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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그 조동아리 닥치라고 (115/323)

115화: 그 조동아리 닥치라고202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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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회 시작을 바로 앞둔 시간. 검은 이무기가 음각된 마차 하나가 아르티나 공작저에 당도했다. 공작저 앞을 지키며 마차를 검열하고 있던 헤롤드가 인상을 사납게 찌푸리며 애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16549748791863.jpg“저거 데퐁트 아니냐.”

1654974879187.jpg“너 지금 되게 우리 아기씨 곰치 닮았어. 표정 좀 풀어.”

곁에 있던 드웬이 헤롤드의 손을 검에서 탁 털어냈으나, 표정은 더욱 사나워질 뿐이었다.

16549748791863.jpg“저거 데퐁트잖아.”

1654974879187.jpg“맞는데 표정 좀 풀라고. 심약한 후작 나자빠지게 하지 말고.”

16549748791863.jpg“마족인 줄 착각했다고 하면서 베어버릴까.”

중얼거리는 헤롤드의 등을 단장 에딘이 후려쳤다.

16549748791863.jpg“아! 단장! 왜요!”

16549748791893.jpg“말조심해라.”

16549748791863.jpg“뭘 조심합니까? 우리 아기씨 목숨을 노렸던 것들인데!”

16549748791893.jpg“그냥 베어버리면 재미없지. 기사단 숙소에 아무도 모르는 감옥이라도 좀 마련해두고 잡아 와야 하지 않겠나.”

헤롤드가 목덜미를 긁적였다.

16549748791863.jpg“아, 그런 취지였군. 난 또. 우리 단장이 갑자기 천사가 돼버린 줄 알았잖아.”

16549748791893.jpg“공작저에 천사는 한 분이면 족하지.”

에딘과 헤롤드는 한가한 잡담을 나누며 마차가 자신들의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서는 것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16549748791863.jpg“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마차 문을 열고 얼굴을 안으로 넣던 헤롤드를 향해 무거운 장신구가 날아들었다. 그가 이마 정중앙을 때릴 듯 날아오는 것을 가볍게 잡아채자, 세레스가 씩씩댔다.

16549748822994.jpg“어디 감히 레이디가 탄 마차를 들여다봐!”

16549748791863.jpg‘우리 아기씨를 생각하자…… 이건 아기씨의 축하연이다…….’

마차를 부숴버리려던 헤롤드는 저 위에서 단장하고 있을 아기씨를 떠올리며 애써 참아냈다.

16549748791863.jpg“검문을 받지 못하시겠다면 이대로 돌아가시지요.”

헤롤드가 서늘하게 웃으며 마차 문을 쾅 닫아버렸다.

16549748822994.jpg“잠깐! 우리가 누군 줄 알고!”

16549748791863.jpg“데퐁트 후작가의 잘나신 영애 아닙니까.”

헤롤드의 비아냥거리는 어조에 세레스가 얼굴이 벌게진 채로 삿대질했다.

16549748822994.jpg“감히!”

데퐁트 후작가문의 기사들은 이리 방자하지 않은데, 아르티나 가문의 기사들은 역시 버릇없는 것이 자기 주인들을 꼭 닮지 않았는가.

16549748791893.jpg“세레스. 진정하거라. 아주 기대되는 연회 아니냐.”

16549748822994.jpg“기대…… 그렇죠. 후…… 좋다, 수색을 허한다!”

허하긴 뭘 허해. 마치 황후처럼 이야기하는 모양새에 헤롤드는 속으로 비웃으며 다른 가문의 마차들보다 훨씬 꼼꼼하게 수색을 끝마쳤다. 데퐁트 일가가 마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서자, 아직 그 자리에 서서 입장객들에게 꽃을 나누어주고 있던 알렉이 멍한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16549748852257.jpg‘아. 사람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하였거늘. 검으로 후려치고 싶어 큰일이군.’

저 인간들에게는 우리 아기씨 닮은 이 꽃을 나눠주고 싶지 않다. 알렉은 당당히 손을 내뻗는 세레스에게 말했다.

16549748852257.jpg“이 꽃은 벌레 먹어서.”

16549748822994.jpg“뭐?”

16549748852257.jpg“벌레가 득실득실한데. 그래도 가지고 싶으시다면 여기.”

꽃 하나를 세레스 쪽으로 휘두르자 세레스가 꺄악 소리를 지르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16549748822994.jpg“됐어! 저리 치워!”

알렉이 어깨를 으쓱이며 꽃을 다시 바구니에 집어넣자, 알렉의 어깨 위에 앉아 지켜보던 엔리르가 꽃을 답싹 물어 허공 위로 떠올랐다.

16549748852257.jpg“너 나는 거 보이면 안 돼. 우리 아기씨 걱정하신다.”

16549748852284.jpg“난 용이야. 투명 마법은 기본이라고.”

공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엔리르는 꽃을 물고 뽈뽈 날아가 세레스의 머리 위에 후드득 떨어뜨렸다. 난데없이 꽃벼락을 맞은 세레스는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머리에 붙은 꽃잎을 탈탈 털어냈다.

