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아빠와 토끼의 재력 과시2021.12.30.
‘이래서 그때 아빠가!’
이벨리아의 머릿속에서는 며칠 전 일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방에서 그림책에 붓 대신 엔리르 발 도장을 찍으며 놀고 있었을 때였다. 난데없이 아빠가 들어오더니 자신을 들어 안고 볼에 입을 쪽 맞추며 뜬금없는 말을 했다.
“보석 좋지.”
“보석! 좋지!”
“보석 예쁘지.”
“보석! 예쁘지!”
그 말에 씩 웃더니 더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리셨더랬다.
‘그때 갑자기 보석 얘기를 꺼냈던 게 나한테 선물을 해주려고…….’
이벨리아가 미안한 듯 아가레스의 옷자락을 톡톡 당기며 말했다.
“토끼야. 저 보석은 아마 아빠가 나한테 선물할 보석인 것 같아. 우리 토끼 보석은 내가 따로 사줄게. 응?”
만류해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너에게 선물할 보석이야.”
“토끼가 가지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었어?”
“아니. 딱 봐도 우리 꼬맹이랑 잘 어울리잖아.”
그 와중에도 휴고와 아가레스의 패들은 끊임없이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1,200만 리브르.]
[1,500만 리브르.]
[1,800만 리브르.]
“이건 누가 이겨도 상처뿐인 전쟁이야.”
“얻을 영광이 그 상처 다 덮고도 남는 터라.”
[이거…… 괜찮으신 것 맞습니까? 2,000만 리브르 호가되었습니다.]
이쯤 되니 참석자들의 고개 역시 패들을 드는 두 사람을 오가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근데 토끼야. 우리 아빠가 너인 걸 알아보면 어쩌지.”
“모를 거야. 기운을 완전히 갈무리하고 있으니까.”
“근데 토끼야. 우리 아빠가 열 받아서 이 경매장을 부숴버리면 어쩌지.”
“우리 꼬맹이 보석만 챙겨서 튀어야지.”
“아빠랑 싸우면 토끼가 이길 수 있잖아.”
“네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해하진 않아.”
“근데 토끼야. 이러다가 우리 토끼 파산하면 어쩌지.”
그 말에 후드 아래 언뜻 드러난 악마의 입가가 픽 올라갔다.
“이깟 보석 매해 가져다 바칠 수 있어.”
살짝 혼이 나간 이벨리아가 말리는 동안에도 경매가는 가열하게 상승하고 있었다.
[3,000만 리브르…… 나왔습니다! 두 분 진정 좀 하심이…….]
경매가를 높이고자 갖은 술수를 다 쓰는 경매사의 입에서 진정 좀 하라는 말이 나온 것은 경매장 설립 이후 전례 없는 일이다. 표정을 가리고자 흰 가면을 쓴 경매사의 감정을 알아채고자 굳이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달달 떨리는 손짓에서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으니까.
‘저거 어차피 나한테 올 보석인데!’
신선한 방법으로 재력을 과시 중인 토끼와 아빠 중 누가 낙찰을 받든 저건 어차피 내 손에 들어올 물건이다.
‘아빠 돈도 내 돈이고 토끼 돈도 내 돈이니 결국 내 돈이 나가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지금 나가고 있는 생돈이 그렇게 마음이 아프다. 이벨리아는 아까움에 땅을 치며 악마의 손등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토끼! 그만해. 그거 패들 이리 내놔!”
“왜. 저거 사주고 싶어.”
“어차피 저거 나한테 올 거니까 돈 낭비 그만해!”
“내가 사주고 싶은데.”
음. 이벨리아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 방법으로는 굳건한 토끼를 설득하기엔 무리다.
“사실 나는 저 오른쪽 상자에 있는 보석이 더 가지고 싶어.”
“응?”
“저 오른쪽 상자에 있는 거. 딱 조명 켜지는데 저게 눈에 들어왔어.”
“…….”
“진짜야. 그리고 저 색이 나한테 훨씬 잘 어울릴 거야.”
“……그래?”
여전히 조금 미심쩍은 눈이다. 이벨리아는 태어난 이래 가장 열심히 누군가를 설득했다.
“응.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언니 악마랑 같이 옷 입어봤잖아. 언니 악마가 그러는데 나한테는 흰색보다 붉은색이 더 잘 어울린대. 그래서 지금 내 드레스도 붉은색이잖아.”
“흐음.”
“그러니까 이거 그만하고 오른쪽 상자에 있는 거 사줘.”
“그럼 둘 다 사줄게.”
“아니, 아니, 우리 아빠한테도 기회를 좀 줘야지. 응? 이러다가 우리 가문 기둥 뽑히게 생겼어.”
