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동대륙의 사절단2021.12.09.
무더운 여름이었다.
“앗, 뜨거!”
이벨리아는 평소처럼 비밀기지에 놓인 돌에 주저앉았다가 화들짝 놀라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햇빛 때문에 돌이 뜨거워졌어!”
엔리르도 앞발을 돌에 척 대보더니 후다닥 떼어 탈탈탈 흔들었다.
“들어가자. 꼬맹이. 오두막 안에 얼음 가져다 뒀어.”
“얼음!”
아가레스의 말에 호다닥 오두막 안으로 뛰어 들어간 이벨리아는 마치 침대처럼 거대하게 놓인 얼음에 벌렁 드러누웠다.
“흐아- 난 여름이 싫어!”
“나도. 난 털도 있잖아.”
“맞아. 엔리르는 나보다 두 배는 더 더울 거야. 털옷을 입고 있으니까.”
이벨리아가 엔리르를 번쩍 들어 얼음 위에 내려두자, 엔리르가 얼음을 까득까득 씹어먹기 시작했다. 그때. 어김없이 정찰용 매 라르고의 호출을 받고 달려온 루드비히가 오두막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넌 이제 진짜로 일할 때 좀 되지 않았나.”
“에드윈이 헛발질 몇 번 거하게 하는 바람에 당분간 한가하다. 내 일의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내 이복동생을 처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라.”
“어려우면 내게 맡기고. 그 건이면 대가 없이 도와줄 의향 있다.”
“반은 피를 나누어 가진 이복동생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내가 처리해야지.”
얼음 위에 널브러져 있던 이벨리아는 등이 차가워지자 데굴데굴 몸을 굴려 배를 깔고 엎드렸다. 아이는 사랑하는 두 친구들과 아가 용을 보며 재잘재잘 말문을 열었다.
“근데. 데퐁트 후작 말이야. 진짜 죽은 걸까?”
“기사들이 시신을 확인했다고 하니, 진짜 죽은 게 맞을 거야. 왜?”
이벨리아가 쿠션 대신 엔리르를 꼭 끌어안으며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묻었다.
“그냥. 뭔가 허무해서.”
여러 번 목숨을 노린 자이니만큼 아주 오래 대적할 이로 여겼다. 심지어 연금술사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심증도 가지고 있었으니까. 후작의 죽음으로 인해 영식인 리카드와 영애인 세레스가 더욱 이를 드러내겠으나, 아무래도 데퐁트 후작이 버티고 있는 것과는 그 무게를 달리했다. 뭐랄까. 늘 시야를 방해하던 거대한 고목이 하루아침에 뎅겅 잘려 사라진 느낌이었다. 옆에 놓인 오렌지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며 이벨리아가 다른 주제를 꺼냈다.
“있잖아, 요즘 수도에 흉흉한 괴담이 나돈대.”
“괴담? 뭔데?”
“귀신이 보석을 태우고 악몽을 꾸게 만든대! 아주 못된 귀신인가 봐!”
잠시 시선을 마주친 아가레스, 엔리르, 루드비히는 단호하게 이벨리아에게 말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그래. 이유 없는 귀신은 없어.”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러고 돌아다니겠나.”
“……그런가?”
친구들에 한해서는 귀가 상당히 얇은 이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본래 괴담이라 함은 사람의 흥미를 끌게 마련. 소문이 궁금한 듯 이벨리아가 더 물어볼 기미를 보이자, 루드비히는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땅 도둑. 그거 들었어?”
“응? 뭐?”
이젠 배까지 차가워진 이벨리아가 몸을 데굴데굴 굴려 바닥으로 착지했다.
“사절단은 두 해에 한 번씩 방문하지. 에르카디아와 하르벤타가 번갈아 말이야.”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이벨리아가 발딱 일어서 두 주먹을 꼭 쥐고 외쳤다.
“……설마!”
“그래. 동대륙에서 사절단이 온다더군.”
“혹시 이샤트는? 이샤트도 온대?”
“걔는 황태녀잖아. 황태녀는 나라를 비울 수가 없지. 혹시 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힝.”
이벨리아는 다시 꼬물꼬물 자리에 엎드렸다.
“이샤트 없는 사절단은 찐빵 없는 팥이야.”
“팥 없는 찐빵이라고 해야 맞지.”
“응. 그거.”
아무리 생각해보더라도 이샤트가 오기는 조금 어려워 보였다. 실제로 저번 사절단에도 이 식량 도둑은 가지 못했었으니까. 이벨리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샤트에게 통신구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통상 귀족 가문이 타 대륙과 연결이 가능할 정도로 거대한 통신구를 비치하고 있기는 쉽지 않았다. 긴급하게 장거리 연락을 취할 경우 따로 연락소를 방문하는데, 이는 통신구 하나의 금액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르티나 가문 정도 되면 통신구 금액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기에, 휴고의 집무실 바로 옆 방에는 거리별 통신이 가능한 통신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벨리아는 냉큼 달려 올라가 방에 들어간 다음 제일 커다란 통신구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얼른! 일해라, 통신구!”
