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사교계 데뷔 에스코트는 누가?2021.11.29.
그들이 아껴 마지않는 아기씨의 끌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섬뜩한 표정으로 이를 갈고 있던 아르티나 기사단이 다가와 데퐁트 후작가 일원들의 양팔을 잡았다. 헤롤드와 알렉이 세레스의 팔을 잡으려 하자, 세레스가 거칠게 뿌리치며 알렉의 다리를 구둣발로 차버렸다.
“놔! 어디 감히 천한 기사 따위가!”
제법 매섭게 찼는데도 알렉의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자, 세레스가 이번에는 뺨을 올려붙이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이벨리아가 조금 더 빨랐다. - 짜악. 예의 없는 기사의 뺨을 치려 했건만. 부지불식간에 돌아간 자신의 뺨을 붙잡고 세레스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이벨리아를 노려보았다.
“공녀님!”
“감히 내 앞에서 내 기사들에게 말 함부로 뱉지 마. 헤롤드와 알렉 덕에 네가 두 발 뻗고 잠을 잔 세월을 생각해야지.”
“아기씨…….”
“뭐야, 나 또 울컥하려고 해. 우리 아기씨…….”
“시끄러워. 얼른 내쫓기나 해.”
헤롤드와 알렉이 감격한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먹거리자, 괜히 민망해진 이벨리아가 볼을 붉히고 문밖을 가리켰다. 그렇게 데퐁트 후작과 영식, 기절한 후작부인과 세레스까지. 후작가의 일원들은 말 그대로 넋이 나간 상태에서 끌려나갔다. 그리고 군 총사령인 휴고의 엄명에 따라, 후작부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 일원은 곧바로 치열한 접전이 연일 계속되는 전방으로 보내졌다. 생사를 장담하지 못하는 지옥으로. *** 참석자들은 언사를 더욱 조심히 가다듬었다. 생존을 위한 눈치와 아부를 장착한 이들은 이벨리아의 곁에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개중 데퐁트 후작의 백의종군에 드러내 놓고 반대했던 이들도 다를 것은 없었다. 데퐁트 정도의 유서 있는 가문이라면 가주와 소가주가 살아 돌아온다는 전제하에 언젠가는 다시 가세를 회복할 수 있겠으나, 당장 수장이 변방으로 내쫓김에야 당분간은 힘을 쓰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이들은 이 순간 용서를 구하고 면죄부를 받아야 할 이가 누군지를 잘 구분하고 있었다.
“저…… 공녀님. 아까는 감히 소인이 주제도 모르고…….”
“송구합니다, 공녀님. 아르티나에 대해 불순한 오해를 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반면 애초에 아르티나의 편에 서서 모함임을 소리 높여 외쳤던 이들은 당당한 표정으로 이벨리아의 곁에 섰다.
“어흠. 거 애당초 말도 안 되는 모함에 이리 홀랑 넘어들 가셔서야, 원.”
“조금이라도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르티나에 원대한 뜻이 있었음을 짐작하기엔 어렵지 않았을 터인데. 어찌 이리들 부화뇌동하시는지.”
그러나 지금 곁에서 살랑대는 이들 역시 조금 전에는 일말의 의심이나마 비췄던 것을 이벨리아는 직접 목격했었다.
“아하하하-!”
서로 살겠다며 몰려드는 작태가 퍽 우스꽝스러워, 이벨리아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자신들을 향해 웃는 것으로 착각한 참석자들이 따라 어색한 웃음을 뱉어냈다. 왁자한 웃음이 연회장을 휘감자, 조금 전까지 무거웠던 분위기가 단숨에 반전되었다. 용서를 받았다고 착각한 참석자들은 조금 전부터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이 났던 상대를 향해 은근슬쩍 친근감을 표했다.
“이거 말로만 듣던 동(東)마계의 지배자를 직접 보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혹시 추후 저희 가문에서 열리는 연회에 정중히 초청 드려도 될는지요?”
“초대장을 보내면 찢어버리겠다.”
“아이고, 그렇다면 찢으실 수 없도록 번쩍번쩍한 황금으로 만든 초대장을 보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그대를 찢겠다는 말이었는데. 그대도 황금으로 칠갑하고 기다리던가.”
“끄흡.”
초대를 운운하던 귀족이 딸꾹질하며 물러나자, 술을 꽤 마셨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귀족 하나가 다른 유혹을 던졌다.
