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유일한 내 편2021.12.16.
“응!”
올려다보는 이벨리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빠가 허락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해맑음. 자신도 모르게 그러렴, 대답이 나올 뻔한 휴고는 고개를 한 번 털고 애써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귀엽다고 아빠가 다 허락해 줄 거라 생각했다면 물론 맞는 생각이지만, 이건 안 된다. 우리 아가가 외박이라니!”
“이샤트는 황궁에서 자야 한다면서요. 나도 이샤트랑 같이 잘래. 이샤트는 친구가 없어서 밤에 무서울 거야.”
“위험하다.”
“황궁인데요!”
“그래도 위험하다. 아빠랑 같은 집에서 자야 안전하지.”
“엔리르도 데리고 갈게요. 엔리르는 용이잖아요.”
그 말에 엔리르가 털을 부풀리고 날개를 활짝 폈다. 마치 자신만 믿으라며 떵떵거리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아직 고위 악마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는 용이지.”
함께 황궁에 가겠다며 등에 작은 가방을 메고 있던 엔리르가 자비 없이 내리꽂히는 팩트 폭력에 축 늘어져 눈을 감았다.
“그럼 카론도 있고!”
“황궁에서는 사적인 호위를 두지 못하는 것을 잊었구나, 우리 아가.”
“그럼 엘라임도 있고!”
“그자는 네 곁에 항상 붙어 있을 수 없고.”
“그럼 토끼도 있고!”
“그자가 네 곁에 항상 붙어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 멱을 따도 부족할 것 같구나.”
“그럼 루이도 있고!”
“아직 핏덩이 아니냐.”
주변 아군들을 죄다 늘어놓은 회유가 영 통하지 않자 이벨리아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아빠가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나도 다 방법이 있지!”
“무슨 방법이지, 아가?”
장난스럽게 웃은 이벨리아가 엘리시아에게 호다닥 달려갔다.
“엄마아-! 엄마, 엄마, 엄마아-!”
아직 키가 많이 자라지 않은 이벨리아가 엘리시아를 꼭 끌어안고 허리께에 고개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나 황궁에 가고 싶어요. 이샤트가 돌아갈 때까지만 같이 자고 올게요. 응?”
마치 고양이처럼 올려다보는 눈매에 함락된 엘리시아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고. 대신 루페르트 백작과 함께 있거라. 당신이 가는 김에 폐하께 잘 좀 말씀드려요.”
“하지만 우리 딸의 외박을 이렇게 쉽게 허락해 줄 수는 없소!”
“이게 뭐 대단한 외박인가요. 그냥 황궁에서 자는 건데. 그렇게 걱정되면 당신도 황궁에서 자든가요.”
“나와 별거하겠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하다니…… 부인…….”
휴고가 상처받은 듯 어깨를 약간 떨어뜨리자, 남편의 토라짐을 종종 겪어본 엘리시아가 재빠르게 타협점을 찾아 수습했다.
“하루만 있다가 와요. 황궁이 지낼 만한지, 혹시 누가 우리 아가 괴롭히진 않는지, 밥은 먹을 만한지, 직접 확인하고 오면 마음이 좀 놓이겠지요?”
“……그래야겠군.”
집 앞마당에 나간다고 해도 걱정되는 어린 딸의 첫 외박이 고작 아홉 살에 이뤄진다니. 휴고로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목적지가 비록 황궁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외박지가 안전한지는 자신의 눈으로 꼼꼼히 보고 와야 했다. 혹시 암살자라도 들이닥칠 수 있으니 기왕 가는 김에 수상한 이들은 다 잡아 족치는 것도 좋겠다. 휴고는 집무실에서 처리하고 있던 서류들을 바리바리 싸기 시작했다.
“여보. 그건 왜 다 가져가요?”
“오늘 황궁 집무실에서 밤을 새울 계획이오. 간만에 폐하와 깊은 대화도 나누고.”
“무슨 깊은 대화를요?”
“황자 간수 잘하라는 정도의 소소한 대화요.”
“폐하는 무슨 죄고요?”
“그 자리에 앉은 게 죄요.”
그렇게 이벨리아의 황궁 행에 황제의 새벽 근무가 확정되었다. *** 늦은 시간 이뤄진 사절단 맞이는 에르카디아 제국의 국격에 부족함 없는 환대였다. 사절단을 대표하는 이샤트가 하르벤타에서 가지고 온 선물들을 수레째로 건넸고, 품목을 적은 두루마리를 훑던 황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가장 좋은 방을 내어주라 명했다. 그리고 지난 사절단에서 깊은 친분을 맺은 이벨리아와 방을 함께 쓰고 싶다는 이샤트의 청은 별 어려움 없이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사절단 맞이가 끝나자, 황제와 함께 알현실을 나서던 루드비히가 슬쩍 운을 뗐다.
