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나도 네 파트너가 되고 싶어2021.12.20.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 녹음이 푸르른 나무들 사이에 조금 이르게 낙엽을 맺은 나무들이 뒤섞여 색채 짙은 풍경을 만들어냈다. 아기자기하게 서 있는 오두막, 구석에 고여 있는 작은 호수, 언뜻 제멋대로 자란 것 같지만 누군가의 손을 탄 듯 정갈한 꽃과 잔디까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둘러본 이샤트는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우와아-! 대단하다, 비밀기지! 공녀와 황태자가 함께 쓰는 곳이구나!”
“응! 우리가 벌써 5년을 함께 썼지!”
“공녀랑 황태자 둘이서만?”
“내 토끼…… 그러니까 아스도 같이! 그리고 엔리르도!”
이샤트가 입을 떡 벌리고 질린 눈으로 비밀기지를 응시했다.
“대악마와 용과 황태자와 정령왕의 계약자가 지키는 비밀기지라니. 군사 기밀 기지로 써도 충분하겠다.”
공유하는 이들을 듣고 보니 지어진 지 몇 년 되는 바람에 세월의 풍파를 맞아 살짝 색이 바랜 오두막마저도 마치 최종 비밀병기처럼 강해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났다. 자신만 떼어놓고 모두가 놀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온 아드니엘은 이샤트의 뒤로 쏙 숨어들었다. 이야기로만 듣기에도 무서운 존재들이 한가득이었다.
“용도 있어? 공녀는 희귀 존재 수집가야?”
“응. 용도 있어. 우리 용 엄청 귀여워.”
“용 어디 있는데……?”
이벨리아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던 엔리르는 그 말에 파닥파닥 날아가 아드니엘의 머리 위에 착 눌어붙었다.
“내가 용이야.”
“엥? 무슨 용이 이렇게 작아?”
어제 휴고가 고위 악마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미 상처받은 마음이다. 오늘도 팩트로 맞은 엔리르가 아드니엘을 아슬아슬 비켜나가게 불덩어리를 팡팡 쏘았다. 복슬복슬한 미간은 위협적으로 찌푸려진 채였다.
“내가 용이야!”
“으아악! 그래! 너 용이야!”
“너? 너어?”
“아니, 용님!”
위대한 종족의 갑질에 함락당한 제국의 황자는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피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호칭을 정정했다.
“흥! 버릇없는 인간들. 아니, 누나는 제외야. 누나는 용이라고 불러도 돼. 난 그게 좋아.”
인간 하나를 제대로 교육하며 콧김을 뿜던 엔리르는 다시 이벨리아의 어깨 위로 돌아가 아양을 떨었다. 피어오르는 연기를 두 손으로 헤친 아드니엘이 더듬더듬 물었다.
“그…… 그럼 그 대악마는 어디 있어, 공녀?”
“여기.”
기척 없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드니엘이 다시 한번 펄쩍 뛰며 이벨리아의 곁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용. 불덩어리 뿜을 거면 잔디 상하지 않게 해라. 꼬맹이가 좋아하는 곳인데.”
쯧, 아가레스가 혀를 차며 손짓 한 번으로 패인 잔디를 복구시키자, 엔리르도 후다닥 내려와 통통한 앞발로 잔디를 도닥도닥 두드렸다. 잔디 미안해, 작게 사과하면서. 이벨리아는 해사하게 웃으며 돗자리 위에 주저앉아 간식 바구니를 열었다.
“이 비밀기지에 인간이 이렇게 많아진 건 처음이야! 악마랑 용이랑 정령이 많았거든!”
이샤트가 돗자리 위에 벌렁 드러누우며 흘러가는 구름을 손으로 따라 그렸다.
“그랬겠네. 이 비밀기지는 공녀가 지었어?”
“응. 내가 땅을 찾고 내가 집을 지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식량 도둑이 내 창고에서 간식을 모두 털어먹더니 자기 땅이라고 우기지 뭐야.”
“뭐? 그런 못된 도둑이 있었어?”
“응.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어.”