“저희 가문 영지에서는 특출난 술이 제조되지요. 혹시 술을 즐기시는지요, 루페르트 백작?”
“즐긴다.”
“오오! 그렇다면 언제 한 번 저희 영지로……!”
“특히 인간으로 담근 술을 즐기지.”
“어헉.”
술을 운운하던 귀족은 황급히 꼬리를 내리고 다른 귀족들 사이에 숨어들었다.
‘엥.’
이벨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가레스를 바라봤다.
‘내 토끼가 왜 저렇게 귀족들을 뒷발차기로 뚜드려 패듯 난장을 피우는 거지.’
그 내심이 감히 이벨리아를 의심한 귀족들에 대한 살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벨리아가 알 리 없었다. 아가레스가 다가오는 이들을 모두 베어 버릴 것처럼 노려보고 있던 그때. 왜소한 체격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던 귀족 하나가 쭈뼛쭈뼛 물었다.
“그나저나, 공녀님과 루페르트 백작님은 아주 깊은 연을 맺으셨나 봅니다. 혹시 언제부터 가장 소중한 친우 사이가 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가레스의 시선이 질문한 자를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난생 처음 대악마의 눈빛을 마주한 귀족이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너. 이름이 뭐지.”
“예, 예? 제가……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니, 감히 두 분의 관계를 여쭈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허리를 마구 숙이는 이를 향해, 아가레스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법 보는 눈이 있군. 나는 현명한 자를 아낀다.”
“예?”
“가서 와인이라도 한 잔 들지.”
“……아이고, 살려만 주십시오!”
“냉큼 안 마시면 죽인다.”
드물게 호의를 보인 아가레스가 마치 양을 몰 듯 귀족 하나를 몰고 대작을 시작했다. 중간중간 비밀기지의 공유자, 선물, 꽃잎 등등의 단어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 어마어마한 자랑을 일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참석자들이 눈을 번쩍 빛냈다. 수 세기에 한 번 연을 맺기도 어려운 대악마의 공략 방법을 알아냈다! 그들은 쪼르르 달려가 너도나도 이벨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공녀님께서는 어릴 적부터 아주 영명하셨지요.”
“너도 보는 눈이 있군.”
“루페르트 백작께서 공녀님을 참으로 아끼시나 봅니다.”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이브가 나를 아껴주는 것이 중요하지.”
“공녀님께서는 참으로 의젓하십니다. 날이 갈수록 더욱 말입니다.”
“의젓…… 그렇지. 의젓해.”
이벨리아는 휴고의 무릎에 올라앉아 자신의 작은 토끼가 하는 짓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 토끼와 우리 제국 귀족들의 대동단결 방법이 참 요상하다…….”
*** 잠시 뒤. 이벨리아는 귀족 영애들이 아가레스 주위로 마치 원을 그리듯 몰려드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영애들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른 것을 보니 무슨 감정들인지 알만했다.
‘우리 토끼가 아주 근사하게 생기긴 했지.’
까다롭게 와인을 골라 대작하는 아가레스의 발치에는 손수건이 가득 쌓여갔다.
‘토끼는 토끼라서 손수건의 의미를 모를 텐데.’
귀족들은 조금 더 알아가고 싶은 상대방이 있으면 근처에 손수건을 떨어뜨리고는 했다. 이를 상대방이 주우면 돌려준다는 핑계로 다시 만나는 것이 관례. 즉 아가레스가 앉은 테이블 아래 가득 쌓이고 있는 손수건은 여러 영애들이 사적으로 아가레스를 만나보고 싶다고 표한 것이었다. 감히 누구도 다가가 말을 걸지 못했으나, 환상에 젖은 순진한 영애들에게 아가레스는 제국 귀족들이 갖지 못한 외모, 능력, 재력, 힘, 명성 등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가진 매력적인 사내로 비춰졌다. 그러나 역시 제국의 세밀한 예법 따위 알 리 없는 아가레스는 느긋한 목소리로 툭 던질 뿐이었다.
“바닥에 쓰레기가 많군.”
마음을 담은 징표가 쓰레기 취급을 받음에야 자존심 높은 귀족 영애들로서는 분노할 법 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심장을 움켜쥘 뿐이었다. 그들은 멀리 비켜나 기둥 뒤에 숨어 재잘재잘 속삭였다.
“모르시는 게 당연하지. 내가 제국 문화를 잘 알려드릴 수 있는데.”