16549748822994.jpg“꺄아악! 여기 뭐야! 정말 싫어!”

마굴도 이런 마굴이 따로 없다. 세레스는 진저리를 쳤다. *** 연회장에 입장한 세레스는 마치 황족이라도 된 것처럼 턱을 높게 치켜들었다. 대문을 지날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였지만 넓은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 모든 건,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하델이 건넨 주머니를 받아들고서도 코웃음을 쳤다.

16549748822994.jpg‘흥. 망할 가문이 이딴 게 다 무슨 소용이람.’

공녀가 직접 만들었다고 하니 더 꼴 보기 싫었다. 세레스는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대충 던져두었다. 주변을 느리게 둘러보자, 일면식 있는 영애들이 눈치껏 다가와 알은체를 했다.

16549748791893.jpg“어머, 영애! 오셨어요? 후작님께선 안녕하시죠?”

16549748791893.jpg“오늘 드레스가 참 아름다워요.”

16549748791893.jpg“이 원단은 제국 내에선 보기 드문 색인 것 같은데요!”

귀한 자리에 입으려고 아껴둔 진한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온 참이다. 나중에 자신이 주인공이 될 연회에 입고자 잘 보관해두었었는데.

16549748822994.jpg‘아르티나가 멸문하는 경삿날이면 입어도 아깝지 않지.’

세레스는 대부분 하얀색, 분홍색, 노란색 드레스들 사이에 진보랏빛 드레스를 입은 스스로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저쪽에 홀로 앉아 있는 렐리안 저것이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오면 시선이 분산될까 걱정이었는데, 역시 기우에 불과했다.

16549748822994.jpg‘하긴. 저건 누군가의 눈에 띄는 것을 극도로 꺼리니, 이리 주목받는 색을 입을 엄두도 못 내겠지.’

세레스는 가면처럼 우아한 표정을 지으며 곁에 다가온 영애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16549748822994.jpg“잘들 지내셨나요? 최근 마족들의 출몰이 잦아지면서 제국민들이 불안감을 느낀다던데. 이리 제국의 경사가 있으니 정말 다행이지요. 공녀님께서 정말 큰일을 하셨어요.”

16549748791893.jpg“역시 제국을 생각하는 영애의 마음은 감히 헤아리기 어렵네요.”

이 제국의 모후가 되기 위해서는 귀족들 사이 여론을 잘 다져두는 것도 중요하다. 위엄 있고 자애로운 황후가 될 재목이라 소문이 나야 황가에서도 자신을 탐낼 테니까.

16549748822994.jpg‘더욱 빛나려면 지위가 비슷한 이를 깔아뭉개야 하는데.’

목표물을 노리던 세레스는 렐리안을 보며 눈을 번뜩였다. 저것은 늘 자신의 사냥감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말로는 병풍. 세레스의 발걸음이 나비처럼 사뿐하게 옮겨졌다. 뒤로는 데퐁트 후작가에 줄을 댄 가문의 영애들이 그림자처럼 따랐다. 작은 발이 렐리안이 앉아 있던 테이블 바로 앞에서 딱 멈추었다. 오만한 눈이 체구 작은 렐리안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16549748822994.jpg“카시스 영애. 오랜만이에요.”

16549748882698.jpg‘이런. 또 시작이네.’

렐리안이 낮게 한숨 쉬며 막 입에 가져다 대던 찻잔을 받침에 내려두었다.

16549748822994.jpg“공녀님과 영애의 친분이 꽤 깊다죠.”

16549748882698.jpg“그렇지요.”

생긋 웃은 세레스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높아진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16549748822994.jpg“아, 네피르는 잘 지내나요? 아직 후작저엔 발도 못 붙인다는 소식을 들어서 안타까워요. 아무리 어머니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자매인데…….”

눈꼬리를 내려뜨리며 끝을 흐리는 말투가 마치 네피르가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는 듯했다. 좌중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원하는 대로 주목을 받자 세레스는 만족한 듯 한층 더 자애로운 표정을 꾸며냈다. 렐리안의 손이 잘게 떨렸다. 많은 이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일 자체가 렐리안에게는 버거웠다. 세레스의 시비에 늘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16549748882698.jpg‘……이브가 있었으면 그 조동아리 닥치라고 했을 텐데.’

16549748822994.jpg“영애? 왜 대답이 없어요? 네피르는 잘 지내냐고 물었는데요.”

16549748882698.jpg‘…….’

렐리안은 애초부터 네피르를 미워하진 않았다. 태어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자신의 아버지일 것이요, 원망은 그쪽을 향해야 옳다. 그래서 처음에는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마주치기만 하면 자신이 죽기를 대놓고 고사 지내는 데다가 은근히 깎아내리기까지 하니 도무지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세레스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얘기한다는 것은.

16549748882698.jpg‘공개적인 자리에서 내가 네피르를 핍박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로구나. 적자의 신분을 가졌음에도 포용력 없다는 것을 알리려고.’

