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악마의 주인2021.11.22.
“그걸 이렇게 시정잡배가 강도질 하듯 요구한다고?”
“그 왕관을 빼앗기 전에 작위 주고 달래는 게 서로 좋지 않겠나.”
“……크흠.”
헛기침하며 황제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가레스는 황제가 차를 마시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찻잔 안에 있던 찻물을 모두 말려버렸다.
“매정하긴. 지난번 요구에 빠르게 답해줘서 그건 나름 고맙다만. 이렇게 신속하게 결정 내리게 된 계기를 물어도 되나?”
“오늘 이브의 축하연이 열리지.”
“……설마 지금 당장 작위를 내놓으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맞는데. 내놔, 지금 당장.”
“작위 수여가 어디 시장에서 엿 하나 주듯이 툭 던지면 그만인 줄 아는가? 제국에는 다 법도와 절차가 있는 법일세.”
“약식으로 해. 그런 절차도 있는 거 다 아니 헛소리 그만하고.”
“…….”
분명 있긴 있다. 전시(戰時)나 자연재해 및 그에 준하는 긴급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까지 법도를 차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그럴 때는 예외적으로 황제의 칙서에 따라서 곧바로 작위가 수여되기도 한다.
‘눈앞의 이 악마는 그 자체로 전시이고 자연재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자이니…….’
여기서 작위를 줘버리는 것을 두고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고민을 마친 황제가 답했다.
“내가 그대에게 줄 수 있는 작위는 백작위일세.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그대의 왕관을 빼앗고 황제 자리에 앉으면 되겠군.”
아가레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기를 피워올리자, 황제가 다급하게 손사래 쳤다.
“아니! 좀! 사람이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악마는 대화 상대방을 중간에 없애버리는 습관이 있어서.”
저 표정을 보아하니 진정 금방이라도 목이 날아갈 판이다. 황제가 속사포처럼 이유를 읊었다.
“제국법상 후작위 이상은 황제가 마음대로 줄 수가 없어! 왜 이 제국에 단 하나의 공작과 둘 뿐인 후작이 있겠나!”
“그럼 뭐가 필요하지.”
“전공(戰功). 현 공작가와 후작가는 이 제국의 시초에, 혹은 그 이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가문일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후세에 길이 전해져도 부족하지 않을, 그런 공로를 세운 가문이지.”
“전공이라. 마왕의 모가지라도 따오면 되는 건가.”
“……아니 그건 너무 차고 넘치는 공이고.”
하긴. 인간들 입장에서 후세에 길이 남을 전공이라 함은, 눈앞의 이 악마에게는 손짓 몇 번이면 이룰 수 있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다가 제국의 모든 공신들이 세운 역사적 공로가 악마의 놀이 한 번에 빛바래게 생겼다. 악마가 이룩할 공로에 대자면 휴고 아르티나가 이룬 것 정도는 되어야 비벼보기라도 할 것이니까. 당장이라도 마왕의 모가지를 따러 갈 것처럼 구는 아가레스에게, 황제가 설득을 시도했다.
“어차피 명예 작위 아닌가. 그대가 남작이든 공작이든 그대에게 지위에 따른 의무를 강요할 이는 아무도 없어. 그대가 작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악마와 인간 사이에 평화가 싹틀 수 있다는 희망이자 교두보가 될 테니.”
“의무의 강요든, 희망이든 그딴 것 때문에 받는 작위가 아니다.”
“그럼?”
“이브 곁에 설 거라면 완벽해야지. 전공 세워 오면 그때 공작위로 바꿔.”
“……혁혁한 공을 세운다면 내 최대한 노력하지.”
칙서를 담는 두루마리를 꺼내 두꺼운 펜촉의 만년필을 쥐며, 황제가 시선을 슬쩍 들어 물었다.
“아. 가문 이름은 생각해 둔 것이 있는가?”
“루페르트.”
“무슨 뜻이지?”
“알 것 없다.”
“…….”
도무지 친해질 수가 없다. 저 악마를 대하면 대할수록 스스럼없이 친분을 맺은 공녀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 이름은 뭔가. 귀족 명부에 올리려면 적어야 하는데.”
“진명을 가장 먼저 알려줄 이는 따로 있다. 대충 토끼라고 적어.”
“……토끼 루페르트 백작은 영 아니지 않나.”
왜. 난 괜찮은데. 아가레스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자, 황제가 덧붙였다.
