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멍멍이 기사단은 눈치가 없어2022.01.03.
두 미친 기사가 아주 당당하게도 이 제국 황태자, 타 제국 황태녀, 대악마, 무엇보다 그들의 주인을 막고 신원을 밝히라 종용하고 있다.
‘훈련을 잘 받았다고 좋아해야 하는 걸까, 눈치가 더럽게 없다고 슬퍼해야 하는 걸까.’
이벨리아는 선뜻 후드를 벗지 못했다. 종잡을 수 없는 이 멍멍이들이 당장에 아빠한테 가서 일렀다가는 오늘 잠행은 모두 끝이다. 루드비히와 이샤트 역시 마찬가지. 일국의 국본이 나이까지 바꿔가며 거리를 헤맸다는 소문은 얼마든 추문으로 엮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가레스도 다를 것 없다. 대악마가 정체를 밝혀봐야 그 옆에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수상함과 궁금증만 증폭될 뿐이다. 영리한 머리로 여기까지 생각한 엔리르가 귀를 쫑긋댔다.
‘내가 정체를 밝히는 게 가장 낫겠다. 나는 모습도 그대로니까.’
똑똑한 용은 루드비히의 후드 속에서 앞발을 쏙 내밀어 흔들었다.
“나야, 나.”
헤롤드와 알렉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말랑말랑한 앞발은! 우리 아기씨의 여우!”
헤롤드의 무지막지한 손길에 루드비히의 후드 안쪽에서 엔리르가 뽑혀 나왔다. 마치 땅속에서 무를 뽑듯. 순식간이었다. 큰 손에 대롱대롱 들린 엔리르가 황급히 날개를 숨기며 앞발을 휘저었다.
“이제 됐지. 수상하지 않아. 보내줘.”
엔리르는 자신의 신원이 확실하니 함께 있는 다른 이들도 어느 정도 신원이 보장되리라고 여겼다. 통상적으로는 합당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기사의 표정이 더더욱 굳더니, 이제는 허리춤에 놓인 칼에 손까지 가져다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전히 손아귀에 들린 엔리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던 때였다. 기어코 알렉이 루드비히에게 검을 겨눴다.
“이 여우는 우리 아기씨의 여우다. 아기씨는 어디 계시나.”
“……?”
“네놈들이 이 여우를 잡아두고 있다는 건 우리 아기씨를 납치했다는 뜻.”
‘왜 그렇게 되는데? 그리고 검을 겨눠도 왜 하필 식량 도둑한테 겨눠!’
후드 아래로 이벨리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집 멍멍이들 눈치 심각해.
“하. 뛰어난 추리에 놀랐나.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게 될 거다. 알렉, 연행해.”
험악한 표정으로 굳은 알렉이 루드비히의 팔을 덥석 잡고 체포하듯 뒤로 꺾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루드비히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다.
“크윽.”
오른손에 쥔 검은 여전히 루드비히의 목 끝에 닿아 있었다. 저 검이 진짜로 피를 보게 된다면 그야말로 황태자 시해요, 반역이다. 이벨리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걔 황태자야! 쓱싹 안 돼!”
그 말에 헤롤드가 여전히 험상궂은 표정으로 눈을 찌푸렸다.
“우리 제국 황태자 전하는 아직 솜털이시다. 감히 우리 아기씨를 납치한 것도 모자라 아기씨 말투까지 흉내를 내?”
‘이 바보들 어쩌지.’
“우리가 진짜 아기씨와 가짜 아기씨를 구분하지 못할 것 같나.”
‘충분히 못 하고 있다.’
이벨리아가 이마를 짚었다. 이 제국 누가 이 제국 황태자를 상대로 ‘걔 황태자야’ 따위의 말을 뱉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밖에 없지 않나. 또 만일 자신이 진정 납치를 당했다면 엔리르가 저렇게 얌전히 있겠는가. 당장에라도 불을 뿜으며 난리를 치겠지. 여하간 이쯤 눈치를 줬으면 알아들어야 했을 것을. 눈치는 오늘 아침밥과 함께 말아 먹어버린 헤롤드가 기어코 이샤트의 팔까지 잡아챘다.
“아야!”
“어어! 걔 팔 뽀개는 건 진짜 안 돼!”
이샤트가 다쳤다가는 곧바로 하르벤타와의 전면전이 될지도 모른다. 대륙 전쟁의 불씨가 눈치 없는 멍멍이들의 폭주로 기록될 순 없지. 이벨리아가 결국 투덜대며 후드를 내렸다.
“골라잡아도 귀신같이 황족 둘만 잡는 걸 보면 우리 가문 기사들 핏줄에는 불경한 피가 흐르는 게 분명해.”
쨍하게 비추는 햇살 같은 금발, 그 아래 유유히 흐르는 바다 같은 청안. 얼굴을 확인한 헤롤드와 알렉이 동시에 루드비히와 이샤트의 팔을 던지듯 놓고는 이벨리아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저…… 저…….”
