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갈아엎을까, 이 황가?2021.11.11.
- 끼익. 황금 용이 깊게 음각된 거대한 문이 열릴 듯 미세한 소리를 냈다. 그와 정확히 동시.
“공녀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문을 지키던 하인이 크게 외치자, 부드러운 선율을 안주 삼아 간단히 칵테일을 곁들이고 있던 참석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 살롱에서 이벨리아를 본 이들도 있었지만, 아닌 이들이 더 많았다.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탐색하듯 반짝였다. ‘공녀가 가문 내에서 가지는 입지는 여전한가.’ 제국 유수의 가문 영애라고 하더라도 가문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그 힘은 천차만별. 공녀가 공작이나 소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다면, 아무리 정령왕의 계약자라 한들 과히 납작 엎드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면 공작과 소공작이 소문대로 공녀를 아낀다면 공녀에게 줄을 대기 위해 딸과 부인까지 모두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곧 아르티나 공작가문과 연을 맺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될 테니까. 그들에게는 정령왕의 계약자보다는 아르티나 공작가와의 연이 더 중요하니까. 열린 문 사이로 인위적으로 만든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속에 휩싸인 신형이 잘 보이지 않아 참석자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애써 초점을 맞췄다. 서서히 빛이 가라앉자, 가장 먼저 눈에 띈 이는 공작가의 명실상부한 후계자, 아르칸. 어느새 열일곱이 되어 청년의 티가 물씬 나는 소공작이 한참 아래로 손을 뻗고 있었다. 시선으로 소공작의 팔을 천천히 따라가니, 길게 물결치는 황금빛 머리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위에서 선명한 빛을 내는 사파이어 핀이 연회의 취지에 맞춘 물빛 드레스와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세상에.”
누군가 뱉은 감탄사의 의미를 그 누구도 묻지 않았다. 의미를 모르는 이는 여기 없었기에.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등과 고아한 각도로 들어 올린 턱이 내면의 단단함을 짐작케 했다. 수많은 시선을 느끼면서도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옅게 붉어진 볼은 지닌 당당함을 부족함 없이 나타냈다.
‘공녀님을 바라보는 소공작님의 눈에서 아주 꿀이 떨어지는군.’
‘공작 각하는 또 어떠시고.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실 것처럼 일어서 계시는데.’
‘입을 타면 탈수록 부풀려진다는 소문이, 이 경우엔 오히려 축소되었다고 봄이 맞겠어.’
수 없이 와닿는 시선을 흘려넘기며 이벨리아가 단상까지 길게 펼쳐진 카펫 위에 발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엥?’
난데없이 허공에 주먹만 한 물방울 수십 개가 동실동실 떠올랐다. 참석자들 역시 떠오르는 물방울을 향해 시선을 위로 올렸다.
‘이게 뭐야?’
천장 바로 아래까지 올라간 물방울들이 일제히 펑 터지자, 그 속에서 물이 쏟아질 것으로 추측한 참석자들이 황급히 머리를 가렸으나. - 퐁. 퐁. 경쾌한 소리를 내며 터져나간 물방울들 사이에서는 물 아닌 꽃잎이 쏟아져 연회장을 가득 뒤덮었다. 동시에 비산한 물방울들은 얼음 결정으로 쨍하니 얼어붙어 허공을 수놓았다. 연회장의 천장이 마치 꽃잎을 박아넣은 수정 동굴처럼 다채로운 빛으로 반짝였다. 그러자 샹들리에 불빛이 얼음에 반사되어 연회장을 보다 화려하게 만들었다.
“어머! 이게 뭐죠?”
“맙소사, 아름다워라!”
모두가 위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이. 아르칸과 이벨리아 역시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르칸이 작게 속삭였다.
“이거 우리 아가가 한 거야?”
“아니!”
“하델이 준비한 건가.”
“저 표정을 봐. 하델은 아닌 것 같은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벨리아가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아르칸이 눈이 부시다는 듯 살짝 찌푸리더니 입을 살짝 벌렸다.
“……우리 아가 몸이 아주 번쩍번쩍 빛나는데.”
“……엥?”
천장을 바라보던 참석자들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벨리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필시 무슨 일이 있긴 있는 것 같았다.
‘싸늘하다. 가슴에 바늘이 날아와 꽂힌다.’
이벨리아가 허공에 물웅덩이를 만들어냈다. 확인하자 윗니가 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누구 짓이야, 이거.’
누가 내 몸에 형광물질 발라놨어. 누가 내 몸에 이런 거 붙여놓으랬어.
