잔인하게도, 소년은 바닥에 버려진 채였다. 사내들이 모두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사라지자, 이벨리아가 가까이 다가가 소년 앞에 쪼그려 앉았다.

16549754757833.jpg“괜찮아?”

16549754818265.jpg“……퉤.”

소년은 답 대신 침을 뱉었다. 제법 많이 구타당하는 바람에 힘이 없어 이벨리아에게 닿진 않았으나, 뒤에 선 아가레스와 루드비히는 곧바로 달려들 듯 앞으로 뛰쳐나왔다. 이벨리아가 살짝 손을 들어 두 멍멍이들을 저지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16549754757833.jpg“버릇없네. 내가 구해줬는데.”

16549754818265.jpg“콜록. 너도, 똑같아. 더러운 세상 따위 알지도 못하는 귀족 주제에…….”

이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16549754757833.jpg“왜 맞았어?”

16549754818265.jpg“알 거 없어. 꺼져.”

16549754757833.jpg“그 조동아리도 맞고 싶은가 보네. 도둑질했어?”

그 말에 소년이 발끈하며 몸을 일으키려다 맞은 부위를 손으로 감싸며 다시 주저앉았다. 이벨리아는 내려다보기만 할 뿐 부축해주지 않았다.

16549754818265.jpg“날 뭐로 보고!”

16549754757833.jpg“조동아리가 사악한 싸가지.”

16549754818265.jpg“귀족 계집 맞나. 조동아리…….”

16549754757833.jpg“목 날아가기 싫으면 계집이란 말 집어치워. 왜 맞았는지나 말해.”

16549754818265.jpg“알면 뭐 어쩌게.”

16549754757833.jpg“아무것도. 그냥 궁금해서. 네 말대로 이런 세상을 본 건 처음이라.”

하. 소년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엉금엉금 기어 골목길 벽에 등을 대고 호주머니에서 연고를 꺼내 발랐다. 익숙한 듯. 연고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출처도 알 수 없는 해괴한 색의 연고. 그마저도 다 쓴 듯 바닥을 내보이고 있었다.

16549754818265.jpg“……이 길드는 길거리 고아들을 주워 키운다. 그리고 상납금을 받지.”

16549754757833.jpg“돈으로?”

16549754818265.jpg“또는 정보로. 할당량이 있다.”

16549754757833.jpg“그걸 못 채워서 맞고 있었고?”

16549754818265.jpg“채웠어, 내 건.”

16549754757833.jpg“근데 왜 맞아?”

16549754818265.jpg“내 여동생은 못 채웠거든. 걘 몸이 좋지 않아. 이렇게 맞으면 죽을 거야.”

16549754757833.jpg“그래서 네 할당량을 동생 주고 네가 맞은 거구나.”

약을 문지르던 소년의 손이 일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자신이 뭘 이리 줄줄이 말하고 앉았는지 알 수 없었다. 묻는 이가 처음이라 그랬나.

16549754818265.jpg“들으니 어때. 귀족 나리께서 본 적 없는 세상이라 재밌나?”

16549754757833.jpg“재미없어. 그리고 넌 진짜 조동아리 조심해야겠다. 지금 내 호위들이 널 쳐 죽이려고 하는 거 안 보이나 봐.”

차갑게 말한 이벨리아가 뒤를 돌아 소년에겐 보이지 않도록 곰돌이 지갑을 연 다음, 그 안에서 금화 전부를 탈탈 털어 손에 쥐었다. - 땡그랑.  

16549754757833.jpg“가져가.”

소년의 앞으로 금화 수십 개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홀린 듯 바라보던 소년이 돌연 이를 악물고 당장이라도 일어설 것처럼 땅을 짚었다.

16549754818265.jpg“안 받아! 같잖은 동정 집어치워! 이딴 동정 받자고 줄줄 늘어놓은 줄……!”

16549754757833.jpg“그 동정이 네 여동생을 살릴 수 있다면 내 발치에 엎드려서라도 빌어야지.”

16549754818265.jpg“네가 뭘 안다고……!”

16549754757833.jpg“나도 오라버니가 있고 동생이 있어.”

16549754818265.jpg“…….”

16549754757833.jpg“객기도 자존심도 부릴 때 부려. 멍청하게 굴지 말고.”

그 말에 머뭇거리던 소년이 혹여 다른 사람들이 볼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급하게 금화를 주워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그러면서도 경계하듯 노려보는 얼굴이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이리를 보는 듯했다.

16549754818265.jpg“이유가 뭐야. 대가 없는 친절은 안 믿어.”

16549754757833.jpg“더러운 세상 따위 알지도 못하는 귀족이라며. 이깟 게 세상이라면 앞으로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해둘게.”

16549754818265.jpg“난 빚지곤 안 살아.”

16549754757833.jpg“나중에 갚든가.”

16549754818265.jpg“널 어떻게 찾고.”

16549754757833.jpg“재주껏.”

돌아 걸어가는 이벨리아의 앞으로 투박한 목걸이 하나가 던져졌다. 가죽끈에 청동 펜던트. 별 값어치 없는 물건이다.

16549754818265.jpg“가져가.”

16549754757833.jpg“필요 없어.”

단호히 거절하고 걸음을 옮기자 소년이 다친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16549754818265.jpg“저 깃발. 파라반트를 상징하는 푸른색 바탕. 저게 붉은색이 되는 날 그 목걸이를 들고 와. 한 번은 네가 원하는 정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주지. 대가 없이.”

그 말에 이벨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슬쩍 뒤를 돌아봤다.

16549754757833.jpg“네가 뭔데?”

16549754818265.jpg“일평생 바닥을 길 생각 없어. 버러지같이 태어났어도 인간이라면 한번은 저 꼭대기를 노려야지.”

16549754757833.jpg“…….”

16549754818265.jpg“능력으로든. 안 되면 멱을 따서든. 고귀한 영애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이 바닥은 그런 바닥이거든.”

소년이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49754818265.jpg“너무 허무맹랑하게 여기진 마. 때로 나처럼 아무 능력 없이 몸뚱이와 꿈만 가진 이들도 허다하니까.”

16549754757833.jpg“별로. 가장 갖기 어려운 걸 가졌네.”

이벨리아가 허리 숙여 목걸이를 집어 들려고 하자, 옆에 서 있던 아가레스가 곧바로 몸을 낮춰 이를 집어 건넸다. 투박한 목걸이를 손에서 몇 번 굴린 이벨리아가 골목길을 나서며 답했다.

16549754757833.jpg“붉은 깃발이 걸리는 날. 네 첫 고객이 되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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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목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이벨리아가 눈앞으로 목걸이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16549754757833.jpg“내가 누구야! 역시 투자에는 일가견이 있다니까!”

투자가 아니라 협박과 사기에 능하고 그걸 귀여움으로 덮는 수준이지만 아가레스와 루드비히는 현명하게도 입을 다물었다.

16549754757833.jpg“금화 몇 개로 이런 걸 얻다니!”

그러니까 저 소년이 이 길드를 먹기만 하면 이 목걸이를 가지고 제대로 부려먹을 수 있다는 소리다. 금제탑에 대한 정보를 싹 털어오라고 시켜도 돈 한 푼 들지 않는다니. 이벨리아가 목걸이를 소중히 집어넣으며 씩 웃었다.

16549754757833.jpg“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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