“그 도둑은 어떻게 했어? 잡아서 혼쭐을 냈어?”
“그럼! 솔방울도 던지고 엉덩이도 뻥 차버리려다가 참았지!”
“와. 진짜 몹쓸 도둑이네. 창고에서 간식도 뺏어 먹고 땅도 자기 거라고 우기고 말이야. 이거 공녀 땅 아니야?”
“응. 내 땅이야!”
“공녀가 샀지?”
“아니, 사지는 않았는데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집을 지었으니까 내 땅이야!”
“……잠깐.”
수상하다. 뭔가 굉장히 잘못된 것 같다. 신나게 도둑을 욕하던 이샤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땅 안 샀어?”
“응. 이 땅은 주인이 없는 땅인걸!”
“아이고. 세상에.”
자신의 소중한 친구는 땅값이 금값인 시국에 소유자 없는 땅이 놀고 있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는 점을 모르는 것 같았다. 때로 진짜 주인 없는 땅들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목 좋은 산맥이라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땅은 분명 주인이 있을 것이다. 주인이 사두고 잊고 있었든, 알면서도 방관하고 있든 간에.
‘공녀가 말한 도둑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 제국 유일한 공녀라는 지위에 눌려 소유권 주장조차 하지 못했나 봐.’
선량한 친구가 의도적으로 땅을 빼앗은 것은 아닐 터다. 이샤트는 소중한 친구가 상처받지 않게 좋은 말로 현실을 알려주고자 마음먹었다.
“공녀. 사실 땅들은 모두 주인이…… 응?”
그런데 입을 염과 동시에 황태자가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이어지던 말이 뚝 멈추자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이샤트의 옷자락을 툭툭 잡아당겼다.
“이샤트?”
“아니, 아니야.”
“목이 말라서 그래? 오렌지 주스 마실래?”
“아. 괜찮다. 물이면 충분하다.”
“응. 오렌지 주스 가져올게.”
반박은 필요 없다. 이 비밀기지에 왔으면 나와 함께 오렌지 주스를 마셔야 해. 이벨리아가 오렌지 주스를 가지러 오두막으로 들어가자, 이샤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루드비히에게 다가가 물었다.
“설마 여기 그대 땅이야?”
“내 땅이었지.”
“뺏긴 거야?”
“준 거지.”
“이 노른자 땅을?”
“아니, 이 산맥을.”
“산맥을? 미쳤어? 듣기로 그대는 뒷배가 없어서 돈이라도 많아야 할 텐데? 이걸 공녀한테 홀랑 넘겨줬다고? 왜?”
“이 땅이 내게 가치 있으려면 여기 이브가 있어야 하니까.”
하. 이샤트가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에르카디아 제국 사람들은 공녀에게 빠져도 단단히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자신도 그렇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생판 남한테 이 산맥을 통째로 넘겨주다니. 그것도 받는 이는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게.’
황태자도 용도 대악마도. 공녀에게 품은 우정과 애정이 생각보다 아주 깊은 듯했다.
‘공녀한테 밉보이지 말아야지.’
벌써 몇 번째 고쳐 다짐하고 있는 이샤트 옆으로, 오렌지 주스를 품에 안고 나온 이벨리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선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는 듯 키득대며 이샤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이샤트. 사실 그 식량 도둑이 바로 쟤야, 루이! 내 땅을 훔치려다 실패했지!”
이벨리아는 땅을 산 적 없다. 아르티나 공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 산맥의 땅문서 소유자란에는 이벨리아의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다. 이샤트는 이 기가 막힌 현실 앞에 입만 뻐끔댈 뿐이었다.
“그걸 황태녀에게 홀랑 일러바치다니. 언제 적 이야기인데.”
