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외박을 하겠다고?2021.12.13.
제국의 국본과 황자가 모두 사라져버림에야, 황제가 뒷목 잡고 쓰러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르벤타 황제의 집무실에는 쩌렁쩌렁한 고함이 울려 퍼졌다.
“내 이 자식을 그냥!”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고정? 내 고정을 바랐으면 황자나 잘 고정해 두었어야지! 대체 뭘 하고 앉았기에 마차에 숨어드는 것도 막질 못해!”
“송구합니다, 폐하. 소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지금이라도 전하를 다시 모시고 오겠습니다!”
신하들을 향해 가열한 삿대질을 하던 세필리아는 제풀에 못 이겨 황좌에 털썩 주저앉았다. 클수록 말을 듣지 않는 황태녀와 황자 때문에 도진 두통이 다시금 그녀를 성가시게 만들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구는 대장군을 한 손으로 만류했다.
“됐어. 관둬라!”
감히 자신의 명을 어기고 마차에 숨어 도망쳐버린 아들이 아주 얄밉기는 했지만, 그와 별개로 이왕 떠나버린 것을 굳이 되돌아오게 할 이유가 없기는 했다.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그만인데, 그 부분에서는 믿을 수 있는 보험 하나를 들어두었으니까.
“하오나 혹시 에르카디아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만 나가보거라. 믿는 구석이 있으니. 따라가서 게이트까지만 제대로 호위하고.”
신료들이 나가는 소리와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은 황제는 몇 주 전 집무실로 쳐들어왔던 대악마를 상기했다. 지금 이 대륙에서 그자를 상대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있기나 할까. 그자의 눈을 피해 이샤트와 아드니엘을 해할 수 있는 자를 상정할 수나 있을까.
‘마왕이라도 강림하지 않는 이상 어림도 없지.’
일평생 악마라면 치를 떨다가 이제 와 대악마의 보증에 마음을 놓는 스스로가 퍽 우스웠다. 세필리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살다 살다 대악마를 믿게 될 줄이야.’
공녀가 인간의 편에 서 있는 한, 그 대악마의 약속에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낼 수 있었다. 적어도 공녀의 이름을 들먹이며 한 약속을 그가 깨리라고는 상상조차 어려웠다. 표정이 그랬고, 어조가 그랬으며, 그 눈빛이 그랬다. 입매를 쓸던 세필리아는 생각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뭐 있겠는가.
“이 나이쯤 되면 믿을 이 하나 늘어나는 건 그저 기꺼울 따름이지.”
늘 곁에 두는 씁쓸한 증류주 한 잔을 마신 그녀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상소문에 손을 가져다 대던 찰나였다. 갑자기 뭔가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에르카디아의 황제와 황태자, 공작은 모두 아드니엘이 공녀에게 청혼한 것으로 알고 있을 텐데.”
아드니엘에게 직접 물어 그저 공녀가 멋있어 보였을 뿐 혼인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긴 하였으나.
“깜빡 잊고 전달을 안 했네.”
지금이라도 아드니엘이 공녀에게 딴마음 먹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릴까. 그녀는 통신구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살짝 고개를 흔들며 손을 떼어냈다.
“못된 아들내미. 어디 한 번 크게 혼나보라지.”
말 안 듣고 뛰쳐나간 망아지는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한편 이샤트는 쏟아질 듯한 눈을 크게 뜨고 아드니엘의 뒤통수를 찰지게 내리쳤다. 퍽, 참외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좁은 오솔길을 메아리치듯 맴돌았다.
“아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붙이는 바람에, 덜컹 흔들리는 마차 짐칸에서 아드니엘이 데구루루 굴러 땅으로 툭 떨어지는 불상사가 있었다. 다행히 산세가 험해 속도를 최대한으로 늦추었기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에르카디아 영토를 밟는 순간까지 숨어 있으려 했던 아드니엘에게는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내가 보관이랑 옥새 반지까지 줬는데!”
“나도 공녀랑 놀고 싶어.”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가서 또 공녀에게 치근덕대려고 그래?”
그 말에 아드니엘은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어릴 적에 말 한 번 잘못했다고 두 해가 흐른 지금까지 공녀 이야기만 나오면 누나에게 들들 볶이고 있다.
“아니야! 진짜 아니야! 왜 누나만 공녀 친구야? 나도 공녀 친구야!”
“흥. 그거야 공녀가 결정할 일이지!”
이샤트와 같은 방을 쓰면서 더할 나위 없이 가까워진 이벨리아는, 이샤트와 아드니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애정의 차등을 팍팍 티 내곤 했다. 주로 두 장을 넘어가는 이샤트의 편지와는 달리, 아드니엘에게는 내 머리통만 한 대왕 마들렌은 대체 무슨 의미였냐며 묻는 정도의 편지에 그쳤으니까.