‘왜 내 몸에서 무지개처럼 빛이 나는 거냐고!’
한껏 위협하는 표정으로 토끼를 바라보니 고개를 젓는다. 아빠와 엄마를 바라봐도 마찬가지다. 엔리르 역시 그 옆에서 작은 앞발을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혹시 몰라 식량 도둑을 일별하니 그 역시 자신은 아니라며 손가락으로 작은 엑스를 만들어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 정적이 깨진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영 민망한 평가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무지개의 신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요?”
‘그딴 신이 어딨어!’
“공녀님께서도 이 연회에 신경을 참 많이 쓰셨나 봐요.”
‘아냐!’
“은근히 치장을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다른 영애들 눈을 좀 봐요. 곧 저런 식의 치장이 수도의 유행이 되겠어요.”
‘이게? 난 억울하다!’
애써 태연하게 걷던 발목이 살짝 삐끗하자 아르칸이 잽싸게 잡아챘다. 그때였다.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이벨리아의 주변으로 습한 훈기가 돌더니 작은 목소리 하나가 귀에 꽂혀 들었다.
[나의 아가 계약자. 그대가 가장 빛나길 바라며.]
‘너 이 자식! 가만 안 둔다!’
범인을 찾았다. 이벨리아의 보드라운 손이 주먹 쥐어졌다.
‘맹약자가 내 뒤통수를 이렇게 후려갈길 줄이야!’
*** 한편 공작저 밖에서는 제국민들의 환호가 점점 높아졌다.
“비다! 비가 온다!”
“거참 신기한 게 어떻게 논밭이 있는 곳만 정확히 골라서 비가 오지?”
“자연적인 비 맞나, 이게?”
엘라임의 허가를 받아 허공을 떠돌며 논과 밭, 산과 들에 특히 집중적으로 비를 뿌리던 상급 정령 일레스트가 눈을 번뜩였다. 자연적인 비라고 오인당하면 안 된다. 이건 왕의 아가 계약자가 내려주는 비가 되어야 했다. 왜? 그래야 왕의 아가 계약자가 화려하게 빛날 테니까.
‘어쩌지. 어떻게 해야 왕의 아가 계약자 덕에 내리는 비라고 알릴 수 있지.’
정령사로부터 소환되지 않은 자연체 상태인 덕에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일레스트가 앞발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시작했다.
‘으음. 그래! 그거다!’
일레스트가 말랑말랑한 앞발을 앞으로 모아 동그라미를 만들며 둥글둥글 굴렸다. 앞발 사이에서 만들어진 작은 구체가 점점 크기를 키워갔다.
‘이걸 왕의 아가 계약자가 있는 공작저 위에다가 놓고……!’
상급 정령의 의사에 따라 몽실몽실한 구름 하나가 공작저 위에 톡, 하니 걸렸다. 혹시 사람들이 잘 몰라볼까 봐 그 옆에 쌍무지개를 띄워두고 반짝거리는 물방울을 흩뿌려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구름들을 모두 물로 만든 선으로 연결해야지.’
일레스트가 훅 입김을 내뱉자 공작저 위에 걸린 거대한 구름에서 뽈뽈 푸른 물줄기가 뻗어 나가더니, 한창 논과 밭에 비를 뿌리고 있는 구름들로 이어져 착 붙었다. 요모조모 바라보던 일레스트가 복슬복슬한 미간을 찌푸렸다.
‘물이 투명해서 잘 안 보이잖아. 이러면 안 되지.’
어떻게 하면 인간들의 눈에 더 잘 띄어서 왕의 아가 계약자가 더 빛날까. 고민하던 일레스트의 눈에 곁을 날아가던 불의 상급 정령 피닉스 하나가 띄었다.
[이봐. 피닉스.]
[일레스트로군. 뭘 하고 있지? 자연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왕의 명령이시다. 왕의 아가 계약자를 빛나게 해주라는. 넌 뭐 해?]
일레스트의 눈이 의아하다는 듯 파닥거리는 피닉스의 날개에 가닿았다. 피닉스의 새 부리가 민망한 듯 달싹였다.
[……왕의 명령이시다. 물의 왕의 아가 계약자가 인간들로부터 칭송받게 하라는.]
같은 명령을 받고 허공에 자리한 두 상급 정령의 눈이 마주쳤다. 이것 참 잘 되었다. 합작하면 더 화려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었다.
[보아하니 구름을 물줄기로 엮어두었군. 딱 봐도 아가 계약자가 힘을 썼다는 걸 알 수 있도록.]
