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기꺼이 악역을 맡겠다2022.01.10.
“여부가 있겠습니까.”
청년은 이벨리아와 일행들을 상층부로 안내했다. 제법 긴 계단을 올라 층이 바뀔 때마다 안내하는 이도 바뀌었다. 젊은 청년에서, 기사 같은 중년에서, 안경을 쓰고 마나 지팡이를 들고 있는 노인까지. 이번 층의 안내자는 뿔 달린 가면을 쓰고 있는 여자였다.
“환영합니다. 이곳은 A급의 정보만 취급하는 공간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층을 오를 때마다 방문의 개수는 점점 적어져, 이곳에 이르니 정보를 뜻하는 날개 달린 모자와 샌들이 깊게 음각된 문이 단 세 개 자리하고 있었다. 공간이 많을 필요는 없었다. 이 정도의 정보를 대가 치르고 살 사람은 많지 않았고, 파는 이는 더욱 적었으니. 여자가 방문을 여는 곳으로 들어가며 이벨리아가 물었다.
“이 위는 뭐지?”
“위층은 저희 마스터의 집무실입니다. 오로지 S급의 정보만 거래되지요.”
“듣고 난 후, 내 정보가 S급이라면?”
“만일 그렇다면 곧바로 마스터와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제공하시는 정보가 A급에 미치지 못하는 정보라면 다시 아래로 안내해 드리지요.”
이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둘러보았다. 예상외로 단조로웠다. 안에서 뛰어놀아도 부족함 없을 만큼 넓은 공간에 달랑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둘. 이벨리아가 자리에 앉자 그 뒤로 루드비히와 아가레스, 이샤트가 마치 호위처럼 섰다. 맞은편으로 파라반트 소속의 여자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언뜻 보이는 손목 안쪽, 새겨진 길드 문장이 새까맣게 짙은 것을 보니 제법 고위직인 것은 분명했다.
“아. 사고 싶은 정보도 있네.”
“그렇다면 팔고자 하시는 정보와 맞교환하시지요.”
역시 돈이 흘러가는 곳에서는 깜빡 정신 팔았다가는 뒤통수 맞기 십상이다. 이벨리아가 헛웃음 지으며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아니. 맞교환은 됐어. 내 정보를 팔고, 그 돈으로 새 정보를 사도록 하지.”
분명 내가 가진 정보의 가치가 더 높을 테니까. 맞교환은 손해 보는 장사다.
“연치 어린 영애이신 듯한데. 꽤 세상살이를 아십니다.”
“떠보지 말게. 불쾌하니.”
이벨리아로서는 혹시 어린 나이임을 들킬까, 혹은 자신임이 티가 날까 심장이 두근거려 짧게 내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정보상은 역시 고위 귀족의 성질은 참으로 괴팍하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변죽을 더 울리지 않고 곧바로 투명한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자, 이곳에 팔고자 하는 정보를 적어주시지요.”
“이 종이에?”
“예. 모든 필적을 같게 바꾸어주는 종이입니다. 또 정보를 판매하는 자가 거짓을 적고 있다면 아무것도 적히지 않지요. 오로지 파라반트, A급과 S급 정보 거래를 위해 존재하는 물건입니다.”
“……꽤 쓸만하네. 마도구인가?”
“이 또한 정보이나 첫 거래이시니 서비스로 말씀드리지요. 이 길드의 창립자는 악마와 거래하였다고 전해집니다. 72 악마 중 누군가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 들었는데.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사실 여부는 모릅니다.”
악마. 악마 하나 저기 있는데. 전혀 티 내지 않은 이벨리아가 묵묵히 종이를 받아들고 매도할 정보를 적었다. 한편 정보상은 흥미로운 눈으로 눈앞의 거래 상대를 바라봤다. 파라반트는 신원을 묻지 않는다. 그러나 태도나 말투에서 신원을 추측하는 데는 매우 적극적이다. 그것 역시 다른 이에게 팔 수 있는 새로운 정보가 되기 때문이다.
‘왼손잡이. 갓 성인이 된 듯한 나이. 괴팍한 성격. 까칠한 말투. 귀족적인 태도. 호위를 셋이나 대동하는 안전제일주의자.’
정보상은 돈이 되는 새로운 정보를 빠르게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녀의 눈이 이벨리아를 더 탐색하기도 전. 이벨리아가 종이를 내밀었다.
“벌써 다 쓰셨습니까? 이리 짧은 정보가 비싸긴 쉽지 않은데.”