대응할까. 용기를 낼까. 할 수 있을까. 렐리안은 위에서 준비하고 있을 친구를 떠올렸다. 여기는 둘도 없는 친구의 축하연. 적어도 이곳에서 낮잡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렐리안이 작은 주먹을 꼭 쥐고 테이블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세레스의 키가 더 커서 조금 올려다봐야 했지만, 주눅 들지 않고자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16549748882698.jpg“영애. 배다른 자매라고 하더라도 친자매처럼 서로 보듬고 아껴야 한다는 말인가요?”

16549748822994.jpg“그것이 귀족이 보여야 할 너그러움 아니겠어요?”

그러자 렐리안의 시선이 천천히 황족을 위해 마련된 상석으로 가닿았다. 누가 보아도 황제와 황태자의 자리임을 알리기라도 하듯, 연회의 주인공인 이벨리아의 것만큼이나 화려한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16549748822994.jpg‘이게 어딜 보는 거야.’

렐리안의 시선이 자신을 떠나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자, 거만하게 턱을 올리고 렐리안을 내려다보던 세레스를 비롯하여 다른 참석자들도 렐리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16549748939566.jpg‘……황제 폐하의 자리? 왜 저길 보고 있는 거지?’

렐리안은 모두가 황가의 자리를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16549748882698.jpg“영애. 정말 그러한가요? 배다른 형제, 자매라 하더라도 아끼고 보듬어야 하는 건가요?”

16549748822994.jpg‘……설마!’

세레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평소처럼 발발 떨다가 고개를 떨굴 줄 알았던 렐리안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반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렐리안이 일말의 미소도 없는 얼굴로 천천히 세레스와 시선을 맞추었다. 세레스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16549748822994.jpg‘이게 황가를 끌어들일 줄이야!’

황후 소생인 황태자와 황비 소생인 황자의 사이가 극악할 정도로 좋지 않다는 것은 고위 귀족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다.

16549748822994.jpg‘아니라고 하면 카시스 영애 앞에서 순식간에 말을 번복했다는 비루한 소문이 나돌 게 분명한데!’

끔찍하리만치 싫었다. 자존심 상했다. 공녀에게 밀리는 것도 모자라 이리 공개적인 자리에서 카시스 영애에게 꼬랑지를 말았다는 사실은 참을 수가 없었다.

16549748822994.jpg‘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하면 황태자 전하와 황자 전하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된다.’

그것도 안 된다. 처벌을 받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세레스는 황후가 되어야 했다. 황가를 비난한 영애가 황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 세레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렐리안이 느릿하게 세레스를 불렀다. 마치 답을 독촉하듯.

16549748882698.jpg“영애? 정말 그러한가요?”

세레스는 풍성한 드레스 자락에 감추어진 손이 희게 질릴 때까지 주먹을 쥐었다. .

16549748822994.jpg“……아니요. 제가 잘못 생각했군요. 조금 전엔 실언했어요.”

고고한 자존심이 꺾임으로 인해 뺨이 형편없이 떨렸다. 곁에 선 영애들이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젠 카시스 후작영애에게도 힘을 못 쓰냐는 듯 실망하는 눈빛들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16549748822994.jpg‘괜찮아. 어차피 아르티나는 오늘이 마지막이야. 가깝게 지내던 카시스의 명성도 땅에 처박힐 테지. 그땐 두고 보자.’

스스로 다독이며 돌아서던 세레스는, 그래도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퍽 상하여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16549748822994.jpg“몸도 약하면서 어떻게 공녀님과 그리 가까워지셨는지. 공녀님도 참.”

몸이 약하다며 돌려 비꼬는 말. 더하여 이벨리아의 안목을 에둘러 내리깎는 말. 예전이라면 홀로 상처받고 말았겠지만, 이벨리아의 친구가 된 지금까지 그럴 수야 없다. 자신이 깎아 내려지면 이벨리아에게도 친구 사귈 줄 모른다는 오명이 뒤집어 씌워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 것이야 익숙했지만, 그 흙탕물이 이벨리아에게까지 튀게 할 수는 없다.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였으니까. 렐리안에게는 태양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이였으니까. 렐리안은 찻잔을 느리게 들어 올려 한 모금 삼킨 다음, 긴장으로 떨리는 손을 옷자락에 감추고 어깨를 꼿꼿하게 폈다.

16549748882698.jpg“데퐁트 영애.”

16549748822994.jpg“네?”

한없이 소극적이던 렐리안이 자신을 불러 세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는 듯 세레스의 잿빛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렐리안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이자, 세레스는 하, 비웃으면서도 렐리안의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어디 무슨 말을 하나 들어보자는 표정으로 세레스가 턱짓하자, 렐리안이 몸을 기울여 세레스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16549748882698.jpg“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길 원치 않는다면, 말 가려서 하세요.”

16549748822994.jpg“뭐……뭐라고요?”

렐리안은 자신의 손바닥이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세레스에게만 보이도록 몸으로 가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자, 이내 손바닥 위에 얼음으로 빚어낸 선뜩한 칼날이 마치 목표물을 겨냥하듯 빙글빙글 돌며 떠올랐다. 이를 바라본 세레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렐리안이 쐐기를 박았다.

16549748882698.jpg“죽기 싫으면 그 조동아리 닥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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