“저런 차가운 모습도 멋있어.”
“앞에서 넘어져 볼까? 잡아주시지 않을까?”
“그게 언제 수법인데. 관심 없는 척 도도하게 굴어야 눈길을 줄걸?”
작게 들려오는 소리를 듣던 이벨리아는 여전히 자신에게 눈길을 둔 채 와인을 들이키는 토끼를 마주 바라보았다.
‘우리 토끼 얼굴이 죄다.’
살래살래 고개를 젓던 이벨리아가 마치 품 안의 고양이처럼 휴고의 크라바트 장식을 손으로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그런데 아빠랑 엄마는 알고 있었어요?”
엘리시아가 입에 작은 마카롱 하나를 쏙 넣어주었다. 사르르 짓는 눈웃음을 보니 알고 계셨나 보다. 이벨리아가 순식간에 마카롱을 씹어 삼키고 물었다.
“뭐야! 다들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몰랐던 거야? 토끼가 우리 제국 토끼가 된 거?”
“아니. 아빠도 엄마도 몰랐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휴고와 엘리시아가 서로 시선을 마주치더니 이내 동시에 답했다.
“그 악마 때문에.”
이어진 말조차 누가 금슬 좋은 부부 아니랄까 봐 완전히 같았다.
“딱 알겠더구나. 미리 수를 써둔 것을.”
“토끼는 내가 더 오래 봤는데…… 어떻게 엄마 아빠가 먼저 알았지.”
휴고가 씩 웃으며 이벨리아를 둥기둥기 얼렀다.
“그 악마. 수틀릴 것 같았으면 후작이 ‘저자가 악마입니다.’를 외침과 동시에 목을 날려버렸을 거다.”
“……우리 토끼 그런 토끼 아닌데.”
“네 토끼 그런 토끼 맞다.”
그때, 귀족들 사이에서 자신과 이벨리아가 얼마나 친한지 실컷 자랑을 마친 아가레스가 마치 관성처럼 돌아와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벨리아가 아가레스를 휙 돌아보며 대뜸 물었다.
“너 이 토끼, 그런 토끼였어?”
음? 갑자기 묻는 말에 무슨 취지인지 이해하지 못한 아가레스가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토끼인진 모르겠으나, 네가 그런 토끼라면 그런 토끼인 거지.”
휴고의 무릎 위에서 발버둥 쳐 내려온 이벨리아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위협적인 자태로 섰다. 이 토끼에게는 따질 것이 남아 있다.
“이 요망한 토끼. 나한텐 말도 안 하고 제국 귀족 작위를 날름 받아버렸단 말이지!”
의자에 앉은 아가레스의 시선은 서 있는 이벨리아의 시선보다 높았다. 그는 즉각 의자 아래로 내려와 한쪽 무릎을 꿇고 어린 친구와 시선을 맞추었다.
“미안. 아까 얘기한다는 게.”
“잊을 게 따로 있지!”
“잘못했어. 손들고 서 있을까?”
가늠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대악마가 자신의 반 토막도 채 되지 않는 어린 친우 앞에서 쩔쩔맸다.
“어디서 배웠는지 사과하는 것도 아주 요망한 토끼.”
내 감정의 모든 건 네가 가르쳤어. 아가레스는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어린 친구를 더 화나게 해서 좋을 건 없었다. 이벨리아가 최대한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세상 누구도 무섭다고 하지 않을 표정이었으나, 아가레스에게는 제법 무서워 보이긴 했다. 진짜 토라지기 전에 납작 엎드려서 풀어줘야 했다.
“또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아가레스가 냉큼 잘못을 인정하고 비 맞은 강아지처럼 올려다보자, 본디 친구에 한해서는 솜사탕보다 부드러운 마음이 여지없이 풀려 내렸다.
“약속이야?”
“약속이야.”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결 좋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받았어, 작위?”
“정중하게 요청했지.”
“폐하, 작위를 내려주시옵소서, 이렇게?”
“……충분히 예를 갖췄어.”
황제가 들으면 기함할 소리였지만, 아가레스 입장에서는 유혈사태 없이 작위를 얻어왔으니 충분히 예를 갖춘 것은 맞았다.
“그러면 왜 백작이야?”
“왜? 마음에 안 들어?”
“우리 토끼를 뭐로 보고 고작 백작 지위를 줘? 이 제국 누구보다도 토끼가 강할 텐데! 그러면 당연히 우리 아빠처럼 공작위를 받아야지!”