정보상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접힌 종이를 폈다. 시답잖은 정보라면 곧바로 이 귀족 영애를 아래층으로 내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어떤가.”
여인의 손이 짧게 경련했다.
“……이 종이에는 허점이 있지요. 필자가 거짓말을 하는지는 가려내나, 필자가 거짓을 진실로 믿고 있다면 그것까지 가려내진 못합니다. 신의 물건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혹 이를 입증하실 수 있는 다른 것이 있으신지요.”
이벨리아가 정보상 앞으로 작은 돌멩이를 휙 던졌다. 정보상이 데굴데굴 굴러오는 돌멩이를 잡아챘다. 이곳은 가장 방대한 정보를 다루는 곳. 돌에 새겨진 정보를 읽지 못할 리 없다. 독특하게 생긴 반원 모양 도구에 돌을 넣고 떠오른 글씨들을 유심히 보던 정보상이 가면 위로 입을 틀어막았다.
“발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연력. 용의 브레스로 생기는 독특한 문양……. 세상에…….”
“용은 살아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자, 이제 값을 치르지.”
“잠깐. 관련한 다른 정보는 더 없습니까. 값은 섭섭지 않게 치러드리겠습니다. 하다못해 이 돌을 어디에서 발견하셨는지라도…….”
“없어. 아무것도.”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정보상이 종이에 A라고 적힌 라벨을 달아 소중히 말자, 이벨리아가 눈썹을 슬쩍 올리며 물었다.
“S가 아니라?”
“파라반트에서 다뤄지는 S급 정보는 귀하의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음…… 예를 들면, 귀하께서 가져오신 정보에 용이 어디에 서식하는지까지 더해졌다면 S급이 되었겠군요.”
역시 제국 굴지의 정보 길드. 다른 정보 길드에서라면 S급을 달고 마스터에게 큰소리칠 수 있을 법한 정보가 이곳에서는 그저 귀한 A급 취급에 그친다. 하긴, 타국 사람들까지 이곳에 와서 정보를 팔고 갈 정도니, 가진 정보 중 이 대륙을 움직일만한 것들도 적지 않을 터다. 정보상은 천천히 일어나 A급 정보에 책정된 금액을 건넸다. 정보가 목숨보다 귀하다는 모토에 맞게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자. 주신 정보에 걸맞은 값입니다. 300만 리브르.”
“300만! 흠. 뭐. 나쁘지 않은 금액이군. 그럼 이걸로 정보를 사도록 하지.”
정보상이 거래 상대자를 파악하는 정보에 한 줄이 추가되었다. 300만 리브르에 놀라는 것을 보니 손에 꼽을 정도로 부유한 가문은 아닌 것으로 판단.
“좋습니다. 원하시는 정보가?”
“몇 개 있어. 먼저, 데퐁트 후작가의 가주는 죽은 것이 맞는가.”
정보상의 탐색하는 눈이 조금 더 짙어졌다.
“최근 가장 활발하게 거래되는 정보입니다. 판매자와 구매자가 제법 많지요.”
‘역시. 나뿐만이 아니야. 의심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어.’
“시신이 되돌아온 것은 맞습니다. 데퐁트 가문에서 장례를 치렀고, 봉분이 만들어졌지요.”
“……다인가?”
“이 정도 정보는 하급 정보상들도 파는 수준입니다. 당연히 파라반트는 다르지요.”
이벨리아가 이어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데퐁트의 가주가 출정한 곳은 블라고 산맥. 가주는 이젠 사라져버린 금제탑 소속 연금술사였지요.”
정보상이 테이블에 팔을 괴며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그런데 그가 죽은 자리에 연금술을 모르는 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짙게 남은 연금술의 흔적이라……. 제 머릿속에서는 이미 기승전결 완벽한 소설 한 편이 그려지는군요.”
“……대답이 되었네. 다음으로 넘어가지. 그 집안에 영애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소재를 알고 있나.”
“아! 수도로 들어온 지 좀 됐다더군요. 황제 폐하께서 시찰을 명하신 걸 거둬들이진 않으셨으니 탈영이라고 봄이 맞겠지요.”
“그렇다면 후작저로 돌아갔겠군.”
“흠. 아니요. 황궁입니다.”