“폐하. 저 잠깐 공녀와 황태녀가 묵는 방에…….”
“어허. 황태자가 아직 어려 뭘 모르는구나. 이 늦은 밤에 레이디가 묵는 방에 함부로 찾아갔다가는 뺨 맞기 십상이다.”
“……묘하게 단호한 어조이십니다. 경험담이십니까.”
“내 황태자일 시절 황후의 방 발코니에 기별 없이 찾아갔다가 뺨을 맞았지. 공녀는 정령왕의 계약자이니 자칫 치한으로 오해를 받았다가는 뺨 맞는 정도가 아니라 네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다.”
“…….”
땅 도둑이 모처럼 황궁에서 묵는다는데 당장 찾아가지도 못하는 것이 참으로 답답했다. 때로 친구들은 함께 밤을 새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장난도 치고 한다는데. 아마 땅 도둑과 황태녀는 늦은 시간까지 함께 놀다가 잠에 들 텐데. 밖이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 루드비히는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이 황궁 어딘가에 땅 도둑이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영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램프를 켜고 다시 책상에 앉은 루드비히가 정찰용 매 라르고에게 말을 걸었다.
“내일은 땅 도둑이랑 뭐 하고 놀지. 이미 황궁 구경은 다 시켜줬는데.”
- 끼루룩.
“뭘 해야 땅 도둑이 또 황궁에 오고 싶게 만들 수 있을까.”
- 끼루룩.
“……그래. 친구도 반려도 없는 매에게 내가 뭘 묻겠느냐.”
- 끼루룩!
***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뜬 시간. 어제 늦게까지 재잘재잘 수다를 떨다가 잠든 이샤트와 이벨리아는 아직도 한창 꿈나라에서 헤매는 중이었다. 어린 황족의 시중을 담당하는 노련한 시녀들이 한 침대에 대자로 뻗어 누운 두 아이를 조심스레 깨웠다.
“으웅. 이샤트?”
“공녀.”
“진짜 왔구나, 이샤트. 꿈인 줄 알았네.”
과거 하르벤타에서 맞춰 입었던 잠옷은 두 해가 지난 지금 너무 작아져 맞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자신의 방에 두었던 같은 색 잠옷 두 벌을 들고 와 이샤트와 나눠 입은 참이었다. 멀리 있어서 자주 만나지 못했던 친우가 비슷한 잠옷을 입고 옆에 누워 있으니 맞이하는 아침이 특히 상쾌했다. 눈을 비비며 기지개 켠 이벨리아가 속삭이며 작게 물었다.
“오늘 나랑 비밀기지 갈래? 구경시켜줄게.”
“비밀기지! 좋다! 그렇지 않아도 일전에 황태자가 자랑한 적 있지.”
비몽사몽 한 채로 시녀들의 손에 맡겨져 머리를 정돈 당하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루이가? 언제?”
“공녀가 사절단 업무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딱 보아하니 나를 견제하고자 공녀와의 친분을 자랑하는 것이었는데, 그냥 장단을 좀 맞춰 주었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자신의 소꿉친구를 잘 알고 있는 이벨리아가 키득키득 웃음 지었다.
“나와의 친분이 뭐 그렇게 자랑이라고. 루이도 정말 유난이야.”
“나는 그 심정 이해한다. 공녀의 이야기로 하르벤타가 들썩일 때 나도 온갖 대소신료들에게 자랑했더랬지. 나와 아주 친하다고.”
그때였다. 비교적 어린 시녀 하나가 얼굴을 붉히고 후다닥 뛰어와 알렸다.
“공녀님.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응. 들어오시라고 해.”
황족을 모시는 시녀들인 만큼, 이곳에 이 제국 황태자와 공녀의 친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대다수 시녀들은 고위 귀족은 아닐지라도 제법 유서 있는 가문들의 방계 혈족이나 차녀들이었기에 황족과의 혼인 등 좋은 관계를 고대하며 입궁한 이들도 여럿이었다. 이번 이벨리아의 시중에 자원자가 많았던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공녀님의 곁에 붙어 있으면 황태자 전하를 알현할 기회가 많아질 테니까. 이를 방증하듯, 이벨리아 곁에서 머리를 단장해주던 어린 시녀 몇몇이 황급히 입을 다물고 재빠르게 자신들의 머리를 매만졌다.
“이브.”
“루…… 아니, 전하.”
주변 시녀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루드비히가 성큼성큼 걸어와 이벨리아의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편하게 부르라니까, 평소처럼.”
“불경하다고 되려 욕을 먹습니다.”