“어쨌든 너는 어머니한테 죽었다.”
“누나도 마찬가지야. 보물고 털어온 거 다 봤어.”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이샤트가 망토를 꼭꼭 여미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낮게 이를 갈았다.
“……봤냐.”
“응. 뭐 훔친 거야?”
“별거 아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거야.”
“폐하 보물고에 장난감은 없는데.”
사실 보물고 터는 것 따위 보지 못했다. 그냥 누나라면 왠지 하르벤타의 귀중한 것들 몇 개를 가져다 공녀와 놀 것 같아 떠봤을 뿐인데, 월척이다. 미끼를 덥석 문 이샤트 덕에 약점을 잡은 아드니엘이 씩 웃었다.
“보물고가 워낙 크니까 뭐 없어져도 잘 모르시긴 할 텐데, 하필 여기 목격자가 있네? 내 정직한 성품에 지금 수도로 돌아가면 홀랑 일러바치지 않고선 배길 수 없을 것 같은데.”
“이씨…….”
이샤트가 주먹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절단 떠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셨는데, 보물고를 털었다는 것까지 들켰다가는 강제로 에르카디아에 눌러살게 될지도 몰랐다.
“너 진짜 비밀이다?”
“날 데려가면!”
이샤트가 짜증 난다는 듯 붉은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투덜댔다.
“에이, 공녀랑 둘이서만 알콩달콩하게 놀려고 했는데. 알았어, 같이 가!”
마차 속에 숨어드느라 머리와 옷에 지푸라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아드니엘이 강아지처럼 몸을 푸르르 털었다.
“근데 진짜 보물고에서 훔친 건 뭐야?”
“우린 이제 한배를 탔지?”
“누나는 내가 탈출하는 걸 도운 공범이고, 나는 누나가 보물고를 터는 걸 도운 공범이나 다름없지.”
비밀을 지키겠다는 확언이다. 이샤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망토 자락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 사이로 투명한 호리병이 언뜻 모습을 비췄다. 아드니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고자 눈을 찌푸리자, 이샤트가 망토 자락을 휙 덮으며 고개 숙여 속삭였다.
“외형 변경 마도구.”
“그걸 가져왔어?”
명칭은 마도구이나 생김새는 알약과 비슷하다. 아주 오래전 하르벤타에서 유희를 즐기던 드래곤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것. 한 자루를 만들고 갔다 기록되어 있지만, 시간이 제법 흘러 이제 남은 것은 이 병에 담긴 것 몇 개였다. 게다가 마법을 부여한 지도 몇 세기가 지났으니, 새겨진 세밀한 마법이 흩어지고 일부 재배치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 즉, 과거 원하는 나이로 변화시켜주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거진 복불복이긴 했다. 아드니엘 역시 경계하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낮게 속삭였다.
“그걸로 뭘 하려고.”
“당연한 걸 묻네. 공녀랑 나눠 먹고 놀러 갈 건데.”
“굳이 나이까지 바꿔서 어디 수상한 데를 놀러 가려고?”
“어린아이의 몸으로 갈 수 있는 곳엔 한계가 있잖아?”
“그 한계엔 다 이유가 있지. 함부로 싸돌아다니다가 큰일 당하면 어쩌려고.”
그 말에 이샤트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걱정을 듣는다는 듯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공녀는 정령왕의 계약자야. 거기다 공녀를 졸졸 따라다니는 대악마도 있을 텐데?”
“…….”
아드니엘은 입을 조개처럼 꼭 다물었다. 그렇네. 시장 거리가 아니라 암살자 소굴에 관광을 간다고 하더라도 안전할 구성이다. 놀러 가는 곳에 화산이 터지고 해일이 일더라도 공녀와 누나는 멀쩡히 걸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걱정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묘한 기대감이 메꾸고 올라왔다.
“누나랑 공녀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지금보다 더 어린아이로 변해도 재미있을 것 같고, 어엿한 레이디로 변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뭐로 변하든 에르카디아의 황태자와 대악마가 아주 경악을 하겠지.’
그 표정들을 상상하던 아드니엘이 키득키득 웃었다. 이번 사절단, 역시 따라오길 잘했다. ***
“아기씨. 하르벤타의 황태녀 전하로부터 통신이 왔답니다.”
테사가 들어와 부드럽게 전하자, 책상에서 시무룩하게 편지를 써내리고 있던 이벨리아가 벌떡 일어섰다. 「이샤트가 없는 사절단은 찐빵 없는 팥이야」까지 쓰고 있던 차였다. 이벨리아가 옷자락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편지지가 바닥에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이를 주워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두며 테사가 첨언했다.