“우리 아기씨를 굉장히 닮았는데. 흑마법인가.”
“악마인가. 악마가 우리 아기씨 흉내를 내나.”
“이 멍청이들아! 나잖아!”
기껏 후드까지 내렸건만 영 믿지 않는 표정이다. 마치 주인이 이상한 냄새를 묻히고 왔을 때의 강아지들 반응과 유사하다.
“자. 신분패.”
그래도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다. ‘아가 이브’가 납치되었다는 의심을 하고 있으니 ‘어른 이브’가 ‘아가 이브’에게서 신분패를 빼앗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건 어때. 운디네!”
[계……계약자? 아니, 왜 어른이 되었대? 인간 아가들은 원래 이렇게 순식간에 자라? 나 아직 우리 아가 계약자를 보낼 수 없는데?]
“자. 여기 내 정령. 이제 믿겠어?”
그제야 알렉과 헤롤드에게서 유의미한 반응이 나왔다.
“우리 아기씨 정령이다!”
“아니, 쉽게 믿을 순 없지. 난 치밀하고 똑똑하거든. 이봐, 물고기. 너 우리 병아리 아기씨의 정령 맞나.”
[맞지. 내 계약자는 우리 병아리지.]
확인을 마치자 두 기사의 눈이 곧바로 살기를 거뒀다. 그 자리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람이 가득 들어찼다. 두 기사는 한참 넋을 놓고 이벨리아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이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두 손을 앞으로 어정쩡하게 뻗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기씨! 우리 병아리 아기씨는 어디 가시고 닭이 되어서 돌아오셨습니까!”
“닭…….”
“잠깐. 다시 후드부터 뒤집어쓰시지요. 지나가는 저 새끼들의 눈을 제가 모두 뽑아버리기 전에.”
“눈 안 돌려? 감히 누굴 쳐다봐!”
후드를 내린 잠깐 사이에 쏠린 이목을 알렉과 헤롤드가 마치 경비견처럼 으르렁거리며 모두 날려버렸다. 다시 후드를 덮어쓴 이벨리아가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두 기사를 단단히 단속했다.
“이샤트가 가져온 마도구를 사용한 거야. 아빠랑 엄마한텐 비밀로 해.”
알렉과 헤롤드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께 숨기는 것 없는 충정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아기씨와 그들만이 만들 수 있는 비밀과 그에 따른 유대감이 더 중요하다.
“다른 기사들에게는 말해도 되겠습니까?”
“말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그야 당연히 하르벤타의 황태녀 전하를 탈탈 털어 마도구를 더 내놓으라 윽박지른 다음 우리 아기씨 한 번 더 써보시라며 조르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그러면 전쟁이 나겠지요?”
“그러면 너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목을 다 쳐버리면 되겠지요?”
“……가 아니라 말을 안 하면 되겠지.”
왜 기승전 모가지로 흘러가냐고. 이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깝다.”
“그래도 오늘 순찰 나오길 정말 잘했어. 농땡이 피운 나 자신 칭찬해.”
사실 격한 훈련에 슬쩍 농땡이를 피우다가 휴고의 눈에 딱 걸려 순찰에 동원된 참이었다. 나오기 그리 싫었건만, 이런 횡재를 할 줄이야! 어른이 된 우리 아기씨를 뵐 줄이야! 뜻밖의 수확에 싱글벙글 웃던 헤롤드와 알렉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그런데 아기씨. 어쩌죠.”
“뭘?”
“우리 아기씨 크면 이렇게 되신다는 거죠?”
“그렇겠지? 나이를 바꿔주는 마도구니까.”
“미리 사내놈들 모가지를 쳐놓는 것도 좋겠습니다. 우리 아기씨 자라시면 어차피 다 죽을 거 미리 없애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 말에 아가레스도 후드를 살짝 들어 올렸고, 심지어 루드비히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 동참하지.”
“맞는 말이야. 나도 돕지.”
자신을 빼고 물 흐르듯 흘러가는 대화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야? 왜 내가 자라면 다 죽어?”
“사람의 눈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니까요.”
“근데?”
“그러면 저희는 목을 칠 거니까요.”
“왜?”
“사람의 눈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니까요.”
“……?”
뭐야, 이 맥락 없는 개논리는. 그리고 이 터무니없는 논리에 왜 나를 빼고 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거야. 이벨리아는 이 인원 중 가장 정상적인 이샤트를 향해 물었다.
“이게 지금 말이 되는 말이야?”
타국에서 온 친구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말이 된다. 또한, 지당하다.”
*** 정체를 밝힌 덕분에 거동수상자로 연행되는 일은 막았지만, 졸졸 따르는 두 기사를 떼어내는 것은 영 만만치 않았다.
“그만 가. 훠이! 훠이!”
