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전사(戰死)2021.12.06.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바람에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척추에서 곧바로 뽑혀 나왔다.
“돌팔이…… 땡중…….”
긴 정령생 처음으로 자신에게 직접 내리꽂히는 과격한 언사에 엘라임이 입을 틀어막았다. 곁에 서 있던 아가레스는 곤히 자는 어린 친구에게 방해가 될까 소리를 죽이고 큭큭 웃었다.
“우리 꼬맹이가 실체를 파악하는 눈이 제법 뛰어나지.”
“…….”
맞긴 했다. 사기나 다름없는 특수효과였으니까. 둘도 없는 계약자의 저 정도 귀여운 투정은 전혀 기분이 상할 것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 아가 계약자는 아직 아가인데! 미간을 찌푸린 채로 턱을 쓸던 엘라임이 의문을 표했다.
“우리 아가 계약자가 이런 말들은 다 어디서 배운 건가…….”
“우리 꼬맹이 정신 교육에 해가 되는 것들이 몇 있다.”
“그게 누구지.”
당장이라도 대해(大海) 속에 처박을 것처럼, 엘라임의 주변에 푸른 물이 위험스레 넘실댔다.
“감히 우리 아가 계약자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면 없애야 마땅하다.”
상성이 좋지 않은 힘이 방안을 가득 메웠으나, 아가레스 정도의 악마라면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산발하는 자연력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넘기며 아가레스는 이벨리아가 뻥 차버린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번 없앨까 했는데, 그랬다간 이브가 슬퍼할 자들이라.”
“미움받을까.”
“아주.”
“본디 인간 아가들은 때로 거친 말도 배워가며 자라야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지.”
신속한 태세전환에 아가레스가 픽 웃으며 세 번째로 떨어진 이벨리아의 이불을 주워 덮어주었다.
“으으응-!”
덥고 답답한지 이불은 올라가자마자 매몰찬 발차기에 다시 뻥 떨어져 내렸다. 네 번째로 이불을 주워 올리는 아가레스를 보며 엘라임이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아가 계약자의 잠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군.”
그 말에, 옅게 웃고 있던 아가레스의 입매가 삽시간에 굳었다. 무표정한 눈매가 적을 가늠하듯 날카로운 예기를 담았다.
“예나 지금이나……? 본 적이 있나, 감히?”
금방이라도 피를 볼 것처럼 목 바로 아래 와닿는 마기에 엘라임이 손을 휘저으며 투덜댔다.
“내가 아무리 정령이라 한들 예의를 모르진 않는다. 내 아가 계약자가 아주 아가일 적에 잘 지내나 잠시 와본 것뿐이야.”
“우리 꼬맹이는 지금도 아가다.”
“지금보다 더 아가일 때. 아주 아가일 때. 아직 걷지도 못할 때.”
“아주 아가인 이브를 어떻게 알고.”
그 말에 엘라임이 고개를 기울이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 말을 안 했었나.”
“뭘.”
“내 아가 계약자가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게 안배한 이가 나다.”
“……뭐?”
다시 이불을 덮어주려던 손이 뚝 멈췄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기실 소중한 이의 전생을 상정해본 적도 없다. 아가레스에게는 그야말로 폭탄 발언이었다. 그가 자세히 설명하라는 듯 턱짓했다. 혹시 이벨리아가 깼나 흘끗 보던 엘라임은, 어린 계약자가 여전히 도롱도롱 코를 골며 자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밖은 여전히 연회의 여운으로 밝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굳게 닫힌 창을 타고 어렴풋이 들려오고. 모든 것을 관조하듯 휘영청 떠 있는 밝은 달. 엘라임이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그날과 참 닮았다.
“내 아가 계약자는 전생에 운다인을 구하려다 죽었다.”
“…….”
아가레스의 표정이 비견할 데 없을 정도로 서늘해졌다. 잇새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리 지금의 이브가 아니라 전생의 이야기라 한들, 소중해 마지않는 이의 죽음이 거론되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엘라임에게도 여전히 아픈 주제였다. 그는 침대를 사이에 두고 아가레스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내 아이를 구하려다 생을 버렸어. 그렇게 죽어놓고 한다는 소리가, 운다인이 잘 돌아왔으면 됐다고. 그러더군.”
“…….”
“눈도, 영혼도, 참 예뻤어. 본 적 없는 금빛으로 산개하는 게 말이야.”
