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작위 내놔2021.11.18.
경악. 그 이상 이 분위기를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이 웃고 떠들던 연회장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이벨리아는 속으로 탄식했다.
‘내가 안일했어.’
마족 소환은 제국법상 극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 미로네 백작의 일을 직접 겪었으니까. 하지만.
‘내 토끼는 우연히 만난 친구고. 내가 소환한 악마는 아니니까 괜찮으리라 여겼어.’
그래서 토끼와 자신의 관계가,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악마와 아르티나 공녀의 내통으로 보일 것으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 불찰이야.’
뼈 아프다. 무슨 수작이든 부릴 테면 부려봐라, 그리 생각했었다. 자신을 상대로 한 권모술수라면 지략으로, 정 안 되면 엘라임의 힘을 빌려서라도 빠져나올 수 있을 것으로 자만했다. 그런데 이렇게 주변 이들을 엮어서 목을 죄어올 줄이야.
‘내 구구절절한 사정 따위 중요하지 않아.’
토끼가 악마가 아니라는 증거를 대기 어렵다. 막말로 정령사 하나만 데려와도 토끼가 악마라는 것은 곧바로 밝혀질 진실이다. 그렇다면 연을 맺은 계기가 우연이든, 제국 전복을 위한 소환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남들이 보기엔 내통이며, 그렇다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 테이블만 바라보던 이벨리아는 느리게 시선을 올려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한 표정의 참석자들 속. 유일하게 세레스만이 환히 웃고 있었다. ***
“아르티나 공작가는 일선에서 악마와 대치해온 가문이오! 증좌가 없다면 데퐁트 후작의 말을 신뢰할 수 없소!”
아르티나 공작가와 친분 깊은 카시스 후작가에서 증거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아르티나 기사단의 기사들을 배출한 가신 가문, 아르티나와 사업적으로 엮인 가문들이 모두 뒤를 이어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헛된 모함입니다! 어디 감히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티나가 악마와 내통하였다고!”
“폐하, 증거도 없는 모함을 믿어서는 아니 되십니다!”
일부 귀족들이 적극적으로 두둔하는데도 아르티나의 일원들이 이렇다 할 반박이 없자,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이벨리아를 바라보고 있던 데퐁트 후작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증거라.”
“예, 증거 말입니다. 후작은 지금 아무런 물증 없이 감히 아르티나에 오명을 뒤집어씌우고 있지 않습니까!”
“연금술은 그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술법들을 가지고 있음은 익히들 아실 테지요. 또 정령과 마족이 상극이라는 점은 고대 학문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그다지 접하기 어려운 정보는 아닙니다.”
후작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서는 옷깃에 달린 브로치를 떼어내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이 브로치에 박힌 구슬은 그 지식을 활용하여 제작한 것입니다. 드는 재료가 제법 까다롭지만 원리만 알고 있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요.”
연금술로는 이 제국 내 가장 조예가 깊다는 후작이 하는 말이다. 연금술을 잘 알지 못하는 귀족들로서는 효율적인 반박을 하기도 어려웠다.
“이 구슬은 마기에 반응합니다. 평소에는 흰빛을 띄고 있다가 마기에 닿으면 검은빛으로 변하지요. 바로 지금처럼.”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 연금술이 후작 각하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정도 증거야 조작일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되묻지요, 잔느 백작. 지금 공녀님의 곁에 앉은 저 사내를 이 제국에서 본 적이 있습니까?”
“과거 사절단에…….”
“아니, 그 전 말입니다. 아르티나 공작가에서 사절단에까지 포함시킬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라면 왜 저자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답니까?”
“…….”
“…….”
“그래도 못 믿으시겠다면, 이 자리에 계신 정령사, 공작부인이나 공녀님께서 정령을 불러 직접 물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저자가 악마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눈앞에 들이 밀어진 증거. 데퐁트 후작의 당당함. 생각해보면 그럴듯한 논리. 줄곧 데퐁트 후작을 향해 있던 참석자들의 불신 어린 눈초리가 이제는 아르티나를 향했다. 이벨리아는 아빠와 엄마를 차례로 응시했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
두 분 모두 지극히 정적이다. 당황한 기색도, 분노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으로 천천히 고개 돌려 황제 폐하를 바라봤다.