“그대가 토끼 루페르트 백작으로 불리면 아마 이브도 부끄러워할걸.”
“그렇다면 아레스라고 적도록.”
고고한 대악마가 이 제국에서 사용할 이름과 가문명, 그리고 지위가 유려한 글씨로 칙서 위에 적혔다. 「아레스 루페르트 伯」 시종장을 불러 이를 맡기자, 시종장은 곧바로 귀족 명부를 가져와 황제의 눈앞에서 틀림없이 새겨넣었고, 황제는 반듯하게 옥새를 찍었다. 목적을 달성한 아가레스가 떠나려 몸을 일으키자, 문득 궁금해진 황제가 물었다.
“공녀를 차치하고, 고위 악마가 고작 인간 제국의 백작위를 받는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진 않는가?”
어두운 마기 속에 휩싸여 공작저로 목적지를 정한 아가레스가 고민 없이 답했다.
“이브를 차치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말이다. 그보다 우선인 건 없어. 그게 자존심이든, 오기이든, 욕심이든, 그 무엇이든.”
내 작은 친우의 곁에 설 수만 있다면 제국의 개가 되는 것쯤이야. 기꺼울 따름이지. *** 황제가 손가락을 까닥하자, 연회장 저 구석에 시립해 있던 시종장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깊이 고개를 조아리며 손에 받쳐 올리는 것은 칙서와 귀족 명부. 오늘 오전 황제가 작성한 것이었다. 모든 귀족들이 볼 수 있도록 이를 펼쳐 보이며, 황제가 권태롭게 웃었다.
“자. 어떤가.”
황제에게 읍소하느라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데퐁트 후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어떻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처세술에 능한 후작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건…… 이건…… 어떻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저 악마가 귀족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폐하! 지엄한 제국법에 따르면……!”
“전시나 자연재해에 준하는 사유가 있다면 약식으로 가능하지.”
“그런 사유가……!”
“있었네. 저 악마가 누군지 아는가.”
“…….”
극적인 효과를 위해, 황제가 잠시 말을 멈추고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동(東)마계의 지배자일세.”
“……!”
“……헉!”
여기저기서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랄 만도 하지.’
동(東)마계의 지배자를 모르는 이는 이 제국에 아무도 없다. 행동에 깔린 저의는 아무도 모르나,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1차 인마전쟁을 종식시킨 자다. 오랜 전쟁을 겪은 인간들에게, 아가레스는 반대 진영에서 유일하게 평화를 원하는 이로, 그리고 홀로 이를 실현할 힘이 있는 이로 비춰졌다. 그런 이가 이 제국의 귀족 작위를 받았다는 게 무엇을 뜻하겠는가. 귀족들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그가 인간들의 편으로 완전히 돌아선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악마들이 날뛰는 이 시기에 저런 아군이 편입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경사지.’
단독으로 전쟁을 종결시킨 이가 우리 제국을 함께 지켜준다! 이는 필연적으로 다시 발발할 인마전쟁에서 제국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요, 이 자리 참석자 모두의 지위와 재산, 생명과 안위가 보전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상황을 파악한 참석자들의 얼굴에 조금 전까지 서렸던 혼란이 사라지고 서서히 환희가 들어찼다. 그와 정반대로, 데퐁트 후작과 세레스의 얼굴에서는 애써 숨겨두었던 환희가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고 혼란과 낭패가 자리했다.
“저 정도 되는 악마가 우리 제국에 편입되기를 원한다며 나를 직접 찾아왔는데. 저 악마 자체가 홀로 전쟁과 재해에 준한다 할 것이니, 나로서는 얼른 작위를 줘버릴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데퐁트 후작이 번들거리는 회색 눈으로 좌중을 쏘아보았다. 여기서 물러나면 아르티나를 잡으려다가 역으로 잡힐 수 있다. 운 좋게 잘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이 일로 가문의 명성이 진흙탕에 처박힐 것이 분명했다. 후작의 잇새에서 이가 갈리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하오나 저 악마를 어떻게 믿겠습니까, 폐하!”
관망하던 루드비히가 그 말에는 즉각 반박했다.
“그건 내가 보증하지.”
“황태자 전하께서 어떻게 보증을…….”
“나 역시 저 악마와 친우다.”