[그렇지만 물이 투명해서 저 아래 인간들에게는 잘 안 보일까 걱정이야.]
[그건 내가 해결하지.]
피닉스가 날개를 휘젓자 물로 만든 실을 따라 붉은 화염이 옮겨붙었다. 상급 정령의 권능에 따른 불은 물 위에서도 기세가 죽지 않았다. 덕분에 실이 붉게 물들었다. 누가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너도 나 좀 도와줘.]
피닉스가 부리를 크게 벌려 후- 불을 내뿜자, 타이밍에 맞추어 일레스트가 물로 회오리를 만들었다. 화염으로 만든 회오리가 공작저 사방을 둘러싸고 하늘까지 가닿았다.
[완벽해.]
[이거면 왕의 아가 계약자가 아주 주목받겠지.]
두 상급 정령의 합작은 나름대로 그 목표를 달성했다. 공작저는 가히 마왕성의 재림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으니까. 뿌듯해진 두 상급 정령은 허공을 돌며 힘차게 외쳤다.
[자, 왕의 아가 계약자 앞에 다 무릎을 꿇어라!]
[꿇어라!]
*** 바깥 사정을 모르는 이벨리아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단상에 다다랐다. 소리 증폭기가 너무 위에 있어 까치발을 들고 목을 쭈욱 빼도 닿지 않자, 아르칸이 증폭기를 최대한 구부려 이벨리아의 키 높이에 맞춰주었다.
“귀한 시간 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엘리시아가 알려준 개회사를 달달 외워왔으므로 이벨리아는 당당하게 첫마디를 뗐다.
“저는 이 자리가 제국의 경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축하연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지요.”
여유로운 표정으로 참석자들의 면면을 살피는데, 표정들이 영 이상했다. 누군가는 의문 어린 표정을 짓고, 심지어 누군가는 웃음을 참는 듯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 아닌가. 이벨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들 저렇게 보지?’
단상 아래 서 있는 이들 중 가장 믿음직한 토끼에게 시선을 두니, 토끼 역시 애써 웃음을 참는 모양새로 입가를 부들거리면서 입 모양을 만들어냈다.
‘바뀌었어.’
‘……앗!’
말이 꼬이는 바람에, 정령왕을 소환한 이 능력을 오로지 일신의 편안함을 위해서만 사용하겠다는 취지로 말해버리고 말았다. 이벨리아는 황급히 정정했다.
“아니, 아니, 바뀌었네. 잘못 외웠다. 제국의 경사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짐작하고 있던 참석자들이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벨리아의 볼이 붉어졌다.
“으음…… 부디 이로 인해 제국이 조금 더 평안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껏 위엄있는 개회사를 하려고 했는데. 참석자들의 눈빛이 마치 오라버니들이 자신을 볼 때의 눈빛과 꼭 닮았다. 더욱 민망해진 이벨리아는 참석자들의 시선을 맛있는 음식으로 돌리자고 마음먹었다.
“우리 집 요리사 세토는 요리를 아주 잘해요. 아마 그러니까 요리사겠죠? 그래도 요리사 중에서도 특히 잘하니까 저기 있는 음식들을 다 드시고 가세요!”
마치 뭔가를 던지듯 속사포로 세토를 찬양한 이벨리아는 곁을 지키던 아르칸의 옷자락을 꼭 쥐고 단상을 종종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흘끗 보니, 저 멀리 선 자신의 아가 토끼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 요망한 토끼가 감히 내 개회사를 듣고 웃어? 너도 이따가 두고 보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오렌지주스 한 컵을 들이킨 이벨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중요한 말을 빼먹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아, 맞다! 보따리 풀어보라고 해야 했는데. 긴장해서 깜빡 잊었네. 이따 끝나기 전에 얘기해야겠다.’
이미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된 분위기라, 지금 다시 단상 위로 올라가서 주목받는다면 모양새가 썩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이벨리아가 옆에 앉은 휴고의 새끼손가락을 두 손으로 쥐고 탈탈 흔들었다.
“아빠. 나 창피해요.”
“무슨.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개회사였다.”
“틀렸는데요.”
“틀리긴. 사실 그렇지 않느냐. 이게 왜 제국의 경사야. 우리 아가의 경사지. 그 힘은 하등 제국을 위해 쓸 것 없다.”
이벨리아가 목소리를 확 낮추어 물었다.
“아빠, 혹시 반역을 준비하세요? 갑자기 평소보다 세 배는 불경해진 것 같은데.”