“아기씨. 찐빵 없는 팥이 아니라 팥 없는 찐빵이라 하심이 옳습니다.”
“응. 그거! 난 내 팥이랑 통신 좀 하고 올게!”
작은 발걸음이 빠르게도 휴고의 집무실 옆 방, 통신구가 놓인 곳으로 향했다. 이샤트와 통신할 때 항상 사용하던 가장 거대한 원거리용 통신구로 향했으나, 그 통신구는 아무 신호 없이 빛바래 있었다.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엥? 이상하다?”
하르벤타 제국에서 온 이샤트의 통신이라면 마땅히 이 통신구여야 하는데?
“테사가 날 속인 건가? 내 간식 그릇을 빼내려는 계략이었나.”
간식이 위기에 처했다! 황급히 뒤돌아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저쪽 구석에서 잘 쓰지 않는 작은 통신구 하나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응? 왜 이게 반짝이지?”
의아해하며 통신구를 요리조리 흔들어 신호를 연결해보니, 대뜸 나타나는 것은 붉은 머리칼과 녹색 눈. 그리고 소녀치고는 저음의 목소리.
“공녀!”
“이샤트?”
“나 공작저 앞이다!”
“……?”
어디 앞? 이벨리아의 머리에 일순 인지 부조화가 일었다. 잠시 침묵하던 이벨리아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 하르벤타 제국 슈타인 공작저 앞?”
“아니! 에르카디아 제국 아르티나 공작저 앞!”
작은 머리가 갸웃 넘어갔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거 우리 집인데!”
“응, 나 공녀 집 앞이다!”
통신구 안에 싱글벙글 웃고 있는 얼굴이 오늘따라 참으로 미친 것 같았다.
“진짜야? 진짜 우리 집 앞이야?”
“응! 공녀 보고 싶어서 한달음에…….”
“아니, 이 돌아버린 황태녀 같으니라고!”
손에 쥔 통신구를 내동댕이치고 벌떡 일어난 이벨리아가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아빠, 이샤트가 왔대요!”
“그러게 말이다. 재앙이 따로 없지.”
하인들과 하녀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아빠가 잔뜩 귀찮은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아하니 도착 직전에야 기별이 왔나 보다.
“실라페!”
저택 문에서 정원을 지나 바깥 문까지는 한참을 달려야 하는 거리였기에, 이벨리아는 망설임 없이 실라페를 불러 그 위에 잉차 잉차 올라탔다.
[우리 계약자. 많이 컸군. 무거워졌어.]
“레이디에게 무거워졌다는 말은 실례랬어. 달려, 독수리!”
[계약자는 레이디가 아니라 아가인데. 아! 아! 깃털! 당기지 마!]
바람을 가르는 독수리에 올라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평소 휴고와 엘리시아가 엄격하게 금하는 행위였으나 지금 이벨리아에게는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몸집을 키운 독수리의 날갯짓 몇 번에 금세 붉은 머리가 시야에 와닿았다.
“이샤트으-!”
창공에서 들리는 청량한 목소리에 이샤트가 고개를 들자, 맑은 하늘을 휘도는 연둣빛 독수리가 시야에 잡혔다. 곧이어 고도 낮춘 독수리의 등 위에서 이벨리아가 짧은 다리를 바동거려 착지했다.
“공녀!”
이샤트가 와락 달려들어 이벨리아를 끌어안았다. 두 해가 지나 이벨리아보다 조금은 키가 커진 이샤트가 호탕하게 웃음 지었다.
“으하하핫-! 내가 에르카디아의 황제 폐하께 인사를 드리기도 전에 공녀부터 보러 왔지! 우리 공녀는 여전히 작구나!”
“보자마자 사실로 두드려 패면 아파, 이샤트. 아드니엘도 왔네?”
시선을 돌려 이샤트와 똑 닮은 쌍둥이를 바라보자, 아드니엘이 순한 눈을 휘어 접으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얌전한 인사였다.
“공녀, 오랜만이야.”
“응, 오랜만이야! 그런데 둘 다 자리를 비워도 괜찮아?”
“괜찮아. 목숨만 붙어서 돌아가면 돼!”
“그건 내가 보장할게. 내가 이래 봬도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거든! 둘 다 내가 지켜줄 테니 나만 믿어!”
우쭐대는 표정과 말투에 이샤트가 다시 이벨리아를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정령왕의 계약자와 대악마의 보증이라니. 내가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보겠어.”
“응? 대악마의 보증?”