연결이 가고 있다는 신호음이 몇 번 들리더니, 하르벤타 황태녀의 연락소를 담당하는 노신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 아. 에르카디아 제국의 공녀님이십니까?”
“네! 황태녀님은요?”
“말씀 편히 하시라니까 항상 그리 높이십니다. 황태녀 전하의 둘도 없는 친우께서 제게 말을 높이시면 제가 경을 칩니다.”
“응, 황태녀님은?”
이미 시도 때도 없이 통화했던 터라, 노신은 당황한 기색 없이 그렇지 않아도 다른 이가 황태녀 전하를 부르러 갔다고 알렸다. 그렇게 잠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통신구에 이샤트의 붉은 머리칼이 가득 들어찼다.
“공녀!!”
“이샤트!!”
와락 통신구를 붙잡은 이샤트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공녀! 공녀! 우리 제국에서 사절단이 간다!”
“응! 들었어! 그런데 이샤트는 못 온다며…….”
삽시간에 시무룩해진 황금빛 머리칼의 친구를 바라보며, 이샤트가 안절부절못하며 달래기 시작했다.
“아니, 나는, 아무래도 황태녀니까, 조금은 가기 힘들지.”
“나도 이제 아가가 아니어서 잘 알고 있어. 그래도 이샤트 보고 싶었는데.”
“내가?”
“응. 같은 잠옷도 입고 같이 잠도 자고 같이 비밀기지도 구경하고 같이 이바스 저택도 가면 참 좋을 텐데.”
“진짜 재밌겠다……. 공녀, 진짜 내가 보고 싶어?”
“많이 많이.”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던 이샤트가 녹색 눈을 도로록 굴리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녀. 서대륙에서 딱 기다려.”
“응?”
씨익. 장난스러운 미소가 통신구를 가득 채우더니 이내 통신이 뚝 끊어져 버렸다.
“뭐야. 얘 설마 오려는 건 아니겠지?”
하긴. 오려고 애를 써봤자 동대륙 황제가 보내줄 리도 없다. 하나뿐인 황태녀 잘못되면 후계자 문제는 어쩌려고 보내주겠는가. 비록 아드니엘이 있다고는 하나, 유약하고 소심한 황자는 황위를 내어주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다. 타대륙 유일한 친구인데 너무 높은 지위에 있다 보니 만나기도 영 쉽지 않다.
“이샤트한테 편지나 써서 보내야지.”
이벨리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 동대륙에서는 서대륙으로 가는 사절단 준비로 한창이었다. 하르벤타의 황제는 이번 사절단을 예년보다 훨씬 성대하게 준비하라고 명했다. 이번 사절단은 단순히 교류를 넘어, 에르카디아의 공녀가 정령왕을 소환하고 악마와 인간 사이 평화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교두보를 내린 것을 축하하는 의미를 겸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동대륙 황궁의 앞마당에는 서대륙으로 가져갈 각종 특산품, 보물, 비단 등이 가득 찬 수레가 셀 수 없이 늘어섰다. 누가 사절단원으로서 서대륙에 다녀올 것인지에 대해서도 큰 논쟁이 일었다. 표면상으로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엄밀히 말하면 타국, 더 나아가 평하자면 유일하게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적국. 그런 연유로 통상 기피되던 업무였으나, 이번만큼은 정령왕과 대악마라는, 평생 가도 한 번 보고 죽기도 힘든 존재들이 연관되어 있으니, 너도나도 자원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유는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이샤트와 아드니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간다!”
“어차피 어머니께서 누나는 안 보내주실 거야. 내가 갈래.”
“본래 황족은 사절로 가지 않는다. 너나 나나 마찬가지야.”
“그래도 황태녀보단 황자인 내가 가능성이 높겠지.”
“너 어릴 땐 안 그러더니 점점 기어오른다?”
“나도 공녀 보고 싶어.”
그 말에 이샤트가 아드니엘의 엉덩이를 뻥 차버렸다. 감히 이게!
“너 아직도 포기 못 했어? 우리 공녀를 어디 너 같은 뺀질이한테 갖다 대!”
“……어쨌든 누나는 황태녀잖아. 혹시라도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고양이의 그것을 닮은 이샤트의 눈매가 사르르 접혔다. 이샤트는 황가의 후계자를 의미하는 작은 보관을 머리에서 벗겨내고, 옥새를 겸하는 반지를 손에서 빼냈다. 이 제국 황실. 정통성을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보물들이 한낱 장신구처럼 아드니엘의 발치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누나?”
“자. 나 못 돌아오면 너 해라. 황제.”
황태녀 파업이다! 이샤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망토도 벗어 던져버렸다. *** 곧바로 황제를 찾아간 이샤트는 냅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빌기 시작했다. 아무리 잘못해도 고개만 빳빳하게 세울 뿐이었던 딸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니, 황제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폐하. 저를 사절단에 넣어주십시오.”
“황태녀는 국본(國本)이다. 제국의 근본이 제국을 떠나 어딜 간단 말이냐. 불허한다.”