실제로 이 정도 경매가로는 가문 기둥이 뽑히긴커녕 기둥 부스러기 몇 개 긁어낸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벨리아는 애써 처량한 척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만할게. 오른쪽 보석 사줄게.”
다행히 설득이 제법 먹혔는지 아가레스의 패들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 사이에 경매가는 다시 500만 리브르 높아져 있었고. 휴고가 마지막으로 패들을 든 3,500만 리브르가 호가되었다.
[자. 3,500만 리브르. 더 없으십니까?]
토끼의 손이 움찔대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이벨리아가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세 번 호가하고 확정하겠습니다. 3,500만 리브르. 3,500만 리브르. 3,500만 리브르.]
경매사가 경매봉으로 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탕탕탕 울렸다.
“어차피 나한테 올 보석인데 둘 다 이게 무슨 낭비야. 아까워 죽겠네. 이 가격이면 소가 몇 마리고 고기가 몇 덩이인데!”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자, 아가레스가 빙글 웃으며 답했다.
“네가 소유할 보석이 얼마에 낙찰되었는지도 중요해. 어차피 웃돈 얹어 살 생각이었어.”
“그게 왜 중요해! 내 손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만이지.”
“아르티나 공녀가 소유한 두 개의 보석 모두 발하일 역사상 최고가로 낙찰되었다…… 듣기 좋잖아.”
“…….”
잠시 방심했다. 아빠나 토끼하고는 종종 말이 영 통하지 않을 때가 있고, 가치관에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커다란 폭이 있다는 것을 가끔 잊고는 한다. 그리고 곧바로 시작된 오른쪽 상자 속 보석 경매.
[자, 오른쪽 시작해보죠. 예상가, 마찬가지로 100만 리브르부터.]
여러 귀족이 마지막 남은 저 하나의 세공품만큼은 낙찰을 받고자 호기롭게 패들을 손에 쥐었으나. 손에 든 패들을 바닥에 휙 던져버리며 아가레스가 낮은 목소리로 호가했다.
“5,000만 리브르.”
더 이상 호가하는 이는 없었다. 발하일 역사상 최단 시간 내. 경매 종료였다. *** 낙찰되면 경매사는 물품을 댁으로 배송할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가져갈지를 묻는다. 이때의 태도와 대답이 낙찰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이기에 경매에 참여한 이들 모두는 귀를 쫑긋 세웠다. 굳이 정체를 감출 이유 없는 휴고는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서며 곧바로 후드와 가면을 벗었다. 어두운 경매장 내에서도 환히 빛나는 금발은 완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딸에게 줄 선물이다. 지금 가져가겠다.”
참여자들 사이에서 부러움 섞인 탄식이 흘렀다. 어느 아버지가 딸에게 줄 보석을 위하여 저리 거금을 선뜻 내놓는단 말인가. 모두가 알기론 공녀의 탄신일 또한 이 시기가 아니었으니, 저건 말 그대로 그냥 평범한 날 평범한 일상에서 주는 선물일 것이었다. 혹시 외형을 변경한 이벨리아가 정체를 들킬까, 일행을 모두 먼저 내보낸 아가레스 역시 답했다. 여전히 후드를 눌러 쓴 채였다.
“내 주인에게 줄 선물이다. 지금 가져가지.”
아. 이렇게 말하면 인간들은 이 보석이 누구 손에 들어갈 건지 곧바로 유추하지 못할 수도 있겠군. 아가레스가 덧붙였다.
“굳이 공작저로 배송하기도 번거로우니.”
낙찰자의 재력과 주인이라는 호칭, 아르티나 공작가와 연관 있다는 단서. 모든 것을 종합하던 참여자들 사이에서 작은 깨달음이 퍼져나갔다.
“……!”
“……설마, 루페르트 백작!”
붉은색 보석을 세공한 화려한 목걸이는 허공에 둥실 떠올라 아가레스의 손에 안착했다. 5,000만 리브르를 담은 자루는 곧바로 경매사의 발치에 툭 떨어졌다. 무려 제국을 사고도 남을 돈으로 보석 하나를 손에 쥔 아가레스는, 경악한 참석자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 나오며 후드 아래로 드러난 입매에 짙은 웃음을 매달았다. 올해 발하일의 보석 두 점은 그렇게 모두 아르티나 공녀의 소유로 귀속되었고. 낙찰자의 신원에 관심 많은 유수의 신문사들은 뜨거운 소식을 대서특필하여 퍼 날랐다. 「발하일 경매, 두 보석이 처음으로 하나의 주인을 찾아.」 「유례없는 최고가 낙찰. 그 주인공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제국의 귀부인들과 영애들은 차마 부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 경매장을 나와 일행과 합류한 아가레스는 낙찰받은 보석을 곧바로 아공간에 쑤셔 넣었다.