동물을 쫓듯 파닥파닥 손을 흔들어봤지만, 두 기사는 오히려 바짝 달라붙어서 자꾸 후드 아래로 얼굴을 살피기 일쑤였다.
“마침 저희도 이쪽 방향 순찰을 돌아야 합니다, 아기씨.”
“여기 아까 돌았잖아. 너희 이쪽에서 오는 거 다 봤는데!”
“원래 순찰은 돌던 곳을 두세 번 돕니다.”
“하아…….”
번쩍번쩍 튀는 황금 용이 그려진 경갑옷을 입고 따라오면 누가 봐도 범죄자 또는 아르티나 가문의 사람임을 티 내는 꼴이다. 벌써 흘끗대는 시선들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이렇게 시선을 끌어 모처럼의 놀이를 망쳐버릴 수야 없다. 이렇게 되면 협박을 해서라도 돌려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책에서 잘 배워둔 협박법이 있다.
‘통하려나?’
이벨리아는 짐짓 엄한 태도로 허리에 손을 얹고 위협을 시작했다.
“너희. 자꾸 그렇게 졸졸 따라오면 나 연인을 만들 거야.”
“……!”
“……!”
효과 있는 협박이었는지, 꼬리치며 따라오던 알렉과 헤롤드가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심지어 알렉은 손에 들고 있던 검까지 떨어뜨렸다. 입을 떡 벌리고 한동안 굳어 있던 두 기사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어떻게 그런…… 그런…… 야만적이고 무시무시한 협박을…….”
“어떻게 이런…… 이런…… 여럿 죽어 나갈 협박을…….”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한 알렉과 헤롤드가 곧바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뒷걸음질 쳤다. 그런 위험한 말씀 다시는 입에 담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고. 두 기사가 저 멀리 사라지자 아가레스도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농담을 들었다는 듯 인상을 굳혔다.
“꼬맹이. 너 그거 어디서 배웠어.”
“책에서! 왜?”
“무슨 책에서.”
“예전에 이안 오라버니가 만들어준 동화책에서. 이렇게 하던데?”
아가레스와 완전히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루드비히가 읊조렸다.
“후작 영식이 오로지 이브를 위해 만든 동화책이니. 이브가 주변인들에게 사용했을 때 가장 효율적인 협박을 적어두었나 보군.”
그렇다면 후작 영식의 가르침은 대성공이다. 아르티나 식솔들을 비롯하여 기사단, 그리고 친우인 그들에 이르기까지. 그보다 더 무서운 협박은 없다. 아가레스가 음산하게 이를 갈았다.
‘왕자를 나 비슷하게 그려둔 것 말고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하나도 없군.’
어린 친구의 사상 대부분을 장악한 그놈의 동화책.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이 직접 만들어 줄 것을 그랬다.
“……아주 중요할 때만 써. 그 협박이면 이 제국도 제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무서운 협박이야? 역시 책이 좋구나!”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팔랑팔랑 걸어가는 이벨리아의 뒤. 아가레스와 루드비히, 엔리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인이라니. 연인이라니. 연인이라니! 뭐 저런 무도한 협박이 다 있어! 같잖지도 않은 영식이 그들보다 더 이벨리아와 가까워지고, 손도 잡고, 밥도 먹고, 함께 놀고, 포옹하고, 때로 뽀뽀도…… 때로 뽀뽀도…….
“죽여버리겠어.”
“없애버리겠어.”
“태워버리겠어.”
셋은 형체도 없는 ‘이벨리아의 연인’을 향해 어마어마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곁에서 지켜보던 이샤트가 고개를 저었다. 무려 대악마와 용, 이 제국 황태자가 앞장서서 반대하는 연애라니.
“음. 공녀는 연애를 못 하겠는데.”
“이브는 뭐든 할 수 있다. 다만 상대가 세상을 떠날 뿐.”
“땅 도둑이 하고 싶다는 건 막지 않아. 다만 상대가 사라질 뿐.”
“누나가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어. 다만 상대가 불에 탈 뿐.”
가만히 듣던 이샤트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그걸 연애 못 한다고 하는 거다. 이 팔불출들아.”
이샤트는 앞서 뛰어가는 이벨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세 남자에게 물었다.
“만약 공녀가 데뷔탕트 파트너로 다른 영식을 고르면?”
“그럴 수 있지. 그건 이브의 의사니까. 하지만 그 영식은 데뷔탕트 날 못 올 거다.”
“아마 아플걸. 팔이든. 다리든. 손을 삐끗해서 목숨이든.”
“혹은 내 동굴에 묻혀 있을지도.”
“…….”
이샤트가 그새 쿠키를 봉지에 담아 계산하고 있는 이벨리아의 뒤에 대고 말했다.
“공녀. 도망가.”
얘네 이상해. 눈빛이 맛이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