“서대륙은 우방이자 적국입니다. 많이 알아두어 나쁠 것은 없지요. 차기 황제가 되려면 오히려 마땅히 거쳐야 할 절차라 할 것입니다.”
“네가 언제부터 그리 정진하였다고. 그저 공녀가 보고 싶은 것 아니더냐.”
“…….”
예리하시긴. 고개 들어 흘끗 보니, 여전히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황제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자신의 어머니지만 이럴 때는 참 바늘 들어갈 틈 하나 없는 분이시다.
‘어쩌지. 어떻게 하면 우리 공녀 보러 갈 수 있지.’
이샤트가 녹색빛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고민하던 찰나였다.
“황제.”
바로 뒤에서 어둠을 거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겁고 낮은 것이, 등 하나 없는 칠흑을 연상케 했다. 여전히 고개를 조아린 채로 이샤트가 귀를 쫑긋 세웠다.
‘나 이 목소리 아는데! 이거 공녀 옆에 그자인데!’
헷갈릴 수가 없는 음성. 영민한 이샤트는 잊지 않고 있었다. 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서류만 바라보던 황제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피곤하다는 듯 붉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면서.
“그대 때문에 온 대륙이 들썩이고 있어.”
“바라던 바라.”
“기어이 공녀 곁에 머물기로 했군.”
정체를 공표하지 않고 곁에 머무는 것과 온 대륙 역사서에 남도록 이를 포고하고 머무는 것은 결이 달랐다. 전자가 긴 삶을 지루하게 여기는 이들의 한낱 유희로 치부될 수 있다면, 후자는 진명과 그 모든 발자취가 기록되더라도 곁에 있겠다는 진심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황제와 악마는 그 의미와 깊이를 모르지 않았다. 아가레스가 변화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 또한 바라던 바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권하며, 세필리아가 물었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일인가?”
아가레스는 바닥에 주저앉은 이샤트를 내려다봤다. 용건은 이것 하나이니 처리하고 얼른 돌아갈 생각이었다.
“황태녀. 서대륙으로 보내.”
“황태녀의 안위는 국가 중대사다. 보장되지 않는다면…….”
“보장하지. 내가.”
“……그대가? 왜?”
“이브가 종일 시무룩하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게 전부인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지?”
범접할 수 없는 팔불출력. 공녀가 시무룩해 한다는 말 한마디에 국경을 넘나들어 타국 황제를 협박하는 기세. 살짝 입을 벌린 황제를 향해, 아가레스가 얼른 답하라는 듯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저거 예전에 뱀 잡으라고 협박하던 그 눈이다. 여기서 내가 안 된다고 하면 바로 제국 반 토막 낼 기세야.’
이거, 칼라일이 참 큰 패를 쥐었다. 세필리아가 한탄처럼 내뱉었다.
“그대. 동대륙으로 오지 않겠나? 더 높은 작위와 더 많은 부를…… 됐다, 내가 말하면서도 허무맹랑하군. 그대는 공녀가 없으면 오지 않겠지.”
당연한 말이다. 답할 가치 없는 말에 아가레스는 그저 돌아섰다. 황제의 집무실을 나와 이벨리아에게 줄 꼬치를 사 가려고 황궁 바깥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작은 발소리가 도도도 들려왔다.
“이봐!”
“……?”
“공녀의 친구! 고맙다! 덕분에 내가 공녀를 보러 갈 수 있게 되었어!”
“……요즘 것들은 개나 소나 다 반말이군.”
차가운 언사에 깜짝 놀란 이샤트는 이내 수긍했다. 항상 공녀와 같이 있어서 몰랐던 것뿐. 이자는 오히려 따뜻한 것이 어울리지 않는 대악마다. 적도 아닌데 적으로 돌릴 필요 없다. 자존심 부릴 상대가 아닌데 그럴 필요도 없고. 이 악마가 굳이 걸어가는 이유를 재빠르게 눈치챈 이샤트가 생긋 웃으며 태세를 전환했다.
“저번 사절 때 공녀가 우리 황궁 꼬치를 참 좋아했었는데. 꼬치 좀 가져가시면 공녀가 좋아하지 않을까요?”
아가레스는 묘한 표정으로 이샤트를 내려다보다가, 주방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개나 소라는 말은 취소하지. 제법 현명하군.”
아가레스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이샤트가 뒤를 슬쩍 돌아보며 씩 웃었다.
“제가 간다는 건 공녀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놀라게 해주고 싶거든요. 모르고 있다가 제가 짠 나타나면 공녀가 훨씬 기뻐할 거예요.”
“너 꽤 괜찮은 황제가 되겠어.”
*** 몇 주 뒤. 당당히 사절단의 주역으로 선 이샤트와 달리, 아드니엘은 몰래 마차 짐칸에 숨어들었다. 엉덩이를 쑥 집어넣고 짚으로 몸 위를 토닥토닥 덮은 다음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누우니, 그 누구도 쉽게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감쪽같았다. 겁이 많은 아드니엘은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히잉,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애써 틀어막고 이를 악물었다.
‘나도 공녀 보러 갈 거야. 나도 가서 뱀 때려잡는 공녀랑 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