휴고 역시 다른 이들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소리를 죽여 답했다.
“……저 악마가 그러더구나. 네가 정령왕을 그저 물뿌리개 용도로만 사용한다면, 그게 전부인 거라고.”
“아스가요?”
“음. 아주 사상이 바른 악마야.”
그렇게 속삭이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영 채신머리없는 손짓이 느껴졌다. 파닥파닥, 아주 다급하게도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곁눈질로 슬쩍 보니.
‘원수나 다름없는 황제 폐하네. 못 본 척해야겠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휙 돌렸으나 공녀! 외치는 소리가 심히 우렁차게 날아들어 더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이벨리아가 한숨 쉬며 일어서자 휴고가 홀로 속삭였다.
“드디어 반역의 때인가.”
“아빠, 쉿!”
휴고를 말리고 황제에게로 걸어가는 이벨리아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자, 연회장 끝 쪽 벽에 기대어 있던 아가레스가 살짝 손을 흔들어 이벨리아의 시선을 잡아챘다.
‘토끼? 왜?’
묻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자신의 악마 친구가 황제 폐하를 가리킨 다음, 엄지로 목을 슥 긋고는, 묻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 아닌가.
‘당연히 안 되지!’
표정을 풀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황자와 더불어 황제 폐하까지 시해당하게 생겼다. 아빠 또는 악마에게. 이벨리아가 아빠와 악마 친구를 달래듯 방긋 웃으며 황제에게로 다가갔다.
“폐하. 오셨-.”
“공녀!”
제대로 인사를 마치기도 전이었다. 황자 에드윈이 마치 둘도 없는 친우를 만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예, 황자 전하. 폐하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
“공녀는 마음에 둔 이가 있는가?”
‘이 꼴뚜기 불경하기가 우리 아빠 못지않네.’
황제에게 인사하는 것을 잘라먹는 본새 봐라. 이벨리아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뇨. 없습니다. 제가 지금 폐하께 인사를 드리고 있는 중이지 않습니-.”
“없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아. 싫은데요.”
이벨리아는 얼굴 근육이 허용하는 최고 한도로 인상을 찌푸리며 속마음을 그대로 내뱉었다가, 이후 아차하며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불경하다며 나를 잡아갈 기미를 보이면 곧바로 아스한테 척살을 의뢰해야지.’
단호한 거절에 당황하여 잠시 굳어 있던 에드윈이 애써 호방하게 웃어 보이며 손뼉을 짝짝 쳤다. 그 태도만 보자면 마치 더할 나위 없이 호탕한 기개를 가진 성군 같았다.
“그렇지. 내가 너무 성급했지.”
‘그게 문제가 아닐 텐데.’
“본디 마음을 얻자면 천천히 다가서야 하는 법인데 말이지.”
‘거북이처럼 천천히 기어와도 소용없는데.’
“그렇다면…….”
에드윈이 다짜고짜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내려오더니 테이블에 꽂혀 있던 꽃 하나를 빼 들고 이벨리아에게 내밀었다. 눈을 찡긋하면서.
“레이디. 첫 곡은 저와 함께 추시겠습니까?”
“……억.”
표정과 제스처, 말투와 꽃까지. 모든 것이 경악스럽다. 이벨리아가 상체를 뒤로 물렸다. 심지어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들은 통상 연회에서 춤을 추지 않는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연애 서적을 읽고 왔나 봐. 얘 어떡하지.’
“레이디?”
“으, 제가 꽃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러자 에드윈이 다시 한번 바짝 다가서서 에스코트하듯 팔을 내밀었다.
“꽃과 춤이 부담스러우시다면, 테라스에서 오붓하게 이야기라도 나누실까요?”
“제가 테라스 알레르기가 있어서.”
한 발 크게 물러서며 사양하자, 에드윈이 주먹 쥔 손을 이마에 대더니 절레절레 흔들며 하하 웃었다.
‘어디서 몹쓸 연극도 보고 왔나 봐. 얘 진짜 어떡하지.’
한참 웃던 에드윈이 뚝 웃음을 멈추고 이벨리아를 빤히 바라봤다. 그 눈이 제법 진지했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 창피하다는 걸 인지한 걸까?’
그런 것 같다. 이벨리아가 안도의 숨을 내쉬는 찰나였다. 에드윈이 진중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댔다.
“레이디의 부끄러워하는 표정이 제 심장을 녹이는군요.”
“…….”
이 정도면 애를 이 지경으로 키운 황가 전체가 연대책임이다.
‘진짜 갈아엎을까, 이 황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