아가레스의 턱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어린 친구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전 생에도 지금과 같이 감히 그 누구도 엄두 내지 못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내 아이를 구하려다 죽었으니 나는 마땅히 생을 주었고.”
엘라임은 얼굴이 간지러운지 손을 올리는 이벨리아를 대신해 볼에 붙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떼어주었다.
“곧은 눈에 홀려 나도 모르게 이리 진한 인장을 남겨버렸지.”
“…….”
아가레스에게는 또 다른 생소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어린 친구를 알게 된 후로 배운 적 없는 감정들이 시시때때로 그를 괴롭혔다. 이어지는 엘라임의 말은 그를 저미듯 아프게 만들었다.
“제법 외로웠는지, 다시 태어난다면 가족들의 사랑을 받게 해달라 청하더군.”
“……사랑을.”
그가 멍하니 따라 읊조렸다. 죽은 와중에도 사랑을 받게 해달라는 게 부탁이라면. 너는 대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던 걸까. 지금은 괜찮을까. 더는 외롭지 않을까. 네가 그때 원하던 그만큼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는 걸까. 슬프기도, 애통하기도 한 그 모든 색채의 감정들이 섞여 그의 심장 언저리를 따끔히 맴돌았다.
“굳이 내 안배가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어. 이리 따뜻한 아이를 감히 사랑하지 않을 이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힘을 쓰지 않았다며, 엘라임이 픽 웃음 지었다. 아가레스는 곤히 잠든 어린 친구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은 몰랐던, 그리고 지금도 알지 못하는 친구이자 구원자의 과거. 그가 없는 그 어느 시간을 이 작은 발로 혼자 걸었을 것을 생각하니 바알처럼 공간을 넘어 다니지 못했던 것이 처음으로 후회됐다. 만일 내가 공간을 넘었다면 우연이든 운명이든 중력에 이끌리듯 너의 세상으로 갔을 테고. 그랬다면 너의 길이 조금 더 안온할 수 있도록 함께 걸을 수 있었을 텐데. 한참 이벨리아를 내려다보던 아가레스가 작게 속삭였다.
“네 정령을 구하려다 이브가 죽…… 아니, 이브의 전생이 죽…… 아니, 잘못되었고, 그래서 네가 이브를 이곳에 다시 태어나게 했다는 말이지.”
“그래.”
“널 죽이고 싶은데, 또 고맙기도 하군.”
“……편차가 너무 큰 것 아닌가.”
“일단 죽이고서 네 무덤에 대고 고맙다고 말하지.”
거세게 휘몰아치는 마기에 엘라임 역시 기세를 끌어올리려다가, 소중한 아가 계약자가 단잠을 자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항복하듯 두 손을 든 채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홀로 남은 아가레스는 평온하게 잠든 이벨리아의 코를 살짝 건드렸다.
“히잉…….”
깼나 싶어 손을 내리고 쥐 죽은 듯 가만히 서 있는데.
“내 토끼…… 개롭히면 가만 안 도…….”
“꿈은 좀 편안히 꾸지.”
무슨 꿈을 꾸길래. 꿈속에서조차 너는 나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그 따스함을 안겨주려 동분서주하고 있나 보다. 넌 내가 없는 시간, 없는 곳에서도 여전히 훈풍이었겠지. 모진 풍파 홀로 견디면서도 그저 너다웠겠지.
“힘들었을까.”
“우웅…….”
작게 흐르는 잠꼬대가 마치 그렇다 답하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쓰려왔다. 함께하지 못했던 발자취를 마음으로나마 좇으며, 만월 아래 악마는 작게 맹세했다.
“같은 길을 걸을게. 항상.”
*** 다음날 오전.
“오늘 날씨가 왜 이래? 덥고 축축해.”
어제 연회의 여파로 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이벨리아가 운디네를 불러 물었다. 운디네가 이벨리아의 곁에 머무는 습기를 말려 쾌적한 공기를 만들어주며 답했다.
[상급 정령님들이 아주 화가 나셨거든!]
“왜 화가 잔뜩 났대?”
[어제 공작저를 불 회오리로 예쁘게 장식한 건 정령들인데, 그게 그 무서운 악마가 현현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일레스트와 피닉스가 만들어낸 화염의 회오리는 누가 봐도 정령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악마의 권능으로 보였으니까.