“네 곁에 서기 부족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받아올게.”
이벨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그딴 건 전혀 상관없다.
“나는 아스가 공작이든 마구간 지기이든 상관 안 해.”
조금 더 작아진 목소리가 흘렀다. 여전히 친우에 대한 따뜻한 걱정을 담고.
“그냥 혹시라도 아스가 자존심 상했을까 봐…….”
“나에게도 이깟 작위는 아무 의미 없어. 그저 네 곁에 서고 싶어 받은 것뿐이니까.”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동의를 구하고서 어린 친구를 번쩍 들어 옆 의자에 앉혀두었다. 옆에 앉아 턱을 괴고 시선을 맞추었다.
“네 에스코트, 이제 해줄 수 있어.”
곧 에스코트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이걸 뜻했구나. 이벨리아가 생글 웃으며 체리 한 알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렇네! 그러면 나 나중에 사교계 데뷔할 때도 아스가 에스코트 해주면 되겠다!”
“……?”
테이블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곁에 앉아 있던 휴고와 아르칸, 세드릭의 표정이 마치 세상의 종말을 목도한 것처럼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가레스 역시 눈을 크게 뜨고 굳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시간이 조금 더 지속되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휴고가 뻣뻣한 목을 돌려 어린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눈빛으로.
“아가. 뭐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응, 형님. 우리가 잘못 들었나 봐.”
이벨리아가 왜 못 알아듣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확인 사살을 가했다.
“내 사교계 데뷔 말이야! 그때도 아빠나 오라버니들한테 에스코트 받기는 싫어!”
세 부자의 표정이 기어이 둘도 없는 보석을 빼앗긴 것처럼 무너져내렸다.
“왜…… 왜?”
“혹시 아빠가 뭔가 잘못을…….”
“이브, 오늘 오라버니 에스코트가 별로였어?”
아빠랑 오라버니들은 낭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이벨리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체리를 데굴데굴 손으로 굴렸다.
“아니이- 사교계에 데뷔할 때는 나도 아가가 아니라 멋진 레이디일 거잖아.”
“그렇지. 이 제국 가장 훌륭한 레이디겠지. 그런데?”
“원래 레이디는 근사한 왕자님한테 에스코트 받는 거란 말이야. 아빠나 오라버니가 아니라. 내가 동화책에서 다 봤어!”
환청인가 싶었는데. 오가는 논쟁에 제대로 들은 것임을 인지한 악마의 표정이 환희로 물들었다. 답답하여 거칠게 풀어두었던 크라바트를 다시 정갈하게 매는 것은 덤이었다.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려면 부족함 없는 신사의 예를 갖춰야 할 테니까. 그 모습을 보던 세드릭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저게! 저게 어딜 봐서 근사한 왕자야! 저자는 악마라고!”
“아가. 네 동화책 속 왕자는 저렇게 시커멓지 않았을 거다.”
“혹시 이크리안이 동화책을 엉망으로 만들어 주었나.”
세 부자의 강력한 반발에 아가레스가 씩 웃으며 이벨리아가 굴리던 체리를 입에 넣었다.
“왕자가 뭐 별거 있나. 근처 왕국 하나 가져오면 그만 아닌가.”
“저 봐! 저 폭력적인 악마!”
“다시 생각해 보거라, 아가. 네 사교계 데뷔 에스코트는 역시 이 아빠가…….”
이벨리아는 새로운 체리를 꺼내 다시 도르르 굴리며 해사하게 웃었다.
“이 옷을 입은 토끼가 가장 왕자님 같아.”
심장에 대못이 박힌 세 부자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한편 아가레스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 사실을 세상 모든 이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을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아냈다. 사교계 데뷔. 인간들에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날이라 들었다. 그런 날에 그 곁을 내준다는 사실이 숨길 수 없을 만큼 기뻤다.
‘그날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해두고. 아니다, 꼬맹이가 입을 드레스와 비슷하게 맞추는 것이 좋겠군. 이브를 태울 마차는 미리 만들어야겠어.’
무려 8년 뒤에 있을 이벨리아의 사교계 데뷔 에스코트에 대한 창대한 계획이 벌써 펼쳐지기 시작했다.
‘감히 우리 꼬맹이를 불온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내 새끼들은 모두 지옥에 가둬버려야지.’
늘 오늘이 마지막이길 원했던 악마에게, 내일을 그릴 또 다른 이유가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