오렌지 주스 가장 아랫부분을 이벨리아에게 건네주며 루드비히가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황태자의 사유지였던 이 땅은 이미 3년 전, 이 제국 유일한 공녀 앞으로 양도가 이루어진 터였다. 등기부에 기재된 양도일은 이벨리아의 생일이었다. *** 사절단의 공식 업무가 적은 편은 아니었으나, 황제 칼라일은 최대한 이샤트의 편의를 배려해주었다. 공녀와 이샤트, 그리고 루드비히가 깊은 친분을 맺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얻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덕분에 이샤트는 제법 오랜 시간 사절단 업무를 내팽개치고 비밀기지에 들어앉아 있을 수 있었다. 간식을 나눠 먹고 누워 낮잠까지 자고 일어난 이샤트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이벨리아에게 물었다.
“아. 에르카디아 제국은 사교계 데뷔가 언제야?”
“열일곱 살 때!”
“아. 성년이 되는 나이도 열일곱이니까 그때 맞춰서 하겠구나.”
“응. 하르벤타는?”
“우리는 데뷔탕트를 열여섯에 먼저 치르고, 열일곱에 성년식을 하지. 마침 얼마 후면 데뷔탕트 시즌이라 온 제국이 난리야.”
요즘 들어 동화책 속 왕자님에 푹 빠져 있는 이벨리아는 사교계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더 말해보라고 채근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왜 난리인데?”
“어떤 파트너를 대동하느냐에 따라서 사교계에서의 입지가 다져지니까. 좋은 파트너를 선점하려고 온통 난리지. 파트너 선정에도 가문 간의 힘이 작용한달까.”
아, 파트너 선정이 그런 의미도 가지는구나.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누구를 데려갈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공녀에게는 온갖 영식들이 함께 가자며 서신을 보낼 거야. 꽤 귀찮아지겠는걸!”
“괜찮아. 다 거절할 거니까!”
“응? 왜? 설마 공작이나 소공작과 함께 가려고?”
“아니. 데뷔탕트 파트너는 벌써 정해두었거든.”
그 말에 무심하게 앉아 흐르는 대화를 듣고 있던 루드비히가 고개를 휙 돌리고, 꼬리를 살랑이며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엔리르가 펄쩍 뛰어내렸다.
“정해두었다고? 누구?”
“누나, 누군데?”
이벨리아가 바구니에 놓인 초록색 사과를 크게 한 입 베어 물며 태연하게 답했다.
“아스!”
그 말에 루드비히가 손에 쥐고 있던 사과 하나가 처참하게 터져나갔다. 마찬가지로 엔리르가 물고 있던 나뭇가지가 뚜둑 소리를 내며 잘려나갔다.
“대체 무슨 기준이야!”
“왜 저 악마야, 누나?”
“아빠랑 오라버니들이랑 같은 걸 물어보네. 아스가 가장 왕자 같아. 원래 데뷔탕트 에스코트는 왕자님한테 받는 거야.”
단순명료한 기준에 이샤트가 키득키득 웃었다. 하긴, 외형으로 따지자면 저렇게 왕자 같은 이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재력이나 능력 면에서도 다를 바 없겠지. 아가레스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루드비히와 엔리르를 일별했다. 루드비히가 하늘 무너진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진짜 왕자 여기 있잖아.”
“아니, 루이는 황태자잖아. 황태자랑 왕자는 달라.”
“우리 제국을 왕국으로 강등시키면 되겠어?”
심히 당황하여 용의 모습으로 이리저리 날개를 푸드덕거리던 엔리르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붉은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아드니엘의 크라바트를 빼앗아 자신의 목에 매었다.
“누나. 나는? 나는 왕자 안 같아?”
“응. 엔리르는 아직 아가 용이잖아. 왕자는 아가가 아니야.”
무적의 논리다. 소위 말해서 개논리. 황태자와 용은 맞서기 가장 어려운 논리 앞에 봉착했다.
“……그럼 저 악마는 왜 왕자 같아?”
“생긴 게 왕자 같아.”
“혹시 카시스 영식이 저런 왕자를 그려줬나.”
“비슷했어.”
아가레스는 일전에 이벨리아로부터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얻어 아주 마뜩잖게 봤던 카시스 영식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반면 루드비히는 바득 이를 갈며 집무실에 놓인 서류 더미를 모두 이크리안에게 떠넘기고 말겠다는 다짐을 되새겼다. 땅 도둑의 데뷔탕트 파트너가 될 기회를 이렇게 잃을 순 없다. 루드비히는 지금 당장 땅 도둑에게 조르기보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마음먹었다.