황궁? 후작저가 아니라 황궁으로 들어갔다고? 후드 아래로 이벨리아와 루드비히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루드비히의 손이 불쾌하다는 듯 움켜쥐어졌다. 세레스의 조력자가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황궁의 주인들 중 세레스를 들일 자는 황비밖에 없으니까. 구체적인 건 조금 뒤에 생각해도 충분하다. 이벨리아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 집안 영식은. 사지 멀쩡한가.”
“다행히 그렇습니다. 가주의 부고로 정신을 차린 건지 일선에서 지휘 중이라고 하더군요.”
“지휘라…….”
“용맹하게 몸을 사리지 않아 군 내부에서도 평이 좋다 합니다. 데퐁트 후작가를 이어받기에 부족하지는 않을 듯하다더군요.”
“그렇군.”
크게 궁금했던 정보들은 모두 물어 답을 들었다. 사실 어딘가 계속 찝찝하던 차였다. 태어난 이래 계속해서 반목해왔던 가문이. 나름대로 이 제국 양대 후작가 중 하나라는 가문의 가주가. 고작 연회에서의 실수 한 번으로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 더 이상했으니까.
‘하나만 더 물어보고, 나가서 생각 좀 정리해야겠어.’
이벨리아가 앞에 놓인 차를 집어 들자, 마시면서 혹시라도 얼굴이 드러날까 우려한 아가레스가 곧바로 정보상과 이벨리아 사이에 서서 시야를 가렸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고 얼굴을 꼼꼼히 가린 이벨리아가 다시 정보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묻겠네. 금제탑은 정말 사라진 게 맞는가.”
그러자 정보상이 쓰고 있던 흰 가면이 순식간에 붉은색 일그러진 형상으로 돌변했다. 기괴했다.
“……!”
“문답은 여기서 끝입니다. 그 정보를 사시기에는 300만 리브르는 부족하니.”
*** 고급 정보 거래를 마친 이들을 위해서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받은 정보의 의미를 되새기고 생각을 정리하라는 의미. [정보의 가치는 목숨의 가치보다 높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마치 신언처럼 높은 곳에 걸려 있는 문구. 과연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이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데퐁트 후작은 안 죽었을 거야.”
“네 감이 맞았네.”
“세레스는 황궁에 들어가서 뭘 하는 걸까.”
“황비 밑에 들어갔다면 모종의 거래가 있었겠지. 데퐁트와 황비 사이에.”
“리카드는 일선에서 지휘하고 있대. 내 축하연 날, 출진하라는 폐하의 명에 밀가루 반죽처럼 하얗게 질렸었는데 말이지.”
들은 대답이 모두 내심 바라던 것과 달랐다. 데퐁트 후작이 정말 죽었길. 세레스는 치열한 전쟁을 참관하며 두려움에 떨었길. 리카드는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길.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들을 바랐다. 그러나 데퐁트 후작은 살아있고, 세레스는 황비와 결탁했을 것이고, 리카드는 나름 길을 찾아 인정받고 있었다. 이벨리아가 금빛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나만이 아니야.”
“뭐가?”
“나만 성장하는 게 아니야.”
뭔가 깨달은 듯 어딘지 멍한 눈빛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엘라임과 계약했으니 나는 안전하다고.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나는 계속 배우고 강해지고 있다고. 그러니까 이제 데퐁트는 상대도 안 된다고.”
내가 부단히 노력하는 만큼, 그들 역시.
“적들이라고 항상 그 자리에 멈춰 있을 리 없는데.”
그저 놀고만 있을 리가 없는데. 즐겨 읽던 동화책들에선 주인공은 계속 강해지고, 악역은 항상 자만하다가 멍청하게 당하곤 했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었다. 내 세상에서 주인공은 나지만. 후작과 세레스, 리카드의 세상에서 주인공은 그들이라는 것을. 주인공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끝내 성장한다. 그리고 세상 모두가 그들 삶에선 주인공이다. 나만 강해졌다는 생각에 안일하게 굴다가 역으로 당하는 건 한순간일 터다.
“정보 값이 아깝지 않네.”
탈영했다는 세레스나 일선에서 지휘 중이라는 리카드에 대한 동정 따위는 없다. 데퐁트가 자신의 목숨을, 아르티나를 노린 그 시점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둘 중 하나가 없어져야 한다면. 그건 반드시 그들이어야 한다.
“앞으로는 책을 읽을 때 악당에 집중해서 봐야겠어.”
“왜?”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고민에 빠져 있던 이벨리아가 후드를 쓰고 일어서며 답했다.
“데퐁트가 주인공이라면, 나는 그 끝을 비극으로 만들 악역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