‘……저 표정은 뭐지. 아르티나가 무너지면 폐하도 곤란하실 텐데. 왜 저렇게 태연해?’
황제는 아가레스의 정체를 알고 있다. 이벨리아와 제법 깊은 친분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상황을 미리 예견했던 것일까?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여전히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나른한 표정으로 연회장을 훑는 태도가, 마치 아르티나가 멸문하더라도 하등 관심 없다는 뜻으로 보였다.
‘아니. 지금 폐하의 표정이 중요한 게 아니지.’
이벨리아의 영민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스가 악마라는 사실은 황실 정령사만 불러오면 곧바로 확인될 거야. 그렇다면 덮어놓고 부인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아.’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아가레스의 정체를 이토록 극적으로 폭로한 이상, 최선과 차선은 없다. 최악과 차악 중에 골라야 할 뿐.
‘나 혼자 벌인 일이라고 해야 해. 아빠나 엄마가 나서면 아르티나 전체가 엮일 거야.’
그렇게 되면 진정으로 멸문의 화를 피할 수 없다. 결심한 이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르티나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에 참석자들의 시선이 다시 테이블로 쏠렸다. 손쉽게도 돌아서는 눈빛들을 마주하며, 이벨리아가 긍정했다.
“맞습니다.”
“……맞다니요! 공녀님!”
“공녀님! 그게 무슨……!”
“다 들으셨으면서 뭘 다시 묻습니까. 이자는 악마가 맞다고 했습니다.”
설마 대제국의 공녀가 악마와의 내통 사실을 이렇게 쉽게 인정해버릴 줄이야! 참석자들은 말 그대로 혼란에 빠졌다.
“그게! 그게 무슨!”
“공녀님께서 진정으로 고위 악마와 내통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아르티나 가문의 일원이!”
마치 자신들이 더할 나위 없는 배신을 당한 것처럼 군다. 정작 이 제국을 떠받치고 지켜왔던 게 누군데. 의무를 분담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배신에 뼈아파 할 권리 따위 있을 리 없다. 이벨리아는 천천히 걸어 테이블을 돌아 나왔다. 참석자들 한가운데 선 이벨리아가 비소를 짓고 다시 확언했다.
“제 소중한 친구가 악마라, 이거 참 유감이로군요.”
고위 악마와 친분을 맺은 대가를 누군가 치러야만 한다면, 그것은 자신 혼자여야 했다. 다만 자신의 여리고 착한 토끼가 괜히 나쁜 광경을 보게 만들어 미안했다.
‘우리 빙구 토끼. 너무 속상해하면 안 될 텐데.’
걱정하며 돌아본 이벨리아의 눈에 왜인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가레스가 보였다.
‘뭐야. 저 표정은 우는 거야 웃는 거야?’
제법 오랜 시간을 봐왔지만 도통 알 수 없는 친구의 표정에 의문을 가지던 찰나.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잠깐.’
다시 황제를 보니 손으로 가린 입매가 살짝 올라가 있다. 이벨리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다시 토끼를 보니…… 저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니다.
‘저건 미안한 표정인데. 뭐가 미안하지?’
푸른 눈동자를 또록또록 굴리며 퍼즐을 맞추던 이벨리아가 하, 낮은 숨을 뱉었다.
‘이것들. 뭔가 작당했구나. 나 몰래!’
*** 대체 무슨 거래가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정도의 패임은 분명했다.
‘장단 좀 맞춰 줄까.’
자신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은 괘씸했지만, 곧 데퐁트 후작과 세레스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질 것을 생각하면 통쾌하기도 했다.
‘자. 세레스. 부끄러운 역사를 더 만들어 봐.’