“감히 누가.”
시립한 시녀들을 싸늘하게 훑는 시선에 그녀들이 자신들은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는다는 듯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봐. 없대.”
“황궁이란 온갖 소문의 온실이니 훨씬 조심해야지요.”
“온실이 아니라 온상지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군. 하여간 안 어울리게.”
“스읍.”
이벨리아는 조용히 하라는 듯 작게 경고했다. 아무리 네가 황태자라고 한들 비밀기지에 가면 그저 식량 도둑에 불과하다. 비밀기지에서 보복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그 입을 다물어라. 정도의 의미였다.
“나 이샤트랑 거기 갈 건데.”
“거기를? 황태녀와?”
루드비히의 수려한 눈썹이 마땅치 않다는 듯 슬쩍 올라갔다. 이 작은 친구가 ‘비밀기지’라 칭하지 않는 것은 아마 주변 시녀들의 귀를 우려해서일 것이었다.
“응. 거기. 우리한테는 아주 소중한 곳이잖아요. 이샤트에게도 소개해주고 싶어서.”
“아주 소중한 곳…… 그렇지.”
둘도 없이 값진 곳. 내게도 그렇듯이 네게도 다를 바 없나 보다. 그 한 마디가 루드비히의 마음을 여지없이 따뜻하게 녹였다.
“그래. 가자. 채비 마치고 내 집무실로 와. 준비해 둘게.”
들어올 때보다 약간 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루드비히가 방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어린 시녀 하나가 재잘댔다.
“거기가 어디인가요, 공녀님? 황태자 전하께서도 굉장히 좋아하는 곳인가 봐요!”
곁에 있던 나이 지긋한 시녀 하나가 툭 치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아주 오랜만에 이 제국 국본을 눈앞에서 본 시녀는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공녀님, 혹시 그곳이 어디인지 저도 알 수 있을까요?”
“왜?”
“황태자 전하께서는 뭔가에 흥미를 갖는 일이 드물다고 들었거든요. 저리 좋아하시는 곳이라니 저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전하께서 흥미를 갖는 일이 드물대?”
“예, 공녀님. 전하께서 어릴 적 모후를 잃으시고는 오로지 제왕학에만 전념하시고 다른 것들에는 관심 두지 않으신다 들었어요.”
하. 한쪽 입꼬리만 슬쩍 올린 이벨리아가 머리를 빗겨주고 있던 시녀의 팔을 밀어냈다.
“공녀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보다 한참은 키가 큰 시녀를 빤히 올려다보는 눈이 제법 매서웠다.
“여기. 황족을 가장 오래 모신 시녀가 누구지?”
“저…… 공녀님, 소인입니다.”
“교육을 이따위로 해?”
“죄송합니다. 공녀님.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입을 단단히 교육하겠습니다.”
비록 황족은 아니라 한들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이 제국 유일한 공녀. 황제 폐하의 총애는 물론이거니와 아르티나 공작가의 실세라는 소문이 자자하고, 황태자 전하는 공녀님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는 뒷말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거기다 정령왕의 계약자에 대악마의 주인이라는 일신의 능력까지 범접하기 어려우니, 답하는 수석 시녀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했다. 차가운 시선으로 수석 시녀를 응시하던 이벨리아가 고개 돌려 조금 전까지 재잘대던 시녀에게 물었다.
“넌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
“공녀님…….”
시녀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억울한 표정이었다. 느리게 고개가 기울어지자 황금빛 머리칼이 어깨를 따라 흘러내렸다. 푸른 눈이 경고하듯 시린 안광을 발했다.
“감히 네가 모시는 분, 이 제국의 국본을 가볍게 입방아에 올려? 모후를 잃었다, 흥미를 갖지 않는다…… 시녀가 이 제국 황태자의 약점 될 것들을 타 제국 황태녀 앞에서 줄줄이 읊느냔 말이야.”
“아…… 소인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
“첩자인가?”
뭔가 변명하려던 시녀는 이벨리아의 말에 냉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공녀님!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어린 공녀의 말 한마디면 자신이 진짜 첩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굴지의 공작가에 대자면 아무리 유서 깊다 한들 한미한 가문일 따름이다. 공녀님이 자신을 첩자라 여긴다면, 진실 여부는 관계없이 자신은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제 입이 방정이었습니다. 제가 감히 다른 제국의 사절 앞에서 이 황실을 평가하고 욕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한 번만 용서를……!”
바닥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시녀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이벨리아가 고고하게 명했다.
“일어서. 마저 단장해.”
“예, 예, 공녀님.”
바들바들 떨리는 시녀의 손이 금빛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매만지자 이벨리아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충고했다.