“꼬맹이가 들고 다니기엔 무거우니까, 집에 가는 길에 줄게.”
5,000만 리브르. 발하일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금액으로 낙찰한 보석을 마치 길거리에서 산 세공품과 별다를 바 없이 여기는 모양새였다. 이벨리아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아빠랑 우리 토끼의 돈 관념은 뭔가 한참 잘못됐어.”
사실 불과 몇 년 전에 아빠에게 가서 크론 10개와 금화 10개를 맞바꾸자며 강탈 비스름한 짓을 했던 본인도 크게 다를 것 없다. 루드비히의 품속에 있던 엔리르 역시 꼬물꼬물 얼굴을 꺼내고서는 한층 더 경건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악마는 원래 다 돈이 많아, 아니면 토끼 악마가 특히 많아?”
“당연히 내가.”
“……나도 보석 조금만 줘. 동굴에 심어두게.”
“보석 심어둔다고 보석 안 열린다.”
그 말에 왜인지 충격받은 표정을 한 엔리르의 머리를 다시 밀어 집어넣으며, 루드비히 역시 중얼거렸다.
“흥. 내가 황위만 이어받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들을 선물해줄 수 있다.”
“꼭 능력 없는 것들이 미래를 가정하지.”
한편 곁에 선 이샤트는 세상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3,500만 리브르…… 5,000만 리브르…….”
“이샤트. 나도 그 기분 알아.”
“내 용돈 가지곤 어림도 없었어.”
“내 곰돌이 지갑을 다 털어도 어림도 없었어.”
이벨리아는 울상을 지으며 아가레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정보 길드에서 정보를 사는 값으로는 충분할까?”
“음?”
“내 곰돌이 용돈 지갑 말이야.”
“…….”
“부족할까?”
어린 친구의 눈매가 세상 처량하게 내려갔다. 마치 여름과 가을 내내 차곡차곡 모아둔 도토리로는 겨울을 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 다람쥐 같았다. 아가레스가 냉큼 대답했다.
“아니. 안 부족해.”
“정말? 정보 길드에서 정보를 사봤어?”
“그렇진 않지만 어쨌든 안 부족해. 가자, 정보 길드.”
만일 부족하더라도 안 부족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방법은 많았다. *** 이번에도 수도 지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루드비히를 마치 어미 닭 쫓듯 졸졸 따라가던 일행의 앞. 두 명의 기사들이 당당하게 앞을 가로막았다.
“거동수상자가 배회한다는 신고를 받았다. 후드를 벗어보도록.”
‘이런.’
이벨리아가 후드 아래에서 침음을 삼켰다. 결국 신고가 들어간 모양이다. 하긴 무리 지어 다니는 네 명이 모두 음침한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마치 누구 하나 암살할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으니 검문이 시행되는 것도 영 이상한 일은 아니다.
‘대체 어느 기사들이 이렇게 눈치가 없어. 딱 봐도 몰래 놀러 나온 귀족 아니냐구.’
황실 경비대인지, 그렇지 않다면 어느 가문의 기사들인지 똑똑히 봐두기 위해 이벨리아가 여전히 눈을 가리고 있는 후드를 손으로 슬쩍 들어 올렸다. 시선이 천천히 올라가 기사의 경갑옷 가슴팍에 닿았다.
‘엥. 잠깐. 저 문양은…….’
가슴팍에 달린 것은 위엄 넘치는 황금색 용이 아닌가. 용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이벨리아가 황급히 후드를 내려 얼굴을 가렸다. 세상에. 망했다.
‘우리 가문 기사들이잖아!’
“당장 안 벗으면 연행하지.”
“으아, 잠깐!”
자신도 모르게 외친 이벨리아가 앞에 선 기사들의 특징을 재빠르게 잡아냈다. 한 기사의 옆구리에는 쌍검이, 한 기사의 등 뒤에는 바스타드 소드가. 쌍검을 찬 기사는 불량하게 짝다리를 짚고 있고, 바스타드 소드를 맨 기사는 주먹에서 우두둑 소리를 내고 있다.
‘알렉과 헤롤드.’
만나도 하필 아르티나 가문 최고 또라이 둘을 만났다. 당황한 이벨리아의 머리 위로 다시 따분하다는 음성이 흘렀다.
“얼른 후드 벗어. 검문 마치고 우리 아기씨 뵈러 가야 하니까.”
이벨리아는 속으로 절규했다.
‘네놈들 아기씨가 바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