치열한 황위 다툼을 벌이고 있는 루드비히에게 이는 치명적인 오점이 될 수 있다. 분명 황비는 이 사실로 그를 물어뜯기를 주저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상관없다. 땅 도둑이 이 촌극에서 흠 하나 없이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흙탕물도 주저 없이 뒤집어쓸 수 있으니. 그렇게 황태자의 선언까지 떨어지자, 데퐁트 후작은 더욱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하오나 폐하! 저 정도 되는 악마가 무슨 이득이 있어 이 제국에 편입되기를 원하겠습니까! 이 제국의 기밀을 염탐하려는 끄나풀일 수도 있음입니다!”
이벨리아는 조소했다. 염탐. 끄나풀. 우리 아가 토끼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우리 착한 토끼는 그런 거 몰라.’
자신의 아가토끼를 바라보며 씩 웃자, 여전히 이벨리아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아가레스가 의자에 나른하게 기댄 채로 입을 열었다.
“아. 이득.”
악마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된 이상, 그는 지닌 지배력을 굳이 감추지 않고 풀어냈다. 감히 한낱 인간들이 마주하기에는 버거운 기운. 참석자들 모두가 마치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이 제국에 편입됨으로써 얻고 싶은 이득이 있긴 하지.”
“그것 보십시오! 무언가 원해서 이 제국에 편입된 것이 너무도 자명한 것을!”
데퐁트 후작이 이것 보라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아가레스에게 삿대질했다. 아가레스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여유로운 움직임이 마치 오랜 잠에서 깨 사냥을 준비하는 포식자의 기지개를 닮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참석자들이 한 걸음씩 물러났다. 아가레스는 걸음을 옮겨 이벨리아가 서 있는 곳, 그 바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눈을 맞췄다.
“이브가 보내는 눈길, 곁에 머무는 발길, 잘했다 치하해주는 손길.”
“……뭐?”
“그걸 원해 이 제국에 적(籍)을 두었다.”
충성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악마. 이벨리아는 무심결에 아가레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가레스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듯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일어나 이벨리아의 뒤에 버티고 섰다. 마치 그림자처럼. 혹은 충견처럼.
그는 지닌 마기를 인간들이 혼절하지 않을 정도만 풀어내며 선언했다.
“나의 친우가 인간을 적대하지 않는 이상, 나 역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악마들의 전력에서 동마계의 지배자가 이탈한다는 선포.
“나의 친우가 악마에 대적하는 이상, 나 또한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걸 넘어서, 완연히 인간들의 편에 서겠다는 포고. 불과 몇 분 전과는 다른 의미로 참석자들이 경악했다. 공녀가 정령왕을 소환했다 하여 연회에 참석하였건만. 이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범주의 일이다. 고위 악마가, 그것도 명성 자자한 동마계의 지배자가, 어떻게 한낱 인간에게 저리도 맹목적으로 복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참석자들의 시선이 꼿꼿하게 서 있는 공녀에게로 가닿았다. 아르티나 가문의 유일한 적녀라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패를 쥐고 태어났다고 여겼는데. 일신의 능력으로 정령왕부터 고위 악마까지 쥐고 있으니, 지닌 것이 너무도 많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분명 경사는 경사인데, 받아들이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큰 경사라 연회장은 일순 침묵에 휩싸였다. 한편 아가레스는 이제야 조금 만족스러웠다.
‘우리 꼬맹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마땅히 저래야지.’
감히 자신의 구원을 바라보는 시선이 불경하여 이 연회장을 모두 쓸어버리고 싶던 차였는데. 이제야 감탄과 존경이 깃드는 것이 아주 온당했다. 아가레스는 데퐁트 후작과 세레스에게 차례로 시선을 두었다. 동시에 그가 발한 마기가 두 인영의 위로 마치 중력처럼 쏟아져내렸다.
“커흑……!”
“콜록, 콜록!”
견디지 못한 데퐁트 후작과 세레스는 자리에 납작 엎드려 버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다가간 아가레스가 엎드린 데퐁트 후작의 등 위에 발을 올려 세게 짓밟았다. 억눌린 신음이 발아래에서 연신 흘렀으나 악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처참하게 바닥을 구르고 있는 데퐁트 부녀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어떤 경고보다 직관적이다.
“처신들 잘하라고. 감히 내 주인을 적으로 돌리지 마.”
짓누르는 마기를 그대로 둔 채, 고고한 악마가 쐐기를 박았다.
“나의 친우가 적으로 여기는 이상, 내게도 다름없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