이벨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령왕이야 내가 계약자이니 그렇다 치고, 갑자기 대악마는 왜 나와? 힉. 그 반응에서 말실수를 깨달은 이샤트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이벨리아는 대악마가 하르벤타 제국으로 쳐들어와 자신을 보내라며 황제를 협박했던 일을 모르는 듯했다.
“아니이…….”
“우리 요망한 토끼가 또 나 몰래 뭘 했구나.”
“그게…… 공녀가 온종일 시무룩하게 편지만 쓰고 있다면서 우리 어머니한테 날 에르카디아로 보내라고, 그러면 내 안전은 보장하겠다고…….”
“이 토끼!”
이벨리아가 두 손을 불끈 쥐자 혹시라도 악마에게 불똥이 튈까 걱정한 이샤트가 두 손을 황급히 내저었다.
“공녀한테 미리 얘기하지 않았다고 해서 너무 기분 나빠하진 마. 그 악마는 그냥 네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자꾸 기특한 짓을 나 몰래 하는 건 어디서 배운 거지?”
아가레스가 들었다면 내 모든 건 네게서 배운 거라며 답할 물음이었다. 한편 이샤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벨리아를 바라봤다.
‘기특한 짓…….’
악마의 호의를 고작 기특한 짓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 인간은 세상천지에 이 작은 친구 하나뿐일 것이었다. 세태 파악에 능한 황태녀는 오늘도 다짐했다.
‘역시 공녀한테 잘 보이는 것이 오래 살아남는 방법이야.’
*** 그리고 오랜만에 재회한 이샤트와 이벨리아의 바로 옆. 아드니엘은 복화술로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
“누나. 공녀. 살려줘.”
그러나 놀랍게도 이벨리아와 이샤트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둘만의 세계에 빠져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누나와 친우를 보며 아드니엘의 심장이 타들어 갔다.
“누나. 공녀. 여기 좀 봐줘.”
다시 외쳐보지만 역시 반응 없다.
“나 지금 척살 당할 위기에 처한 것 같은데.”
아드니엘은 시선을 흘끔 올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아르티나 공작, 소공작, 공자를 재빠르게 훑고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먹잇감을 탐색하듯 말없이 응시하기만 하던 세 부자가 성큼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분명 음성만 들었을 뿐인데 왜인지 목덜미를 물어뜯기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아드니엘은 자신도 모르게 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황자 전하시군요.”
“우리 아가에게 부인이 되어달라 하셨다던.”
“혹시 그 생각 아직도 변함없으신지?”
“과거 인마전쟁 때 붉은 머리칼을 가진 마족들을 제법 많이 베었었지요. 아, 그냥 옛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아버지, 자칫 황자 전하와 마족을 헷갈리면 큰일이겠습니다.”
“얼마 전 악마 목을 베고 온 제가 봐도 헷갈리기는 합니다만.”
그렇지 않아도 소심한 아드니엘의 위로 세 부자의 살기가 쏟아져 내렸다.
“누……누나. 공녀. 나 진짜 죽을 거 같은데?”
열심히 복화술로 웅얼대봤지만 역시 돌아오는 구원은 없었다. 휴고가 머리를 쓸어올리려고 손을 휙 들자, 지레 놀란 아드니엘이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차가운 시선이 아드니엘에게 내리꽂혔다.
“안 때립니다. 깔끔하게 죽이면 죽였지.”
아드니엘은 창백하게 질려가며 속으로 한탄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어머니 말씀 들을걸…….’
***
“대련이나 하죠. 진검으로.”
“공작은 소드마스터 아닌가!”
“그럼 제가.”
“소공작은 악마 목을 베고 왔다며!”
“아, 까다로우시네. 그렇다면 제가 상대해드리겠습니다.”
“……공자 검 잘 쓴다는 것도 내 익히 다 들었는데!”
세 부자가 아드니엘에게 진검을 내던지며 대련을 청하고, 아드니엘은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나던 그때. 진정 척살 당할 뻔한 아드니엘을 살린 것은, 제국 유수의 귀족들 모두 사절단 맞이를 위해 황궁으로 들라는 황명이었다.
“운이 상당히 좋으십니다, 황자 전하.”
찌푸린 표정으로 대충 정복을 걸치고 휘적휘적 걸어 나가는 휴고의 뒤로 이벨리아가 바짝 달라붙었다.
“아빠. 아빠.”
“음. 우리 아가.”
“나도 갈래.”
“우리 아가는 왜 가지?”
“황궁에 가서 잘래.”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휴고는 이내 자신이 잘못 들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마 딸은 이렇게 말했으리라.
“아. 황궁에 가서 구경하겠다고.”
“아니! 황궁에 가서 자고 올래.”
아드니엘을 보면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던 휴고가, 어린 딸의 그 말에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외박을 하겠다고!”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