[상급 정령님들은 똥은 내가 싸고 박수는 왜 악마가 받냐고 화를 내고 계셔.]
상급 정령들도 자기들 공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같구나. 이벨리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한편 엔리르는 그 옆에서 석상처럼 위엄 있게 앉아 있었다. 그래봤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봉제 인형만큼 작았지만, 표정만큼은 제법 엄격했다.
“엔리르. 왜 그렇게 앉아 있어? 이리 와서 같이 낮잠 자자.”
늘 살랑이며 이불 속으로 쏙 들어왔던 것과 다르게, 오늘만큼은 단호한 앞발이 척 거절을 표했다.
“나는 마지막 비밀이야.”
“……?”
“나는 마지막 남은 보루야.”
“……우리 아가 용 갑자기 왜 이래?”
마침 간단히 먹을 수프와 부드러운 빵을 트레이에 받쳐 들어오던 테사가 살짝 귓속말을 했다.
“어제 아기씨께서 잠드시고 난 후에, 마님께서 용님을 부르셨지요.”
“엄마가? 왜?”
“아기씨 곁에 머무시는 분이 악마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 이제 마지막 남은 비밀이자 보루는 용님밖에 없다고 하셨답니다.”
뛰어난 청력으로 귓속말을 들은 엔리르는 가슴 털을 더욱 부풀리며 날개도 활짝 폈다. 앞다리를 쭈욱 뻗으니 인형만 한 덩치가 쿠션만큼은 되어 보였다.
“나는 누나의 최종 비밀 뭐 그런 거야.”
몸집이 꽤 하찮긴 해도 어쨌든 용은 용. 이벨리아와 테사는 눈을 마주치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맞아. 엔리르가 이제 내 마지막 남은 비밀병기네.”
그 말에 엔리르의 꼬리가 사정없이 살랑댔다.
“내가…… 비밀병기……!”
비밀기지에 가서 황태자와 악마에게 꼭 말해줘야지. 엔리르는 새로 배운 단어를 머릿속으로 몇 번 되뇌었다. *** 며칠 뒤.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하나 돌았다. 무작위의 귀족들 자택 침실. 전조 없이 나타난 시뻘건 화염이 이를 드러낸 용의 모습으로 나타나 넘실거리더니, 가장 값비싼 물건들 몇 개를 형체도 남겨두지 않고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화염이 나타난 가문의 귀족들은 꿈자리가 뒤숭숭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하루하루 말라가기 일쑤라는 소문도 얹어졌다. 더 나아가 가문 영지의 은밀한 비리 또는 아무도 모르게 덮었던 범죄 행각들을 적은 양피지가 마치 경고처럼 방 안에 놓여 있었다는 소문도 살을 불렸다. 그리고 이 흉흉한 수도 괴담의 근원들은 현재 모두 비밀기지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제대로 했겠지. 용.”
“보석을 보는 내 눈은 정확해. 내가 잘 태워버렸어. 그러는 악마는.”
“꽤 쓸만한 부하가 하나 있지. 제대로 처리한 모양이다. 넌.”
“내 부관은 뒤를 캐는 데 소질이 있지. 잘 처리했다.”
대악마와 용, 황태자가 만든 살생부에는 처리를 뜻하는 줄이 착실하게 그어졌다.
“자, 오늘 밤 할당은 다섯이다. 부지런히 돌도록.”
감히 이브에게 청혼서 비스름한 서신을 보낸 이들은 대가를 치러 마땅했다.
*** 이 제국 단 하나뿐인 공녀가 무려 정령왕의 계약자가 된 것으로도 부족해서, 동(東)마계의 지배자까지 곁에 두었다는 소식은 날개 달린 듯 퍼져나갔다.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기에, 이를 차치한 다른 소문들은 모두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제국 신문은 연일 아르티나 가문의 행보를 1면 헤드라인에 실었고. 가판대마다 남은 신문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진 행렬이 이어졌다. 그렇게 모두가 아르티나 가문의 행보에 주목하는 와중. 아르티나 아닌 다른 가문의 소식이 1면에 대서특필되었다. 연회 이후 무려 열흘 만이었다. 「데퐁트 후작, 블라고 산맥 방어전에서 왼팔과 오른쪽 눈 잃어.」 제국의 최고위 귀족이 불구가 되었다는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 새로운 소식을 담은 신문이 제국 전역을 뒤덮었다. 「데퐁트 후작,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