“나중에 내가 저 악마만큼 크면 나도 왕자 같아질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그때 가서 다시 정해. 그때 네가 보고 더 왕자 같은 사람으로.”
아가레스가 조소했다.
“그때가 된다고 네가 뭐 달라질 줄 아나.”
“악마 너보단 멋있을 거다.”
“네가?”
“요즘 내 초상화가 제법 인기 좋다고 하더군. 다 이유가 있어서겠지.”
“그건 내 초상화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일상처럼 티격태격하는 두 친구를 말리며 이벨리아가 손을 휘저었다.
“그만. 그만. 알았어, 그때 가서 볼게! 둘 중 누가 더 왕자님 같은지!”
하여간 별것도 아닌 거로 싸운다. 처음 만난 그날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자신만 쑥쑥 자라고 이 두 친구는 자라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직도 어린아이들이 따로 없는 것을 보면. 고개 젓는 이벨리아 옆으로 붉은색 머리가 빼꼼 존재감을 알렸다.
“셋이야. 셋 중 누가 더 왕자님 같은지 보고 골라.”
“왜 셋이야?”
“그때가 되면 나도 어른 용이 되어 있을 테니까.”
아직은 어린 용이 요망하게 몽롱한 눈을 휘어 웃었다. 서로를 견제하듯 이를 갈고 있는 황태자와 대악마, 용 사이에서 오로지 병아리 하나만이 태평했다.
‘이러다 종족 전쟁 나겠다.’
기겁한 이샤트가 품 안에 담긴 외형 변경 마도구를 만지작거렸다. 주제를 전환하는 것이 신상에 좋을 듯하다. 마침 이벨리아가 딱 좋은 미끼를 던졌다.
“얼른 커서 데뷔탕트 날에 아주 예쁜 드레스를 입고 싶어. 여기저기 훅 파인 거.”
“공녀. 그런 옷은 아직 우리처럼 작은 어른들이 입기에는 무리가 있지.”
“맞아. 그래서 안타까워. 나도 엄마처럼 예쁜 옷을 입고 싶은데.”
입매를 올려 웃으며 이샤트가 만지작거리던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짠! 이게 뭐게!”
“알약!”
“알약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외형 변경 마도구지!”
그 말에 이벨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릎걸음으로 바짝 다가가 병을 요모조모 살펴보는 것이 확실히 관심을 끈 듯했다.
“외형 변경 마도구? 생긴 걸 바꿔줘?”
“사실 생긴 걸 바꿔준다기보다는 나이를 바꿔줘. 아주 예전에는 원하는 나이로 변경이 가능했다고 하던데, 시간이 오래 지나 마법이 변형되어서 지금은 무작위야!”
호기심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이벨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재밌겠다!”
“이걸 먹고 어른이 되면 예쁜 드레스도 입어볼 수 있고.”
“어른이 되면 내가 어떻게 변할지도 미리 볼 수 있고!”
“거리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고.”
“커피도 먹어볼 수 있겠다!”
딱 어른에 대한 환상을 가질 나이. 이벨리아와 이샤트는 서로 마주 보고 씩 웃은 다음 알약을 하나씩 입에 털어 넣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재빠른 손놀림이었다. 데뷔탕트 파트너 건으로 서로 견제 중인 아가레스와 루드비히, 엔리르가 미처 말릴 수도 없었던 속도.
“꼬맹이, 잠깐!”
“그게 뭔 줄 알고 그냥 막 그렇게 입에!”
“누나, 퉤 해! 퉤퉤!”
그리고 눈 한번 깜빡하는 찰나의 시간이 지난 뒤. 주저앉은 채로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내려다보던 이벨리아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왕?”
방금까지 이벨리아의 입에서 알약을 끄집어낼 기세로 다가오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손 뻗은 채 그대로 굳어버린 세 존재가 경악했다.
“헉.”
“꼬맹이……가?”
“누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