“조심해. 여긴 나와 내 친우가 있었지만, 다른 귀족들이 있는 곳에서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간 그 목, 진짜로 떨어져 있을 테니까.”
호되게 뼈에 새길 조언이었다.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린 시녀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의 경험이 훗날 그녀의 목숨을 살리리라는 것을 재빠르게 깨달았다. 조금 전보다 훨씬 정중해진 손길이 부드럽게 머리를 매만지고 어깨를 주물렀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이벨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오.’
곁에서 지켜보던 이샤트가 눈을 반짝였다.
‘멋있다, 공녀.’
자신은 지난 2년간 황위를 잇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랬기에 제법 성장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 이번에 공녀를 만나면 공녀가 진정 어린아이로 여겨질지 모른다고 여겼는데……. 오만함에 기인한 오판이었다.
‘공녀도 나만큼 성장했구나.’
아마 많은 것들을 마주하고 부딪히고 이겨내며 힘껏 걸어왔겠지. 내가 그랬듯. 따사롭게 들어오는 햇살 아래 눈을 감으며 이샤트는 시원하게 입매를 올렸다. 자신의 둘도 없는 소중한 친우는 진정 오르카스 해를 닮아가고 있었다. ***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땅 도둑 친구가 언제쯤 단장을 마치고 돌아올까 오매불망 기다리며 방을 서성거리던 그때.
“얍! 나 왔다!”
늘 그렇듯 루드비히의 집무실 문을 쾅 열어젖힌 이벨리아가 청량하게 외쳤다. 화들짝 놀란 루드비히는 바로 옆에 놓인 화초에 다급하게 손을 가져다 댔다. 부지불식간에 거친 손길을 받은 화초 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흠. 흠. 화초를 돌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방금 그 화초 죽은 것 같은데.”
“원래 잎이 없는 화초다.”
“아래 떨어진 잎이 수북한데. 어쨌든 우리가 조금 늦었군. 공녀가 시녀 하나를 아주 호되게 혼내느라 그랬다.”
이샤트의 말에 루드비히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성큼 이벨리아에게로 다가간 루드비히가 어느새 훌쩍 높아진 시선으로 작은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왜. 네게 무례하게 굴었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별거 아니었어. 얼른 가자!”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이벨리아가 비밀기지로 가는 통로로 먼저 걸어갔다. 뒤를 따르며 루드비히가 이샤트에게 무슨 일인지 눈짓으로 묻자, 이샤트가 작게 속삭였다.
“시녀 하나가 그대에 관한 이야기를 가볍게 늘어놓았다. 그에 분노한 공녀가 호되게 혼을 냈지. 아주 멋있었어.”
그 말에 루드비히가 멍한 표정으로 앞서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브가…….”
“감히 타 제국 황태녀 앞에서 이 제국 국본을 입에 올리냐면서. 모든 시녀 앞에서 그대의 위엄을 세워주었지.”
“…….”
“부럽군. 같은 제국에 저런 친우가 있어서.”
“……내가 신의 존재를 믿는 유일한 이유지.”
두 친구와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자 의아해진 이벨리아가 휙 돌아서서 외쳤다.
“뭐 해? 빨리 와! 가서 간식 먹자!”
바람에 황금빛 머리칼이 산개하는 태양처럼 흩날렸다. 해사한 미소가 가을을 앞둔 시원한 공기를 똑 닮았다. 청명한 목소리가 선명히 물든 초목을 음성으로 빚은 듯했다.
“아…….”
전조 없이, 오랜 소꿉친구가 조금 생경하게 느껴졌다. 누구보다 가깝다 여겼건만 또 누구보다 생소하게 와닿았다.
‘아마 내가 또 이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겠지.’
때로 느껴지는 이 간질간질한 느낌. 심장이 박자를 잃고 팔딱대는 느낌. 손 닿지 않는 어딘가 찌릿함이 느껴져 몸이 들썩이는 느낌. 이 황궁. 그 누구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황태자 자리는, 반대편에서 세력을 공고히 하는 황비와 맞서기엔 부족한 감이 있으니까.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줄 한 번 잘못 섰다가는 황위 교체 과정에서 피바람 부는 일이 예사니까. 그렇기에 앞뒤 잴 것 없이 자신의 편에 서주고, 그것이 별일 아니라며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는 이는 오로지 자신의 친우뿐이다.
‘이런 거 받아본 적 없어서 그래.’
그래. 이 생소함은, 어색함은, 거리감은.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돌려주는 친우의 따뜻함에 또다시 가슴 어딘가가 녹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금방 괜찮아질 거야.’
루드비히는 빠르게 걸음을 놀려 땅 도둑의 곁으로 다가섰다. 항상 그렇듯, 가장 기꺼운 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