이벨리아가 속으로 읊조리기가 무섭게, 세레스가 깊은 비탄에 빠진 표정으로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이럴 수가! 공녀님께서 정령왕을 소환하였다 하시어 진정 이 제국의 경사라고 여겼는데! 진정으로 경하드리고자 한달음에 달려왔건만……!”
‘와. 연기 하나는 대단하네.’
“공녀님을 정말로 존경했는데…… 어떻게 이러실 수가!”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리는 세레스를 주변의 영애들이 호들갑 떨며 부축했다. 겨우 테이블을 짚고 자세를 바로 한 세레스가 다시 털썩 무릎을 꿇더니 황제를 향해 읍소했다.
“아아, 제 입으로 이런 간청을 드리게 되다니…… 흐흑. 페하, 부디 공녀님을 단죄하시어 제국의 지엄한 법도를 바로 세워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자신의 딸을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데퐁트 후작 역시 황제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 그 성심이 얼마나 상하셨을지 감히 짐작기 어렵습니다만, 악마와 내통한 것은 제국법상 사형으로 다스릴 중죄입니다. 부디 공녀님을 투옥하시고 구체적인 경위 파악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두 부녀의 태도만 보자면 제국을 위한 충신이 따로 없다. 황제는 아르티나의 처벌을 바라며 낮게 고개 숙인 부녀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흔쾌히 답했다.
“그럴 수 없네.”
“역시 현명한 결단…… 예?”
“그럴 수 없다고.”
“……공녀가 악마와 내통하였다는 것을 자인하였습니다, 폐하!”
“나도 이 자리에 있었네.”
“제국법전에 악마와 내통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명기되어 있는데, 어찌……!”
“그것도 알고.”
“그렇다면 대체 왜……!”
“거기엔 명백한 예외 조항이 있지.”
“저자는 투귀자가 아니고, 사역마도 아니며, 이 제국에 편입되지도…….”
황제가 데퐁트 후작의 말을 끊으며 코를 긁적였다.
“그래, 그거. 저자는 이 제국에 편입된 악마거든.”
*** 황제가 이토록 당당하게 데퐁트 후작의 청을 무시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연회 당일, 이른 오전.
“이봐. 황제.”
늘 그렇듯 기척 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황제는 다시 한번 잉크병을 엎어버렸다. 줄줄 새는 잉크가 서류를 적시고 책상 아래로 똑, 똑, 떨어져 내렸다. 어떻게 정리한 서류인데! 머리를 헤집으며 황제가 고개를 휙 돌렸다.
“부디 기척을 좀 내주면 안 되겠나? 응? 그대 때문에 버린 서류가 벌써 몇 장인지 아는가?”
“바랄 걸 바라. 악마한테.”
“……공녀한테도 그렇게 얄밉게 굴면 예쁨 못 받을 걸세.”
“그래서 이브에게는 아주 착하게 굴지. 예쁨 받을 수 있게.”
잉크로 물들어버린 서류를 탁탁 털며 황제가 투덜거렸다.
“어쩌다 그대같이 앞뒤 다른 악마와 엮였는지 원. 공녀가 안쓰럽군.”
“감히 이브를 동정하지 마. 그대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아이이니.”
“이 제국이 내 것인데 공녀가 어떻게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갖나?”
“이 제국과 더불어 마계까지 모두 이브의 것이다.”
“……내 제국이 왜 공녀의 것이야.”
“이브가 원한다면 그날로 이브의 것이 될 테니까.”
“어쩌다 공녀의 충견이 되었는지 원. 그대도 안쓰럽군.”
“그게 내 모든 불행을 덮고도 남을 유일한 행운이니 말조심하고.”
본래도 알았지만, 가진 마음이 생각보다 깊다. 이런 대화가 영 익숙하지 않은 황제가 잠시 침묵하다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이번엔?”
앉으라는 말은 없었지만 아가레스는 황제의 의자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긴 다리를 꼰 채 턱을 기울인 자세가 마치 폭정을 일삼는 폭군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방종했다. 고고한 대악마가 일국의 황제에게 명했다.
“작위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